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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저장소] 중국의 막장 왕조, 송(宋)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아라보자! : http://www.ilbe.com/4219731494

 

<사진 자료는 중국의 사극인 명 말기의 멸망을 배경으로 다룬 '강산풍우정'을 대부분 캡처해서 올림>

 

"사진 때문에 스크롤 압박인 것 같으니, 사실상 글 내용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1) 서두

 

안녕, 게이들아.

 

이번에는 명나라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던 젊은 영웅 정성공에 대해서 써볼거야.

 

정성공은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글을 시작하기 앞서 정성공이 누구인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정성공은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야.

 

정성공의 아버지는 정지룡인데, 이들 정씨 가문은 중국 동남 해안과 일본 근처를 누비면서 무역 중개업을 벌여 이득을 거두고 있었지.

 

근데 말이 무역 중개업이지, 실제로는 해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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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

 

그래서 명나라 입장에서는 골칫거리라서 정지룡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회유했고, 정지룡은 총병관의 직위를 얻고

 

정지룡의 아들인 정성공은 이때 중국으로 들어가 학문을 배우게 돼.

 

하지만 청나라의 침략과 함께 명나라 내부의 농민 반란 등 거대했던 명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는데,

 

명의 수도였던 북경(北京)이 함락되고 나서 명의 마지막 충신 지사들은 모두 남쪽으로 내려오게 돼.

 

그래서 이들이 남명(南明)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정지룡은 철저히 자기의 이익 추구를 위해 남명을 위해 일했었지만,

 

청의 침략으로 남명마저 흔들리게 되자 정지룡은 남명 보호에서 손을 떼버려.

 

왜냐하면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남명에 정씨 가문의 자금과 물자까지 보태면서 지켜봤자 정지룡이 얻는게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정지룡은 청에 빌붙게 돼.

 

하지만 정성공은 이러한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효(孝)가 아닌 충(忠)에 중점을 두면서 명의 마지막을 위해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게 돼.

 

이후 정지룡은 청 수도 북경에 억류(?)되어 살게 되고, 정성공은 아버지의 함선과 병사 등등 정씨 가문의 재력들을 이어받아

 

새로운 근거지를 세우고 청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돼.

 

그리고 명의 부흥을 위해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명나라 황족에게 충성을 하게 되고,

 

정성공은 이후 청나라의 눈을 피해 대만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네덜란드군과 싸우는 등 참으로 흥미진진한(?) 삶을 살게 돼.

 

(2) "네가......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 태어났다는 말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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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5천만 명이 넘는 인구와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동아시아 패권국 명나라는 기울기 시작하였다.

 

변방에서는 청나라의 만주족 병사들이 준동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농사만 짓던 일개 찌끄래기들이 이자성 휘하로 들어가 수십만으로 불어나 명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앙 조회는 벌써 며칠째 열리지 않았고, 명나라 신하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다.

 

"황제 폐하!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 인근까지 도착했습니다.

 

황상께서는 몸을 피하시옵소서..."

 

말을 마친 태감은 급히 도망쳤다.

 

황제인 숭정제는 자신이 직접 북을 치면서 신하들을 소집하고자 했지만, 오직 환관 왕승온만이 황제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숭정제는 최후가 왔음을 인지하고 칼을 들고 15살이 된 장평공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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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공주 역시 제국의 몰락이 다가왔음을 알고 있었고, 황제가 왜 자신의 방으로 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숭정제는 칼을 빼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외쳤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 태어났다는 말이더냐!"

 

장평공주도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인 황제는 칼로 공주를 내리쳤다.

 

그리고 황제는 6살의 어린 나이인 소인공주의 방으로 들어가 공주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그런데 장평공주는 죽지 않았었다.

 

자식을 칼로 내려칠려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겠는가?

 

장평공주는 칼에 깊게 베이지 않아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주변에 있는 단검으로 자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평공주의 자결을 만류하고자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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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극, <강산풍우정> 목을 맨 숭정제

 

한편 숭정제는 환관 왕승온만을 데리고 자금성 뒤편의 경산에 올라가 목을 매었다.

 

"짐은 죽어 지하의 선황제를 볼 낯이 없다. 따라서 머리로 얼굴을 가린다.

 

적은 짐의 시체를 마음대로 찢거라! 그러나 나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다치게 하지 말아라."

 

환관 왕승온은 오열하고 황제 옆에 자신도 목을 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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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풍우정> 환관 왕승온

 

(3) 만주족, 북경(北京 : 오늘날 중국의 수도)에 입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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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

 

이자성은 명의 심장부인 북경(北京)을 공격해 입성하였다.

 

수십만 명의 농민 군단을 보유한 이자성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숭정제는 자살했고, 북경은 이자성에게 떨어졌지만 이자성에게는 아직도 남은 골칫거리가 있었다.

 

만리장성 부근의 청나라 기병대도 골칫거리였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명나라의 충신이었던 오삼계가 그에게는 매우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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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풍우정> 오삼계

 

오삼계는 수만 명의 정예 병력으로 명나라 내지로 향하는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도 막강한 기병 군단을 보내 오삼계의 명나라군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그 공격은 좌절되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중원 정복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오삼계를 격파하고 중국 내지로 향하는 산해관 관문을 열어야 했다.

 

그렇지만 오삼계는 순순히 청나라군에게 산해관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번번이 청나라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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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풍우정> 오삼계와 그의 애첩 진원

 

하지만 영원히 뚫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즉 중국의 심장부로 향하는 산해관 관문이 문을 열게 되었다.

 

명의 불세출의 명장인 오삼계가 청나라 황제에게 투항을 선언한 것이다.

 

청나라 황제는 오삼계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오삼계와 휘하 병사들에게 변발을 강요하였다.

 

오삼계가 왜 투항을 했는지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애첩 진원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북경(北京)에 입성한 농민 반란군의 수장인 이자성의 부하가 오삼계의 애첩인 진원원을 가로챘다는 것에 대하여

 

오삼계가 분개했다는 이야기다.

 

나도 정확히 그 경위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삼계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와 나름의 고충으로 인해 산해관을 열어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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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大巡)의 황제, 이자성

 

청나라에게 투항한 오삼계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즉각 이자성의 군대를 쳤다.

 

이자성의 군대는 막강한 청 기병과 오삼계의 정예 병력에 밀려 패퇴하였다.

 

북경에 입성했던 이자성은 당일날 하루 황제식을 즉각 거행해 스스로 황제가 되고 다음날 도망쳤다.

 

이자성은 군대를 대부분 잃고 도주 생활을 하다가 죽게 된다.

 

아무튼 만주족의 청나라 황제와 군대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에 입성하게 되었다.

 

(4) 이곳은 장차 우리 만주족의 수도가 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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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입성한 청나라 사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북경 시내를 거닐면서 명나라 관리와 백성들에게 변발을 강요하였다.

 

한편 숨어 있던 명나라 문무 신료들은 청 황제를 만나 예(禮)를 취했다.

 

"이곳은 장차 우리 청나라의 수도가 될 곳(북경)이다!

 

우리 군사들은 무자비한 살육도, 약탈도 행하지 말거라.

 

그리고 명나라의 문무 신료들에게는 평소 하던대로 업무를 보라 이르거라.

 

다만 이곳의 명의 신료와 백성들은 우리들의 관례에 따라 변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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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한족(漢族)의 변발

 

청 황제는 명의 신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제국의 내치 안정과 정치를 위해 각종 준비를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청 황제는 각지에 왕들과 장수들을 보내 명나라의 서쪽과 남쪽을 점점 평정해갔다.

 

항복하면 무자비한 살육은 없었지만, 끝까지 저항하면 모조리 분쇄하였다.

 

그리고 변발을 하지 않고 저항해도 청의 사자들에게 목숨을 잃거나 모진 탄압을 받았다.

 

(5) 명(明)의 신하들이 남명(南明) 체제를 구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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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숭정제는 자살하고, 명의 수도인 북경(北京)이 함락됨으로써 명은 정식적으로 멸망하였다.

 

하지만 명의 신하들은 저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남경(南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명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특히 '전겸익'이라는 당대 명망이 높은 대학자를 중심으로 남명 조정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전겸익 문하에는 이 본문의 주인공인 정성공도 있었다.

 

정성공은 어린 시절에 전겸익 밑에서 여러 학문을 배우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여러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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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자 전겸익은 명의 유신들을 결집해 남명을 구축했지만, 황제 자리는 한시라도 비워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경에 모인 명의 신하들은 황제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 거듭 논쟁을 벌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거듭 정치적 투쟁이 벌어져 당쟁 싸움이 격화되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복왕(福王) 주유숭이 남명 신료들의 옹립으로 황위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주유숭은 정사에 관심이 없고 매우 방탕한, 즉 황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한시라도 황위를 비워둘 수 없기에 급하게 주유숭을 황위로 옹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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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황제는 옹립되면서 황위는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남명 조정에게 있어서 청나라군을 막을 변변한 병력도, 물자도, 자금도 없었다.

 

그래서 강남(江南) 지역의 토호와 군벌 세력들에게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관작을 하사하는 등 그들과 접촉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중에 정지룡(정성공의 아버지)의 해상 군벌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근데 내가 서두에서 밝혔지만, 정지룡은 정성공과는 다르게 철저히 이해 타산적인 인물이었다.

 

자신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명(明)과 관계를 맺을 수도, 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나중에 아들 정성공과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6) 양주(揚州)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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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팔기군의 말발굽은 대륙을 준동하고 있었다.

 

청의 명장 아지거, 도도 등이 군대를 이끌고 계속 남진하고 있었으며, 청에 투항한 오삼계 역시 그러하였다.

 

남명의 장수들은 청의 기세에 두려워하여 항복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청은 항복한 자들에게 관작과 땅을 하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유혹을 뿌리채지 못하고 남명의 장수들과 고위급 신하들도 청과 접촉하거나 투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의 장수인 도도가 이끈 군대가 양자강(양쯔강) 방어선까지 진군하였다.

 

남명의 장수들은 대부분 투항했지만,

 

양주(揚州) 지역의 병부상서 사가법(史可法)은 명 왕조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며 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일대 격전이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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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장수 도도는 양주(揚州)에 항복한 한족 장수들을 보내 항복을 권유케 하였다.

 

그러나 사가법은 청의 회유와 항복에 굴하지 않고 거절하였다.

 

이후 도도는 항복한 명나라 장수 이우춘을 보내 사가법에게 항복하게 하였지만,

 

사가법은 성벽 아래에 있는 이우춘을 겨누어 활을 쏘아 죽여버렸다.

 

이에 도도는 사가법이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인지하고 즉각 공격 채비를 갖추었다.

 

사가법 : 사랑하는 병사들아 듣거라! 그대들이 항복하겠다면 그리하라. 나는 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항복하라고 하지 마라! 나는 명 제국의 대신이니, 여기서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사가법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갑옷을 입고 통곡하자, 병사들은 한 목소리로 높여 외쳐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양주(揚州)를 결사적으로 지킬 것입니다!"

 

성 내부의 열기는 뜨거워졌고, 양주 백성들도 무기를 들고 성벽으로 자원해 싸우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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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청나라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사가법이 성벽 곳곳에 배치했던 소형 대포인데,

 

이 소형 대포의 포격술은 유럽에서 온 예수회 사제들이 명나라에 전해 준 기술이었다.

 

사가법은 이 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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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는 마침내 공격을 개시하였고, 사가법은 역시 대포로 대응해 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청군 수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으며,

 

청나라 장수 도도는 양주가 도저히 함락이 되지 않자 분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되면서 청나라군의 사망자가 늘자,

 

성벽 근처에 청나라군 시체가 토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나라군 병사는 아군의 시체를 딛고 성벽 위로 접근했으며, 전투의 형세는 급히 달라지게 되었다.

 

백병전 과정에서 명나라군은 밀리기 시작하였고, 청나라군은 이러한 명나라군을 닥치는대로 살육하였다.

 

사가법은 칼로 청나라군 몇몇을 베었지만, 도저히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도도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그대가 비록 적장이지만, 명 왕조의 충성심과 항전 의지는 높이 평가하오.

 

그대는 우리에게 귀순하여 청을 위해 일할 생각이 없소? 황제께서는 기뻐하시어 높은 벼슬을 내릴 것이외다."

 

하지만 명 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각오로 싸운 사가법의 대답은 단호했다.

 

"죽음 이외에 더 바랄 것이 없소이다."

 

도도는 잠시 눈을 감다가 이내 사가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제국을 위한 충신의 지조를 지키도록 하시오."

 

사가법의 목은 땅에 떨어졌고, 도도는 곧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리 선언하였다.

 

"닷새 동안 성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

 

사가법이 처형된 이후에도 성 내부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양주(揚州)의 군사와 백성들은 청에 맞서 끝까지 싸웠지만, 도저히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성이 함락된 이후에 도도의 군대는 10일 동안 끔찍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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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십일기>에 따르면 양주에서 죽은 양주 백성들만 해도 그 숫자가 800,0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저것이 과장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무튼 양주(揚州)의 글자가 새긴 전각이 피에 떠다닐 정도라고 하니,

 

참혹한 살육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양주(揚州)가 함락되자 청나라 대군은 즉각 남명의 양자강 방어선을 도하하기로 하였다.

 

남명의 최후도 얼마 남지 않았다.

 

<3줄 요약>

 

1. 숭정제가 자살하고, 이자성이 북경에 난입하면서 명은 몰락하게 되었다.

2.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남명 조정을 구축하였으며, 새 황제를 옹립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3. 그러나 청 대군의 남하로 남명의 요충지인 양주(揚州)가 함락되었으며, 청군은 양자강 도하를 하기에 이른다.

 

<참고 자료>

 

부흥 카페, "명나라의 마지막 이야기"

해적왕 정성공

엔하위키, 위키백과 사진 및 글 자료 참고

명 제국의 몰락과 황혼

춘추흥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