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은 한국의 운동권 독재체제에 대한 자유 민주주의적 극복을 주장해야 한다.
(2013년 글)
1. “아니, 反共이라니…”하는 美國人 ‘리버럴’님 보세요!
국가권력에 의한 獨裁도 문제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신봉하는 운동권 세력들의 문화독재도 큰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反보수”가 젊은 사회에 강조되는 것은, 학생운동 참여 경력의 정치 엘리트의 고의적 방조다. 젊은 사회에 다원성이 메말라가도 “국민교육 토대된 장년층에 비하면…”이란 논리로 계속 좌경화된 교육으로 육성되는 젊은층을 키워갔다. 어찌하여, 우리 사회는 젊은 세대 영역을 좌익에 독재적으로 안겨주는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을까?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서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기초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 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련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으로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릿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 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중략)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김구, 373-374쪽)
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가 바뀌게 된 직접적 요인은 美國의 개입이었다. 일정한 기간이 흘러서 ‘이익’과 ‘손해’를 결산하는 민주화 권력의 ‘손익계산서’를 따지게 된다면, 확실히 일상생활 공간에서 다양한 의견을 허락하는 것에는 권위주의 정권보다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일상 생활 수준에서 권위주의 정부보다, 민주주의 발전을 느끼게 되는 영역은 상당하다.
우리는 우리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에 대하여도 우리의 뜻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한국과 미국은 4반세기에 걸친 혈맹이며,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같은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민주체제가 공산체제에 비해 우월한 것은 사회의 다양한 활력과 개인의 창의가 보장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존중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적 폭압에 의해 획일성이 강요되고 다양성과 창의가 무시되고 인권과 자유가 유린된다면 우리는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방관계의 한쪽에서 그 국민이 독재의 억압에 짓눌리고 있고, 우방관계의 한쪽 정부가 독재권력을 지원하여 한국 민중의 탄압을 방조하는 결과로 되고 있을 지도 모르는 바로 여기에 한미관계의 미묘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 측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결과로 되어 국민에 대한 탄압과 독재를 미국이 추인하는 것으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김대중․김영삼, 33쪽)
우리는 이와 같은 원칙 위에서 독재권력에 결연히 맞서야 합니다. 현 독재권력은 입으로는 민주를 말하는 뒷전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의 강화와 영구화를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합을 말하고 속으로는 분열을 음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에서는 정의를 말하나 뒤로는 엄청난 불의와 부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장영자 사건이나 삼보증권 사건, 그리고 권력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와 부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폭력에 길들여져 있으며 유신정권 아래서 몸에 밴 잔인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대형 사건, 사고들의 폭력성이나 잔인성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 정권의 속성과 짙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거짓과 폭력으로 지탱하며 독선과 불의로 자신들의 특수한 이익만 도모합니다. 그들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비이성적 집단이며, 반민족 반민주 집단인 것입니다. 현 정권은 유신체제 하에서 민중을 탄압했던 중추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력의 장악과 유지에만 그 목적이 있을 뿐 나라의 안보도, 국민의 안전도, 나라의 위신과 민족의 존엄도 그들의 안중에는 없습니다. (김대중․김영삼, 32쪽)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면서 국가기구가 과잉돼 오히려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빈발했다. 군사정부는 反정부 행동에 대하여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민주적으로 처리해나가는 과정에 無能力했다. 군사정부를 둘러싼 6.25 전쟁을 참전한 경험의 군사엘리트들의 戰時 일처리 방식에 대한 유혹에 쉽게 굴복했다.
박정희가 이제 막 지하에서 싹을 틔우려는 노동운동을 제대로 다룰 줄 몰랐던 무능함이 그의 암살배경이 되었다.(도널드 커크, 107쪽)
군사정부를 둘러싼 핵심 엘리트들은 군인출신이다. 그들은 ‘인간존중’에는 약점이 있었고, ‘애국심’과 ‘업무추진력’에는 탁월했다. 군사정부는 공권력을 과잉되게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지, 內亂的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애국심의 발로가 나오는 상황에 의심을 하지 않는 장년층 보수도 상당히 많다. 이는 동시에 ‘권위주의 정부’를 대체하고 나온 세력이 ‘내란적 상황’을 감추려는 여론조작에 대한 풀뿌리 수준의 분노의식이 상당히 축적돼 가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대체로 미국인들은 정확한 현실반영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DJ의 정치적 열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을 보았다."(도널드 커크, 174쪽)
내란적 행위 의혹에 대한 심판을 통해서 법치주의를 세우려는 노력의 좌절에는, 1970년대부터 누적된 ‘美國 리버럴’세력이 韓國 종북세력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착각이 누적된 문화가 있음을 한국의 보수는 최근 깨닫기 시작했다.
DJ는 미국 선교사들이나 논객들과도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다.그 사람들이 미국 스타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품고 있었고, 처음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나쁜 박정희 정권의 월권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탓에 DJ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도널드 커크, 75쪽)
그러나 DJ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정치인과 학계 인물들로부터 이미 확보해 둔 동정과 지지를 바탕으로 한국의 지도자들과 정책들의 모든 병폐에 관한 분석의 글을 쓰면서, 예전 못지 않게 바삐 움직였다. 그는 미국 리버럴들이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민주적 지도자의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유명인사가 됨과 동시에 아직도 공산주의에 맞서 국가안보를 미군에 의존하고 있는 한 동맹국에서 벌어지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이끄는 부패한 한국정권과 미국의 오랜 관계에 점점 더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도널드 커크, 173쪽)
노무현 정부 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서 두 차례 제출됐다. 한마디로 ‘리버럴 운동’을 가장한 ‘종북주의 내란 운동’이 있으며, 그것이 부당하게 ‘리버럴’운동으로 오해되고 있으니, 재 조사해야 한다는 ‘개정안’의 취지다. 종북 운동 경력의 국회의원이 장악한 국회는 이를 무시했다. 아울러, 학생운동 경력의 엘리트들과 대학 동문 의식을 공유하는 보수 언론조차, 반론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런 배경에는 美國 리버럴 세력이 김대중의 주장을 額面價대로 믿어주는 것이 존재했다.
전두환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김대중을 재판정에 세우고 유죄를 입증하여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한국의 가장 용감한 반체제 인사라는 DJ의 명성을 염청나게 높여주었다,"(도널드 커크, 121쪽)
그러나 DJ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잘 알려진 공산주의자나 스파이들과도 협력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었다.(도널드 커크, 57쪽)
민주개혁가로서 김대중의 커리어는 전라도의 아들로서 인격이 형성되던 시기에 이승만의 고압적인 통치를 지켜본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도널드 커크, 170쪽)
김대중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또한 민주주의를 재판정에 세우는 것이기도 했다.(도널드 커크, 122쪽)
反共을 표방한 한국 권위주의 정부의 ‘자유주의 부족’을 변명하지 않는다. 인권 침해라는 팩트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시정하려는 미국 리버럴의 한국 정치 참여에 감사한다. 그런 참여가 없었다면, 애국심과 추진력만 출중하되 인간의 섬세함엔 약할 수 밖에 없는 군사엘리트 체제 안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주장은 미국 역사 배경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미국 리버럴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오해를 유발시키려는 김대중의 목적에 끌려감으로써,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도왔던 美國이 부지불식중에 정반대 상황을 지원할이지 모른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은 人種이 많고 세력도 다양해서 공산주의자의 결합이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 대치 상황에 남한에 공산혁명을 수출하는 것을 노동당 헌법에 담고 있는 한국 상황을, 미국 리버럴이 근본적으로 한국이 미국 같은 조건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군사정부 때 반공역사교과서는 국민에 공산주의와 연관된 지식 정보를 퍼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정부를 대체한 김대중 주변에 섰던 운동권 세력은, 공산주의 관련된 지식의 공산주의자의 입장만을 반복했다. 공산주의와 관련되데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던, 즉 전통적 ‘한미동맹파’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밝혀주는 정보는 문화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통제되고 있다. 그런 통제된 정보에 접한 국민의식만을 미국은 진정한 여론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의 정치 인생은 이승만 정부 부터가 아니라 상상 그 이상으로 ‘건국준비위원회’참여부터 시작되고 있다. 미국 리버럴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 일이 DJ에게 끼친 영향은 가혹했다. 그는 마포의 사저를 여러 번 방문한 나에게 언젠가 "이제 그 어느 신문도 나의 연설에 대해 보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나의 당에 스파이를 심어놓고 돈을 주고 있으며, 나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에 민주주의가 없다."(도널드 커크, 77쪽)
미국 리버럴은 좌파 언론은 일방적 좌파만을 보도하고, 보수 언론마저도 좌파에 유리한 정보만이 보도되며 좌파에 불편한 주제가 거의 보도되지 않는 것을 아는가? 한국 권위주의 정부의 ‘자유주의’ 지향의 일처리 부족 때문에, 모든 것을 ‘정적 견제’로 몰아가는 語法을 보수 국민 많은 수가 갑갑하고 황당해하는 것을 아는지. 미국 리버럴을 안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에 퍼진 엘리트가 그런 여론을 무시하며 일방통행하는 사회임을 아는지. 정말로, 자유주의적 일처리로 진정한 문제 해결을 하려는 것자체가 미국 리버럴이 리버럴을 주장하는 종북의 주장을 일방청취함으로 이행되지 못함을 아는지.
이 시기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부역자’딱지를 붙여 처벌하였을 뿐 아니라 정권의 정적을 ‘공산당’으로 몰아 탄압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대표적 예가 바로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생한 “국제공산당 사건”인데, 이 사건을 통해 이 시기 국가보안법의 적용양상을 엿볼 수 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6쪽)
유신체제는 단정 수립 이후 집권층이 내걸어 온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마저 전면 부정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자본주의와 반공 분단체제를 유지시키고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화를 압살하는 테러통치체제였다.
전국적으로 유신반대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박정권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긴급조치권을 9호까지 발동하여 모든 민주화세력을 탄압했음은 물론, 유신체제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이처럼 박정희 정권은 어느 정권보다도 많은 규제 입법을 만들어 정권안위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21쪽)
이러한 특징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성립과 유지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이처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인원이 늘어난 시기는 바로 전두환 정권의 최대 위기국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가보안법은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였음은 물론, 민주화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억압의 수단으로 적절하게 사용되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1980년대 초반 5.17내란에 대한 저항시기와 1981년 수치가 급상승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은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수많은 애국민주인사, 학생, 노동자들을 국가보안법이라는 무기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31쪽)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서 반대파를 탄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해놓고도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습니다. 언론을 장악해서 권력이 하고 싶은 말만 하게 만들고, 그 뒤에서 권력이 안겨주는 온갖 부정과 비리를 마음껏 저지릅니다. 그런 것이 권력의지라면 제게는 없는 것이 맞고,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문재인, 24쪽)
1956년 대선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은 아주 강력한 반공체제로 전환합니다. 독재정권이 쓸 수 있는 궁극의 카드를 끄집어낸 거죠.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반공이에요.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레드콤플렉스를 건드리면 못할 게 별로 없습니다. (최태성, 464-465쪽)
미국 리버럴은 다양성 주장이 벌어져도, 민간의 독재적 과잉 권력에 대한 부분은 논의가 없고 언제나 ‘체제 수호 세력’ 및 ‘체제 수호 기능’의 축소만이 논의에 오르는지를 아는지? 신자유주의적 작은 정부 기능으로 정부의 공보 기능이 대폭 축소돼서, 종북 언론들이 총 단결할 때 종북 진영의 프레임이 더 강할 수 밖에 없음을 아는지? 그런 상황에서도 통제된 여론 덕분에 ‘과거 향수’ 젖은 국민의 착각이 현실에 기반되지 않았음을 아는지?
정부와 언론은 소통과 긴장이라는 두 가지 관계를 통해서 균형감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합리적인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부는 언론에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언론을 통제하지 말고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언론 역시도 국민들의 목소리가 공정하고 왜곡되지 않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언론은 정부가 여론을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창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합리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문재인, 231쪽)
안 : 사실 보수, 진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이 두 진영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호 보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세력이고, 진보는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세력이죠. 양쪽이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도전과 발전의 기회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이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협력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누가 봐도 절실한 복지 확충, 경제 민주화 같은 과제에 대해서는 ‘좌파’의 딱지를 붙이며 색깔 공세를 펴는 비상식적 세력이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방해하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상식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소통과 합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철수, 90-91쪽)
理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국민과 한국현대사에 밝지 못한 미국 리버럴님은 ‘시민’은 자생적인 의미로 형성된 것을 말한다고 이해할 겁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시민은 종북정치를 대변하는 ‘고인 물’에 가까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종북이념을 섬기며 그런 전제로 보수를 들러리 세워야 한다는 발언이 글의 실제입니다. 미국 리버럴님은 아시는지? 미국 리버럴님과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구현되도, 리버럴을 빙자한 종북에는 만족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치가 시민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한다면, 우리 정치는 소수만의 특권 정치가 아니라 다수가 참여하는 상생과 통합의 정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문재인, 52쪽)
미국 리버럴님.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면, “좋은 왕 베쓰 이야기” 구절이 나옵니다. 좋은 왕은 좋기 때문에 좋고, 나쁜 왕은 나쁘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광주항쟁 강경진압 등 인명경시 권위주의 정치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참전 군인 전두환의 머릿속에서, 내란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 가치를 너무 도외시했구나 하는 생각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 리버럴님, 김대중이 좋기 때문에 좋고, 전두환이 나쁘기 때문에 나쁘다. “좋은 왕 베쓰 이야기” 수준으로 역사를 보시렵니까?
그의 부인이 전하는 것처럼, 전두환 정권이 DJ를 다루는 것을 보면 심지어 감옥에서조차 DJ는 조금의 기회만 주어져도 무슨 것이든 꾸밀 수 있는 인물이라는 두려움이 그대로 느껴졌다.(도널드 커크, 172쪽)
제정 국가보안법의 목적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은 내란행위 자체보다는 내란 유사의 목적을 가진 결사․집단의 구성과 가입 자체를 처벌하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졌다.이로써 특정 조직이 구체적 위법행위로 표출되지 않더라도 조직의 구성․가입만으로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치안유지법의 사상탄압 방식이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법은 당시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의 제거에 그 목적이 있었다.그 당시에 구형법 등 일본법제와 군정법령 등에 의하여 폭동과 반란에 대한 처벌이 충분히 가능하였음에도, 위기적 상황인식이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가져왔던 것이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6쪽)
공안사건의 역사는 곧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한민국 인권침해의 역사와 일치됩니다. 이는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그것이 빨치산 등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에 의한 국가의 보복행위에서 빚어진 것을 이해합니다. 빨치산도 결국은 대한민국 영토주권 안에 사는 데, 남북 공산세력이 연합하여 ‘대한민국 자유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상황에서 빚어진 悲劇에 대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존중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극복하려 나아가는 것은 정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리버럴을 주장하는 종북진영의 주장을 미국 리버럴님이 일방청취함으로써, 자유주의적으로 대한민국이 과거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절반의 진실을 감추는 데 미국이 일조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안사건 관계자들에 인권 침해 문제에 공권력에 사과가 있어도, 정작 그 발생원인인 ‘내란지향적 가치’에 대하여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사례는 아직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국 리버럴님의 ‘리버럴’가치로 사탕발림된 종북주의자의 말을 일방 편들면서 멀어지고 있지요. 아래 인용문은 4.3 관련한 정부의 입장과, 종북주의자의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는 문맹이 많았을 때이며 저학력 사회였기에,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극렬투쟁을 ‘힘’으로 막다가 많은 부작용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 다 같이 극복하는 ‘리버럴’ 가치인가, ‘리버럴’을 빙자한 종북혁명인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 결정 경계선으로 기독교세계관의 有無 문제일 것입니다.
포고문
3.1절에 발생한 불상사에 접종하여 정치, 산업 및 교육 각 기관의 활동이 마비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본관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제주도에 왔다. 첫째 제주도 동포 제위의 새영과 재산을 보호할 경비상 만전대책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기만적 선전과 파괴적 모략으로써 제주도의 사회를 무질서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빠지게 할 근본적 요소를 제지할 근본 방침도 수립되어 있다. 도청 책임자와 협의하여 제주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를, 폭동과 같은 무질서의 행동같이 조선 건국의 전도를 위험케 하는 것은 없다. 폭동의 빈발은 조선민족의 정치적 자치력과 도덕적 자율성의 결여함을 세계의 이목 앞에 폭로 시켜 우리의 위신과 신용을 추락시키는 것이다. 동포여! 반성 자중하여 일상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건국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경무부장 조병옥(이선교, 42쪽)
① 친애하는 경찰관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있는 경찰관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청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 뜨려야 한다.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란 놈을 돌려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 투쟁의 호응 궐기 하라!
② 시민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온르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민해방군은..... 극악 무도한 반동을 완전히 숙청함으로써 UN 조사위원단을 국외로 몰아내고 양군을 동시 철회시켜 외국의 간섭이 없는 남북통일의 자주적 민주주의 정권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
1. 인민해방군의 목적 달성을 전적으로 반항하고 또 반항하려는 극악반동분자는 엄벌에 처함.
1. 인민해방군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매국적인 단선 단정을 협력하고 또 극악반동을 협력하는 분자는 반동과 같이 취급함.
1. 친일파 민족반역 도배의 모략에 빠진 양심적인 경찰관 대청원은 급속히 반성하면 생명과 재산을 절대적으로 보장함.
1. 전 인민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인민해방군을 적극 협력하라.
우와 여히 전 인민에 고함
4283년 4월 10일 인민해방군 제 5연대, (이선교, 80-81쪽)
2. 동상이몽 독립운동, 핏줄 민족 자체의 독립 -(1)
3.1 운동 이후 외교독립운동 노선은 한계에 부닥친다. 내전을 종식한 소련공산당은 한반도에 ‘지국’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영향을 떨치려 한다. 많은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소련공산당의 영향을 의미있게 보았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급속히 보급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우선 3.1운동을 통하여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본질적 약점과 무능력이 드러나면서 그것이 그 이전에 가졌던 대중적 영향력과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민족 자결권과 같은 것에 환상적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에 기대어 외교적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들은 그 이전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한계를 절감,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갈구하게 되었고, 이때 들어온 사회주의는 이들의 요구에 맞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보급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또한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이에 고무된 전 세계의 혁명적 운동의 적극화를 들 수 있다.(김재용․이상경․오성호․하정일, 290쪽)
이때부터 독립운동은 ‘동상이몽’ 신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핏줄민족 자체’의 독립을 지향하는 것을 대변했지만, 소련공산당에 연계된 ‘사회주의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세력의 운동도 존재했다. 사회주의 민족의 해방은 공산당 전체주의 주도권의 확립을 의미하며, 이는 김일성 꼭두각시 공산정권 성립 때 실체가 드러났다. 사회주의 민족의 해방은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장악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와 일체 소통하지 않은 정부 옹호파가 아니라, 핏줄 민족 안에서 공산주의도 인정하는 ‘개조파’가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스탈린은 1929년 ‘민족문제와 레닌주의’를 집필했다. 여기에서 그는 민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역사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면서 프로레타리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사회가 서면 부르주아 민족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부르주아 민족을 토대로 하여 내용과 형식이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민족이 생성되고 발전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회주의 민족이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정신을 가진 인민이 있는 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인민들도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회에 맞게 비사회주의 인민들은 사상개조를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결론은 스탈린 1인 독재와 무자비한 숙청이었다.(이영진, 101쪽)
| 우파 민족주의 (핏줄) | 좌파 민족주의(사회주의) |
동상이몽 민족주의의 발생 | 3.1 운동 이후 외교독립노선의 한계 및 소련공산당의 확장정책 | |
기원 | 대한제국 독립협회 | 친러파 |
다른 이념 이해 방식 | 핏줄 민족 안에서 하나! | 사회주의 확장의 도우미 |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첨예한 대립은 한국문학사 해석에도 상반된 논리를 제기한다.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이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민족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민족운동이라 보지만 사회주의나 좌파적 입장에서는 이를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친일 타협 노선이라고 비난한다. (홍문표, 196쪽)
일본 유학생들은 일본을 통해서 수탈자를 보면서, 동시에 발전을 하지 못한 민족현실을 보았다. 이들은 귀국후에 민족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생에게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로서의 성격과 식민지 모국으로서의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일본은 민족국가 성립이라는 근대의 기반을 탈취한 적대적인 타자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창구기능을 한 모순적인 존재였다. 한말과 달리 고급관료의 진출이 차단된 식민지 체제 속에서, 귀국 후 이들 신지식인들은 교육이나 언론활동을 통해 서구사상을 소개하고 한국민족이 처한 새로운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개진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습득한 신지식, 신사상을 토대로 나름대로의 방안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대체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실력양성론과 유교사상이나 봉건적인 구관습을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사상과 가치관을 도입하고자 했던 구사상․구관습개혁론이었다. (김행숙, 36-37쪽)
식민지시대의 지성은 대체로 두 가지 조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구유림세력과 천도교․유교․기독교 계통의 종교인들이 합류한 민족주의 세력이고, 또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에 편승된 사회주의 세력이다. 그 두 세력은 처음에는 민족주의 세력내에 포함되어 있던 급진적인 투쟁론과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역량을 준비해야 한다는 온건한 준비론세력이 가시화된 것이다. 민족주의 세력은 안창호의 준비론을 그 사상적 근거로 삼아 민족의식을 개발하고, 지키고, 교육시키는 것을 그 일차적인 임무로 삼았으며, 사회주의 세력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무산자 혁명과 동일시하여 강경한 투쟁과 혁명을 주장한다.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의 교육․개조를 부르짖다가 조선주의의 확립으로 정착하여, 고전을 발굴하고, 한글운동을 일으키며, 시조를 부흥하려 한다. 당연한 결과로 농민의 문맹퇴치가 그 중요한 목표가 된다. (홍문표, 195쪽)
핏줄민족의 독립을 구현하는 운동(부르주아 민족운동)과, 소련 연방 안에 들어가며 무산계급의 국가 소련과 더불어 독립(?)을 꿈꾸는 운동(사회주의 민족 운동)은 공존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 존경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결국은 ‘감성적 공동체’관에 입각된 좌익에 대한 無知가 원인이 아니겠는가? 도산 안창호는 공산좌익을 민족공동체 구성원으로 아우르려 했지만, 마음은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비록 의견이 다르다 하더라도 우정과 존경에는 변함이 없으며 문명 국민의 본색일 것이다. 이리해서 우리나라에서 천만가지 사상과 의견이 대립하더라도 우정과 민족적 애정만은 하나일 수 있으니 그리하면 사상의 대립은 서로 연마․발달하는 자극이 될 수 있고, 서로의 존경과 애정은 민족통일의 묶는 실이 되어서 안으로는 아무러한 의견의 대립이 있더라도 외모나 전민족적 운명이 달린 일에 대해서는 혼연히 하나가 되어서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주요한, 494쪽)
반공주의 역사는 1930년대 한국기독교로 소급된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사회주의와 관계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영향을 떨치려는 사회주의자들의 한국교회에 대한 일방 매도와 비난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소련민족주의를 무산계급의 조국으로 신앙적으로 믿는다. 따라서 핏줄민족의 독립운동 이해관계와 상충된다. 193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마르크스 이념 따라 한국교회를 일방 비판하는 공산주의자들에 경계심을 가지게 됐고, 김일성 소련 위성정권 성립 때 한국교회 핍박 이후 강력한 반공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경고는, 그들이 혁명의 시기에 관하여 말할 때조차도 물산장려 덕분에 조선에 國富가 증진되면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혁명에 동조하는 사회심리가 약해져 이완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심리가 엿보인다는 자기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전상숙, 49쪽)
국민문학운동이 들고 나온 외래적인 요소에 대한 배척과 조선심, 조선혼, 조선적인 것에 대한 선양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가혹해지던 당시 문학에서 민족성을 고수하려는 진보적인 의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외래적인 요소를 배척하고 조선적인 것을 살림으로써 일제의 폭압에 의하여 점차 사라져 가는 민족의 넋을 살리고 민족문학을 지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국민문학운동의 이러한 긍정적이며 진보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제창자들이 민족적 일면만을 내세우면서 계급적인 것을 부정해 버린 것은 그들의 주장이 일면성과 제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무산대중의 요구와 리익을 반영한 프롤레타리아 문학 발전을 저해해 나서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류만 1, 14쪽)
교회연합정신은 요즘은 ‘진보교회’의 단골 메뉴처럼 비춰지지만, 교회연합정신은 한국교회초기부터 독립운동으로 ‘민족주의 계열’이 단결할 수 있는 기반 요소였다. 이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영향이 안창호 등 기독교 독립운동가등을 통해서 퍼져 내려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구한 말 한국 민족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안한 자리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민족적 일대 위기 속에서’ 받아 들였으므로 초창기부터 한국 기독교회는 그 신앙형태가 민족구원이라는 민족단위 위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민족의 개화(開化)로 작용하면서 민중 속에 자리를 잡으며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일제의 강점기동안 민족구원과 해방의 신앙으로 나타나면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였다.(송길섭, 1997: 5)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의 60, 70, 80년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참여의 모습을 보여 주게된다.(채종혁, 44쪽)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에큐메니칼 어원적 정리를 하고자 한다.
그 의미에 대하여 W.A. 비셔트 후프트는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정리를 7가지로 구분한다.(Malin von Elderen/이형기역, 1993: 214)
1)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세상과 관련된 혹은 이 뜻을 나타내는
2) 로마제국 전체와 관련된 혹은 이 뜻을 나타내는
3) 교회 전체와 관련된 혹은 이 뜻을 나타내는
4) 보편적 교회론적 유효성을 갖고 있는 것
5) 교회의 전 세계적인 선교적 확장과 관련된
6)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교회들 간의 또는 여러 교파들에 속한 기독교들 간의 관계와 하나됨에 관련된
7) 기독교의 하나됨에 대한 자각과 그 바램을 표현하는 내용 혹은 태도
1), 2)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그레코 - 로마 세계 안에서와 신약성경에서 발견된다. 3), 4)의 의미는 초기 몇 세기 동안의 교회생활 속에서 점차적으로 생성되었다. 5), 6), 7)의 의미는 현대에 와서 발전된 개념이다.(Malin von Elderen/이형기역, 1993: 215)(채종혁, 14쪽)
한국 기독교 민족 독립운동 전통은 ‘급진혁명주의’가 아니라 ‘점진주의’를 취하고 있다. 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무장투쟁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좌파 담론과 결정적인 차이점은, 소련 민족주의에 넋놓고 꼭두각시 짓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역량강화를 하여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고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주요한, 491쪽)
「한국민족전체를 개조하려면 그 부분의 각 개인을 개조하여야 하겠고, 각 개인을 다른 사람이 개조하여 줄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가 자기를 개조하여야 한다.」(주요한, 492쪽)
「경술국치 이후로 우리는 언제나 싸우자, 싸우자 했다. 그러나 싸울힘을 기르지 아니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싸우자는 소리뿐이요, 싸우는 힘이 있을 수는 없다.」
「우리 나라를 망케한 것은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다. 우리나라를 망케한 책임자가 누구냐? 그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에 손톱을 박게 하였으며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 팔기를 용서하였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나 자신이다.」(주요한, 495쪽)
①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②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게 할 것
③ 그힘으로 교육과 산업진흥에 전력하여 전 민족적 역량을 준비할 것
④ 그리하여 앞으로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기회를 놓치지 말것.
(중략)
①독립은 타력으로 될 것이 아니라 민족 자체가 독립할 자격이 있은 후에라야 성취되는 것이요, 자기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라야 영구히 지닐 수 있는 독립이다.
② 자력을 발휘하는 길은, 첫째로 국민각개가 분발 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없고 참된 인격과 기술적으로 지식이나 기능을 적어도 한가지씩 가진 유능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
③ 그러한 개인들이 뭉쳐서 신의를 지키고 협동할 줄 알고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
(주요한, 557-558쪽)
일제시대 시작된 기업운동은 그 자체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입각해서 움직였다. 기업으로 잘 움직여 민족의 富를 증진시키고, 그럼으로써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반면에 기업운동을 시작한 사람 대부분은 과거 ‘지주’였을 것이다. 마르크스 계급투쟁 선호자들에게 地主들에 점진주의 라는 이름하에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행위로 비난됐을 것이다.
도산이 행한 애국계몽운동에 관한 연설은 얼마나 감명이 깊었던지 그 연설을 메모하던 일본인 형사의 눈에서 눈물이 죽죽 흘러내리도록 할 정도였다. 그래서 누구나 조선인이면 그의 연설을 듣고 오직 민족구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결심하게 되었다. 남강 역시 그의 연설을 듣고 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고민과 갈등과 방황의 끝이 도산을 통해 찾아오게 되었고 이후 남강의 삶은 실천주의 그 자체였다. 이것은 인간의 끝이 바로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도산의 구국적 신앙이 바로 남강에게 그대로 세례되었다. 그리하여 남강은 도산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신민회의 가입, 태극서관의 설립, 도자기 회사 설립등 도산이 하는 모든 일에 남강은 항상 앞장서 있었다. 이러한 민족운동의 중추에는 항상 도산과 같은 걸출한 기독교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남강이 이 시기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김연상, 39쪽)
일제 시대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수탈에 맞싸운 공산주의자에 의한 것도 아니다. 기독교계가 물산장려운동 식산흥업운동 농촌재건운동 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사회저변을 완성해가면서 이뤄 나간 것이다. 서구 사회가 개항이 먼저 이루어져 산업화를 이룰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된 이후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亡國 상황을 극복하려는 독립운동의 실질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농촌운동은 서구 근대농법과 덴마크 농촌사업의 경험을 본격적으로 한국농촌에 도입하여 영농의 다각화와 과학화, 시장제도의 개선과 직업윤리의 각성 등을 추구했던 데서 살필 수 있듯이 서구식 산업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농촌재건운동이었다. 이같은 서구형 산업자본주의의 논리는 YMCA 농촌운동의 과정에 특히 뚜렷이 나타났다. 그들은 지주자본의 구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서 산업화를 통한 농촌 과잉인구의 도시 흡수를 전제로 한 유상매상․유상분배의 토지개혁 방안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농업생산과 유기적 관련을 갖는 농촌공업의 육성과 대자본에 맞서는 농민들의 자본형성 방안으로 신용조합의 조직에 주력하였다. 이에 비해 장로교 농촌운동은 거시적인 농촌재건의 마스터플랜보다는 농촌순회지도․문서지도․지도자양성사업 등을 통해 기독교 이상농촌을 건설해 나가는데 주력하였는데, 여기에는 장로회 총회 관할이라는 제약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계의 물산장려운동은 서울과 평양을 양대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본축적운동과 물산애용․근검절약의 의식개혁운동이라는 맥락에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서북지방의 물산장려운동은 금주금연․관혼상제의 간소화 등의 근검절약과 저축조합 등을 통한 소자본의 규합-자본축적운동에 중점이 있었다. 여기서의 운동은 특히 조만식과 안창호계의 기독교 민족주의자․상공인층의 주도하에 절제와 저축을 통해 축적한 자본을 공장을 설립하거나 토착자본가에게 융통해주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대한제국기 이래 식산흥업론의 연장선상에 서는 것인 동시에 막스 베버가 말하는 청교도정신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이승만계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울의 경우는 물산애용의 의식 개혁운동, 나아가 소비자 주권 캠페인으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역적 특성의 차이와 더불어 그들 각각의 자본주의 근대화론이 갖고 있는 뉘앙스의 차이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장규식, 41쪽)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들에게 ‘기독교’는 서구 도덕으로서 국민을 개화시켜 부강국민을 만들 문명이면서, 우리를 독립시켜줄 수 있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칭을 이루는 자유세계의 이념으로 다가왔다. 각 사람이 농촌 사회에서나 가능할 저열한 풍속 안에서 자본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절제 운동’의 바람이 불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기독교 믿음안에서 육체를 경건히 해야 한다는 종교도덕이 솟아나며, 그것을 통해서 실생활을 절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됐다. 한국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금연·금주’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독교인 자세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서부를 완전히 개척하게 되면서 국가 체제를 완성시키고, 1880년대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산업 자본주의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사상면에서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확산, 근대과학기술 발달, 자본주의 발달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미국 사회 전반에 ‘세속화(secularization)’가 나타났다. 인간이성의 점진적 진보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삶의 권위를 더 이상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관 즉, 청교도 정신에서 찾지 않게 된 것이다.
미국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이에 대응하여 청교도 정신과 개신교적 가치관을 옹호하고자 하였고 그것이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나타났다. 노예제 폐지와 금주를 포함하여 인간의 완전주의를이지 향한 대각성운동은 개신교의 복음주의적 가치를 다시 일깨움으로써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움직임이었다.
절제운동은 이러한 대각성운동에서 촉발되었는데, 부흥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완전론, 즉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통해 획득하는 그리스도의 ‘완전(perfect)'에 근거하여 전개되었다. 완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과 사회를 변혁시킴으로서 새천년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완전주의자들의 목표와 의도는 절제운동의 확장이었다. 그것은 당시 미국의 가장 시급한 이슈와 지역 정책으로 인식되었다. 종교적 지도자들의 영향 아래 도덕적이고 절대금주를 실행하는 남성들이 노동자로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시민으로서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윤은순, 10쪽)
청교도적,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적 신앙 전통 및 신학적 교리를 갖고 있었던 대부분의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과 윤리를 피선교지 조선인들에게 그대로 투영시키고자 했다. 감리교는 1897년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윤리적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가족윤리의 준수, 금욕과 절제, 성실한 노동 등의 빅토리아 윤리와 청교도 윤리가 핵심내용이었다.
선교사들은 거짓말, 도적질, 노름, 술마시기 등의 타락행위가 조선에 만연해 있다고 보고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윤은순, 13쪽)
“문화운동의 골자는 실력양성이며 실력양성 중에서 현대문명의 기초되는 자본주의적 경제력의 발달이 主眼이라”든가, “금일 吾人의 문화운동은 먼저 산업으로서 기초를 삼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는 등의 언설은 경제적 실력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력전쟁의 시대’가 가고 대신 ‘경제적 전쟁, 문화적 전쟁의 시대’가 온다고 판단한 조선 지식인들은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실력’을 기를 것을 주장하였다. “경제는 사회의 기초이며 인생의 제일 조건이고 문화 향상의 근본 토대”라는 진단 아래, “정치는 경제의 형식이오 경제는 정치의 실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눈에 보이는 경제력의 향상 및 성과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20년대 초반 서울을 시작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실력양성운동의 가장 선구적이고 대표적인 예이다. 물산장려운동은 내부적으로 다양한 노선이 존재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실력양성론에 근거하여 추진된 자본주의 경제건설 혹은 자본축적 운동이었다.(윤은순, 18쪽)
다음으로 안창호계열의 경우는 주로 기독교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초 캘비니즘(Calvinism)․청교도정신(Puritanism)의 경제윤리에 기초한 자본주의 정신의 전파자였다. 여기서 근면 절제의 노동윤리는 그들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근대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독점화와 불로소득층의 광범한 존재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건강성 상실은 이내 그들로 하여금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나서게 하였고, 그 결과 소장층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주의, 신자유주의 등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기독교사회주의는 이대위를 비롯해서 배민수 중심의 기독교농촌연구회 그룹에게서 그 실체를 찾을 수 있는 데, 일단 공상적 사회주의의 맥을 잇는 반(反) 유물론적 사회주의였다고 성격지울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오기영․한치진 등에게서 그 실체가 발견되는데, 사회정의의 지평에서 재해석한 자유주의였다. 즉 자본주의 경제독점과 이로 인한 인간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사회구성원 다수의 도덕적 자유의 실현을 위해 노동자보호입법․반독점입법 등과 같은 사회적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들 기독교사회주의, 신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1920년대 후반 안창호가 표방한 대공주의(大公主義)의 연장선상에 서는 흐름으로서 도산 좌파의 사상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도산 우파의 경우는 대체로 전통적 자유주의의 기반 위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깊이있는 검토가 필요하다.(장규식, 42쪽)
핏줄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물산장려운동에 동의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소수파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다수는 소련의 지도력에 복종하는 것과 상관없는 우리 민족의 순수한 독립가치를 외면했다. 종교적으로 습득된 공산주의적인 계급혁명이 핏줄민족의 독립보다 우선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당대 조선이 자본주의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에 있다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모두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이들은 당대 조선의 현실과 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던 물산장려운동에 대해 맑스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논쟁을 전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둘러싸고는 심한 견해 차이를 노정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수용하고 있던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 방식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박종린, 78-79쪽)
즉 주종건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현재 해야할 것은 국내 상해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생산력 증대에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계급투쟁을 전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위해 맑스의 『공산당선언』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또한 주종건은 나경석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견해에 과도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레닌과 트로츠키의 논리에 기반하여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가는 과도기의 무산계급독재정치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종린, 80-81쪽)
문학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신뢰한 文學을 민족주의 문학으로 구분한다.
동인지 문단에서 ‘민족’의 문제는 이광수처럼 ‘자수자양’을 통한 건전한 교양과 공동체적 구성원의 육성이라는 이념적 목표로 설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대고, 희생, 어둠, 죽음 등 내면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인식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결국 민족은 그들의 현실인식을 지배하는 중심적인 힘으로서 미적 가치관 생성의 모태가 된다. (김춘식, 160쪽)
동인지 문단에서 예술은 ‘생활의 심미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현실과 생활에 관여하고자 하는 성향을 보인다. 즉, 이들의 아비투스란 민족문화, 조선적인 것의 예술의 창조와 확립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춘식, 161쪽)
보수의 문화인식은 좌파가 도구적으로 단기간에 효과를 내는 측면을 하는 것에 반해서 대단히 장기적이자 근본적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으면서 형성하는 그런 지점을 근대적으로 가꾸어가자는 말이다. 보수는 계급투쟁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에 치중했다.
이 ‘문화운동’을 추동했던 논리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질 수 있다. 한편에서는 서구 자본주의가 모델이 되는 ‘문화적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력양성이 긴급하다는 진화론적 논리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민립대학 기성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등이 문화운동에 포섭될 수 있었던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진화론을 대신하여 세계는 정의․인도․평등․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개조되고 있고 또 개조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세계사 인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조 즉 신문화건설이 주장되고 있었다. 1920년대 초 각 신문․잡지에서는 개조라는 말은 시대적인 키워드이자 유행어였다.이 두가지 논리는 부분적으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상호보완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노동본위주의를 내세우면서 사회주의적 경향의 ‘개조’ ‘신문화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보다는 현대문명의 수립이라고 막연하게 표현되는 근대사회로의 개조를 지향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당시의 개조론은 반자본주의 보다는 반봉건 근대화 방향에서 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라는 기호는 문명의 의미로 작동했다. (김행숙, 40-41쪽)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작과 더불어 같이 한 민족주의 문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개조파로 바뀌면서 ‘절충파’의 모습을 띠지만, 궁극적으로 소련공산당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방향을 같이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절충파(염상섭·양주동)도 민족주의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과 같이 국민문학은 1925년 육당의 조선주의로 대두되어 1926년 가갸날 및 시조를 이론적 바탕으로 하여 1927년까지 밀고 나갔으나, 프로문학측의 맹공격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이론적 근거의 빈약으로 더 이상 전개해 나가지 못하고 일부는 절충주의 중간파로, 나머지는 이광수 중심의 민족주의 문학으로 분리되어진다. 그러나, 이 분리는 프로문학에 대항키 위한 방법론적인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절충파라 했지만 이들은 결국 민족주의자였고, 또 민족주의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김윤식, 115쪽)
특히 염상섭은 민족주의 문학과 프로문학의 통합론을 제창하므로서 주목을 끌었다.
“정신문화상으로보면 민족주의는 자민족의 개성에 중심을 둔 문화-국민문학의 수립을 기도하는 반면에 사회운동측면에서는 보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화-계급문학의 고조로서 전통적 관념의 파기 및 개조에 분망하게 된 것도 필연한 현재일 것이다. 그러한 이 두 경향이 피억압민족과 실제행동에서 양자가 합동일치함이 각자의 운동을 일층 권위있게 함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염상섭이 반전통문학의 관계(조선일보, 1927.1.15)에서 주장한데 동조해서 양주동은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은 그 제휴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했다.
“현단계의 우리는 조선민족인 동시에 무산계급이요, 무산계급인 동시에 조선민족이 아니냐…… 현단계 운동은 곧 광의로 보아 일종의 민족주의 운동이다,”(윤병로, 29-30쪽)
3. 동상이몽 독립운동 - 계급주의(사회주의 민족) ---(2)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 지점에도 ‘신간회’가 놓이지만, 계급주의 운동의 최고 지점에도 ‘신간회’가 놓인다. 신간회를 독립운동의 바탕으로 보는 민족주의 진영과 달리 계급주의 확장으로 민족주의 진영을 이용하는 명분으로 보았던 것이다.
방향전환 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민족단일당인 신간회를 지지하는 견해가 표면화되고, 급기야 신간회로 민족의 총 역량을 집결시키자는 본부의 선언이 나온다. 그러나 신간회를 지지하는 논의는 극히 형식적이다.
그것은 ‘약소민족의 계급성에 입각한 전민족적 단일당’(이북만, 27.11), 또는 ‘단체의 협동을 매개하는 조직’(한설야, 28.2) 정도로 표현될 뿐이다. 여전히 민족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없으며, 현시점에서 왜 민족단일당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도 없다. 다만 이들은 제국주의에의 저항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연합전선을 지지했거나, 민족 해방이라는 명분을 거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막연히 민……(족적 단)결을 운위함’이 ‘절충론에 떨어질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운동의 지장’을 가져올 것이란 부정적인 인식까지 내포되어 있다. (한설야, 28.2)
이들에게 민족은 주된 목적이 아니다. 김기진, 박영희 등 카프 초기 논객들이 감상적 논설을 통해 민족 현실을 거론하였지만, 실제 의도는 계급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의 프로문학론에서 민족 문제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신간회의 성립을 계기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민족은 계급문학운동의 부수적인 항목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표면상으로는 민족진영과의 협동전선을 내세웠지만, 카프의 실질적인 관심사는 계급 해방에 있었다.(이기인, 7쪽)
민족과 계급 문제는 결국 신간회와 직결되어 있다. 신간회의 조직 전말을 살피려면 필연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1920년 이후 결사 집회가 일어났고 그 중, 조선청년연합, 조선노동공제회 등 좌익적 경향을 대표하는 중요한 운동이었다. 이 사회주의 사상을 일제의 위정자들이 묵인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급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심하여 총독정치에 항거하였다. 그 주동인물은 박중화, 박이규, 장덕수, 오상근, 김철수, 김사국, 김약수, 유진희, 신일용, 김명식, 홍증식 등이었고, 1922년 이후 서울청년회, 화효회 등 좌익 사상이 거침없이 표면적 행동을 나타내어, 민족주의와 배타되기도 했지만 일제로서는 이것이 더욱 두럽게 생각되어 1925년 제1차 공산당사건, 1926년 6.10 만세사건등을 일으켜 탄압을 철저화했었다. 1927년, 반항운동이 지하화되자, 일제는 취체를 완화하는 정책으로 나왔고, 그 결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단일 전선이 가능해진 것이다. (김윤식, 111쪽)
‘신간회’는 카프의 투쟁 노선과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민족 협동전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계급투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 운동의 실천을 강조’한 정우회 선언에서 알수 있듯이,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투쟁 성격은 단순하지 않다. 사회운동권의 영향 하에 있었던 카프도 민족 협동전선을 놓고 미묘한 갈등을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음에도 논쟁의 본격적인 주제로 부각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카프의 투쟁 성격을 짐작케 하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카프 논객들은 대부분 협동전선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신간회와 카프의 위상에 대해서는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지만, 카프의 공식 입장은 신간회를 민족단일당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향전환기의 카프가 처음부터 협동전선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이기인, 5쪽)
물론, 계급주의 이념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보탬이 될 줄 알고 공산당에 입당한 이들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회주의의 흐름을 한국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1919-1921년 사이는 점진 및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의 전진과 민족주의 운동안에서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출현한 시기이다.1922-1923년 사이는 민족주의 운동 안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과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 분파의 발생시기였으며, 1924-1925년 사이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 대립의 노골화 및 사회주의자들의 전선통일을 위한 조직 정비시기였다. 한국에 처음 전파된 것은 3.1운동 이후, 일본에 유학했던 학생층을 통해서였다.
사회주의 사상이 당시 우리나라 사상계에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첫째, 청원형식의 독립운동으로는 독립의 성위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는 젊은 층이 많았고 그에 대한 대안이 요구되었고,둘째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내건 ‘현실타파의 반항적 개혁주의로서 입장’이 당시의 절망적인 민중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임시정부 내의 일부 민족주의자들까지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이는 볼셰비키 사상 자체에 공명해서가 아니라, 임시정부가 소련이나 코민테른 이외에는 지원받을 수 있는 뚜렷한 외국세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프로문학은 이러한 사회적,사상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시작하였다.(호배배, 7쪽)
카프문학은 조선공산당 운동 ML당계와 밀접하다. 민족주의 문학이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의 선지자적 감정에 치우친다면, 계급주의 문학은 계급혁명의식을 담는 공산당성을 민중에게 연결하는 도구적 관점에 치우친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ML당계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을 이용하였다. 카프는 그 결성 초기부터 조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다. 조공의 입장에서보면 카프는 조공의 외곽조직이었고 예술활동을 통해서 계급운동을 하였으므로 합법활동의 영역이 일반 사회운동보다는 컸다. 그러므로 조공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조공이 붕괴하는 과정에서도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1928년 조공이 붕괴된 후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이 소멸된 자리에서 그나마 남은 카프가 조공재건운동의 근거로 전화됐던 것이며 이는 ML당계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현주, 111쪽)
카프는 라프와 영향관계가 있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공산당에 혁명을 지원하는 부서가 ‘라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프는 조선공산당 ML당의 선전도구로 신간회 운동등을 하면서, 일본 프로문학을 참고 자료로 사용했다.
김준엽․김창순은 코민테른이란 레닌정권의 흥분된 희망 속에서 결성되어 세계 적화를 수행하기 위항 볼세비키 강령에 찬동하려는 사람을 규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초기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경우, 코민테른의 그러한 세계 적화혁명 공작에 일부 민족주의운동가들이 깊숙이 끌려 들어가 민족독립운동에 참혹한 혼란이 일어났다고 본다. 진덕규도 코민테른이 한국 민족운동에 계급적 분파주의를 강요했다면서 코민테른 해악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 민족운동은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코민테른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민족운동의 실질적 주도권은 보수 우파의 영향 밑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에서 구체적인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고준석은 코민테른은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이론으로 무장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조선노동계급에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가르쳤고 조선공산당의 전략 전술을 수립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코민테른이 한 역할을 긍정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코민테른이 다 올바랐다고 하지는 않는다. 고준석은 코민테른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좌주의적이면서 종파주의적 테제들을 통해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특수성을 무시했으며 민족해방투쟁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혔다고 한다. 서중석은 코민테른이 실패를 거듭하는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주었지만, 그것은 아주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것이 많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딱히 코민테른 긍정론에 포함시키기 어려울 만큼 구체적인 부분에서 코민테른의 전략․전술을 비판한 글도 많다.
(최규진, 168-169쪽)
[코민테른]→[조선공산당 ML당]→[카프]→[민중]의 순서로 수직적 영향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 이와는 달리, 한설야는 우직하게도 정면으로 이북만을 공격하였으며 그 방법은 유물변증법이라는 무기였으며, 그 무기의 사용법은 누가 얼마나 정세파악에 정확했는가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누가 진자 당원이냐를 문제삼아야 되는 국면이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1928) 그리고 12월 테제를 알고 있는 이론가와 그렇지 못한 논자 사이의 싸움은 실상 진정한 싸움일 수 없는 것이다.(김윤식 1, 142쪽)
(2) 신경향파 문학담론은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적인 기성 문단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진정한 문학을 새롭게 창출하고자 하는 기획의 실천적 성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문단과 그 속에서 활동하는 문인들 및 그들의 작품 세계를 비판하는 글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상준, 279쪽)
보수가 한국 진보세력을 비판할 때 ‘꼭두각시’ ‘괴뢰’ ‘종북’ 등으로 어떤 권력에 권위적이며 수직적으로 붙은 상태를 비판한다. 그것은 이런 역사적 기원에 있다. 부르주아적인 기성문단이라고 말할 때, 이는 ‘非공산당상태’를 의미한다. 공산당 상태는 “프롤레타리아적”이라 표현되기 때문이다. 소련을 업고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지향성을 믿는 문학을 덮어 나간 것이다.(2) 아울러, 소련을 정통하게 업었다면, 국내 비평논쟁에서도 승리가 주어졌다.(1) 이런 의식은 사대주의 小中華意識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초기 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은 동맹을 말하면서도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치와 조직에서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또 민족해방운동을 무조건 지지하면서도 민족주의 운동을 붉은 색으로 칠하려는 것을 단호히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려는 민족주의 세력과 일시적으로 동맹하여 공동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아직 그들의 영향 밑에 잇는 대중에게 공산주의 정치의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입증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을 제기하였다. 나아가 초기 코민테른 전략 속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성공하려면 그것이 노동자권력을 획득하려는 국제적 투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미 안에 들어 있었다. 초기 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은 국제 노동 계급과 연대하는 가운데 식민지 민족주의의 영향을 가장 적게 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하려는 것이었다. (최규진, 183쪽)
공산주의가 信仰으로 다가올 때 눈앞에선 현실은 감춰진다. 식민지 민족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의 독립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당장의 독립보다 소련 공산민족을 위하는 게 먼저라고 교육되더라도, 일본제국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은 소련 속국에도 넘어서야 한다는 진실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카프와 좌련은 전개한 문학 논쟁이 유사하다. 카프와 좌련의 발전과정 중에 다른 계급진영의 프로문학을 반대하는 각종 문학 이론과 창작의 방법을 위해서는 커다란 공헌이 아닐 수 없었다. 동시에 카프와 좌련 내부에서도 많은 문제에 대하여 심도 있는 토론과 논쟁을 진행하였다. 카프는 “내용·형식의 논쟁”,“문예대중화 논쟁”등을 전개하였고 좌련도 성립된 후 “민족주의파와의 문학 논쟁”,“자유인과 제3중인”과 “문예대중화 논쟁”등 문학논쟁을 진행하였으며 이런 논쟁을 통하여 문학의 계급성을 명확히 하였고 양국 프로문학의 발전에 공헌을 하였다. 한국과 중국 모두 프로문학은 여러 가지 비프로문학파 문예사상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은 모두 일본과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1925년 소련은 “라프”를 성립하였고 1928년 일본은 “나프”를 성립하였으며 이는 카프와 좌련의 성립에 특정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과 중국의 프로문학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프로문학운동 조류의 일부분이었다. 불가피하게 소련 라프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지역관계로 인하여 소련의 프로문학의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 한국과 중국에 전파되어 “라프”문학의 영향을 받았다.(호배배, 42-43쪽)
시야를 넓혀서 볼 때 좌파문학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세계사적인 동시성의 측면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전의 여러 문학 사조 혹은 기획들이 서구사에 있어서는 과거적인 것을 뒤늦게 수입한 것인 반면, 1920년대의 좌파 문학은 그러한 시대적 지체가 거의 없다는 특징을 보인다. 시기적으로 뒤늦었으며 동시에 구조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근대화 곧 자본주의화 과정 속에서, 세계 차원의 시대적인 조류에 동승한 것이 바로 좌파 문학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소련의 RAPP에서 일본의 NAPF를 거쳐 식민지 소선의 KAPF로 즉각 이어지는 맥락은, 이론의 수입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적 조류를 동시에 호홉했다는 점에서 새삼 고려해볼만한 대목이라 하겠다. 세계 체제의 기본 문제를 현재 공간화하여 수행된 문학행위로서 보편사 차원의 함의를 짙게 띠고 그럼으로써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지닐 수도 있는 까닭이다. (박상준, 149쪽)
이 시대의 문학이 사회운동과 유달리 관련되어 있음이 강조되어야 하며, 동시에 일본 문학과의 관련도 밀접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사상이 일본에서 거의 직수입되었기 때무닝다. 특히 프로문학은 흔히 국제적 추수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동경문단의 지부적인 혐의가 농후한 것이다. 고쳐 말하면, KAPF 문학은 소련문학과는 무관한 채 거의 전부가 일본 프로문학과의 관련에서 명멸해 간 것이다. (김윤식, 13-14쪽)
1927년 무렵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의식을 담은 작품이 처음(선구적이지만 동시에 서툴다는 것을 모두 함의함)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26년 말-1927년 초에 한국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잘 알려진 세 개의 논쟁, 즉 내용-형식 논쟁, 아나키스트와의 논쟁, 방향전환 논쟁을 치부하게 된다. 이 세 논쟁을 지나며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당파성을 자신의 핵심적인 미학적 범주로 정초하게 된다. 문예운동의 당파성이란 요컨대 “무산계급운동의 일 부문인 무산 계급 예술운동”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변혁운동 일반-예술운동의 관계는 코민테른-조선공산당, 소련이론-조선이론의 구도로 쉽게 이월 중첩될 것이다. 1927년 이후 소련 문예이론의 수입과 正典化가 본격화되는 데는 이 같은 사정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본격화 역시 이 맥락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문제를 생각할 적에 현실적으로 가장 쉽게 떠올릴 만한 것이 아마도 한일간 노동자계급의 연대일 것이다. (유문선, 62-63쪽)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서 국제주의가 가장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이른바 문예운동의 볼세비키화가 주창되던 1931,2년 경이다. 볼세비키화론의 요체가 당파성의 고창임을 생각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볼세비키화론의 특색과 수준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권환의 「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중외일보, 1930.9.1-16)에 나오는 그 유명한 ‘10개 제재’항목에도 국제주의는 거론되고 있다. (유문선, 64쪽)
소련공산당은 자신들에 말 잘 듣는 이를 선호했다. 따라서, 계급주의 운동보다는 왠지 민족주의 운동 냄새가 나는 신간회운동의 민족주의적 단합을 깨뜨리는 열혈 소련 충성파를 선호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독립운동 입장으로 보면 어이없는 꼭두각시 놀음인 것이다. 카프 소장파는 그렇게 사실상의 의미로 소련에 충성을 주장하고 독립운동에 등을 돌림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ML 당계의 신간회 해소론은 신간회 조직 내의 대중을 민족부르조아지의 타협적 영향력에서 금후의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으로 이는 구체적으로 공산당의 계급적 지도 아래 민족 부르조아지가 배제된 3계급 연합의 반제협동전선을 전개하기 위한 첫단계의 실천적 전략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반제협동전선론이 노·농운동의 고양이라는 나름대로의 뚜렷한 인식에 입각하여 제기되었던 것이었다는 점에서 신간회 해소의 가결은 ML당계로서는 운동론의 일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이현주, 113쪽)
1931년 전후한 제 2차 방향전환의 외적 자극은 아마도 신간회 해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내적 자극은 팔봉이 주장하고 나선 프로문학 대중화에 대한 극좌적 소장파의 안티테제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화란 객관적 정세의 어려움에 의한 프로문학의 구제책으로 『먼저 목적을 교묘히 달하는 수단으로 재미있게 평이하게 대중이 친할 만큼』오락적 요소를 내포해야 한다는데, 이러한 타협안을 거부한 극좌파는 전투하는 계급의식으로 대결한다. 전위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와 당의 문학의 두멍제로 요약하는 극좌파는 동경에서 돌아온 안막, 김효식(남천), 임인식(화), 권환 등이 중심분자였다. 이에 대한 舊 KAPF 측은 침묵을 지켰을 뿐이니, 이 때부터 KAPF의 실권은 임화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김윤식, 33쪽)
4. 좌·우연합의 동상이몽 : 한 핏줄인데 對 계급혁명에 쓸모
사회주의 운동에서 핵심적인 전술 중의 하나인 통일전선은 식민지에서는 민족통일전선으로 구체화되며, 또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결합하는 민족통일전선에서 민족문제가 전형적으로 드러난다.통전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항일, 혹은 反帝라는 절대적 명제 아래 통전을 당연히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인식 속에서 혁명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통합/분리의 과정, 코민테른과 관련한 사회주의자의 인식과 실천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배성준, 377쪽)
신간회 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외형을 띤다. 공산주의자와 합작은 한 핏줄이니 합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 민족주의자를 도구적으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주의(우익 보수) | 공산주의(종북진보) |
*. 한 핏줄인데(공산주의자와 연합) *. 소련이 독립 도와준다니까 | *. 민족주의는 계급혁명 위해 이용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소련공산당 도구 |
신간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와 코민테른을 이야기하는 한, 대한독립은 부차적이며 세계 공산혁명이 주된 이슈가 된다. 반면에 신간회 자체를 인정하면서 공산주의자 참여를 적는 민족주의 역사학도 가능할 것이다.
신간회 창립에는 민족독립을 이루려면 서로 행동을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문제는 민족 독립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 그리고 운동 수준이 서로 다른 데, 어떻게 투쟁을 할 것인가에 있다. 이때 제기되는 것이 바로 민족통일전선이다. 그 통일전선의 근본 문제를 일찍부터 고민했던 쪽은 코민테른이었다. 코민테른의 영향을 빼놓고는 신간회가 창립된 이론적 배경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간회 창립에 이르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의 배경을 코민테른 또는 福本主義․山川主義 등의 외인론으로 환원하거나 주체적 요소라는 내인론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국내에서 민족 통일전선전술을 받아들일만한 현실적 이론적 조건들이 마련된 상태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늘 제기되어 왔던 민족통일전전전술이 조선에서 실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규진, 190쪽)
신간회를 둘러싸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전략․전술 논쟁이 아주 복잡하게 벌어진다. 이러한 논쟁 속에 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이 얼만큼 스며들고 있었는가. 1925-1927년 사이에 코민테른이 중국에 제시한 민족통일전선의 문제점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되짚어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 논쟁의 핵심을 나름대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간회와 조선공산당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둘째, 정우회 선언에서 말하는 정치투쟁의 내용은 무엇이고 식민지 조선에서 정치투쟁과 경제 투쟁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이다. 자치운동이나 합법운동을 둘러싼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와 연결 지어 정치투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이때 정우회가 맞서고 있던 전진회가 정우회 선언의 정치투쟁이 자치운동까지 포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신간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는 무엇이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주장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가., 또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넷째, 합법단체인 신간회는 민족해방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등이다. (최규진, 192-193쪽)
통일전선에 있어서 민중계급헤게모니는 중요하다. 즉, 민중계급의식은 공산당 당성과 수렴되는 대중의식을 말하며, 공산당 당 중심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민중민주 민족운동에서도 민중계급이란 표현이 쓰였고, 이는 당연히 통일전선 개념으로서의 당성을 의미한다. 1980년대 민중민주 운동은 1980년대 운동사에 있어서의 통일전선 조직을 의미한다. 아울러,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민중운동’은 곧 통일전선조직과 연결된 운동이었다. 1960년대 민중운동은 그 시대의 통일전선조직, 70년대의 민중운동은 그 시대의 통일전선조직, 80년대의 민중운동은 그 시대의 통일전선조직과 수렴됐다는 말이다.
백진기는 김명인의 이 대중성과 지도성 개념에 대해 각각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주도성, 즉 변혁 주체로서의 여러 민중들의 통일전선 내지는 그것을 예비하는 계급 연합전선의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그가 말하는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주도성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서로 매개․규정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성격과 여기에 기초한 변혁과제에 입각하여 변혁 주체의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개념이다. 요건대 그가 말하는 민중적 민족문학의 민중적이란 통일전선의 문학적 반영으로서 노동자 계급 당파성이 지도하는 민중성과 주도성을 규정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민족․·민중문학은 변혁주체의 통일전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여 그것을 예비하는 연합전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갑, 167쪽)
이데올로기영역에 통전을 놓을 때, 통전의 이데올로기적 공간과 통전의 주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통전의 이데올로기적 공간이란 지배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의 틈을 뚫고서, 혹은 지배이데올로기와 타협하면서 통전의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제기이며, 이러한 접근은 통전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통전의 주체란 중앙의 지도부, 혹은 몇몇 명망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간회 및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하부 혹은 지부에 참가하는 대중을 말하며, 이러한 대중이 어떻게 통전의 주체로 형성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중심적 과제로 떠오른다. 대중은 신간회를,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대중은 신간회를,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배성준, 379쪽)
1980년대까지 우리의 민족문학론은 백낙청의 논의에서 하나의 귀결을 마련한다. 1980년대 들어 그는 분단 극복과 우리 내부의 민주화 과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다.그리하여 시종일관 민족문학론의 시각에서 민중문학론을 이해한다. (중략) 그가 1980년대 급진운동의 흐름들, 예컨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그리고 그 둘을 통일하고자 했던 NDR(민족민주혁명)과 거리를 둔 것도 ‘자주화’와 ‘민주화’ 그리고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이 둘을 모두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학과 운동, 그리고 지식인과 민중의 시각을 동시에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이상갑, 196-197쪽)
통일전선은 공산당 중심이 맞다. 통일전선에서 민중중심이라 하는 것은 공산당 중심을 맺어지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머문다. 그러나 강만길은 좌익에게 상식인 그 내용을 분명하게 기록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을 읽는 일반인들의 참여가 없었기 때문이다. 좌파는 통일운동을 불필요하게 과잉 관념적이고 과잉 현학적으로 포장했다. 강만길은 통일전선이 공산당 중심이라고 단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글의 뜻을 알 사람만 알라는 입장인 것이다. 어쩌면, ‘한 핏줄인데 공산주의도 품어야 한다’는 일제시대 민족주의 감정을 활용하여 종북주의자들이 활동반경을 넓히기 위한 술수를 위해서 일 수도 있다. 종북주의 역사학자 강만길씨의 주장은 사실 묘사 수준과 독자에게 이뤄지는 효과면에서도, 두 겹으로 통일전선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만길은 1970년대 후반에 분단사학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통일지향의 관점을 제시했다. 그 뒤 좌우익 사이의 통일전선운동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민족해방운동사야말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극복된 온전한 민족해방운동사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의 전체과정을 통해 추진된 통일전선운동은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면서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 어느 한쪽도 독자적으로는 민족해방운동의 추진주체가 될수 없는 역사적 조건 아래서 그 주체는 반일 노선에 선 각 계급들의 연합에 의해 성립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즉, “민중을 주체로 하는 민족해방운동은 조선의 경우 계급적 측면에서는 노농계급과 반일적 지식인 및 소자산계급 연합세력의 운동이며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는 좌익전선과 비타협적 우익전선과의 통일전선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최규진, 173쪽)
통일전선 운동에선 흔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목적 수행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것은 일반사회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공산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운동에서는 늘 정당화돼 왔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공산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 국한됐을 뿐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의 영향력 속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사민당 이래 민족국가를 경계로 하는 민족적 당이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의 목표가 국가권력의 장악에 두어짐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국가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다. 제 2인터내셔날 내부의 분열도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독일 사민당의 경우 민족국가의 건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군국주의와 전쟁 등 주요한 쟁점들이 민족주의의 영향력 하에 놓여 졌다. 특히 독일 사민당의 민족주의화, 조국과 애국주의로의 경사는 1914년 8월 정시공채에 동의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통일전선은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와의 결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술이다. 코민테른에서 통일전선에 대한 토론과 실천은 통일전선을 사회주의자의 전략 전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게 만들었다.(배성준, 367쪽)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관계에 대해서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중에 어느 것이 기본적이며, 어느 것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가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과제라거나 민족해방이 먼저 이루어지고 계급해방은 민족해방 이후에 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방식으로 정리되었지만 정세에 다라 강조점은 달라졌다. 민족유일당 결성이나 인민전선의 수용 등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필요한 시기에는 민족해방이 우선시되거나 강조되었으며, 민족주의에 대한 타격이 필요한 시기에는 계급해방이 우선시되거나 강조되었다. 통전 문제는 코민테른의 기조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동요가 국내 사회주의 운동에 그대로 파급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20년대 전반 이후 코민테른 2차 대회와 제4차대회의 반제통일전선이 수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코민테른 5차 대회의 반제통일전선의 영향 아래 조선공산당의 사회주의자들은 국민당형태의 혁명적 국민정당으로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제6차 대회의 사회파시즘론을 통하여 사회민주주의, 민족개량주의에 대한 타격이 강조되면서 신간회의 해소, 대중운동의 좌경화가 뒤를 이었으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인민전선전술은 다시 민족주의를 포함한 광범한 반일전선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물론 코민테른의 테제가 수용되는 조건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겠지만 각 시기의 분위기로 볼 때 코민테른의 주류적 인식과 실천이 그대로 파급되었다. (배성준, 370-371쪽)
5. 소통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이념문제 극복의 길은 없을까?
“미국 리버럴님” 리버럴을 주장하는 종북주의자들의 면모는 민족해방세력의 확장을 위해서, 권위주의 정권의 보편민주주의 미흡에 불만느낀 이들을 이용하려는 통일전선전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단적인 예가 87년 6월 항쟁입니다. 참여자 다수는 민정당의 보편적 민주주의 미흡에 불만이지, 종북세력의 이념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도 동의한 적 없는데 지금의 역사교육은 동의한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5.1. 어째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수정헌법 취지와 정반대편인 ‘국가보안법’이 필요한가
(1) 미국은 국가 형성보다 개항이 먼저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갖춰진 이후에 國家가 형성됐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총기휴대’자유는 미국 부르주아 계급 형성의 뿌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 부자들의 운명은 국가와 무관했습니다. 반면에, 아시아 사회에서는 보수주의자가 ‘총기휴대 자유’를 부르짖는 것을 납득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시아 사회는 대부분 개항이 국가형성보다 늦습니다. 부르주아 계급 형성 이전에 서구에 개항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 사회 부자들은 국가와 동반하는 운명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것은 대단히 상식적인 것에 속합니다. 그러나, 미국 리버럴님에 아시아 엘리트들이 반론을 하지 않았음은, 대단히 아시아적 가치로 미국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유지하는 측면에서의 ‘전략적 침묵’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기에‘)
(2) 미국은 국가 내에 공산혁명을 수출하는 상황과 항구적으로 맞닥들이지 않았습니다.
설사, 공산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역적 국지적인 일로 일어날 수 밖에 없고, 다양한 인종과 민족과 계급, 계층을 견제와 균형으로 질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항구적으로 공산혁명을 수출한다는 북한정권과 맞닥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대단히 동질적인 사회입니다. 민간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질서를 찾는 것이 대단히 난감해집니다.
(3) 한국 국민 대다수는 6.25 전쟁을 통해서 ‘빨치산’에 대거 양민학살된 체험이 세대 전승돼 왔습니다. 물론, 한국 좌파는 그때에서 달라졌지만 6.25 전쟁기의 빨치산 양민학살에 대한 공포는 빨치산 정서를 사실상 잇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이도 많습니다. 따라서, 좌파에 상대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위험을 감수하는 소수의 보수 운동가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미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싸운다해도 국가를 어떻게 이끄느냐의 문제이지, 제퍼슨과 링컨의 역사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 쓰자는 차원은 아닙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핏줄 민족 독립’이란 입장에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입장을 취했고, 결코 이데올로기에서 편향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정권이 권력을 잡아야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져서 안되는 것이 달라지지 않도록 하는 법의 필요성이, 한국사회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5.2. 미국 리버럴님은, 종북세력의 ‘리버럴’로 포장한 종북행보에 속았습니다.
미국 리버럴님은 리버럴을 자처하는 종북에 속았습니다. 한국 종북세력은 권위주의 행보에 반발의식으로 ‘리버럴’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의식을 보인 게 아닙니다. 김대중의 정치의식은 이승만 정권 과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방공간 건국준비위원회 가입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창작과 비평』은 대한민국 내에서 인기 있는 잡지입니다. 그 잡지의 책임자 백낙청은 6.15와 10.4 에 2인자로 참여했습니다. 그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이 ‘남로당 문화조직’의 후예라고 최근 좌익 학자들이 밝혔습니다.
운동권 세력은 암호(code)정치를 했습니다. 학술문서로 사실을 표현해도 讀解力이 되는 사람만 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백낙청이 남로당 문화조직의 후예라고 밝히기는 오래전부터 밝힌 것이지요. 많은 국민은 한글로 쓰여 있어도 학문언어 深層으로 쓰는 것을 해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평단에서 회자되는 민족문학론이 60-70년대에 <창비>에 의해 주도적으로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창비>의 민족문학론을 해방 직후 조선문학건설본부가 주창했던 민족문학론과 계보학적으로 직접 연결시키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리얼리즘론은 보기 드물게 근대문학이 자리잡음과 동시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사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는 거대한 이론적 산맥의 하나이다. 저 1920-1930년대를 가로질러, 다시 해방 직후, 그리고 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형체로 이어져 왔다.…리얼리즘론 역시 그 추이를 살펴보면 단절의 시기가 있다. 1950년대가 바로 그것으로, 이 시기는 남북 분단의 고착화로 특징된다. 이에 따라 문학 주체들 이 남북으로 양분되면서 남한에서도 일종의 공백상태․단층상태가 나타난 것이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직후까지의 리얼리즘론이 분명한 연속선상을 이루고 자기 전개를 이루어 왔다면, 70년대 이후 본격화된 리얼리즘론 역시 60년대 이후의 문학적 실천 속에서 싹터 나와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민족문학에 대한 인식(민족문학론)은, 1920년대의 다소 복고주의적․정신주의적 경향의 민족 ‘주의’문학론을 거쳐, 해방 직후 임화등에 의해 최초의 논리적인 문학이념으로서의 정식화가 이루어진 후, 민족의 분단과 함께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잠복했다가 70년대의 진보적인 문학운동에 의해 새롭게 부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보적인 문학운동의 이념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두 편의 인용문은 각각 임규찬과 신승엽이 민족문학론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의 부분이다. 임규찬이 <창비>의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신승엽은 민족의 범주를 통한 주체화가 문학 창조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창비>의 입장에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현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그러나 민족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족문학론의 계보를 카프(1920-1930년대)-문학건설본부(40년대)-창비(60년대 이후)로 설정하는 데에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고봉준, 271-272쪽)
그런데 지금까지 1960년대의 진보적 지성의 흐름에 대한 논의의 주류 구도 속에서 ‘한양’은 암묵적으로 배제되어온 게 사실이다. 우선 사회적 실천의 진보의 전통속에서 『사상계』→『창작과 비평』으로 진보 매체의 맥락의 가치를 자연스레 이월시킨다. 뿐만 아니라 진보적 문학의 주요 담론인 민족문학(론)의 계보를, 카프(식민지시대)→문학건설본부(해방공간)→『창작과 비평』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한결 같이 1960년대 진보적 지성과 실천의 큰 수확이자 1960년대 이후 펼쳐질 진보적 지식사회의 문화적 진지로서 『창작과 비평』의 존재를 자리매김하려 한다. (고명철, 74쪽)
반공 권위주의 정치는 공산주의 담론을 배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편의 획일주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운동권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 배경에는 미국 선진국처럼 공산주의 이념도 규제 없이 허락할 수 있어야 된다는 그들의 선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제도권에 좌파를 허락할 때, 미국 리버럴님의 나라처럼 선진국이 되는 과정인 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1인 군사독재에 의한 반공담론으로 문화의 획일화보다, 다수의 인문학 재능을 가진 좌편향 엘리트들이 지능적으로 보수 담론이 한국 문화에서 비중이 커지지 못하게 하며 좌파만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한편 이 같은 보수주의적-반공적 시각과는 정반대 입장으로서, 북한의 공식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민족해방적-혁명적 시각이 있다. 이 시각에 따르면, 북로당은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지역에서 반제반봉건혁명을 수행하고 미제에 의한 남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에 대항하여 전조선 정권으로서 북한 정권 수립을 주도했던 전위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된다.
이상 보수주의적-반공적 시각과 민족해방적-혁명적 시각은 냉전 및 분단 상황아래에서 남북한 각각의 공식 입장이거나 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그 각각의 주장과 논리는 자신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강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해구, 390쪽)
민족해방 담론은 북한체제 이념이라고 좌파 연구자가 밝혔지만,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의 이념이 민족해방주의 인 것 같은 많은 역사조작을 했습니다.
선진 문화 사회는 다양한 주제가 연구돼야 합니다. 88올림픽을 끝내고 공산주의 관련 문인을 허락했을 때는 정말 ‘다양성’이 통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어떤 정권이 되든지 운동권 관련자인 공산주의 관련세력만이 연구되게 강제하는 시스템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일운동이라 불려진 것은 결국은 대한민국을 북한체제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 ‘레닌’에서 ‘모택동’에 이르는 긍정적인 이데올로기로 문화선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정권에 희생된 비극사를 강조하며 한국대학가에는 ‘임화’가 꾸준히 강조됐습니다.
임화는 그의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야 전하라> 등에서 종잇장처럼 얇아진 가슴을 조이며 애처러이 전선에 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영웅적 투쟁에 굴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성과 투항주의 사상을 설교하였으며 또 <흰눈을 붉게 물드린 나의 피 우에>에서는 우리의 마뜨로소브인 한 전투영웅의 애국주의를 파렴치하게 왜곡하면서 영웅의 어머니를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존재로서 절망적으로 왜곡하여 형상화하였다.(<조선문학통사>, 1959년판, 인동판, 248쪽)
바로 이것은 비극의 실마리였다. 이를 두고, 북로당이 남로당을 숙청하는 일의 일환이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지 않다. 임화의 실수랄까 비극적 운명은 그가 시인으로 환원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민항쟁가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선에서 멈추어야 했을 것이다. 시이자 시가 아니며 노래이자 노래가 아니며, 정치이자 정치가 아닌 곳, 그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일이 「9월 12일」이후의 그가 할 수 있는 용기의 기본노선이다. 행사, 기념, 단체의 선전시가 따위의 최고 수준을 보인 것이 <인민항쟁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6.25는 그로 하여금 <네거리의 순이> 계열에로 되살려 놓았다. 그는 그도 모르게 온전한 시인으로 되살아갔다. 이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는 그의 운명을 보고 있었다. 운명을 응시하며 종로 거리에 서 있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응시하면 종로 네거리에 서 있는 중년 사나이를 해칠 그 어떤 무기도 없는 법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시라는, 불패의 무기를 손에 쥔 것이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 재판장 김익선 소장이 임화를 두고 형범 제78조 및 형법 제65조 1항에 의하여 사향, 형법 제 68조에 의하여 사형을 량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형법 제68조의 사향에 처한다 하고, 또 그에게 속하는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한 것은 시인 임화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누가 시인을 단죄할 수 있으랴. (김윤식 1, 627-628쪽)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임화’는 남로당 문인으로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눈 문인인 것이 너무 늦게 드러났습니다. 좌파는 리버럴 인 것처럼 하며 제도권을 장악하고는 보수를 물러나게 하고, 한국 사회를 세뇌교육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입니다. 한국은 넓게 보면 넓을 수 있지만, 작심하고 엘리트 영역이 좌파가 장악된 상황에서 일정한 기간이 흐르면 시대흐름이 바뀔 수도 있는 좁은 사회입니다. 아래 연구자는 얼마나 대한민국 반대에 서고 싶어서 몸부림 쳤을까요?
미국에선 반미가 곧 反국가가 아닙니다. 물론, 반미가 ‘친 멕시코’ ‘친 러시아’ ‘친 중국’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과거사에서는 反대한민국이 親북한으로 모아지며, 그것은 많은 국민들의 객관적인 기본권을 해치는 상황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화의 자기 반성은 해방 직후 이루어진 여러 자기 반성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에 숨 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 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아내여
가을비 차가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 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9월 12일」 일부
이 시는 1945년 9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경축하는 시가행진에 참가한 임화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그런 만큼 시적 주체는 임화에 매우 근접해 있다. (박정선, 146-147쪽)
해방기 임화의 문학적 실천 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이 노랫말 창작이다. 그는 1945년 12월에 개최된 조선청년단체총동맹 결성대회에 부치는 「헌시」에서 “이미/살길은 명백하고/우리는 단지/죽는 법을 배워/돌아가면 그만이다”라고 속도감 있는 화법과 단하호나 어조로 삶과 죽음의 길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명백한 살길이란 곧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실천을 말하며, 죽는법은 그런 과정에서 닥칠지 모를 죽음을 명예롭게 맞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임화가 해방기에 지은 노랫말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들은 ‘해방전사의 노래’, ‘국군행진곡’, ‘인민의 소리’ , ‘예명의 노래’, ‘민청가’, ‘전평의 노래’, ‘인민항쟁가’, ‘민애청가’, ‘남조선 형제를 잊지 말아라’등이다. 임화는 이 노랫말들을 통해 새롭게 건설된 조선은 모든 권력이 인민에게로 돌아가는 인민의 나라가 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한 목숨 바치자라고 노래 했다. (박정선, 152쪽)
주지하다시피 당시 북한은 국토완정을 목표로 한 이른바 조국통일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박헌영의 정세판단에 의거하여 한국전쟁을 개시한다. 그에 따라 임화는 다른 작가 예술인들과 마찬가지로 의무적으로 종군하여 전선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영웅화한 작품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임화가 쓴 시가 「전선에로! 전선에로! 인민의용군은 나아간다」인데, 이 시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 신속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 인민의용군을 시적 주체로 설정하여 그들의 위용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적 주체는 인민군대가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유격대가 패주하는 적을 무찌르고 있는 상황에서 적을 완전히 소탕 박멸하기 위하여 전선으로 나아감을 열정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이 시에서 인민의용군은 자기 위상에 대한 자긍심과 자기 임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다.(박정선, 165쪽)
시집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서울」,「한번도 본 일 없는 고향땅에」, 「밟으면 아직도 뜨거운 모래밭 건너」는 1950년 여름에 쓰인 작품들로서, 이 시들에는 전쟁 발발 초기의 우세한 전세와 승리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참전한 군인들의 집단적 목소리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서울」은 서울 점령에 대한 기쁨과 싸우다 스러져간 동지들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서울은 “영구히/우리 조국의 움직이지 않는/ 수도”임을 고조된 어조로 노래한다. 이 시에서 임화는 “서울거리는/나의 고향”이라는 표현처럼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우리 인민”이라는 집단주체에 의해 담론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소희가 표현될 여지를 가급적 배제하고 집단적 서정에 입각하여 서울 점령의 감격을 피력하고 있다.(박정선, 166쪽)
한국인 보수들도 속았는데, 미국 리버럴님이 속은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인 보수가 이젠 좌파에 속은 것을 검증하고 싶어하는 데, 미국 리버럴이 아직도 과거 기억에 젖은 것 같습니다.
5.3. 노무현 NLL 발언(10.4 선언) 검증 및 심판에 美國 리버럴님이 나서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미국적인 ‘리버럴’한 가치도 구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현을 통해서 체제가 전복돼 ‘월남’처럼 되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보수 정권이 두 번째가 되도, 운동권 독재로 사회에 뿌리 내린 ‘대못’이 거둬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온 사회를 장악한 운동권 세력이면서도 언론 조작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해지고 있습니다.
한국독립당은 본디 독립의식 안에서 모든 이념을 융합했습니다. 그러나, 여순 사건 이후로 그런 민족감정 안에 포함된 인사 중에 반체제인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反共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지요.
한국 사회는 넓고 다양하지 않습니다. 반만년동안 한반도가 비교적 동질적으로 형성됐기에, 미국을 닮고자 인위적으로 ‘연방주의 모델’을 덧씌우면 ‘일본식’ 분열정치(DEVIDE & RULE)로 남한을 통제하려는 리버럴을 자처하는 종북의 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한국 사회는 불안해서 미칠 지경으로 문화 영역이 좌파에 장악됐습니다.
6.25 전쟁 때 국군 반대편에 참여한 이들 중에서 진심으로 대한민국에 수렴한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이들이 중심으로 젊은층에 대한민국으로 단일화되지 않도록 하는 문화를 생산합니다.
미국 리버럴님. 보수의 정적을 해친다거나 보수정권이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의 불안감이 아닙니다. 미국 리버럴님이 아시는 한국민주화운동사가 ‘리버럴’로 포장된 종북민족해방운동이란 것이며, 그것의 완성이 공산혁명이기에 두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좌파에 속는 수준의 일반 국민은 모르며, 진실을 아는 엘리트들은 복잡하다고 손을 내두르거나 좌파 권력이 무서워 침묵하고 있을 겁니다.
사실상 해상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 NLL을 포기하는 일은 반국가단체 상대방일 수 있는 북한 최고통수권자에 국민의 생명을 맡긴 것입니다. 그저, 김대중의 통일안을 이은 노무현 정부가, 리버럴한 사안을 넘어서서 대한민국 체제 변개의 중대한 시도를 하려는 것으로 의심돼 집니다.
미국 리버럴님이 강하게 한국 정부 및 한국 내 민주화운동세력에, UN단체에 투명하게 NLL대화록 여부로 反대한민국을 지향했는가 아닌가를 밝혀달라고 압박해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수정권 및 진보정권과, 한국의 보수정권 및 진보정권이 동일하게 좋은 관계가 되길 기원합니다. 미국 리버럴님은 한국현실을 한국인보다는 모를 겁니다. 민주화운동세력은 미국 리버럴의 의견을 받아서 한국정치계을 장악하는 일을 반복해 왔습니다. 노무현 NLL 반국가성 여부 심판은 미국 리버럴님이 나서는 것이 한미동맹의 미래를 위해 좋다고 여겨집니다.
한국은 국가가 작아지기 위해서 시민사회가 커져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 시민 사회는 특정한 세력이 무제한적으로 강해져서 국가도 흔들만큼 돼, 그들에 불안해 하는 이들의 검증의 길이 완전 차단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금이 그 상황임을 미국 리버럴님은 아셔야 할 것으로 봅니다.
-참고문헌-
고명철, 「민족의 주체적 근대화를 향한 ‘한양’의 진보적 비평정신-1960년대 비평정신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연구소, 『영구혁명의문학들-1960년대 문학을 다시 생각한다.』, 국학자료원, 2012.
고봉준, 「민족문학론 속에 투영된 지식인의 욕망과 배제의 메커니즘」, 문학과 비평 연구회, 『한국뭉학권력의 계보-해방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4.
김구, 김학민․이병갑 주해, 『정본 백범일지』, 학민사, 1997.
김대중․김영삼, 「김대중․김영삼 8.15 공동선언」, 『언론으로 본 80년대 민족․민주운동』, 신동아 1990년 1월호 별책부록, 동아일보사.
김연상, 『南岡 李昇薰의 基督敎的 企業經營 理念과 活動에 관한 硏究』, 연세대 석사, 2003.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3.
김윤식 1, 『임화연구』, 문학사상사, 1989.
김재용․이상경․오성호․하정일, 『한국근대민족문학사』, 한길사, 1993.
김춘식, 『미적 근대성과 동인지 문단』, 소명출판, 2003.
김행숙,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1920년대 동인지 문학의 근대성』, 소명출판, 2005.
도널드 커크, 정명 진 역, 『김대중 신화』, 부글북스, 2010.
문재인, 『사람이 먼저다』, 퍼플 카우, 2012.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2003년도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 보고서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 실태』, 2004.2.
박상준, 『한국근대문학의 형성과 신경향파』, 소명출판, 2000.
박정선, 『임화 문학과 식민지 근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0.
박종린,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물산장려논쟁」, 『역사의 현실 47』
배성준,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문제」, 역사학연구소 편,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연구-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97.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 김영사, 2012.
유문선, 「카프 작가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민족문학사연구』 24권, 2004.
이기인, 「카프 방향전환론의 재검토」, 『韓國言語文學』 第52輯
이상갑, 『민족문학론과 근대성』, 역락, 2006.
이선교, 『제주 4.3 사건의 진상』, 현대사포럼, 2010.
이영진, 『1980년 5월 노동신문의 비밀』, 우딸사, 2009.
이현주, 「신간회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의 운동론-ML당계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권, 2008.
장규식 1, 「1920-1930년대 YMCA 학생운동의 전개와 일상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7호, 2007.9
장규식, 「일제강점기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의 정치․경제사상」,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제31호, 1998.3.7.
전상숙, 「물산장려운동을 통해서 본 민족주의 세력의 이념적 편차」, 『역사와 현실 47』
정해구, 「북조선노동당의 형성과 발전」, 역사학연구소 편,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연구-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97.
주요한 『안도산전서』, 삼중당, 1963. 안창호, 『도산안창호 전집 12권 전기Ⅱ』, 도산안창호 기념사업회
채종혁, 『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참여 -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를 위한 제안 -』, 강남대 석사, 2004.
최규진, 「국내통일전선과 코민테른」, 역사학연구소 편,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연구-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97.
최태성, 『한눈에 사로잡는 한국사』, 들녘, 2011.
호배배, 『한국 카프와 중국 좌련에 대한 비교 연구 -조직과 문학 논쟁을 중심으로-』, 대구대 석사, 2011.
홍문표, 『한국현대문학사 Ⅰ: 개화기에서 광복이전까지』, 창조문학사, 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