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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을 설명할 때,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을 강조한다.


특히 동양은 한 영웅의 활약을 강조하고, 민중사학의 영향으로 민초의 고통과 활약을 강조하는데,

물론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에서 이들의 활약은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로 대단하고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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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대체가 의문이다.

흔히 사극에서도 그렇지만, 조선 조정은 무능하게 묘사되었고,

이들이 무엇을 했는지 관심 1조차 가지지 않고 묘사하지 않는다.


 소규모 국지전도 아닌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에서 정부의 활약을 강조하지 않고,

그저 민초들만의 항쟁으로 극복한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옛날부터 실록의 내용을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고 자료를 재구성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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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기록 덕후답게 수많은 기록 문화 유산을 남겼는데,

특히 승정원일기는 경종 때 상소를 올린 경상도 유생 수천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할 정도이며,

왕이 기침을 몇번 했는지조차 기록할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살펴볼 임진왜란 관련 선조 부분은 아쉽게 승정원일기에 남아있지 않다.

이는 인조 때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인조 이전의 사료가 모두 유실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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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전, 조선 초중기의 승정원일기 부분 사료가 모두 소실되었다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승정원일기는 번역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40여 년이 더 걸릴 예정이라고 한다(인조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면 10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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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 조정의 활약상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부터 모든 내용은 실록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여러 논문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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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지방 행정 구역


흔히 조선 왕조를 설명할 때, '중앙 집권 시스템'과 '행정 시스템'이 잘 구현된 나라로 설명하는데,

본 글의 취지가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에서 이것들이 어떻게 실현했는지,

그리고 선조와 조선 조정의 중앙 관료들이 어떻게 이를 활용해서 초기 전란을 대처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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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조선 조정은 전쟁 내내 '조총'과 '화약 무기'에 큰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선조는 자신이 직접 총을 만들어 유성룡에게 보일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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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화약 무기의 주재료인 '염초' 확보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기술은 자신들이 상국으로 모신 명나라에게까지 기밀로 삼을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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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선조는 왜군 포로를 잡으면 그들로부터 총기 제작과 염초 생산 기술을 배우게끔 하였고,

이 기술을 절대로 명나라 제독에게 알리지 말 것이라고 비망기를 통해 조정의 신료들에게 당부하기도 한다.

또한 선조는 조총 사격술에 능한 자들은 노비라 할지라도 면천(노비 해방)의 혜택을 주었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조선군 전체 병종 비율에서 '포수(총을 쏘는 병사)'의 비중을 늘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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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중후기 포수(조총병) 고증


특히 전쟁 초기에 조선 조정은 의주로 피신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1592년 전쟁 중에 명나라로부터 활 1,380편과 화약 무기의 재료인 염초 200근을 사올 정도로

병기와 화약 확보를 위한 무역에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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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주의 선조와 조선 조정은 지방의 절도사와 장수에게 화약 무기를 보내주었고,

심지어 전라좌수사의 이순신에게 화약 병기와 염초 수천 근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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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화약 병기를 만드는 장인들을 우대하였다.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는 경상도 절도사 박진이 이끈 1만여 명의 군사들이 활용하여

경상도의 큰 성인 경주성을 수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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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수류탄 비슷한 것으로 실록의 묘사에 의하면,

왜군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탄을 만지자 그 속에서 쇳조각이 수많은 별처럼 흩어져 터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주변의 왜군 수십 명이 살상되었다고 한다.


이 기세를 타고 경상도 절도사 박진이 지휘하는 조선군 1만여 명이 경주성을 수복하고,

1만여 석의 군량을 노획하여 경상도 지역의 조선군의 사기 진작에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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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선조의 잘못된 결정으로 요동으로 망명할려고도 하였으나,

이는 조선 조정의 관료들이 만류하면서 무산되었다.

그 이후로 선조는 전쟁의 극복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전쟁 내내 조선 조정은 작전을 위한 '수천여 건'의 의미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논의의 주요 내용>

1. 신무기 개발 및 무기 개량 정책

2. 화약 무기의 주재료인 '염초'의 확보와 생산

3. 점령지 수복 및 통치 방식

4. 둔전 경영과 군량 확보를 위한 논의

5. 무기 생산을 위한 논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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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과 군량 확보를 위한 조선 조정의 논의, 조선왕조실록 선조편


전쟁 중에 기근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졌으나,

선조와 조선 조정은 섬에서도 둔전을 시행하여 수만 석의 곡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어

이를 남쪽 변경(전라도 · 경상도)의 백성들에게 구휼하기도 하였으며,

잉여 곡식은 각 병영의 군사들에게 지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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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둔전을 시행하여 성과를 거둔 조선 정부의 노력 뒤에는, 이순신 장군의 안정적인 해상 주도권 확보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편 의주의 조선 조정은 1593년 초, 우수한 행정력을 이용하여,

전국의 군사 수효를 파악하였는데, 그 수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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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이 파악한, 1593년 1월경 전국의 조선군 수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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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경, 조선군 총계 : 172,400여 명


선조의 명을 받고 조선 조정은 각 지역의 군사 수효를 파악하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왜군의 배후에 있는 조선군을 이용하여 배후 기습 공격을 계획하기로 하였다.

특히 진주와 행주에서는 승전의 소식이 들어와 선조와 조선 조정의 관료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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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첩


진주 전투에서 조선군 3천 8백여 명은 3만여 명이 넘는 왜군과 전투를 벌여,

이 과정에서 왜군은 1만여 명이 넘게 사망하는 대패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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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함경북도의 조선군 기병대는 정문부 장군을 위시로 하여 왜군과 북관 전투를 벌였고(북관 대첩),

이 과정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의 피해는 8천여 명이 넘을 정도로 심각했다.


참고로 함경북도의 조선군 기병대 100여 명은 다른 지역 군사 1천여 명과 맞붙을 정도로 강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선조 33), 선조는 여진 노토 부락 토벌에

5천여 명의 함경도 기병대와 수백여 명의 화포대를 동원하여 여진족 1만여 명을 학살해버린다(노토 부락 토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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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평양 전투 이후에는, 명나라군이 전쟁 전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 내부에서는 아예 명나라와 별개로 조선군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경성(조선 수도 한양) 수복을 계획하던 권율은 조정의 명령을 받아 진군하던 찰나,

행주 지역에서 왜군과 결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율이 이끈 조선군은 대포 등 우수한 화약 무기(승자총통, 진천뢰, 지신포, 대중발화) 등을 동원하여

1만 5천여 명의 왜군이 사망했고, 9천여 명이 넘는 왜군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가 부상을 입을 정도로 왜군의 피해는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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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초, 조선 전역에서의 왜군의 병력 손실 현황


선조와 조선 조정은 의주에서도 경상도 지역의 전투 현황을 속속 보고받고 있었고,

우수한 행정력을 이용해 전국에 사람을 파견해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또한 조정의 명을 받은 지방 장수들은 독자적으로 움직여 왜군의 배후를 유린했고,

개전 1년도 안되어 1593년 3월까지 조선 땅에서 75,613명의 왜군이 사망했고,

특히 먼저 출발했던 고니시 군단의 손실율은 64.5%에 달할 정도로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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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속속 보고받던 조선 조정의 상황(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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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충청수사 정걸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선조가 보낸 조선군 결사대는

수도 근방의 용산창(식량 창고)을 습격하여 왜군이 먹을 2개월치 군량을 불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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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행주 대첩의 승리, 그리고 함경도 조선군의 활약으로

함경남북도가 수복되고 전 지역에서 조선군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영내에 주둔한 명나라 제독들은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이 부분과 관련해서 조선 조정과 명나라 제독의 대립이 실록에 수많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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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나라(조선) 군사가 기내에 나누어 웅거하면서

권율의 군사를 위시하여 들락날락하며 왜군을 치니,

적이 멀리 나가서 땔나무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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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김천일, 전라 수사 이빈, 충청 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경강(京江 : 한양 부근) 어구에 진격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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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삼도(下三道 : 전라 · 충청 · 경상도)의 용맹스러운 관군과 의병이 적의 길을 차단하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사가 이미 멀리 물러가서 대대적으로 진공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나라(조선) 사람들이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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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을 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 제독이 따르지 않다


행주 대첩의 승리와 독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2만 왜군의 패퇴로

기세가 꺾인 왜군을 향해 선조와 조선 조정은 반격을 계획하였으나,

명나라 제독이 따르지 않자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한스러움을 느낀 조선 조정의 관료들 중에 목을 매 자결하는 자도 생겼으며,

당시 조정의 공론은 모두 한스러움을 느껴,

아예 명과는 별개로 조선 스스로 자구책을 구사하여 정예병을 양성하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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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조련, 왜적 격퇴 방안, 군사 훈련, 군사 대오의 편성 등에 대해 논하다


특히 실록에 묘사된 선조에 대해 살펴보면,

선조는 명나라군의 조선 구원에 열렬히 찬양(?)하는 한편,

전쟁 중후반부에는 명나라군의 행동에 불신감을 가지는 의견도 내놓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선조도 자구책으로 조선 스스로 군사를 양성하고 조련해야함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성룡의 건의도 있게 되자, 선조는 훈련도감(조선 중앙군)을 창설하게 된다.

이 훈련도감은 총기를 사용하는 포수, 활을 사용하는 사수, 창과 검을 사용하는 살수의 삼수병으로 구성되었고,

예하 군의 자체 훈련과 기민 구제 등 대민 지원은 물론,

수도 방위와 국왕 호위 임무까지 역할이 확대되면서 조선의 중앙군으로서 결국 5위 체제를 대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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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전란 이후로도 화약 무기를 비축하고 개발하였으며, 염초의 생산과 보급에 기여하였다.

이후 인조 때에는 화약 병기가 연간 2천 정 생산에 도달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에도 수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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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에는 조선 조정의 사헌부 관료들이 나라의 기반을 회복시키기 위한 계책으로

장문의 상소를 올렸는데, 휴전 협정 기간에도 군사를 조련함을 게을리하지 않고,

군량을 비축하고 왜적을 경계하고 민생을 구제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시기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의 남쪽 변경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인육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선조와 관료들이 녹봉을 털어 곡식을 사들여 백성들을 구휼하는가 하면,

청량사 허욱을 명나라에 파견해 곡식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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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연간 수십만 석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곡식을

산둥의 해로를 통해 조선으로 운송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이 곡식으로 남쪽 변경의 군사와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한편 전쟁 수행 과정에서 명나라 제독과 장수들이 조선 땅에서 무례를 저지르는 일도 있었는데,

한번은 명나라 병사가 선조의 어가 행렬을 침범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의 신료들의 공론은 대부분 분개하는 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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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도감(經理都監)의 신하들이 입시하여 성상(선조)께 이르기를,


"천조(조선이 명을 높게 부르는 말) 군대의 무례함은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성상 전하께오서 거둥하실 때마다 말을 달려 길을 범하는 등

오만불손한 행동이 극악에 달했으니, 모든 신료들이 분개할 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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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조선 시대 최고 행정 기관)와 양사의 관원들이 아뢰기를,


"아무리 천조(명나라)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성상 전하께오서도 한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일국의 병사가 다른 외국의 지존 앞에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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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선조)께서 이르기를,


"천조(명나라)의 제독은 국토(國土)를 잃은 땅(조선)에 들어와

통군정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풍악을 벌였으니,

이것은 매우 황당한 짓이거니와,


또 마땅히 학문을 해야 한다면서 나에게 큰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학문에 강구하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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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교화된 북방 오랑캐들도 성상 앞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을건대,

하물며 덕과 예를 숭상하는 천조에서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전과 같이 오만 불손한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해 데려다가 엄중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아예 실록의 내용을 보면, 전쟁 중후반부에는 조선 조정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모습도 보이며,

특히 선조가 명나라 장수들과 불화하는 모습들도 자주 보인다.

아예 선조가 신경질적으로 명나라 장수들을 대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상 실록의 내용에 의거하여, 선조와 조선 조정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실록에는 이러한 논의 내용이 '수천 건' 기록되어 있으며,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기에 아주 간단하게나마 서술하였다.

자세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참고.


http://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3줄 요약>

1. 선조와 조선 조정은 전쟁 수행 내내, 신무기 개발 및 둔전의 경영, 군량의 운송과 보급 등

전쟁 수행과 관련한 의미있는 논쟁을 전개(조선왕조실록 참고).

2. 자신들의 행정력을 이용하여, 왜적에게 함락되지 않은 지역의 역량을 파악하여

반격전을 전개하였으며, 1593년 3월까지 왜군의 피해는 심각하여 왜군이 한양으로 철수하는 양상을 보인다.

3. 특히 선조는 화약 무기와 염초의 생산에 관심을 가져, 포수와 화약 무기의 양성 및 개발에 관심을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