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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들아. 문재인의 정체와 문재인이 망쳐놓을 한국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 다른나라의 정세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나의 정보글은 이번 것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휴식에 들어가겠다. 다른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좀더 조사를 할 필요도 있어서 그렇다. 암튼 정보글에 우르르 몰려와서 ㅁㅈㅎ 폭탄 놓고 가는 더러운 문빠새끼들이 참 한심했지만 그런 잔대가리 정도로 역사의 큰 흐름을 막을 수 있겠나? ㅋ 좀더 노력해봐라 꼴통들아.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푸에르토리코의 국부 루이스 무뇨스 마린(Luis Munoz Marin)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문재인 시대를 사는 여러 보수들이 자신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카리브해 지도.
푸에르토리코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동쪽, 버진군도의 서쪽에 위치한 섬이다.
수도는 산후안.

혼란의 푸에르토리코
루이스 무뇨스 마린은 1898년 루이스 무뇨스 리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뇨스 리베라는 유복한 스페인 이민자의 후손이었고 푸에르토리코에서 큰 신문사를 운영하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기도 했다.
당시 푸에르토리코는 아직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세기말, 스페인의 지배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음을 간파한 무뇨스 리베라는 푸에르토리코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로비 활동도 헛되이 스페인 제국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무뇨스 마린이 태어난지 불과 몇개월도 안되어 푸에르토리코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Luis Munoz Rivera
당시 푸에르토리코의 정치는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중산층은 완전한 독립이냐, 강대국의 식민지냐 두가지 방향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스페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미군이 들어서자 이제 푸에르토리코는 친미파와 독립파로 나뉘게 되었다.
미군은 푸에르토리코를 안정시키기 위해 영향력 있는 현지인들을 물색하던 중, 무뇨스 리베라를 발탁했다. 그리고 무뇨스 리베라는 친미파의 거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독립파의 표적이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무뇨스 리베라는 독립파의 살해 협박을 견디다 못해 가족을 뉴욕시로 이사시켰다. 무뇨스 마린은 뉴욕시에서 성장하며 영어와 스페인어를 둘다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 무뇨스 리베라는 미국에 의해 상주 대표(Resident Commissioner: 발언권은 있으나 투표권은 없는 하원 대표)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무뇨스 마린은 정치에 흥미가 없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로스쿨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로스쿨 등록비를 가지고 가출했다고 한다) 뉴욕시의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미국인 부인도 문인 시절에 만났다.
처음에는 반미파 정치인
하지만 생활고는 무명 시인 무뇨스 마린을 괴롭혔다. 결국 생활고에 지친 그는 푸에르토리코의 명사인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볼 요량으로 부인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에 돌아간다. 말이 좋아 시인이었지 그냥 한량이었던 무뇨스 마린은 유유자적하면서 푸에르토리코 섬을 유람한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섬을 둘러보는 와중에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의 정치가 미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타락해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도심지와 농어촌의 빈부격차가 엄청났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부와 어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에서는 1표를 2불에 구입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었다. 미군의 강요로 민주주의 선거는 실시하고 있었지만 농민들에게 선거는 그저 공돈을 버는 기회에 불과했다.
표를 매수하는 행위가 당연시되었던 이유는 푸에르토리코의 정치가 갈수록 극단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미파 '푸에르토리코 공화당'은 미국의 일부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푸에르토리코 사회주의당'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하긴 외국나라 군대가 자기네 나라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기분 좋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무뇨스 마린도 이러한 부조리의 원인이 미국의 지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당에 가입한다. 무뇨스 리베라와 가족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순수한 청년 무뇨스 마린은 사회주의당이 자기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공화당의 당원들을 매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표를 위해서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정치의 현실에 크게 실망한 무뇨스 마린은 사회주의당 활동을 접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영어-스페인어판을 동시에 출판하는 신문사에서 일하던 무뇨스 마린은 공화당과 사회주의당의 양당체제에 불만을 품은 젊은 정치인들이 '푸에르토리코 자유당'이라는 새 정당을 세웠다는 소식을 접한다. 자유당에 새로운 기대를 가진 무뇨스 마린은 다시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갔다. 다시 정리하자면, 공화당은 미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사회주의당은 미국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자유당은 미국의 일부가 되지만 자기네 대표를 선출할 선거권 등, 자치권은 얻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당시의 무뇨스 마린은 자유당 입장에 가까웠다. 그런데 미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화당 인사들이 대거 자유당에 흘러들어오면서 자치를 주장하는 무뇨스 마린 같은 젊은 정치인들은 배격받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당에서 또 실망을 맛본 무뇨스 마린은 미국으로 돌아가 신문기자 겸 시인으로 일한다.
미국의 저력을 목격하고
1920년대 말기, 미국의 주식시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무뇨스 마린도 정치를 잊고 주식에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1929년 미국은 대공황을 겪게 되었고 주식의 거품은 꺼지고 말았다. 무뇨스 마린도 엄청난 돈을 주식으로 날리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지냈다. 대공황의 여파는 푸에르토리코에도 미쳤고 정치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의 인식까지도 크게 바꿔놓게 되었다. 역시 경제 문제가 걸린 일에서는 누구라도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푸에르토리코는 실업률이 치솟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속 미국 응디를 믿어야 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편이 나을 것이냐를 놓고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재수없는 일은 절대로 혼자 오는 일이 없다던가. 1929년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허리케인에 강타당한 푸에르토리코에는 이재민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미국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했고 푸에르토리코 의회는 더더욱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무뇨스 마린은 미국의 힘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자치를 얻는다 해도 그걸 써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치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무뇨스 마린은 서서히 공화당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혼란 속에서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결정하려는 미국의 정치 수준을 보며 무뇨스 마린은 이것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마침 귀한 인연이 다가왔다. 당시 뉴욕주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부인 엘레노어 루즈벨트가 뉴욕 언론인들과의 모임을 주최하다가 무뇨스 마린에게 허리케인에 대해 물어본 것이다. 무뇨스 마린은 대담한 제안을 했다.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다스림을 받으며 발전해온 모범적인 섬입니다. 이번 허리케인의 피해를 직접 방문해서 보십시오."
놀랍게도 루스벨트 부인이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무뇨스 마린은 직잡 안내역을 맡아 푸에르토리코의 피해 지역을 보여주었다. 미국 유력 정치인의 부인을 푸에르토리코 섬에 직접 수행하여 모시고 온 무뇨스 마린의 인지도는 크게 올랐다. 그리고 그는 푸에르토리코 공화당 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는 많은 단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무뇨스 마린은 신중한 태도를 지켰다. 젊은 시절 정계에서 겪었던 많은 실망 때문에 당장의 인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화당으로부터 한발 떨어져, 1932년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했고 푸에르토리코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지금까지 재야에서 방황하던 인물이 이제 처음으로 당선을 맛본 것이다.
친미파의 거두로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3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즈벨트가 과감한 투자를 통해 실업난을 해소하는 '뉴딜 정책'을 시행함을 알게 된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에도 투자해주십사 하고 로비 활동을 펼쳤다. 고립주의를 버린 미국은 국제무대에서의 파트너를 얻어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수함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이 미국 정계에서 큰 호응을 얻은 것도 미국식 제도를 통해 동아시아에 미국의 파트너를 만들 수 있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무뇨스 마린 또한 푸에르토리코를 모범적인 케이스로 관리하는 것이 미국 정부에 큰 이익이 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뉴딜정책의 시행으로 미국 재정은 이미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군비를 줄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메릴랜드주 상원의원 밀라드 타이딩스(Millard Tydings)가 푸에르토리코에게 10년의 '민주주의 연습' 이후 독립을 주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과거의 무뇨스 마린이라면 크게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저력,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의 가치를 알게 된 무뇨스 마린은 미국의 일부로 남는 게 더 낫다는 생각으로 바꾼지 오래였다. 미국과 푸에르토리코 양쪽에 영향력이 있는 무뇨스 마린은 타이딩스의 제안에 반대했다. 자유당 시절의 무뇨스 마린을 기억하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은 그를 배신자라 비판했다. 하지만 무뇨스 마린의 신념은 확고했다.
"우리 푸에르토리코는 경찰에게 잡힌 범인과도 같다. 경찰은 범인을 놔주고 도망가고 싶으면 가라고 한다. 범인이 도망가면 그 등에 대고 총을 쏜다. 경찰은 '범인이 도망가려고 해서 쏘았다'고 말하면 그만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총기 범죄가 이미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용의자에게 보복하고 싶은 경찰은 용의자 보고 도망가라고 해놓고 등 뒤에서 총을 쏘는 일도 흔했다. 이런 발언은 내용이 잔인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나라를 깎아내린다고도 보여질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무뇨스 마린은 독립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독립시켜주겠다고 허겁지겁 독립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미국으로부터 아무 지원도 못 받게 된다는 우려를 드러낸 것이다.
1932년, 엘레노어 루즈벨트를 수행할 때만 해도 큰 인기를 얻었던 무뇨스 마린이었으나 1935년에는 타이딩스 의원의 독립 제안에 반대한 일로 그의 인기는 추락했다. 그의 아버지가 겪었던 것처럼 독립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도 받았다. 하지만 무뇨스 마린은 위대한 정치인이 될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눈앞의 인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념, 자신의 신념을 따라가는 점이었다. 무뇨스 마린은 친미파로 바뀌면서 자유당 내부에서도 마찰을 빚자 이번엔 공화당의 친미파들과 손을 잡고 '푸에르토리코 민중민주당'이라는 새 당을 세운다.
타이딩스 의원은 푸에르토리코에 했던 독립 제안을 포기했다. 하지만 필리핀의 독립도 제안했고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필리핀이 어떤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의 꿈, 농촌 개혁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뿐만 아니라 중남미 전체에서도 고결한 비전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치란 단지 돈을 어떻게 나눠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진정한 꿈은 푸에르토리코의 정치 수준을 미국 수준에 가깝게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목격했던 농어촌에서 표를 돈받고 파는 일을 반드시 고치리라 다짐했었다. 그의 민중민주당 조직은 농촌에 뛰어들어 열심히 선거운동을 펼쳤다. 단지 선거운동만 한 게 아니라 '미국에서 시행하는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고 왜 민주주의를 해야 농어촌이 잘 사는지' 가르친 것이다. 이 노력이 큰 인정을 받아 1940년, 푸에르토리코 총선에서 민중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당수였던 무뇨스 마린은 이제 푸에르토리코 의회의 의장이 되었다. 미국이 파견하는 총독(governor)을 제외하면 푸에르토리코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농어촌을 개혁하지 않으면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수준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내다보았던 무뇨스 마린은 미국 총독에게 농어촌 개발 계획을 건의했고 이 노력은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Operation Bootstrap(=bootstrap은 자립이라는 의미)이라는 개발 정책으로 나타났다. 무뇨스 마린에 의하면, 지나치게 많은 인구가 농촌, 그것도 사탕수수 농장에 몰려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푸에르토리코의 농어촌은 추수가 끝나거나 허리케인이 다가오면 수많은 일꾼들이 백수가 되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실업률을 낯추고 농촌의 인구를 분산하려면 경공업과 건축업 등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일자리를 늘리고 인구를 분산시키는 정책으로 각계 계층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경제를 "도시 vs 농어촌"으로 보지 않았던 무뇨스 마린의 온건한 성향이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독립파와의 대결
한편 무뇨스 마린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주민들 사이에서 미국 응디가 독립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파는 무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48년, 무뇨스 마린 의장은 "53호 법안"으로 알려진 조치를 내린다.
-독립을 요구하는 '푸에르토리코 민족주의당'을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고 해산한다
-푸에르토리코 국기를 소지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들면 범죄로 간주하고 체포 및 최고 1만불의 벌금을 부과한다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거론하는 것은 불법이며 벌금의 대상이 된다
-미국 정부에 대한 비방도 테러 선동으로 간주되며 벌금의 대상이 된다
-독립주의자들에게 테러 물질(총기나 화약을 지칭)을 판매한 사람도 똑같이 처벌을 받는다
비록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무자비한 법안이었지만 무뇨스 마린의 단호한 대처 덕분에 독립파가 벌이는 유혈사태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1949년, 미국 정부는 총독을 파견하는 대신,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이 직접 총독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했는데 경제와 치안 면에서 큰 성과를 올린 무뇨스 마린이 1949년, 새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무뇨스 마린의 총독 취임은 독립파(민족주의당)와의 더 큰 충돌을 예고했다. 독립파는 1950년 10월30일, 무뇨스 마린에 맞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무뇨스 마린은 즉시 푸에르토리코 보안대를 출동시켜 교전을 벌였다. 그런데 민족주의당원들은 총기를 가졌을 뿐이고 군사훈련은 받지 못한 무리들이었다. 보안대가 응전하자 겁에 질린 그들은 무기를 내버리고 도망쳤다. (반면, 쿠바혁명 때의 카스트로의 병사들은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교관들로부터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다) 이렇게 하여 민족주의당의 저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족주의당 당수 페드로 캄포스는 체포되었다. 캄포스는 1965년에 석방되었으나 뇌출혈로 사망한다.
페드로 캄포스
1953년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고 1955년 이후부터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정권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무뇨스 마린은 "53호 법안"을 계속 유지시켰다. 그러다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53호 법안이 미국의 자유 이념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자 1957년 폐지시켰다.
이렇듯 무뇨스 마린은 일관되게 친미노선을 유지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가 케네디 대통령과 충돌한 것에 비하면 매우 다른 행보였다.
US Commonwealth의 탄생
총독으로 선출되면서 무뇨스 마린의 친미파 노선은 다시 한번 약간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스스로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는 초기의 자유당 이념과 많이 닮은 것이었다. 그리고 비록 미국 헌법을 많이 따라가게 되기야 하겠지만 푸에르토리코 헌법을 만들고자 했다. 바로 영연방 국가들처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연방국(US Commonwealth)이라는 개념의 탄생이었다. 현재 미국의 연방국들은 푸에르토리코와 북 마리아나 제도의 섬들(Northern Mariana Islands)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푸에르토리코인이 미국 영토에서 취업할 때에는 아무 제약이 없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주(state)가 아니기 떄문에 투표권이 없다. 사실 푸에르토리코의 고유 헌법을 만들면서도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미국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푸에르토리코의 만성적인 고 실업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었다. 미국 정부도 무뇨스 마린의 친미노선을 알고 있었기에 "푸에르토리코의 미래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이 결정하게 한다"는 형태를 취했다.
무뇨스 마린이 미국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푸에르토리코 공화당을 멀리하면서까지 이렇게 연방국이라는 지위에 집착한 것은 그는 정치적으로는 미국에 의존하지만 문화적으로는 푸에르토리코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마치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교육에 힘을 기울였던 박정희 대통령처럼 무뇨스 마린도 푸에르토리코 고유의 문화와 애향심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푸에르토리코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흑인의 외모를 하고 있었으나 그는 스스로를 푸에르토리코인이라 생각했고 미국내 흑인들도 그를 흑인으로 봐주지 않았다. 흑인이 백인보다 유색인종을 더 차별한다는 개좃같은 사실은 흑인들과 클레멘테의 갈등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푸에르토리코 국부의 말년
무뇨스 마린은 4번의 총독 선거에 당선되면서 총 16년간 총독으로 재직했다. 무뇨스 마린은 미국 1대 대통령 워싱턴을 매우 동경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하고 나서 대중 앞에서 자신은 총독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직접 발표했다. 흥분한 지지자들이 "4년 더!"를 외치자 무뇨스 마린은 "여러분들은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제가 필요없을 겁니다"하고 말하며 자신의 비서 로베르토 산체스를 불러올려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물러났다.
Sanchez
Sanchez & Munoz Marin
하지만 무뇨스 마린의 말년은 그렇게 훈훈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새 총독에 당선된 로베르토 산체스에게 막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산체스는 무뇨스 마린을 멀리했다. 화가 난 무뇨스 마린은 민중민주당을 장악하여 산체스의 재선을 막으려 했다. 산체스는 산체스대로 그의 새로운 당을 만들어 총독 재선에 도전했다. 그런데 무뇨스 마린과 산체스가 내분을 일으키는 사이, 미국에서 태어난 푸에르토리코인 사업가 출신 루이스 페레가 새 총독에 당선되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둘다 권력을 놓친 무뇨스 마린과 산체스의 모습은 마치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무명의 후보 우드로 윌슨에게 대선 자리를 내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같은 모습이었다.
루이스 페레는 미국시민권자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 공화당에서 활동했다.

루이스 페레의 명언: 생각은 혁명적으로, 목표는 진보적으로, 하지만 방식은 보수적으로.
루이스 페레가 총독에 당선된 일을 계기로 정치에 미련을 완전히 버린 무뇨스 마린은 2년간 유럽 여행을 즐겼으며 푸에르토리코에 돌아온 후에는 회고록 집필 등에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8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푸에르토리코의 국부 답게 그의 장례식은 푸에르토리코의 휴일로 지정되어 국장으로 치뤄졌다.
산후안에 있는 국제공항 이름은 '루이스 무뇨스 마린 국제공항'이다. 사탕수수 농사나 짓고 꽃게나 잡던 ㅎㅌㅊ 섬 푸에르토리코를 발전시킨 뛰어난 정치인에 바치는 고마움의 표시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과 푸에르토리코를 비교해보면 그야 당연히 한국이 압도적으로 발전해있다.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는 짓거리 보면 한국놈들이 푸에르토리코인들보다 배은망덕한 건 확실하다.
푸에르토리코의 국부 무뇨스 마린은
1. 눈앞의 인기나 권력보다는 자신의 이념과 신념을 따라감.
2. 미국의 힘을 알고 있었고 뛰어난 외교 감각으로 최대한의 혜택을 얻어내는 이상적인 약소국의 외교를 펼침.
3. 민족적 자존심과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이 결코 정치의 영역에 침범하도록 냅두지 않음. 국뽕에 휘둘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