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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an fool some of the people all the time,

and all of the people some of the time,

but you cannot fool all of the people all the time.

                                         -  Abraham Lincoln

 

 

몇몇 사람을 영원히 속이거나, 모든 사람을 잠깐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  링컨

 

 

 

 

 

II. 북한 개입의 실상과 조갑제의 착각


 

 

북한은 광주폭동에 깊숙히 개입했으며 실제로 전과정을 배후 조종했다. 수없이 많은

증거 자료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북한의 개입을 배제할 경우 5.18은 말도 되지 않는

불가사의에 빠져버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광주폭동과 같은 대규모의 조직적인 시민군

작전운용에 지휘부가 없다. 심지어 정보수집 부대와 선무방송 부대까지 운용한 시민군에

작전 지휘부가 없다는 것이다. 폭도측의 학생수습위원회는 상황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태 수습을 위해 그제서야 생긴 것으로 지휘부가 아니다.

 

 

수도 없이 많은 북한 개입 증거 자료에 대해 좌파정권측은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외로 보수우익 언론인 조갑제씨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좌파들은 이것을 북한 개입 증거에 대한 유일한 반박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즉, 좌파들이 조갑제를 이용해 5.18 진상규명을 반박하고 있는 희한한 형국이다.

 

조갑제는 2012년 10월 7일 트위터를 통해 충격적인 망언을 하였다.

 

“계엄령하에서 철통같이 포위된 광주에 수백명의 북한군이 어떻게 들어오나? 수백명

죽었다는데 시신은 다 어디로 갔나? 시민, 시위자, 진압군인, 취재기자들 가운데

북한군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거나 북한군개입설을 믿는 이는 전무하다”

 

 고 주장함으로써 호남 좌파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며 북한개입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조갑제의 이 발언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연륜과 기자 경력에 비해 논리가 너무 나이브해서

충격적이고, 사실과 전혀 일치되지 않는 주장이라 충격적이다. 조갑제의 이 발언은

그가 그동안 써온 다른 글 전체의 신용성을 상당히 의심해야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지는

발언이다.

 

 

거론되는 북한요원 600명이 광주사태전후로 침투한 것인지 이미 남한에서 활동중인

대남특수요원들을 집결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갑제의 주장과 정반대로 1980년

5.18을 전후해 수많은 북한 침투요원들이 검거되었다.

 

① 3.23. 한강하류로 수중 침투해 오는 간첩 3명 사살


② 3.25. 무장간첩선이 포항 앞 바다에 침입, 우리 어부 3명을 사살하고 도망하다가

해공군 작전에 의해 격침

 

③ 3.27. 금화지구 비무장지대에 3명이 침투, 그 중 1명만 사살


④ 5.12.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⑤ 5.15.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⑥ 5.20.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생포(수사자료 증9, 계엄사 47쪽). 


⑦ 6.21. 서산 앞바다 무장간첩선 침투, 9명 사실, 1명 생포


 

5.23에는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이 검거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광주폭동

당시 시민들이 간첩의심자를 잡아서 공수부대에 넘긴 사건까지 있었다. 아래와 같은

탈북자의 증언도 있다.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뻔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 정도로 생각했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전 조선동맹작가 2009, 330).

 

동일한 증언은 수도 없이 많다.

 

 

 1980년 5월 21일 북한군이 무기를 탈취해서 시민군들에게 나눠주면서 진압군에게

사격을 하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왜 총을 쏴서 사람을 죽여야 되는 가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면서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고 꼬치꼬치

따지는 시민들도 있었다 (전 북한 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 2009, 381).

 

그 증언은 사실이다. 정체불명의 무장시민군이 갑자기 등장하여 무기분배를 하였을 때

그들이 선동하는 대로 군경을 향하여 총을 쏘며 시민군이 된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서워서 도망갔으며, 문을 굳게 닫고 집밖에 나오지 않거나,

피난을 갔다. 그 사실을 서울 송파구 이모씨는 이렇게 전한다: “직접 남조선에 갔다가

온 사람에게 들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들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2009,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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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의 이요원 역으로 나오는 선무방송 요원 전옥주(본명 전춘심, 당시 31세)를

가리키며  "저 여자는 간첩임에 틀림없다!"라고 외친 광주시민들도 있었다

(전춘심 1989;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4014:909).

 

 광주시민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있었으며, 그래서 5월 22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시민들 스스로 전옥주를 당국에 연행하였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전옥주가 27일 새벽에 시민군 동원령 가두방송을 했던 것이 아니라,

26일 시민들에 의해 연행되어 수사당국에 넘겨졌다. 광주시민으로서 동아일보

주재기자였던 김영택은 그 사실을 이렇게 보도한다: “그녀의 완벽한 선동실력을

본 시민들 중에는‘ 광주항쟁을 악용하기 위해 북으로부터 파견된 간첩이 아닌가’

또는 ‘광주항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어느 쪽에서 투입한 프락치는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김영택 1996, 104). 훗날 분명히 확인된

것은 김대중 지지세력이었던 가톨릭농민회가 전옥주를 시민군 선전조로 끌어들였으며,

이후 이휘호 여사 등 김대중 핵심그룹과 전옥주는 친분이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북한은 방송으로 시민군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기에 북한 간첩들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챈 시민군들이 있었다. 며칠간 북한방송을 들었으며 북한이

방송해 주는 대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시민군 이채춘은 광주에서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24일에 이미 간파하였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재춘 1988). 
(참고로 당시는 시민군이 방송사를 파괴하여 남한방송을 수신할수 없었으며,

시민군측은 광주시민들에게 북한방송을 청취할 것을 선무했다.)

 

호남정치세력에 의해 광주사태의 영웅으로 미화된 윤상원은 광주시민들 사이에 퍼진

간첩 침투설을 이렇게 언급하였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투항파들은 무기를

반납하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프락치들은 또 어떤 줄 아십니까? 도청 안에 쫙 풀린

놈들은 간첩이 있다며 혁명군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박노해 1989, 108) 즉, 항간에 퍼진 간첩 침투설을 윤상원도 알고 있었으며,

23일의 운동권과의 대화 때 그 설을 언급한 것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이창룡처럼 전남 해안 보성을 경유 광주로 침투한 북한군들이 있었는데,

박금희 양의 부모도 그런 수상한 자를 현장 목격하였다: “ 26일도 상무관에 들렀다가

걸어서 집까지 오는데 광천국민학교 앞에서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한 명이

너덧명의 사람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자신의 차를

타고 광주로 오다가 길이 막혀 보성에다 차를 맡기고 광주로 들어왔다고 했다”

(박명민, 문귀덕 1988, 180).
 

또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에는 탈북자 정수반의 증언이 있다. 북한에서 5.18 영상을

단체 관람하던 중 북한주민이 "와, 우리 아들 경철이 나왔다" 면서 경철이 엄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대견해했다고 한다.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한에서 시간대 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이 있고, 도저히 현장에 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현장 상황이 북한방송에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계엄군측에서 북한방송을 들으며 상황을 파악할 정도였다.

 

또한 3명의 독침 살해 사건이 발생한 점, 불온전단 내용이 북한 주장과 일치하는 점,

도청난동자들의 조편성이 빨갱이 식 조직이라는 사실, 구호들이 적색 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한 점 등등 이외에도 북한 개입의 증거와 증언은 수도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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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특수훈련을 받은 특수요원이 아니고는 단 4시간만에 전국 17개소 44개 무기고를

동시에 털어서 간첩 170명이 수용되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집중적으로 5차례나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들이 탈취한 무기는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가 피탈됐고, 소화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가 피탈됐다.  779대의 차량을 탈취했고, 이들 779대는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였다. 이는 사단 규모의 차량 수

해당한다.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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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 껌과 과자를 주며 합세를 권장했다(수사자료 증9, 138쪽,

5.18사건의 사료 33항)는 내용도 있는데 어린이를 전투에 합류시키는 것은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전술로서 한국전과 월남전 등에서 방패막이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수법이다.

 

 



 

III. 광주폭도들의 주장


 
 
당시는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고, 국가 비상사태를 맞아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국무총리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이 되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을 임명하였던 시기였다.

 

비상계엄령은 국가 비상사태시 국가안보를 위해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비상권한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헌법의 비상계엄 조항도 다음과 같다.

 

제77조

①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②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한다.
③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즉 현재 시점이라도 국가비상사태시 비상계엄을 통해 합헌적으로 국민의 자유와 집회,결사를

봉쇄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더 큰 국익과 국가안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헌법이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도리어 “최규하 하야”,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무장 시위를 벌인 것이다.

 

 

광주가 전두환의 집권에 항거하여 일어섰다는 말은 완전한 날조이자 거짓말이다.

당시 시위대는 물론 공수부대 군인들조차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자를 들어본 일도 없었다.

5월 18일에야 불순분자들이 주동하는 선전물과 구호를 통해 최초로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었다.

 

 


전두환의 12.12.는 15년간의 운동권 정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무슨 군대를 이끌고 나라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 엎은 쿠데타가 아니었다. 대통령도 그대로, 모든 장관도 그대로,

국회도 그대로, 모두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단지 합동수사본부장의 업무상 수사 권한에

따라 시해사건에 방조 혐의가 있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 하였을 뿐이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음에도 정승화 측이 반발함으로써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정승화

계열 수도권 일부 지휘관들이 강력히 연행에 반발하며 군대를 움직였다.

국방장관이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정승화 친위세력이 군대를

움직이자 헌병단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에 충성하려했던 수경사령관 등을 체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12.12 다. 이를 두고 하극상이니 쿠데타니 헛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후 12.12.는 후대의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김대중의 압박 및 김대중과의 거래를 통해 위와 같은 우발적인 사건을

쿠데타라고 뒤집어 씌운 후 말을 바꾸고 억지 법률을 만들어 처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법률의 모든 기본원칙(소급입법금지, 일사부재리, 형벌불소급, 처분적 법률 금지)을

깡그리 무시하고 12.12와 5.18을 엮어서 전두환을 처벌하는 엄청난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로써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사법의 정당성을 상실하고 정치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부터 김대중의 선전선동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가 완전히 왜곡되기에 이른 것이다.


 

5.18 당시 일반 국민은 지금의 일반국민들이 기무사령관의 실명을 모르듯이 대부분

전두환의 이름을 몰랐다. 당시는 흑백TV조차 보급이 덜된 시절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최규하가 김대중 등을 특별사면해주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최규하를

유신 잔당이라며 최규하 하야를 요구하고 운동권 끄나풀들을 동원해 서울에서 시위를 촉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박정희가 서거하자마자 김대중과 김영삼이 정권을 잡기

위해 나라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가 거절하자 김대중은 5월 19일까지 하야하지 않으면 5월 22일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킬 것임을 선언하는 "민주화 촉진 선언"이라는 것을 하게된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의

협박이었다. 이것이 명백한 내란인 이유는 당시 헌법인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 의해

전국민이 투표하여 91.5%의 찬성으로 개헌된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헌법이었던 것이다.

 

즉, 헌법 개정 세력인 국민이 내린 “근본결단”으로서 이는 유일하게 헌법위에 존재하는

국민의 의사인 것이다. 국민의 “근본결단”에 의해 개정된 이 헌법에 의해 대통령이 된

최규하에게 하야를 요구하고, 하야하지 않을 경우 국민봉기를 일으키겠다고 하면서

예비 내각명단을 만드는 등의 작당을 한 것은 명백한 내란 음모였던 것이다.

이는 지금도 동일하다. 누군가 현직 대통령에게 하야하지 않으면 국민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최후 통첩을 한다면 이는 내란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종북세력 문익환과 손잡고 김대중이 만든 “국민연합”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식명칭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김대중이 민주화 촉진선언이라는 것을 통해, 이 “국민연합”의 주도하에

국민 봉기를 할 것임을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야권의 윤보선 등은 김대중의 술수를

읽고 이를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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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민연합”의 이름은 광주폭동 당시 주도층이 사용한 명칭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결국 광주폭동이 김대중과 종북세력에 의해 사전에 미리 계획된 무장봉기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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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이와 같은 내란 음모에 5월 17일 최규하는 김대중의 무장봉기를 막기 위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언하고 김대중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김대중이 연행되자마자

5월 22일로 계획되어있던 국민연합의 무장봉기를 앞당겨 실행한 것이 바로 5.18 광주폭동인 것이다.

 

 

그 이후 어리석은 양김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 나라의 현대사는 걸레처럼 왜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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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