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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게이들 오랜만이노?

잘 지냈냐?


오늘은 누벨바그의 신화를 만들어낸 역사적인 잡지이자
영잘알 코스프레 게이들에게 최고의 피신처인 '카이에 뒤 시네마'를 알아보려고 한다.

일단 이 글은 거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은 기억을 압축해서
중심만 추려낸 글이다.

글을 보기 전에 앞서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201X년대에 나온 최고의 뮤직비디오인 Lorde 의 Tennis Court를 보자!



이 뮤비를 보고 바로 ㅁㅈㅎ를 주지는 말아라


물론 내가 Lorde 폭도인 것은 맞지만

이 뮤비는 그저 폭도짓을 위해서 올린 뮤비가 아니다. (엑윽엑엑)


진짜 영잘알들은 이미 알고 있을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화 이론을 뼈대로 삼고 있는 뮤비라는 사실을 알꺼다. ㅇㅇ

(힌트 : 네 멋대로 해라)

이 뮤비가 처음 보았을때 좆같지만 몇번씩 번갈아 볼 수록 새로운 느낌과 훌륭한 느낌을 받는 것은

누벨바그의 신선함이 아직까지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다.




1. 시작



누벨바그의 신화를 몰고온 카이에 뒤 시네마는 사실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미 훌륭한 영화 잡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 잡지는 많은 문제로 결국 접게 되었고


프랑스의 정치적인 탄압으로 많은 실험 영화들이 묻히자

프랑스 내수 영화들이 힘들어짐에 따라서


결국 앙드레 바젱과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 로 뒤카라는 3명의 영화 감독이자

비교적 젊은 이 비평가들은


1951년에 영화 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간한다.


이 잡지는 후대에 '역사상 최고의 영향력을 가졌던 잡지'로 역사에 기억된다.


근데 갑자기 이상한 점이 위에 있지 않아?



왜 우리는 앙드레 바젱 말고는 별로 익숙하지 않을까?


그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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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문화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하던 비평가이자

철학가가 있었다.


아직도 엄청나게 유명하지


근데 장 폴 사르트르가 당시의 시민케인을 엄청나게 욕하는 글을 썼었다.


허나 당시에는 왠만한 비평가들은 그의 영향력 앞에서 그냥 숙이고만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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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냐 씹새끼야?)



앙드레 바쟁이라는 당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비평가가

권위자의 비평을 전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결국 바쟁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짐과 동시에 바쟁이 운영하던 영화 클럽으로

ㅆㅅㅌㅊ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비평가와 감독이 몰려든다.



그리고 바쟁은 그저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니다.



한번은 어떤 10대 한 소년도 똑같은 시간에 자신만의 개인 영화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소년은 나이가 부족했고 당시 영화계의 검열을 받지 않는 작품을 상영하면

어느정도 불법이였기에 문제가 있던 것이다.


허나 이 소년은 바젱의 클럽과 자신의 클럽의 운영 시간이 겹치자

자신이 영향력이 부족함에 따라서 전부 바쟁의 클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이 소년은 바쟁에게 자신의 클럽을 위하여

바쟁의 클럽을 뒤로 밀 것을 요구한다.


허나 이때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부친정치법이라고

자신의 자식의 행실이 올바르지 못할 경우 부친의 허락 밑에서

자신의 자식을 구치소에 6개월 동안 머물게 할 수 있는 법이 있었다.


이 소년의 부모는 곧 이 소년이 영화에 너무 미치고 살자

이 클럽을 신고하고 부친보호법으로 ㅁㅈㅎ시킨다.



그러자 바쟁은 이 소년을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써서 빼내온다.


이 소년이 바로 400번의 구타 '트뤼포'다.


이 400번의 구타라는 작품을 발표할 당시에 바쟁이 죽자

이 영화의 크레딧에 바쟁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글을 써 넣었다.



이러한 선구안과 뼈를 찌르는 비평 능력이 있던

바쟁이 사실상 잡지의 중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쟁이 제일 유명한 것이다.



하여튼 바쟁의 이런 구원으로 바쟁의 밑으로 들어간 트뤼포는

1954년에 프랑스와 곧 세계 영화계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비평을 쓴다.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비평이였다.


이 비평의 내용은 무엇이였냐면


바로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쓴 완성된 문학을 영화로 바꾸는 경우가 많은대

이럴 경우에는 감독이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성이라는 비평문이였다.


그렇다.


이 비평은 곧 누벨바그의 시작, '작가주의'의 시작이였다.


트뤼포의 작가주의를 중심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힘을 합세하여 영화계의 기본 관습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근대 그 비평에 참가했던 비평가들이 누군지 아냐?


제일 중요한 3명만 추린다.


1. 트뤼포 ㅋㅋㅋㅋㅋㅋㅋ

2. 고다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 알랭 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이 3명이 졸라 중요하냐면


작가 주의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세계의 영화적 기교를 사실상 현대적으로 바꾸어버린 영화를 만든 감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냐면


비평가들이 자신의 주장을 벌이다가

그것에 힘을 보태자고 자신들의 주장을 영화화 했는대

그 영화들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엄청나게 새로운 느낌의 기교를 보여줘버린

비평가>>감독이 된 경우 ㅋㅋㅋ



2. 누벨바크의 신화, 카이에 뒤 시네마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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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주의의 시작으로써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라는 영화다.

1959년작



이 영화가 작가주의의 특징을 얼마나 담았는지는


네이버를 긁어왔다.


[1] 인물은 당돌하고 비전통적이며 대체로 감상을 배제하여 다룬다.
[2] 구성은 느슨하고 사실적이며 혁신적이다.
[3] 경량 장비의 사용. 소형 촬영기와 장비를 사용하여 우연적이고 사실적인 영상과 음향을 얻어낸다.
[4] 현지 촬영과 야외 촬영의 선호.
[5] 생략 편집을 활용하여 이미지들의 연관, 이미지와 음향, 그리고 매체 자체에 대한 주의를 상기시킨다.
[6] 영화적 공간과 시간에 관한 실험.
[7] 초창기 영화들에 대한 암시를 통해 전통의 지속과 단절을 짚어내고 특정 작품이 품고 있는 영화적 자의식에 관해 언급하며 특정 감독이나 영화에 경의를 표한다.
[8] 인간과 우주의 부조리함에 대한 실존주의적 감각을 갖고 있다.



이기이기 엄청 익숙하지 않노?




이 영화를 시작으로 1950년 후반과 60년대 초반을 관통하는 작품인

(히로시마 내 사랑은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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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라는 영화가 나온다.



이 영화는 작가주의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신선한 효과를 주었는대


바로 '분리'라는 요소이다.


이 영화에서 '분리'는 엄청나게 많이 실험되었는대


바로 이런 분리다.


정서적 분리


보통 영화는 주인공에게 관객들이 공감이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관객과 주인공이 정서적으로 일치되게 구조한다.


그래야만 감동적이든, 반전이든 우리는 엄청난 충격을 먹을태고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몰입을 할태니까 말이야


허나 이 영화는 정서적 분리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주인공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카메라 기교를 이용해서

몰입을 방해하고 주인공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에서 누구도 나쁘지도 않고, 누구도 착하지도 않은 식의 전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히피 문화에서 반겼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시간적, 시각적, 청각적 분리


이 원리는 어느정도의 교차편집의 원리를 이어받은 원리라고 보면 될탠대

조금 다르다.


제일 위의 lorde의 뮤직비디오를 영화사적인 관점으로

이 원리를 이용해서 해석해보자면


가수는 한동안 말을 안한다.


이것은 시각과 청각의 분리다.


허나 강조와 추임세를 넣는 부분에서 오로지

시각과 청각을 일치시킨다.


이 부분은 가사와 연관을 시키자면

자신의 가치관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어떻게 이러한 효과가 가능할까?


바로 시각과 청각을 분리시킨다면 그것에 대한 몰입이 깨짐으로써

그것이 진실한지 진실하지 않은지를 알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중요한지 안중요한지, 등등의 많은 요소들을 다양하게 이용이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영화 전개 방식인 것이지




그리고 작가주의는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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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레네의 1961년작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허나 이렇게 카이에 뒤 시네마 중요 비평가들이

영화 감독으로 나가고


바쟁이 1958년에 죽음으로써 서서히 카이에 뒤 시네마는 알게모르겍 조금씩 시그러 들었다.


바로 영화를 '정치'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3. 좆망태그



주요 인사들이 나가고


바쟁이 죽음으로써 카이에 뒤 시네마는 큰 변화를 겪는다.


바로 편집장의 변화였는대



짧은 시간동안 여러 편집장이 오고 갔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다.



그냥 한 묶음으로 부르면 된다.


'정치가'



바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들이

프랑스 비판 운동에 맛이 들린 나머지


진짜로 '정치'영화를 만듬으로써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작가주의의 영화가 만들기 쉽고 빠르다는 점을 이용해서

질 나쁜 영화를 많이 만들었고


또 비평가들이 정치 운동만 하고

비평을 쓰지 않음으로써 카이에 뒤 시네마의 구독자가 점점 좆망한 것이다.


거의 1년에 3부만 쓴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까


경영난에 허덕인 나머지 편집장들이 엄청나게 바뀌었고


그 중에서 한 편집장은 작가주의의 규칙을 수정함으로써

작가주의가 퇴보하고 다시 할리우드의 기본 양식에 다시 들어가버린다.



그 밖에서는 작가 주의의 감독들이 성공했지만


이와는 별개였다.



결국 카이에 뒤 시네마는 좆망 테그를 쭉 타다가


구독자를 잃어버렸다.


허나 기본 구독자는 영대생이나, 교수들 같은

전문적인 해비 영게이였기에 다시 끌어 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구독자를 가져오고자

라이트한 내용을 쓰는 일반 영화 잡지처럼 상업적인 영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카이에 뒤 시네마는 존재의 의미를 잃고

점점 좆망했다.





4. 현재



2010년대에 종이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 잡지만을 발행한다.


한마디로 씹 좆망







참고로 이 글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매우 많다.


바쟁의 시적 리얼리즘은 물론이고 ㅇㅇ


그러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파생된 이론보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짧게나마 알려주고자 생략한 부분이 많다.


미안하다.


Lorde  파이팅!

[네이버 지식백과] 누벨바그 [Nouvelle Vague]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