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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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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란의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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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설명했듯이 카리브해의 작은 섬 그레나다가 레이건 대통령을 자극한 발단은 모리스 비숍 정권이 외국의 원조를 받아 건설하던 국제공항이었다. (처음 이름은 포인트 샐린즈 공항이었는데 나중에 모리스 비숍 공항으로 바뀜)


레이건은 이 국제공항이 소련의 군사기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3km 이상의 활주로를 갖춘 국제공항급 시설에는 소련의 전략 폭격기와 전투기가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숍 정권은 공항의 건설은 경제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인구 10만명 남짓의 작은 섬 그레나다에 거대한 국제공항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지금 송파구의 인구가 60만명이다.)

게다가 그 국제공항을 짓기 위한 차관을 내준 나라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레이건이 극혐하던 나라들이었다. 소련, 쿠바, 리비아, 동독, 그리고 북한.



행정부 수장이 공개적으로 그레나다에 경고를 보내자 미 하원에서 특별조사단을 파견했다. 특별조사단은 그레나다를 방문 후, 공항이 군사시설로 이용될 것이라 보는 시각은 터무니없고 과장되어 있으며 다른 의도가 있다는, 다분히 레이건을 겨냥한 발표를 했다. 그런데 그 특별조사단의 단장이 민주당 소속의 론 델럼(Ron Dellum) 의원이었다. 닉슨 행정부 시절, 유명한 반전주의자였고 공화당에서도 강경파인 레이건 대통령과 수차례 마찰을 빚어온 인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델럼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레이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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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 Dellum



레이건은 CIA를 통한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3년 3월, 소련, 쿠바, 그리고 북한에서 온 군사고문관들이 그레나다에 입국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레이건은 그레나다가 소련의 군사기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레이건은 어떤 종류의 형태로든 군사력을 쓸 일이 생길 것임을 직감했고 만반의 준비를 다져두었다. 









2. 형님형님 형님응디만 믿습니다

한편 1983년 10월, 그레나다의 혁명정부는 내분을 일으켰고 과격파 버나드 코드가 라이벌 모리스 비숍을 제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는 레이건보다도 그레나다 주변국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가 재빨리 "우리들은 미국의 입장을 지지함"이라고 선언하고 버나드 코드 정권과의 관계를 끊었다. 


카리브해는 약소국들이 벌이는 외교전쟁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절대강자의 뒷마당에서 카리브해의 약소국들은 어떤 때에는 확실한 친미 노선으로, 어떤 때에는 어정쩡한 친미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미국의 행정부가 바뀔 때마다 가장 큰 이익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혹은 국내에 남아있는 반미감정과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미국의 존재감 사이에서 줄다기리를 벌이기도 했다. 물론 쿠바, 니카라과, 지금의 베네수엘라처럼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나라도 있고. 그레나다 쿠데타의 경우, 카리브해의 약소국들은 쿠바로 대표되는 소련의 원조, 그리고 레이건이라는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없는 지도자 사이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다.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는 영국 식민지 출신으로 영어를 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또 경제적으로 친소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그들은 민감한 시기에 재빨리 미국 응디를 선택하는 뛰어난 외교 감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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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이카의 에드워드 사에가(Edward Saega)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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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이도스의 존 마이클 제프리 매닝햄 애덤스(Jon Michael Geoffrey Manningham Adams) 총리. 옥스포드대학에서 공부한 지식인 출신이다.

모리스 비숍도 혁명의 허황된 꿈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애덤스 총리처럼 뛰어난 행정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에 자극받은 다른 나라들도 버나드 코드를 비판하며 직간접적으로 미국 응디를 선택했다. 이것은 버나드 코드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카리브해 여러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어야 했는데 내부 권력다툼에 눈이 멀어 그 점을 소홀히 했다. 카리브해 나라들이 코드를 지지했더라면 레이건도 군사행동만은 망설였을텐데 그 점에서 코드는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하지만 코드의 더욱 큰 실수는 혁명의 본질을 망각했다는 점이다. 혁명가는 죽을 때까지 권력투쟁을 해야 한다는 혁명의 본질.










3. 빨갱이들은 숙청이 취미

모리스 비숍과 버나드 코드를 따르던 인물들 중에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비숍, 오른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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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은 비숍이나 코드처럼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한 이론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택동 말대로 '권력이 총구에서 나오는' 광경도 목격했다. 코드가 비숍을 제거할 때, 코트 편에 서서 싸웠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비숍을 직접 사살한 사람은 오스틴이라고 한다. 


오스틴은 코드가 이끌던 무장세력을 직접 지휘하던 사령관이었고 쿠바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그는 쿠바인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 정당 자체를 해산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질서가 회복될까지" 정당 활동(그래봐야 이미 보석운동당 하나 밖에 없었지만)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버나드 코드는 체포되어 바로 며칠 전에 자신이 비숍에게 했던 것처럼 연금 상태에 처해졌다. 그리고 코드의 추종자들은 그레나다 대중이 보는 앞에서 구타해 죽이거나 사살했다. 10월19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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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무상함이여... 체포되어 끌려가는 버나드 코드



쿠바를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로 믿었던 오스틴은 영국의 존재를 무시했다. 그레나다는 영국의 간섭을 받지는 않아도 어쨌거나 영연방에 속한 나라이며 따라서 그레나다에는 영국 '총독'이 존재한다. 물론 총독이라 해도 실권은 전혀 없는 상징적인 자리이다. 그러나 외교에서 그 상징성이 큰 의미를 갖는 경우는 적지 않다. 외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분싸움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그레나다 총독은 폴 스쿤(Paul Scoon)이라는 인물이었다. 스쿤 총독은 오스틴의 군사정부에 체포된 상태였다. 공포에 질린 스쿤 총독은 레이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군이 그레나다의 혼란을 멈춰야 한다고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레이건이 가장 필요로 하던 명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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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쿤이 아니라 폴스쿤














4. 하, 이 새끼들이...

물론 레이건도 처음부터 군사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일단 명분쌓기에 들어갔다. 레이건은 오스틴에게 스쿤 총독의 석방 및 총독의 감독 하에서 자유로운 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오스틴은 이를 거부했다. 레이건은 한번 말로 해서 안되면 같은 말을 또 하는 오바마가 아니다. 지체없이 지상군 파견을 준비했다.


당초 레이건의 구상은 카리브해 국가들과 함꼐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물론 실제 전투는 미군이 하겠지만) 좋은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메이카처럼 미국 응디에 매달려주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지상군 파병에 반대하는 나라도 있었다. 레이건의 기대와 달리 '카리브해 연합군' 편성은 결국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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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이번에는 "그레나다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구출해야 하니 미군만이라도 출동하겠다"고 선언하고 Operation Urgent Fury라 명명된 작전을 위해 지상군을 파견한다. 10월25일의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레나다에 거주하는 미국인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나 의도는 명백했다. 그레나다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한편 그레나다 침공 직전에는 이러한 뒷이야기가 있다. 레이건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와 사상적으로 방향을 같이 하는 정치적 동지인 영국의 마거렛 대처 총리에게는 그레나다 침공에 대해 사전 양해를 구해두고 싶었다. 레이건은 대처에게 "그레나다에 군사 행동을 하는 게 좋을지 총리의 조언을 구합니다"고 말했지만 대처는 "아무리 심각한 의혹이 있다 해도 작은 독립국가를 함부로 침공하는 행위는 현명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며칠 후에 우리 영국 의회에서 그레나다의 크루즈 미사일 가능성에 대해 토의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제 의견을 듣기 전에 이미 군사행동할 준비를 다 끝내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늦은 시점에서야 저와 대화를 시도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고 답변했다. 대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군사작전을 감행한 걸 보면 레이건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고 또 그레나다 위기는 레이건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었음에 틀림없다.



'긴박한 분노 작전'은 조셉 멧칼프 해군 부제독(Vice Admiral)과 그의 고문 겸 육군 지휘를 맡을 노먼 슈워츠코프 소장(Major General)이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베트남전 경험자들이었다. 그들은 베트남에서의 고전을 잊지 않았고 만반의 사태에 대비해 동원할 수 있는 특수부대는 모두 데려갔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미군이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군사력 테스트를 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미군의 준비는 치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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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맷칼프 3세 (김관진 닮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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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걸프전에서도 활약했으며 4성 장군에 올랐다.



세계최강 미군이 직접 나선 전쟁이지만 전투 자체는 쉽지 않았다. 우선 섬이 작고 최우선 목표가 미국 시민들, 그리고 노무쿤이 아닌 폴스쿤의 구출이다 보니 폭격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보병 전투부대가 방어선을 하나하나 뚫고 나아가야 하는데 쿠바와 북한 등에서 온 군사고문관들은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그레나다섬 내부에서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소련과 쿠바가 그레나다에 어느 수준까지 장비를 지원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미군은 그레나다에 입국해있는 노련한 쿠바 군사고문관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으며 그레나다군보다는 미군이 훨씬 강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작전을 채택했다. 비록 미군 19명이 전사하기는 했으나 각 지역에서 미군들은 공산군과 그레나다군을 제압해나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군이 갖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도 불거졌다. 바로 육군과 해군의 반목이다. 미육군과 미해군은 서로 경쟁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레나다에서 작전 차질을 빚었다. 그레나다에서 해군은 후방부대였고 실제 전투는 육군이 수행했는데 해군이 육군의 지원에 소극적이라는 점 때문에 육군 지휘관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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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육군을 계속 독려하여 그레나다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고 이 경험은 나중에 레이건으로 하여금 합동참모본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골드워터-니콜스 법안'을 만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레나다에서 보병끼리의 시가전이 전개된 탓에 민간인들도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련과 쿠바는 이 일을 두고 민간인 학살이라며 강하게 비판했으나 레이건 측에서는 "쿠바에서 온 사람들은 건축가들이 아니라 건축을 하는 군사고문관들이다"고 맞섰다. 쿠바가 해외에 파견하는 건축가들이나 노동자들이 군사훈련을 받는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게릴라가 민간인 속에 숨어들어 기습을 가하는 작전에 고전했던 미군은 이제 교전 지역에서 개비적거리는 년놈들은 일단 적군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이것이 매우 큰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UN에서는 레이건 행정부의 군사 파병을 문제 삼았다. 우선 선전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미국인 구출을 위한 작전이지 전면전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니카라과의 요청을 받아들여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빡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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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거부권을 발동하였고 전쟁을 밀어붙였다. 긴박한 와중에 희소식은 미군이 폴스쿤을 구출해냈고 허드슨 오스틴과 그 심복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이었다. 10월28일의 일이었다. 즉, 3일만에 공산정권을 전복한 것이다. 오스틴은 6일천하를 누리고 미군에 체포되었다. 게다가 레이건에게 더욱 기쁜 일은 미국 시민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점. 온갖 비판 - 심지어 대처 총리의 비판까지 - 을 무릅쓰며 군사행동을 선택한 레이건의 모험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쿠바를 비롯한 공산국가 출신 군사고문관들은 구금되었다가 모두 추방 처리 되었다.










5. 뒷처리

오스틴의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미군은 노무쿤이 아닌 폴스쿤 총독을 내세워 "그레나다의 국가 수반은 영국 여왕"임을 천명했다. 본래 원하던 공산정권 전복을 이루었으니 이제 영국의 체면을 살려주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스쿤은 레이건과 죽이 잘 맞는 인물이기도 했다.


10월 안보리의 결정을 미국이 거부했기 때문에 이제 11월 UN총회에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안건을 심사하게 되었다.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은 통과되었고 레이건도 이를 수긍하는 척 했으나... 결국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분으로 미군부대는 1985년까지 주둔시킨다. 물론 레이건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미군 주둔을 스쿤 총독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스쿤 총독은 코드와 오스틴에 의해 훼손된 헌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임시의회를 준비했고 임시 총리로 니콜라스 브라스웨이트(Nicholas Brathwaite)를 임명했다. 브라스웨이트는 1년간 임시 총리직을 수행했고 1984년의 총선에서는 허버트 블레이즈가 선거를 통해 총리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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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스웨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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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블레이즈



블레이즈 내각이 들어선 후, 코드와 오스틴은 1986년 그레네다 법정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다. 코드와 오스틴은 둘다 사형을 선고받으나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코드와 오스틴은 둘다 자신이 순수한 의도로 혁명을 했음을 역설했다.


코드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혁명을 포기하고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2004년 카리브해를 강타한 허리케인 이반(Ivan)이 코드가 갇혀있던 교도소 건물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코드는 감옥을 탈출하지 않고 묵묵히 감방에 남아있었다. 코드는 "나의 이름을 내 손으로 더럽히지 않겠다"고 의연한 대답을 했다. 코드는 모범수로 인정받아 무기징역에서 30년형으로 감형받았다. 그 결과, 2009년 출감할 수 있었다. 그는 두번 다시 정치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지금은 자신이 몸담았던 '그레나다 혁명'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강연을 하며, 손자들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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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쓴 책에 사인을 하는 버나드 코드



6일 천하의 주인공 허드슨 오스틴도 종신형으로 감형받고 복역 생활을 하다가 2007년 자신의 늙은 나이를 들며 석방을 앙망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 탄원서에서 오스틴은 자신이 1983년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레나다 사람들에게 깊은 고통을 끼친 점을 뉘우치고 있다고 썼다. 그 앙망이 받아들여져 오스틴은 2008년 석방된다. 그 또한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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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숍의 혁명을 초래한 원인을 제공한 에릭 게어리 말인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도 미군이 그레나다를 탈환한 후에 귀국했고, 정치에 복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비숍이 공포정치를 하던 인물임을 기억하고 있었고 좀처럼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다. 오죽하면 게어리는 "옛날의 게어리는 죽었고 나는 새사람입니다"는 캠페인까지 했으나 끝끝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한국의 이인제를 봤더라면 부러워했을 듯.

게어리는 1997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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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나다의 혼란을 막으려면 코드나 오스틴 같은 군벌이 생겨선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 스쿤과 브라스웨이트는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그레나다의 정규군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현재 그레나다에는 해안경비대와 경찰만이 있으며 그레나다의 안보는 미군이 맡고 있다. 미국응디 존니 든든하다. 스쿤과 브라스웨이트의 정치력으로 그레나다의 혼란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레나다의 정치가 안정된 배경에는 블레이즈의 뜻밖의 죽음도 한몫했다. 블레이즈는 뜻밖의 암이 발견되어 1989년 총리 재직 도중에 사망했는데 이 떄문에 여당에 의한 장기집권 시도나, 야당에 의한 사보타주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미국 응디에게 안보를 맡김으로서 냉전에서 한발 물러난 것이 가장 탁월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레이건과 미군에게 그레나다의 승리는 베트남전의 트라우마를 씻어내는 쾌거였다. (그레나다까지 날아가서 축하 연설을 하며 기뻐하는 레이건. 레이건 왼쪽은 노무쿤이 아닌 폴스쿤, 레이건 오른쪽이 브라스웨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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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레나다 작전은 미군에게 귀한 실전 경험이기도 했다. 실전 경험을 통해 미군은 장비와 명령체계를 대대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었고 이 노력은 걸프전에서 큰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고 '실제 전쟁을 경험한 장성'의 가치를 민간 정치인들이 인정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그레나다 전쟁을 경험한 장성들은 훗날 2대에 걸친 부시 정권의 안보 정책의 틀을 짜게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아프가니스탄을 경험한 해병대 4성 장군 제임스 매티스를 국방장관으로, 알카에다와의 정보전에 참여한 지나 하스펠을 CIA 국장에 임명한 것도 이러한 교훈을 따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적당한 명분을 갖고서 정말로 행동에 나서면 미국을 막을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것이 바로 그레나다 침공이었다. 레이건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트럼프가 이 점을 모를 리 없다.





한편 그레나다 침공은 부작용도 일으켰다. 레이건의 노골적인 현실주의 외교는 학계의 이상주의자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전보다 더욱 황당한 이상주의에 기반한 외교 이론을 만들어내며 특정 정당(미국의 경우는 민주당)을 위해 일하는 정치 브로커가 되었다. 그들은 미국의 힘을 평가절하 하기 이해 무언가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야 했다. 제3세계에 의한 신사회주의 세력이니, BRIC(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이니,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은 G2 시대이니, 하는 이론들은 모두 레이건 시대의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반발로 태어난 것들이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시들해지고 있는 친중노선을 아직까지도 빨고 있는 한국의 두 세력이 문정인으로 대표되는 친중파 학자들과 JTBC로 대표되는 친중파 언론이다.

문정인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일단 미국의 힘이 갈수록 약해지고 미국이 (서브프라임 같은 위기가 또 닥쳐서) 망한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다. 그냥 SF소설이면 그러려니 해도 이 망상에 젖은 틀딱이 무려 '대통령 특별안보 보좌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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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여러 나라들도 친미와 반미로 나뉘게 되었다. 그레나다 침공은 미국의 강력한 힘을 구체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미국이 작심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는가'는 무력감도 선사했다. 결국 반미는 중남미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떠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축적된 반미 사상은 2000년대 남미 신좌파(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너, 볼리비아의 모랄레스)의 등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론: 그레나다에서 배우는 미국의 패턴

1. 미국은 명분 없이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지금 북폭을 한다면 아무리 트럼프라 해도 미국내 비판여론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미국은 존레넌의 Imagine이나 부르는 댕청한 평화주의자들의 나라가 아니다. 비겁한 평화보다 명분 있는 싸움을 원한다. 미군이 알카에다가 숨어있는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할 때, 9.11 테러의 희생자 유족들은 아프가니스탄에 투하할 폭탄 탄피에 메세지를 적을 수 있도록 해달라 요청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미국은 그런 나라이다. 다만 이라크에서 부시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라는 명분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트럼프는 북한에 접근할 때 더더욱 치밀하게 명분을 찾는다.
 
2. 미국은 타협을 하지 않는 나라이다. 미국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에서든 명분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요구를 하는 것에서 나온다. 개대중이나 북한이 욕을 먹는 이유는 아가리에서 나오는 말이 때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오바마를 제외하면) 처음에 요구했던 조건을 굽혀가며 타협을 맺느니 차라리 공격할 명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 미국이 김정은에게 요구한 조건은 바뀌지 않는다. 김정은이 그 조건을 거절하면 미국에게 명분만 더해줄 뿐이다.

3. 미국이 명분을 갖고 군사행동에 나설 때, 미국을 막을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재인은 미국을 막지 못한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아는 거 같은데 문정인 그 틀딱은 영 모르는 것 같다. 중국이든 러시아든 미국이 명분을 갖고 행동에 나설 때 미국을 결코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이미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다.

4. 미국은 파트너를 구한다. 미국은 초강대국이지만 단독 전쟁을 부담스러워 한다. 항상 파트너를 구하며 뒷처리도 파트너의 입장을 존중하여 행한다. 한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통해 미국의 파트너로서 귀한 입지를 다졌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파트너로 나설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는 소리이다. 반미정권이 무너지고 친미정권이 들어설 때, 친미정권은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반미정권의 뿌리를 뽑곤 했다. (지금 이집트를 보라.) 문재인을 과거사 화해라는 명목으로 사면하고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친미국가로 되돌아가고 싶다면 문재인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원래는 이거 2부와 3부로 나누어서 쓰려고 했는데 그냥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문재인 이 씨발놈아. 세금도 올려서 돈 존니 많을텐데 그깟 아이스크림 하나 얼마나 한다고 왜 안 사주노? 국민이 사달라 했는데 사준다 못사준다 설명을 해야지 왜 삭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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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