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국교로한 고대의 거대제국이였던 로마가 게르만 용병들의 무력시위이후 좆망하고 나서 중세시대는 유럽-중근동 세계에서는 동로마제국 비잔틴, 이슬람제국, 프랑크왕국 이 세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있었어. 그외의 국가들은 강력하고 결집된 힘을 갖춘 제국 체제로의 발돋움까진 못하고, 여전히 약한 군소왕국정도에 머물러있었어.
당시 당나라와 더불어 세계최강국이라도 불리어도 손색없는 국가였던 이슬람제국의 전성기시절 판도 와 동시대의 비잔틴제국의 판도.
땅크기자체로만따지면 사실 비잔틴은 이슬람의 적수조차 되지 못할거같아보이지만,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지역은 당시 유럽-근동 지역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들중에 속했고, 엄청난 인구밀집지역이었기에, 만만치않았어.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 당시 샤를마르텔의 치세당시에는 프랑스영역과, 독일중부정도만을 영유하고 있던 시기였어. 그후의 약간 하늘색같은 영역은 그의 후계자 샤를마뉴 대제가 정복을 한거야.
당시 아랍제국은 622년에 메카라는 소도시에서 무하마드가 군대를 일으킨걸 시작으로 632년즈음에 페르시아 대군의 수차례 공격을 격파해내고 아라비아 전지역을 장악해. 그리고 650년도에 사산조제국의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이집트와 페르시아, 리비아 지역까지 제패하고 그후 650-680년대에는 654년에서의 비잔틴과의 지중해해전을 승리로이끈후 비잔틴 또한 민주화시키고 북아프리카 전지역 점령, 동쪽으로는 북인도지역까지 장악하고 유럽남부 현재 스페인-포르투갈의 땅인 이베리아 반도까지 정복해.
사실상 겨우 70-80년만에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당나라보다도 훨씬 거대한 초거대 제국을 세운 아랍제국은 정복에서는 파죽지세를 달리고 있었어. 그리고 이에 기독교 문명들은 풍전등화에 놓여져있는것만 같았던 분위기였어. 그래도 비잔틴은 콘스탄티노플의 굳건한 성벽으로 그들의 맹공을 버텨내고 아나톨리아 지역내에서도 나름선전하여 아랍군대를 격퇴하고 있었어. 하지만 더 큰문제는 서유럽지역에 있었어.
동로마는 그래도 당시 유럽에서도 군사기술도 뛰어나고 나름 정교한 정치체계와 강력한 상비군을 가지고 인구도 상당한수의 튼실한국가였지만, 서유럽과 중유럽 상당수에는 아직도 부족적인 국가정도수준의 국가들도 많이 산재해있었고, 그나마 프랑크 왕국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제대로된 국가꼴을 갖춘국가들은 찾기힘든수준이였어.
그리고 이 위협은 711년을 기점으로하여서 이베리아반도를 공격하면서 현실화되고 있던 시점이야. 겨우 7년만에 이베리아에 존재한 기독교 왕국들을 전부 정복하고, 무슬림들의 영토로 만들어 버렸어. 그리고 이제 아랍제국과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국경을 사실상 맞닿게 된 프랑크 왕국 또한 거대한 위협을 감지하게 돼.
당시 비잔틴 또한 무슬림들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상당히 밀리는 전황이었고, 스페인의 기독교 왕국들이 모두 무슬림들의 손 아래 멸망당하는것을 보게 되자, 프랑크 왕국 또한 겁을 내지 않을수가 없었던거지.
아퀴탱 대공 오도의 영역 Duchy of Aquitaine + County of Toulouse
그리고 719년 쯤 이베리아반도가 완전히 정리된이후 720년에 나르본이라는 해상수송이 쉬운 프랑스 최남단 지역의 해상수송이 간이한 군대 보급을 위한 항구도시 나르본을 정복한후 다시 군대를 재정비한후에 피레네산맥을 넘는 1차침공을 감행해. 이슬람군대들은 721년에 프랑스 최남단지역인 툴루즈로 침공하는데, 당시 툴루즈를 지배하던 아퀴탱 대공 오도 는 워낙 지배하는 영역이 넓은 공작이라 사실상 프랑크의 명목상 우위를 인정은 하고잇었지만, 반독립국의 왕이나 마찬가지였어.
나르본
툴루즈
사실 숫적우위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이슬람군에게는 아퀴탱 대공 자기 혼자로써는 도저히 감당해낼수가 없었어. 그래서 사실상 옴미아드의 공성군들에 성이 다 함락되어 툴루즈 또한 무슬림들의 손에 넘어가나했는데, 아퀴탱 대공의 혜안이 툴루즈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 아퀴탱 대공은 몰래 몇몇의 수하만 데리고 이슬람 공성군의 눈을피해 프랑크왕국의 수도로가서 당시 반독립국의 국왕행세하던 자존심따위는 버리고 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마르텔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해.
샤를 마르텔
그후 때마침 성이 무너지기 직전 시점에 샤를 마르텔은 타이밍좋게 구원군을 끌고 왔어. 하지만 이런 프랑크군의 지원군을 보고서도 워낙많은 연속 승전을 거둔 이슬람군은 자만에 빠져서, 공성기지에 대한 방어강화와 지속적인 정찰을 해주기는 커녕, 후방을 취약하게 내버려두고 샤를마르텔군과 정면으로 맞다이를 뜨러간거야. 그리고 그사이 아퀴탱 대공 오도는 자신의 병사들을 뒤로 우회시켜서 그들의 후방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하려는 전략을 감행시키고 있었어.
결과적으로 샤를마르텔과 아퀴탱 대공의 양면합동공격으로 알삼 이븐말리크의 무슬림 군대들은 말그대로 개박살이 나서 프랑크군들에게 끔살을 당하고, 패잔병들은 무기와 갑옷도 땅에다 내다버린채 도망치는데 급급했어. 그리하여 알삼 이븐말리크가 겨우겨우 패잔병들을 추스려 이베리아 반도로 회군함으로써 일단 서방 기독교의 위기는 잠시간은 사라진거 처럼 보였어.
하지만 툴루즈 전투는 훨씬더 거대한 2차 침공의 전조에 지나지않았어. 이슬람군이 툴루즈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난뒤 10년후에 다시 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여 서유럽에 대한 2차 이슬람 원정대가 조직돼. 732년, 아둘 라흐만 장군의 지휘아래 이슬람의 2차 원정군은 갈리아 전역을 제패하기 위한 5만명의 기병으로써 이루어진 대군들로써 피레네 산맥을넘어서 다시 프랑크 왕국 내부로 진격해오고있었어.
결국 아퀴탱대공은 다시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이번엔 툴루즈가아닌 보르도 지역에서 건강한 남성들을 징병해서 그들과 맞서싸웠어. 하지만 결과는 아퀴탱대공 오도의 대참패, 그들의 군대는 도륙을 당했고, 보르도 지역은 무슬림군대에 의해서 약탈을 당하게돼. 그리고 아퀴탱대공은 보르도 근교에 위치한 강인 갸론느 강에서 다시 한번 이슬람군과 전투를 벌여. 이번에는 오히려 더한 패배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 사실상 아퀴탱 대공의 군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게돼. 그리고 아퀴탱 대공은 다시한번 샤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번엔 샤를마르텔 또한 반독립국의 국왕행세하는 대공이 아니라 프랑크왕국의 권위에 복종하는 봉건귀족이 된다는 맹세를 하면 도와준다는 조건을 내걸지.
보르도 지역
갸론느강(GARONNE)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아퀴탱 대공은 일단 살고봐야되니 그 조건을 수락했고, 샤를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좀더 공고히할수있는 기회를 잡게 된 셈이었어. 그리고 샤를과 아퀴탱 대공 오도가 협상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이슬람의 기병대들은 프랑스 남부에서 북진하며 내부로 더욱 깊숙히 파고들어 파괴와 약탈을 일삼고 있었어. 그정도는 매우 심해 갈리아의 한기록에 의하면 "그들의 기병대들은 황량한 사막의 폭풍" 과 같다라고 할 수준이였어.
무슬림 기병대
협상을 끝마친, 샤를 마르텔은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위하여, 그리고 기독교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시 서유럽에는 중기병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갈리아와 독일 지역에서 2만명의 정예 보병대들을 프랑크 왕국내 귀족들과 기사들에게 군사들을 보내라고 압박을넣어서 있는힘 없는힘 짜내서 어떻게든 긁어모아. 즉 샤를 마르텔의 경우도 절박했던거야. 만약 패배할시, 프랑크 왕국의 땅들이 이슬람군들에게 유린당할것은 뻔할 뻔자였고, 더나아가 자신의 귀족과 기사들에게의 권위 또한 바닥으로 추락하게되는 꼴이 발생하게되는거였지.
게다가 패배의 여파로써 프랑크 왕국 또한 그들에게 프랑크왕국의 힘과 권위를 투사할 마땅할 방법을 잃게 되는셈으로써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준다할지라도 아퀴탱 대공같은 반독립국 영지들이 많이 생겨날거고, 최악의 상태에는 샤를 마르텔에게의 반역 쿠데타 및 많은 귀족들이 프랑크 왕국에서 이탈해서 자신만의 독립왕국들을 형성하고 이슬람들과 동맹을 맺어 이익을 챙기는 일까지 벌어질 가능성까지 있었어.
결국 프랑크왕국에게나, 프랑크 왕국이 사실상 수호자로써 존재하는 서방 기독교 세계에게나 이전투는 절대 지면 안되는 전투였어. 샤를 마르텔이 자신의 정예 보병대들을 모집하여 정비하여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이슬람의 기병대들은 계속 진군하여 프랑스 중앙을 가르지르는 루아르 강 까지 진군해서 다시 한번 재정비하고 그 지역의 남은 아퀴탱 대공및 프랑크왕국의 저항군들을 말소해버렸어.
루아르 강
그리고 샤를 마르텔은 보병대들을 모아서 이슬람군대와 맞붙기 위해서 투르로 남하하기 시작했어. 그의 계획은 나무들이 빽빽한 숲지형의 언덕으로 들어가서 기병들이 숲안으로 들어오게끔 유인한다음 숲안의 제한된 시야와 언덕이란 밀집대형으로 유리한 진형을 이용해서 기병들을 격파한다는거였지. 사실상 샤를 마르텔은 여기에 모든것을 갬블한 상태기 때문에 당시 중세보병들에게는 보기힘든 34kg에 달하는 중장갑 갑옷으로 무장시켰어. 그리고 프랑크의 군사들은 홈그라운드란 이점과 아랍군대에게는 면역이 없는 추위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 마르텔은 2만명의 보병대 vs 5만명의 기병대 와 전투경험등 질과 양에서 둘다밀리기는하지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어.
당시 이슬람군의 투르까지의 진출로
반면 이슬람군대들은 시야가 제한되고 지형적으로 기병들의 차지 전술을 쓰기힘든 나무가 많은 언덕지역에 가는건 패배의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투르지역의 평야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치킨게임은 사실상 신이 샤를의 손을 들어줬어. 서로 대치만 하던째 7일이 되던날 겨울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에, 아둘 라흐만은 뭐든 결단을 내려야만 하게 궁지에 몰린셈이 되었어.
기병대들의 차지 공격과 보병대들의 밀집대형
하지만 여전히 아둘 라흐만은 군대의 전투경험의 우위, 숫적우위, 그리고 보병에 대한 기병의 상성상 우위 등을 믿고 언덕지형으로 돌진해서 샤를 마르텔의 보병대 밀집대형에게 반복적으로 차지전술을 시전해. 그러나 훈련된 정예 보병대였던 샤를 마르텔의 보병대들은 기병대들의 돌격에도 침착하게 동요하지않으면서 밀집대형을 유지해.
그리하여 무너지지않는 밀집대형 때문에 빡쳐버린 이슬람 기병대들은 진형 한곳을 집중공격해서 강제로 헤집고 들어가 그리고 그 빈틈을 계속 노려서 기병대들이 공격해서 보병대도 기병대도 상당한수가 전사해. 하지만 신기한것은 이렇게 틈이 한번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정예는 정예인지 바로 밀집대형진을 구축해서 기병대들의 공격을 막아내. 그리고 기병대들은 지형상의 문제로 기병의 가장 큰 이점들중 하나인 기동성을 이용하지 못해서 계속 고전을 면치못해.
그리고 보병대들이 훌륭히 싸우는동안 샤를 마르텔은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자신이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적군에 대한 게릴라를 펼치면서 약탈을 하면서 거슬리게하고, 식재료들 또한 그가 직접 무슬림군대로부터 약탈해와서 보병대들에게 나눠주는 위엄을 보여. 하지만 이런 샤를과 보병대들의 뛰어난 활약와중에서도 이슬람 또한 그들이 아직건재하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밀집대형진을 한번 붕괴시켜버리고 샤를 마르텔의 목을 따버릴뻔 했어. 그러나 샤를 마르텔의 호위 기사들이 샤를마르텔에게 날아드는 창과 검을 막아냄으로써 위기를넘겨.
그리고 서로 물리고 물리는 이 전황이 결정적으로 샤를 마르텔에게 기우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건 무슬림군대 사이에서 떠돈 소문이었는데, 그소문 내용은 소규모의 프랑크군들이 보르도에서 약탈해온 그들의 금화와 재물들을 기병대들이 보병들과 전투하는 사이에 빼내갈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거였지. 결국 그들의 약탈한 재화를 지키기 위해서 상당수의 군사들이 군 막사로 귀환하기 시작해. 그리고 그들이 재화를 지킬려고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이 시작된지 둘째날에 무슬림군의 보급품들이 소규모 프랑크 정찰병들에 의해 약탈당해.
그리고 샤를이 보낸 소규모의 정찰병들은 이 전투에서 매우 큰역할을하는데, 단순히 보급로를 끊고 보급품을 약탈하는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기지내의 노예들을 풀어줌으로써 무슬림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해. 그리고 이 타격으로, 재화를 지키기 위해 도망친 군사들 뿐 아니라 무슬림 전군이 기지로 회군하기 시작하고 샤를 마르텔은 이때를 노려서 후퇴하는 기병대들을 포위하고 군사령관 아둘 라흐만을 사살하고 상당수의 기병대들을 꼬챙이에 꽂아버리는데 성공해.
그리고 이슬람군의 기지로의 후퇴 다음날, 여전히 샤를 마르텔은 이슬람군의 잔여 기병대들이 아직건재하고 있기때문에 일단 언덕에 머무르면서 다시 밀집대형진을 형성하고 수비로 일관했어. 그는 일단 평야로 내려가면 아무리 정예 보병대라도 기병대들에 의해 둘러싸여서 포위되어 차지전술로 그의 군사들이 녹아날거라고 생각했기때문에 아무리 한번 승리했을지라도 만전을 기했어.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슬림군들은 이미 지휘관까지 잃은상황에서 더이상 전투를 재개할 여력을 잃었고, 그들은 자신이 약탈해왔던 재화들을 챙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게 돼. 하지만 이렇게 격파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의 기세는 대단한것이어서, 737년까지 프랑스 남부의 나르본지역이 샤를의 원정군에 의해서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기전까지는 계속 이슬람제국 통치하에 놓여져있었어.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자면 이전투는 서구입장에서 보았을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전투들중 하나라고 봐도 될거야.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평하길, 만약에 샤를이 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옥스포드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가르쳐지고 있었을테고 영국은 이슬람 신정국가의 통치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해.
그리고 또다른 서구의 역사학자인 레오폴드 본 랑케 는 이전투에서 이슬람제국이 승리했다면 프랑스,이탈리아, 라인강 인근 까지는 물론 라인강을 넘어서 독일 내부의 지역들인 프리슬란드, 색소니 지역까지 이슬람이 전파되어 아마 전 유럽의 무슬림화를 가져오고 빛나는 그리스-로마문화로부터 시작되는 유럽의 정체성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해.
세줄 요약
1 700년대 초반에 이슬람제국이 강력한 제국들 다때려눕히고 온 사방팔방 정복중이었음.
2 이슬람이 진출을 계속해서 프랑크왕국까지 멸망시키고 서유럽 이슬람화 시킬려함.
3 하지만 프랑크왕국 국왕이였던 샤를 마르텔 짱짱맨의 전술과 정예군들의 밀집대형진으로 이슬람기병대들 발라버리고 기독교 문명을 수호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