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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에 태어나 1940년도에 일본에서 정상 바둑 프로기사가 된 9단 세고에 켄사쿠, 


그의 바둑인생에 내제자는 단 세명뿐이였다.


대만의 오청원,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마지막 제자인 조훈현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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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이미 조훈현은 군복무로 인해 한국으로 떠난지 4개월 지났을 무렵이였다.








조훈현을 처음 만났던 10여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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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처음만난 조훈현의 재능을 알아본 세고에 켄사쿠는 내제자로 9년간 집에서 조훈현과 함께 지내며


한국바둑의 영웅이자 한국의 영웅이 될 인물로 길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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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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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89년 일본 서부지방의 광도현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겐사쿠(憲作)라 붙여진 것은 마침 그 해가 일본 제국헌법이 공포된 때문이며 아버지가 작명했다 한다.

조부는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본인방 슈겐으로부터 정식 초단을 인허받은 강자였다.

겐사쿠(憲作)가 어릴 때 눈병이 걸려 집안에서 놀고 있는 동안 심심풀이로 조부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12세에 중학에 입학하였는데 600여명이 경쟁한 입학 시험에 합격한 120명 중 2위였다.

이 무렵 벌써 바둑 실력은 할아버지를 능가하여 광도지방 밖으로까지 소문이 퍼졌다. 그는 바둑이 재미있어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아버지는 대학까지 진학을 시켜 어떻게든 학자로 키우고 싶었으나 사업에 실패하여 그 뜻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지방의회 대의원 보게쯔(望月)가 나서 "겐사쿠를 기사로 키우지 않겠나!" 하고 제의했다. 1908년 겐사쿠는 의원을 따라 상경하여 소장(小壯) 바둑 혈전회 (血戰會)에 참가했다.

여기서 현역기사 3단과 대국, 불계승을 거두어 일약 기단의 기린아로 부상했다.

당시 일본의 바둑계는 혼인보 슈사이 일문과 이와사키가 이끄는 호엔샤(方円社)의 2 대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어 예를 닦는 면에 있어서는 천하 제1인자인 슈사이(秀哉) 혼인보 문하에 들어가야 마땅하겠으나 보게쯔 의원은 호엔샤에 입문하여 타도 본인방을 목표삼는 것이 어떠냐 해서 겐사쿠는 호엔샤를 택했다.

그해 가을에서 이듬해(1909) 봄까지 총 39국을 두어 30승6패 미완(未完) 3국의 성적을 올린 다음 스즈키 3단과의 시험대국이 있었다.

선상선(先相先:반점치수로서 3국 중 선이 두 번)으로 6국으로 두어 4승 2패하여 당당히 3단을 받았다.

겐사쿠는 이 6번기를 지는 날엔 바둑 수업을 걷어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사꾼이 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었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

1910년 겐사쿠는 당시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귀장(鬼將)이라 불리는 노사와 4단과 대국할 기회가 있었다. 평생 기억에 남는 한판이었다고 후일 회상했다.

"참 다행히 이기긴 했지만 그때 노사와 4단의 혹평에 혼자 눈물을 흘린 잊지못할 1국이었다."

노사와의 험담 악구는 유명했다. 온화하고 진지한 겐사쿠 청년 바로 앞에서 "어딘지 자네 바둑이 촌스러워서 힘이 안들어가는군." 하고 내뱉었다.

겐사쿠는 이 말을 듣고 뒷간에 가서 울분을 못 참아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뒷날 겐사쿠는 제1인자 21세 본인방 슈사이 명인에 도전하여 무려 11연승의 기록을 쌓아갔다. 그리고 2선(先) 2의 치수를 선(先)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1924년 일본기원의 새로운 대국규정이 설정되자 여태까지의 성적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불운을 당했다.

이러한 새 규정과 제도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어 일본 기원을 탈퇴하는 기사가 생겨났으나 겐사쿠는 요지부동, 일본기원에 머물러 이후 바둑계의 대동단합에 협력하는 한편, 바둑문화(碁)문화 발전에 크게 힘을 쏟았다.

드디어 겐사쿠는 1959년 명예 9단에 추대되었고 최고의 영예인 대창상(大創賞)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는 기사(棋士)의 거울로서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다가 마지막 제자였던 조훈현의 귀국으로인한 상실감과친구였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를 잃은 고독감에 못이겨 1973년 84세를 일기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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