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영원의 숲과 공주


 “도착했다!”
 에시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스티어스 백작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후유,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네. 백작, 대단해!”
 “공이 기쁘다니 여도 여간 기쁘지 않소.”
 희희낙락하는 둘과는 달리 눈의 마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얼굴이 왜 그래? 이럴 때엔 좀 기뻐하라고.”
 “너, 너무해... 혹사시켜 놓고선...”
 길의 후반부는 거의 내리막길이었는데, 에시의 강요로 눈의 마녀는 썰매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미끄러지며 길을 내려왔는데. 둘은 재밌어했지만 눈의 마녀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뭐, 도착했으면 된 거잖아. 하하하.”
 
 그들의 앞에 있는 건 영원의 숲이었다. 영원의 숲, 초월종도 들어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
 자신들 앞에 있는 건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숲 같았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와보면 사람들은 이 숲에 들어오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영원의 숲은 항상 맑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둥둥 떠다녔으나 한 번도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무는 그대로였다. 항상 우거졌다.
 영원의 숲은 어떤, 알지 못하는 빛이 느껴졌다. 그것은 초월종에게만 나타나는 오라를 연상시켰다. 
 영원의 숲은 그 이름 그대로, 억천만의 시간이 흘려도 똑같을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곳 같았다.
 외부와는 완전히 격리된 세계. 그곳이 바로 영원의 숲이었다.

 “그런데 에시. 듣기로는 초월종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 들었는데?”
 스티어스 백작이 대신 대답했다.
 “꼭 그런 곳은 아니오이다. 설녀 공. 초월종 중에서도 남작, 자작급 한테만 해당되는 소리일 것이오. 마왕 공작 같은 자가 들어와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오이다.”
 “그래서, 나는 못 들어간다, 이 말이야?”
 “그렇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소. 설녀 공은 백작이지 않소.”
 “흥!”
 “에르세르스 공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에시는 영원의 숲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나 혼자 들어가겠어.”
 “뭐?”
“진심이오, 백작?”
 “백작은 빼. 난 진심이야. 나는 나 혼자 들어갈 거야. 괜히 너희들이 위험을 살 필요는 없잖아?”
 “그, 그럼 난 왜 부른 거야?”
 “혼자 다니기 심심하니까.”
 참 그녀다운 대답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붉은 마녀와 만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럼 여가 동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까?”
 “그래. 백작과 눈의 마녀는 이곳에서 기다려. 낮 동안에 돌아올 테니까.”
 백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에르세르스 공. 농담도 잘하시구려. 이곳 영원의 숲은 항상 낮이잖소이까.”
 “그렇지.”
 “그럼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거야?”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에시는 영원의 숲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들어가기 직전 백작과 눈의 마녀를 보며 싱긋 윙크했다.
 에시는 이윽고 영원의 숲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마녀가 사는, 금단의 영역으로.

 에시는 걸었다. 숲 속을.
 그녀는 세상 모든 곳을 다녀왔고 그것은 영원의 숲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시는 붉은 마녀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녀, 아니. 애초에 성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예 성별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람들은 그녀를 붉은 마녀라고 불렸지만,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붉은 마녀’란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붙여준 것이다.
 그녀의 정체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고, 온전한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다른 초월종들이 그녀를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아니, 그녀가 초월종인지도 의문스러웠다.
 물론 에시도 그녀의 정체에 대해 다 알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원을 넘나드는 존재라는 걸.
 ‘붉은 마녀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자.’
 여기는 영원의 숲이었다. 초월종 조차도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운 곳. 
 그것은 붉은 마녀 때문이 아니었다. 
 붉은 마녀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 뿐. 영원의 숲 자체는 굉장히 오랫동안 존재했던 숲이다.
 에시는 이곳이 왜 금단의 숲인지 알고 있었다. 에시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을 많이 알고 있었다.
 가슴 속 한편이 뜨거워져 왔다. 에시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이곳은 영원의 숲이야. 진정해...’
 가슴에서 떠오르는 그것은 너무도, 아련하고 멀리 느껴졌다. 
 옛일은 언제나 추억으로 바뀐다. 
 언제나 아름다운 일로 다가온다. 
 그것에 취하면, 그녀는 시간에 잡혀버린다.
 스티어스 백작은 말했다. 마왕 정도는 돼야 이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그렇다. 마왕이라면 빠져나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마왕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강함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같은 진조인 마왕의 아들이나 공주가 들어갔다면, 
 그들은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물론 스티어스 백작이나 눈의 마녀도 마찬가지. 
 기억에 묶여서 결국 시간에 잡힐 것이다.
 이곳은 모든 순간이 한 순간처럼 존재하는 곳.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한 곳이었다. 영원의 숲이 항상 낮인 것처럼. 
 따라서 이곳에 살 수 있는 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닌 붉은 마녀 뿐이다.
 그런 곳을 지금 에시는 걷고 있었다. 
 ‘저번에도 극복해내었잖아. 할 수 있어. 무시하면 그만이야. 힘들겠지만.’
 피어나는 꽃처럼 기억은 방울방울 떠올랐다.
 “자신을 극복해야해. 자신에게 지면 안 돼.”
 눈을 감으며 웃는다. 웃으며 중얼거린다. 
 ‘붉은 마녀의 기운에 집중하자.’
 느껴진다. 그녀의 기운이 느껴졌다. 가는 거다. 그곳으로. 별로 멀지 않다.
 하지만 기억은 계속 그녀를 덮쳐왔다.
“이런.”

 도시의 하늘에는 온갖 날개를 가진 것들이 날아다녔다. 그 아래 길거리에는 인간들이 잔뜩 죽어있었다. 산처럼 그들은 쌓여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이상했다. 지금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시체들은 점점 몸이 바뀌고 있었다. 탈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시체였다.

 흰 창살 안에 어떤 소년이 있었다. 대머리인 그 소년은 몸에서 은은한 빛을 뿜었다. 그의 눈은 붉은 색이었다. 그는 창살 바깥에 있는 자신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어떤 넓은 방이었다. 그곳에는 나무로 된 책상이 규칙적으로 놓여있는 방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에 자신은 그곳 책상 중 하나에 앉아서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이런!”

 환상, 환상, 환상. 이것은 모두 환상이야.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너도 알고 있잖아? 

 ‘왜 너희들은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과거의 증거였다. 자신에 대한 증거였다. 

 “나는, 나는...”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에르세르스. 
 그녀는 대역죄인이며 배신자이다. 
 그녀는 그 벌로 영원히 지상을 떠돌아다닌다. 
 평온의 정착은 할 수 없다. 
 그건 기억을 모두 지워버려도 끝내 그녀의 무의식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룻밤 만에 수많은 마을이 날아가고 왕국이 날아가는 그런 세상을 만든 게 누구지? 
 지나가던 인간이 물건 하나 주웠다고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세상을 만든 게 누구지?
 광光 좀 낸다는 녀석들이 인간을 가지고 놀고 괴롭히고 죽이는 세상을 만든 게, 대체 누구일까?’

 대역죄인.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를 지은 자. 죄의 왕관을 쓰고 세상을 떠도는 존재. 
 그것이 바로 에르세르스였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는 거야? 꼭 찾아갈게.”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방금 들은 음성은 기억이 아니다. 실제로 들렸던 것이다. 
 에시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환청인가? 나도 얼마나 빠졌던 거야?”
 그녀는 머리를 문지르며 다시 제정신을 정비했다. 
 하지만 불길한 건 여전했다. 그것은 예언일지도 몰랐다. 미래에 들을 음성일지도 몰랐다.
 “설마...”
 그녀는 떠돌아다닐 뿐이다. 어떤 관계에도 속박되고 싶지 않았고, 또 그렇게 지내왔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다. 정말로.

 영원의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것은 기억의 용량이다. 
 사람의 기억을 책이라 하자. 
 사람은 서재다. 
 그 서재의 책이 영원의 숲에게 다 읽히는 순간 그 사람은 영원히 시간 속에 갇힌다.
 하지만 마왕이나 자신처럼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도서관이다. 
 도서관 중에서도 가장 큰 도서관이다.
 짧은 시간에 그 책들이 다 읽히긴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의 숲에서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괴롭지만 그것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으면 에시는 이 숲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에시는 곧 기억의 늪에서 진정되었다.

 에시는 곧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집이었다. 
 다 낡아빠진 저택. 
 이곳에 붉은 마녀가 살고 있다.
 
 자신이 기억하는 붉은 마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녀는 붉은 옷을 입고 있는데, 정확히 말해서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이성이 없었다. 몬스터가 가지는 그런 눈이었다.
 그녀는 거대한 가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걸로 차원의 공간을 자르고 다른 세계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초월종이 아니다. 그녀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였다.
 대화? 애초부터 에시는 그녀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대화가 통하지도 않은데 무슨 대화.’
 에시는 붉은 마녀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애시당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스티어스 백작과 눈의 마녀는 영원의 숲에서 나오는 에시를 보았다.
 “여어, 얼마나 기다린 거야?”
 “으음... 한 달은 넘게 걸렸을 걸.”
 “그래? 기껏해야 두 세 시간인 줄 알았는데.”
 기억에 머물려 있던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처음 왔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그래서 에르세르스 공. 붉은 마녀를 만나서 일은 잘 해결된 것이오?”
 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붉은 마녀에겐 왜 갔던 거야?”
 에시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건 비밀.”
 “너무해! 여기까지 와줬는데!”
 “세상에는 몰라야 할 비밀들이 많지.”
 “좋소. 일이 해결되었다니 기쁘오. 그럼 여는 돌아가도 되는 것이오?”
 “그래. 눈의 마녀. 너도 돌아가.”
 “잠깐, 안 데려다 주는 거야?”
 “뭐?”
 “뭐야? 그 놀라는 표정은? 당연히 데려다 주는 게 당연하잖아? 그럼 여기서 내 장소까지 걸어가라고?”
 “참. 텔레포트 아티펙트가 하나도 없냐?”
 “그래, 없다! 왜! 처음에 말했잖아. 하나도 없다고...”
 “하아...”
 “한숨 쉬지 마!”
 눈의 마녀는 진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어이어이, 울지 마. 그럼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나쁜 놈 맞잖아!”
 ‘나쁜 놈.’
 그 말은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기억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세상에 한 짓. 
 대역죄인 으로서의 자신을.
 ‘젠장, 다시는 안 들어가. 이제 들어갈 일도 없겠지만.’
 “좋아... 그럼 다시 데려다 줄게. 어디보자.”
 에시는 품속을 뒤적거렸다.
 “무작위 이동 아티팩트가 어디 있더라...”
 “그거 말고! 마왕의 성으로 떨어질 수도 있잖아!”
 “알아 알아. 그냥 농담한 거야. 아직 쿨타임도 안됐어.”
 그녀가 꺼낸 것은 다른 물건이었다.
 “짠!”
 “그게 뭔데?”
 “붉은 마녀에게서 얻어낸 물건.”
 에시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있으면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어.”
 “정말이야?”
 눈의 마녀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까지 그녀가 지은 것 중에 가장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마찬가지로 한 달에 한번 밖에 못 쓰는 물건이라, 너한테 쓸 수는 없어.”
 “?”
 “내가 쓸 거니까. 스티어스 백작, 잘 돌아가.”
 “알겠소. 공도 평안히 잘 돌아가시오.”
 “잠까안~~!!!!”
 정말로 처절한 비명이었다. 눈의 마녀는 에시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의 주위는 냉기로 가득 찼다. 주위 풀밭은 툰드라마냥 얼어가고 있었다.
 “안 돼!!! 나를 여기 내버려 두고 갈 생각 같은 건. 저얼~대로 하지도 마! 알, 알았어?!”
 “하하하, 붙잡으면 못 갈 줄 알고?”
 “히이익!”
 “농담이야, 농담. 이거 놔, 얼음.”
 눈의 마녀는 눈물을 닦으며 멱살을 놓았다. 에시는 재빨리 아티팩트를 들어올렸다.
 “그럼 안녕!”
 “잠깐!”
 눈의 마녀는 에시에게 달려들었다. 곧 그들은 엉켜서 들판을 뒹굴었다. 
 잠시 후 에시가 밑에 깔려 있고 눈의 마녀는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켜 줄래?”
 “먼저 약속해! 절대로 혼자서만 내빼지 않겠다고!”
 “약속 안하면 어쩔 건데.”
 “으으으!!!”
 “알았어, 농담이라니까. 내 위에서 비키기나 해.”
 눈의 마녀는 곧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그녀의 위에서 비켰다. 
 “정말, 네가 장난을 치니까 이런 못난 꼴을 보인 게 아니야. 네가 나빠. 에시.”
 “그래, 항상 내가 나쁘지. 인정해, 인정한다고.”
 “뭐야, 에시. 설마 삐진 거야.”
 “아니, 아니야.”
 에시는 다시 아티팩트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영원의 숲을 보며 말했다.
 “다시는 저 곳을 보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지. 그런데 스티어스 백작. 아직 안 갔어?”
 “공들의 노는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 계속 지켜보고 있었소이다.”
 표정이 없었지만 왠지 변태적인 웃음이 그려졌다.
 “암튼,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에시는 강하게 주장했다.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또?”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 혼자에게만 들린 것도 아니었다. 
 눈의 마녀와 스티어스 백작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에시도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라가 없는 곳으로 보아... 인간?’
 “에시, 저 사람 중 한 명은... 그 인간 아니야?”
 전신에 갑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틀림없이 블로우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에시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런.” 
 “에시?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둘이 같이 다니는 거지...’
 “설녀 공? 에르세르스 공? 저 인간들을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 하나는 우리가 만났던 인간이라서. 저 갑옷은 에시가 준거야.”
 “허어? 인간에게? 보아하니 아티팩트 같은데 역시 에르세르스 공은 아티팩트가 넘쳐나는구려.”
 “지금은 인간이 아니야. 흡혈귀지.”
 블로우와 나그네는 그들 일행에게 다가왔다. 
 에시가 말했다.
 “여긴 왜 온 거야?”
 “마왕이 어디 있는지 안 가르쳐 줬잖아요. 그래서 물으려 왔어요.”
 “...설마 그거 물으려 이곳까지 쫓아온 거야?”
 “네.”
 블로우 자신도 대답하면서 뭔가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에시는 옆의 나그네를 보았다.
 “이 인간은 어떻게 알고 같이 온 거지? 둘이 아는 사이였나?”
 “아니요.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당신하고 아는 사이라던데요?”
 “오랜만입니다. 에시.”
 나그네는 반가운 듯이 미소 지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건 에시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만났다? 그것 참 대단한 걸?”
 “저도 놀랐습니다. 아마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 같군요. 이것도 운명의 힘일까요?”
 “운명의 힘이란 없어. 어...”
 “왕자입니다. 첫째 왕자요.”
 “아,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거지잖아?”
 “뭐, 그렇죠.”
 나그네는 쑥스럽게 웃었다.
 “왕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아, 몰라도 돼. 어차피 얘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니거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지. 다르게 말하면 거지고.”
 “에시의 말대로 지금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
 “그런데 너는 이곳에 왜 온 거야?”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났는데 이 친구가 당신을 찾고 있더군요. 그래서 도와주었죠. 영원의 숲으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것도 말했던가.”
 “그래서 저희는 영원의 숲으로 향했었죠. 다행히 한 달 가까이 당신의 위치는 변하지 않더군요.”
 “뭐? 그걸 어떻게... 아.”
 “맞습니다. 당신이 준 나침반이 알려주었죠.”
 “그걸 빌미로 이 흡혈귀와 동행한거군...”
 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그럼 나를 따라서 영원의 숲까지 들어올 작정이었어?”
 블로우가 말했다.
 “아, 그것에 대해서 걱정했는데, 이... 나그네가 좋은 방법을 알려줬어요.”
 “무슨 방법?”
 “바로 나올 때 까지 기다리는 거요. 굳이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그럼 마왕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블로우.”
 에시는 블로우와 눈을 맞췄다. 정확히는 갑옷의 눈과 맞춘 거지만.
 “정말로 마왕과 싸울 거야?”
 “죽일 겁니다.”
 “흡혈귀는 진조를 죽일 수 없어.”
 “아니요, 전 이미 죽여 보았습니다.”
 “역시, 마왕의 아들을 죽인 건 너였군.”
 블로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지. 젠장, 그것 때문에 마왕이 나를 죽이려 한다니까.”
 “그들은 화풀이로 저의 마을까지도 파괴했습니다.”
 “그거야 항상 있는 일이니 별 놀라울 것도 없고.”
 “뭐라고요?”
 그제서야 에시는 블로우의 불같은 성미를 떠올리곤 손을 내저었다.
 “미안, 미안. 하하하. 이해해줘. 초월종의 사고방식은 인간하고는 다르니까. 아, 지금은 흡혈귀지?”
 “절 더 자극하지 마세요. 전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마왕을 죽일 겁니다.”
 “좋아, 블로우. 하지만 네가 마왕의 아들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진 마비독 때문이야. 물론 이 독도 평범한 독이 아니야. 아티팩트거든.”
 “그럼 그 독을 저에게 빌려주세요. 이 검에 묻히겠습니다.”
 블로우는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에시의 눈길이 검으로 향했다.
 “마왕의 아들의 검이네. 네가 주웠구나.”
 “이것 역시 아티팩트입니까?”
 “물론이지.”
 “어떤 기능이 있죠?”
 “마검(魔劍) ‘카르다노’라는 이름인데. 무슨 기능이었더라... 아, 까먹었어.”
 “...그렇군요. 그래도 일반 검보다는 낫겠죠.”
 블로우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럼 에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마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왕은 마왕성에 있지.”
 “그럼 그 마왕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왕성은...”
 “잠깐만 있어보시오! 에르세르스 공! 흡혈귀!”
 갑자기 스티어스 백작이 끼어들었다. 블로우는 황급히 검을 들어 백작에게 겨누었다.
 “뭡니까, 이 몬스터는!”
 “몬스터가 아니니까 검을 내려. 블로우. 이 자는 초월종이야.”
 “초월종...? 인간의 모습이 아닌 초월종은 처음 보네요.”
 “뭐, 뭐라고 하는 건가, 이 흡혈귀는!”
 “진정해, 백작. 블로우, 모든 초월종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어. ‘폴리모프’라고 하지. 대부분의 초월종은 폴리모프한 상태로 있는 거야. 에너지를 적게 쓰니까. 
 하지만 여기 있는 백작은 평상시에도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초월종이지.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할까. 그러니까 그런 말은 삼가. 매우 큰 실례니까.”
 “죄, 죄송합니다... 이름이... 백작?”
 “스티어스라네. 백작은 작위지.”
 “그, 그렇군요...”
 “스티어스 백작‘님’이라고 부르게. 흡혈귀.”
 “알, 알겠습니다...백작, 님.”
 왕자가 질문했다.
“그나저나 에시. 영원의 숲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붉은 마녀를 만나러 간 거였어. 이제 목적은 이뤘고.”
 “그렇군요. 전 그저 당신 얼굴 한번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날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니. 재밌네. 인간이긴 하지만...”
 “이보게 이보게들! 여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 않은가! 인간들은 다 이렇게 무례한가?”
 “실례했습니다, 백작.”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백작'님'.”
 “진짜 이 흡혈귀에게 마왕 공작의 위치를 알려준 셈이오? 에르세르스 공?”
 “아니, 안될 게 뭐가 있어?”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를 혼란시키는 일이오! 이 흡혈귀는 비록 흡혈귀에 불과해도 진조하고 다름이 없소!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지 않소!”
 “거기다 진조의 피로 만들어진 흡혈귀지. 신체능력도 진조와 같아.”
 “그리고 아까 독까지 빌려준다고 들었소. 에르세르스 공. 진조를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는 독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그대는 정말로 이 인간...”
 “이젠 흡혈귀야.”
 “듣자하니 그대가 흡혈귀로 만들었잖소! 에르세르스 공. 정말로 이 인간으로 하여금 마왕 공작을 죽이게 할 셈이오? 헛헛. 마왕 공작은 우리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존재잖소!”
 “그렇지.”
 “가장 천한 인간이 우리 초월종 최상위에 있는 존재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오!”
 “그렇게 흥분할 거 없잖아. 백작. 너무 권위주의적이군.”
 듣고 있는 눈의 마녀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인간이 ‘마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약한 농담으로만 들렸다.
 “정말 저 인간이 마왕을 죽이는 게 가능해?”
 에르세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마법은 어떡하고?단순히 신체능력으로만 따지는 건 무의미하잖아. 이제는 멸족했지만, 드래곤이 단순히 덩치 큰 날개달린 도마뱀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야.
 마왕은 마법을 쓸 수 있잖아? 듣기로는 마왕은 마법의 가장 높은 경지까지 마스터했다고 하는데.”
 “아, 마법하니까 방금 떠오른 건데.”
 “뭔데?”
 “저 마검 카르디노는 말이야. 마법을 무효화 할 수 있어.”
 “...”
 그 고약한 농담은 점점 현실화 되어갔다.
 “따라서 블로우에게는 마법이 안 통해.”
 “그런... 사기 아티팩트가 있어?”
 “응.”
 “왜 마왕의 아들을 처리하고 줍지 않은 거야?”
 “까먹었어.”
 스티어스 백작이 말했다.
 “아니, 에르세르스 공. 그대는 까먹지 않았소. 그런 것을 까먹을 리가 없지. 그대는 알고 있었던 거요. 저 자가 그 검을 주울 것을. 그대와 저 흡혈귀의 대화로 들어 판단하는데 그대는 처음부터 저 자에게 마왕 공작을 처리하라고 한 것 같은데. 여의 말이 맞소?”
 “맞아. 그런데 그건 농담이었어.”
 “...공과 나름 오랫동안 지낸 여는 알 수 있소. 그대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오. 검과 갑옷. 두 개의 아티팩트를 주었소. 거기다가 진조의 피까지. 이래도 이것이 농담이라는 말이오?”
 “젠장, 스티어스. 왜 그렇게 까칠해? 평소답지 않게.”
 “그대가 하는 것은 우리 초월종에 대한 반역이오!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계속 말하는 거지만, 인간이 마왕 공작을 죽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기반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일이란 말이오! 겨우 인간들을 조련했소. 교육했소. 깨닫게 했소. 
 이 세상에 널려있는 게 아티팩트고, 과거에는 인간들이 우연히 주은 그것으로 우리 초월종을 얼마나 학살했소이까!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이야, 우리 초월종끼리 동맹을 맺은 지금이야, 겨우 혼란은 잦아들었소! 
 이제 대부분의 아티팩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소. 그렇게 겨우 질서를 되찾았는데, 또 그런 혼란을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오이까? 에르세르스 공! 인간들에게 헛된 바람을 넣지 마시오!”
 “시끄러워. 인간이 마왕을 죽일 수도 있는 일이지. 그 질서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 이봐, 이봐. 스티어스 백작. 입 다물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말이야. 난 질렸어. 질렸다고.”
 “...공은 영원의 숲에서 꽤나 심적으로 피곤했던 것 같소.”
 “...”
 부정할 수 없다.
 “지금 공이 판단을 잘못하는 것이오. 저 자에게 마왕성의 위치를 알려줄 필요는 없소.”
 “아니.”
 “에르세르스 공!”
 “꼭 영원의 숲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야. 그것 때문에 지금 많이 지친 상태긴 하지만, 그건 아니야.
 그래, 네 말이 맞아. 마왕을 죽이라고 한 건 반은 진심이었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지시한 것은 영원의 숲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마왕이 죽었으면 좋겠는걸.”
 “에시?”
 “에르세르스 공...”
 “머리가 아파. 굉장히 오랜만인걸.”
 에시는 머리를 만지며 비틀거렸다. 둘은 한 번도 이런 에시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난 아무래도 지친 모양이야.”
 “그렇게 보이오. 에르세르스 공. 이번 기회에 좀 쉬시오. 자신만의 장소도 만들고. 이제 방랑을 그만두시고 정착하는 게 어떻겠소?”
 “이봐, 백작.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알잖아?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걸.”
 “허나...”
 “그래, 내가 생각해도 에시 너는 좀 쉴 필요가 있어.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자신만의 장소를 갖지 않는 거야? 왜 떠돌아다녀?”
 “그건 저 인간에게 물어 봐.”
 에시는 왕자를 가리켰다. 왕자는 당황해했다.
 “난 좀 쉬어야겠어. 아, 블로우, 이리 와, 가르쳐 줄테니까.”
 “...”
 블로우는 그녀에게 가려다 스티어스의 매서운 눈길(눈은 없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과 마주쳤다. 블로우는 카르다노를 꺼냈다.
 “움직이지 마라, 흡혈귀.”
 “제 이름은 블로우입니다. 그리고 제 몸은 흡혈귀여도, 마음은 인간입니다.”
 “얌전히 여의 말을 들어라.”
 “절 막아선다면, 에시의 친구라고 해도 싸울 겁니다.”
 “함부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둘은 서로 얼굴을 맞대면서 으르렁거렸다. 둘 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의 마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눈 감고 그들을 얼려버렸다.
 스티어스 백작은 얼어버렸지만 블로우는 얼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기분만 들었다. 
 블로우는 커다란 얼음에 갇힌 백작을 스티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눈의 마녀님. 대단하시네요.”
 “...”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랐다.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만행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떡하면 좋지... 난 얼릴 줄만 알지 녹이지는 못한단 말이야!”
 “그냥 기다리면 녹지 않을까요.”
 얼음의 크기만 해도 수십 미터는 되었다.
 “깨부수면 안 되나요?”
 “안 돼. 그럼 죽을 게 뻔하잖아.”
 왕자는 에시를 보았다.
 그녀는 홀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왕자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에시, 어딜 가는 겁니까?”
 “...”
 에시의 뒤에서 왕자는 거듭 물었다.
 “어딜 가는 겁니까, 에시.”
 “...들려.”
 “뭐라고요?”
 “자꾸 목소리가 들려.”
 “목소리요? 무슨 목소리 말입니까?”
 에시는 왕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을 본 왕자는 깜짝 놀랐다.
 “에시...”
 그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에시의 그런 모습을 왕자는 처음 보았다. 
 에시는 목소리마저 떨고 있었다.
 “나를 부르고 있어.”
 “누가요?”
 “몰라! 하지만 뻔하잖아... 나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나를 미워해. 죽이고 싶어 한다고! 
 아아... 보여, 보인다고! 복수의 검을 들이대는 녀석이! 
 나는... 나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 으윽!”
 왕자는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등이 굉장히 시리고 아파왔다.
 ‘이건...’
 손등 위에 푸른 나비가 그려지고 있었다. 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으으윽! 어째서... 이럴 리가... 없는데?”
 왕자는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왕자?”
 왕자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자신의 손등을 살폈다.
 “그건?”
 “푸른 나비의 표식입니다. 어떻게 된 거죠?”
 “그럴 리가... 우리는 거래를 했지. 그렇지 않아?”
 “그랬죠. 하지만...”
 왕자의 눈이 커졌다.
 “설마...”
 “왜 그래?”
 왕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에시에게 자신의 손등을 보여줬다.
 “이것을 보시오. 에시. 보이십니까? 사라졌을 저의 푸른 나비의 표식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빛나고 있습니다. 푸른색으로 말이죠.”
 “...그런데?”
 “느껴집니다. 에시, 지금 저의 왕국은 위험에 처한 상황입니다. 그것도 매우 큰 위험에요. 에시. 도와주십시오. 저의 왕국을... 인간의 왕국을!”
 “아니. 안 도와줄 거라는 걸 너도 잘알고 있잖아? 그리고 이미 너의 왕국이 아니잖아. 넌 포기했어. 도망쳤다고!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 도망친 주제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왜 갑자기 인신공격을 하십니까, 에시? 이상해요. 영원의 숲에서 많이 지치셨나 봅니다.”
 “닥쳐! 닥치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다. 거지. 거지는 거지답게 떠돌아나 다니라고. 너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니니까.”
“...왠지 자신에게 하는 소리 같군요.”
 “...!”
 에시는 품에서 단검을 빼내들어 왕자의 목에 대었다. 하지만 왕자는 계속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이제 왕자가 아닙니다. 저는 도망쳤죠. 이제 아무도 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야만 합니다.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솔직히 초월종인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줄로는 압니다. 하지만, 왕국을 도와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에시? 솔직히 저는 저기 있는 초월종 친구들만큼 당신과 오랫동안 지내지는 않았지만, 저들은 모르는 당신만의 비밀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냐? 인간 주제에? 어이, 왕자. 이 단도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이걸로 살짝만 그으면 넌 바로 죽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카드 하나를 만들어 놓는 것처럼... 저도 당신에게 남겨둔 카드 하나가 있습니다...”
 “!”
 단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왕자가 가진 카드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알아챌 것 같았다. 그녀는 떠올려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기억의 도서관에서, 열어서는 안 되는 책을 열어버린 것 같았다.
 우연의 우연의 우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에시는 안다. 왕자의 카드가 무엇인지 안다. 왕국에 남겨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왕자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안다.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떠올려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떠올려서는 안되는 것. 그것은 떠올려서는 안되는 것.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
 하지만 결국, 그녀는 떠올리고 말았다.

 “아.”

 영원의 숲에서 들었던 정체불명의 목소리. 지금은 거지가 된 왕자와 했던 거래. 그리고 왕국에 있는 것. 
 그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 떠올려서는 안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깨닫고 말았다.
 
 지금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잊고 살았던 것.

 그녀는 단도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겉으로는 침착해보였으나, 그녀는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며칠 지나면 회복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동전 쌓기에 비유해보자. 물론 세워서가 아닌 눕혀서 쌓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동전의 개수는 존재마다 다르다. 
 인간은 동전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한다.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이다. 두세 개 동전을 쌓아봤자 무너져 내릴 일은 없다.
 초월종은 더 많다. 10개 정도. 하지만 역시 무너질 위험은 없다. 제대로만 쌓으면.
 하지만 마왕같이 오래된 초월종은 동전이 20개가 넘어간다.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리고 에시의 경우. 가장 오래된 초월종인 에시의 경우는 동전이 30개가 넘어갔다.
 위험하다. 위태위태하다. 그녀도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무너지고 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젠장.’

 에시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야 깨달았어. 끝이 다가오고 있었던 거구나. 그런 거 였어. 그래, 그런 거 였군.”
 “에시?”
 “가자.”
 “어,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왕국이지.”
 에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거 였군! 좋아, 지금부터 왕국으로 갈 거야.”
 “저, 저의 왕국을 도와주시는 겁니까?”
 “‘너의’ 왕국이라니. ‘너의’는 빼라고. 거지. 왕국을 구하는 게 아니야. 내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거지. 그게 그건가? 뭐, 상관없어. 스티어스! 블로우! 얼음!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에시는 그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소의 그녀로 돌아온 건가?’
 하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평소처럼 웃고는 있었지만, 평소하고는 달랐다. 뭐랄까. 최후의 싸움을 앞둔 모습이랄까.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자의 활력이랄까. 아무튼 그것은 끝을 앞에 둔 자들이 보이는 그런 것이었다. 
 왕자는 그녀를 따라갔다.
 “뭐하는 거야? 블로우, 그걸 부술 작정이야?”
 에시는 팔을 앞으로 뻗었다. 얼음은 마법진에 뒤덮였다. 불타는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의 빨간 마법진이었다. 곧 얼음이 녹고 스티어스가 해동되었다.
 “아아... 설녀 공. 갑자기 무슨 짓이오이까? 잔뜩 몸이 젖었지 않았소이까. 금속과 가죽에는 물이 별로 좋지 않...”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야. 스티어스. 그리고 얼음, 블로우. 우리는 지금 당장 가야만 해.”
 “어디로 말입니까?”
 “어딜 가는데?”
 에시가 대답했다.
 “왕국.”
 “왕, 국?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 말이야? 그곳에 우리가 왜...”
 “설녀 공 말에 여도 공감이오. 갑자기 왜...”
 “질문은 허락하지 않아. 가면 알게 돼. 여기서 멀다고? 그건 걱정하지 마. 내게 텔레포트 아티팩트가 있으니까.”
 에시는 품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이걸로 한꺼번에, 단번에 왕국으로 이동할 수 있어.”
 “에르세르스 공. 자세한 사정을 들어야...”
 “질문은 허락 치 않아. 그냥 따라와.”
 눈의 마녀와 스티어스 백작은 움찔했다. 
 그녀가 평소의 그녀하고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다.
 물론 눈치 채지 못한 녀석도 있었다.
 “전 싫습니다. 전 마왕을 잡으러 갈 겁니다. 지금 당장.”
 “블로우!”
 왕자가 그에게 말했다.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왕국이 위험에 빠졌다고.”
 “...나하고는 상관없어. 난 아직 너의 정체도 모른다고. 나그네. 네가 왕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따라오면 알 수 있어. 일이 마치면 알려줄게.”
 “관심 없어.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마왕을 잡으러 갈 거야.”
 “인간,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여가 경고 했을 터인데...”
 “왜 또 싸우고 그래! 또 얼려버린다, 너네들!”
 “블로우.”
 그녀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얌전히 따라와.”
 에시의 붉은 눈이 블로우를 향했다.
 “싫어요.”
 “따라와.”
 “싫습니다.”
 “그럼 내가 준 갑옷 돌려놔.”
 “그것도 싫습니다. 에시, 당신 앞에서 말하지는 못했지만, 전 당신에게도 원한이 있습니다. 당신과 저 마녀가 저희들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도로시는 죽을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저희 마을이 날아갈 일도 없었고.”
 “블로우...”
 왕자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블로우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말하지는 못했지만, 당신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하지만 에시. 당신은 저를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만으로 저는 참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려 달라? 그렇게 요구한다면 이제 저는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요구한다면, 당신은 이제 나와 적이야. 에시.”
 “...하하하.”
 에르세르스는 웃고 말았다. 블로우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지금 웃고 있는 건가, 에시?”
 “그래, 넌 갓 마을에서 뛰쳐나온 촌뜨기였지. 순진해. 아무것도 모르군. 넌 아무것도 몰라, 블로우.”
 “내가 뭘 모른단 말입니까.”
 “도로시가 죽은 것도, 마을이 박살난 것도 전부, 우리 탓이란 건가? 그래, 네 말대로 우리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마왕의 아들을 쓰러뜨리지 않았으면, 도로시도 죽지 않고 마을도 그대로라는 말이야?”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그, 그건 아니야!”
 눈의 마녀가 끼어들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인간에게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것은.
 “뭐가 아니란 겁니까!”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가만히 있어, 눈의 마녀. 이건 내가 설명해야할 일이야. 그는 나에게 물었으니까. 그렇지, 블로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의 말은... 우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마왕의 아들은 너와 그 인간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단 말이구나.”
 “그렇죠. 가만히 있는데 건드릴 리 없잖습니까?”
 “너는 몰라도 너무 몰라. 아무것도 몰라. 마왕에 대해서.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 말이야.”
 “뭘 모른단 말입니까?”
 “마왕의 가족. 그의 아내는 오래전에 자살했으나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니 넘어가고. 마왕의 가족은 마왕, 그리고 첫째 딸인 ‘공주’, 그리고 둘째 아들. 셋째 딸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은 아주 유명하지.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말이야. 그들은 죽이는 걸 너무 좋아해서 인간과 몬스터는 보이는 대로 닥치는 죽여 되었지. 
 지금이야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귀족인 것 마냥 허세부리지만, 녀석들은 그저 포악한 학살귀에 불과해. 그게 녀석들의 본성이야. 녀석들에게 살아있는 것이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해. 녀석들이 지나간 곳에는 항상 시체의 산이 쌓여있지. 
 녀석들이 지나가면 말이야. 인간의 마을이고 몬스터의 동굴이고 뭐고 남아나지 않아. 
 겉으로만 곱상하고 품위 있을 뿐. 그게 녀석들의 본성이야.”
 “...”
 “가만히만 있으면 그대로 지나갔을 줄 알았어? 녀석의 마차가? 녀석의 마차가 멈춘 게 순전히 우리들 때문인 것 같았어? 
 너와, 도로시만 있었으면 마차가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줄 알았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로 순진한 거야. 블로우.
 아, 물론 마차를 멈출 필요도 없었겠지. 번거롭게 마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을 테지. 그저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고, 마법으로 너희들을 고깃덩이로 다져놓았을 거야. 그리고 지나가던 길에 있던 마을을 손짓 한번으로 박살내거나 불태웠겠지. 그것이 녀석의 유희거리였으니까.
 블로우. 우리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야. 너와 도로시는 죽고, 마을은 박살났겠지. 그건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건 운명이었어. 너희 마을은 그때 이미 수명이 끝나버린 거야. 그전에 너는 운 좋게 탈출한 것이고.”
 “...말도 안 돼.”
 “왜, 아무 짓도 안했는데 녀석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이상해보여? 그래서 네가 순진하다는 거야. 이 세계는 말이야. 원래 그런 세계야. 너의 마을이 비정상적으로 평화로웠던 거지. 
 원래 이 세게는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날아가고 왕국이 사라지는, 그런 세상이야. 그것도 순전히 재밋거리로 말이지. 그야말로 미친 세상이지.”
 “누가 이런 미친 세계를 만든 거죠.”
 “...”
 모두가 침묵했다. 몰랐으니까.
 에시만 빼고.
 “알고 싶어?”
 다들 에시를 쳐다보았다.
 블로우는 그녀에게 물었다. 
 “알고 있는 겁니까, 당신은?”
 “그래, 나는 알고 있어. 가르쳐줄게. 나를 따라오면 말이야. 마왕이 있는 곳뿐만 아니라, 누가 이런 세계를 만들었는지까지 말이야.”
 “정말인가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믿어도 돼.”
 “...알겠습니다.”
 블로우는 에시에게 다가갔다. 그때 에시가 물었다.
 “그런데 블로우. 만약에 세상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블로우는 바로 대답했다.
 “죽일 겁니다.”
 에시는 웃었다.
 “명쾌해서 좋네.” 
 ‘하긴, 마왕도 죽이겠다고 날뛰는 인간인데.’ 
 다른 인간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하나 잘 고른 것 같네.’
 그녀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수직으로 낙하해왔다.
 에시 일행 모두 기척을 감지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뭐지?”
 
 블로우는 보았다. 자신의 동체시력으로.
 그가 집중하면 모든 것이 느리게, 천천히 보였다. 실제로는 그가 빨라진 것이지만.

 작은 물체였다. 그것은 에시의 앞으로 떨어지더니, 그녀의 얼굴 앞에서 빛을 뿜어내었다. 그 빛과 함께 에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블로우는 재빨리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그것이 물체를 떨어뜨린 자일 것이다. 블로우는 그것을 향해 검을 집어던졌다. 
 이 모든 일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은 순식간에 날아가 하늘의 그것을 맞추었다. 이윽고 그것은 검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블로우는 땅에 박힌 카르다노를 뽑으며 말했다.
 “이게 뭐죠?”
 일행들이 다가와 땅에 떨어진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까마귀였다.
 “까마귀 같은데...”
 “아니오. 이것은 평범한 까마귀가 아니오이다. 이것은 마왕성에 사는 까마귀인데. 지능이 높아서 말도 할 줄 알고 시키는 것도 잘해서 시종으로도 쓰이는 까마귀라오.”
 “그게 왜 이곳에...”
 까마귀는 반쯤 몸이 베어져 있었으나, 아직 살아있었다.
 스티어스 백작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에르세르스 공을 어디로 데려간 것이냐!”
 까마귀는 힘들게 부리를 열었다.
 “나의 이름은... 메르셀... 공주의... 시종이다...”
 “공주? 공주 공작께서 보낸 것인가?”
 ‘공주도 공작이었냐...’
 “에르세르스... 그녀는... 우리 주인께서... 직접, 처형할 것이다.”
 이윽고 공주의 시종 메르셀은 숨을 거두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스타니스 백작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공주 공작께서 그녀를 데려간 것 같소.”
 “불쌍한 에시...”
 “어떻게 사라진 거죠? 어떤 물체가 떨어지며 빛을 뿜었는데.”
 왕자가 대답했다.
 “텔레포트 아티팩트야. 1인용인 모양인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공주와 대면하고 있겠지.”
 “공주? 마왕의 첫째 딸 말이야?”
 스티어스 백작이 대신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그녀가 무사하길 빌어야겠소만...”
 “그런데 하필 공주라니. 에시도 참 운 더럽게 없네.”
 “하필 공주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마왕보다 더 강합니까?”
 “그렇지는 않소. 진조 중에선 마왕이 제일 강하지만, 가장 악명 높은 건 마왕 공작도, 그의 아들도 아닌, 첫째인 공주 공작이라오.”
 떠벌리기 좋아하는 스티어스 백작이 말했다.
 “진조 중에서 가장 피를 좋아하고, 가장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라오. 그녀가 마왕 공작의 첫째 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오만하고 잔혹한 성격 탓에 우리들은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오. ‘공주’라고. 그런 소녀에게 에르세르스 공이 걸렸으니...”
 “그럼...”
 “잠시만요, 기다려요. 여러분. 저에게 에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왕자는 누더기가 다 된 검은 망토에서 황금 나침반을 꺼냈다.
 “이걸로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자는 황금 나침반을 열었다.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이런.”
 “왜 그래?”
 “그녀의 위치가 나오지 않아요. 어떻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그렇다면, 설마...”
 스티어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게 표정은 없었지만 다들 그렇게 상상했다.
 “고유결계로 간 것 같소.”
 그의 말에 눈의 마녀는 깜짝 놀랐다.
 “고유결계? 세상에...”
 “잠시만, 고유결계라면... 그, 이계(異界)를 만들어서 그 안으로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인간인데도 아는 게 많구려.”
 “소설에서나 읽었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블로우는 왕자에게 물었다.
 “고유결계가 뭔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대강 말하자면... 독자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에시를 끌어들었다는 거야.”
 “독자적인 공간?”
 “이계(異界)라고 하는데. 마력으로 일시적으로 만든 공간이지. 강대한 악마들만 쓸 수 있는 거야.”
 흡혈귀도 일단은 악마족에 속한다.
 “그럼, 우리가 그녀를 구하러 갈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어쩔 수 없소이다. 다만, 고유결계는 마력을 많이 소모하는 행위니 단시간 동안만 지속될 거요. 그 시간 안에 단판은 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지금으로써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소. 그저 단판이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는 말이오.”
 “...에시.”

 에시는 자신의 앞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보았다. 1인용 텔레포트 아티팩트였다.
 ‘누가 이런...’
 에시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위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참으로 기분 나쁜 풍경이다.
 “이계(異界)로군.”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사실 붉은 마녀를 죽일 때도 그녀를 쫓아가 차원과 차원 틈새로 들어갔었지만, 지금 서있는 곳은 그곳하고는 달랐다. 
 지금 있는 이 이계는, 이계 중에서도 악마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고유결계네. 진짜 오랜만이구나, 이곳.”
 악마족은 오래전에 멸망했다. 남아있는 악마족이라고는, 흡혈귀가 전부였다. 물론, 흡혈귀 중에서도 고유결계를 펼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느껴진다. 
 에시는 앞을 보았다. 
 보였다.
 ‘난 참 더럽게 운도 없지.’
 눈앞에 있는 것은 한 소녀였다.
 금발에 빨간 눈을 가진, 잔인한 미소를 짓는 소녀.
 지금 에시의 앞에 있는 것은 공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