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굴비장의 변증법
— SKYI 수출전쟁: 약국이 된 무대
‘정치창녀’ ‘암놈’ 같은 표현은 작중 방송과 여론이 붙인 조롱성 별칭이며, 소설은 그 이름을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등장하는 학교·기업·방송은 모두 허구입니다.
1. 또 여론을 가지고 놀았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은 또 퇴출되었다.
이유는 지난 시즌과 달랐다. 지난 시즌엔 ‘두 쪽을 동시에 선택했다’는 이유였다. 이번엔 ‘여론을 가지고 놀았다’는 이유였다. 매체는 그녀의 밀당 시나리오를 폭로했다.
“1주차 간고등어, 2주차 배추, 3주차 눈물, 4주차 충격 반전. 전부 대본이었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 시청자를 기만한 여론 조작자.”
여론은 분노했다. 그 분노는 정확히 방송국이 원하는 모양이었다. 방송국은 그 분노를 편집해서 예고편에 넣었다. 자막은 이랬다.
“여론의 설계자, 여론에 심판받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은 무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저는 여론과 대화했습니다. 다만 대화의 순서를 제가 정했습니다. 그게 죄라면, 이 방송은 처음부터 죄를 요구했습니다.”
방송은 그 말을 3초만 내보냈다. 대신 그녀가 눈물을 닦는 장면을 15초 내보냈다. 시청자들은 울었다. 그리고 그녀를 미워했다. 두 감정은 같은 손가락으로 동시에 누를 수 있는 버튼이었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은 논산으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비닐하우스 앞에서 말했다.
“딸기밭은 아직 있단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아직 멍청하단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은 웃었다. “아버지, 텔레비전은 멍청한 게 아니라, 우리를 멍청하게 만드는 거예요.”
2. 숙명여대의 계산
숙명여대에는 쑥 농가 출신 신입생이 있었다. 이름은 배수민.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도에서 쑥을 재배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집안은 3대째 쑥을 키웠고, 수민은 어릴 때부터 쑥 냄새를 맡고 자랐다.
숙명여대 홍보팀은 이 학생을 주목했다.
“쑥. 좋습니다. 쑥은 한국적이고, 건강하고, 여성적이고, 뭐든 붙일 수 있습니다. 숙명여대의 브랜드를 쑥으로 밀어봅시다.”
숙명여대 홍보팀은 수민을 불러 말했다.
“수민 씨, SKYI 수출전쟁에 나가 주십시오. 학교가 전폭 지원하겠습니다. 대신 인터뷰에서 ‘숙명여대’를 세 번 이상 말해 주십시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물었다. “저는 상품입니까?”
홍보팀이 웃었다. “학생은 학교의 얼굴입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생각했다. 얼굴은 상품이 아닌데.
그런데 여론이 먼저 움직였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이 퇴출된 직후, 포털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번엔 쑥이 대세다.”
“딸기 다음은 쑥이다. 쑥은 약이다.”
“숙명여대 쑥 농가 딸 나왔으면 좋겠다.”
여론의 추천은 방송국의 결정보다 빨랐다. 제작진은 숙명여대에 전화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 씨를 다음 시즌에 투입하겠습니다.”
숙명여대 홍보팀은 환호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조용히 짐을 쌌다. 그녀는 쑥 한 단을 가방에 넣었다. 그 냄새가 서울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지켜 줄 것 같았다.
3.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새 시즌 첫 무대.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쑥을 들고 나왔다. 경쟁 구도는 다시 원점이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의 안동간고등어,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의 태백배추. 그리고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의 강화도 쑥.
사회자가 외쳤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 씨, 파트너를 선택하십시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대답하기 전에 실험부터 했다.
첫 번째 실험. 쑥 간고등어 샌드위치. 쑥을 데쳐서 간고등어 순살과 함께 호밀빵에 넣었다. 심사위원이 한 입 먹고 표정이 굳었다.
“쑥이… 이깁니다.”
두 번째 실험. 쑥 배추 김치. 쑥을 고춧가루 대신 넣었다. 심사위원이 한 입 먹고 물을 찾았다.
“쑥이… 또 이깁니다.”
세 번째 실험. 쑥 딸기잼.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이 남기고 간 딸기잼 레시피에 쑥을 넣었다. 심사위원이 한 입 먹고 조용히 말했다.
“이건 잼이 아니라, 쑥입니다.”
네 번째 실험. 쑥 쑥. 쑥만 데쳐서 냈다. 심사위원이 말했다.
“이건… 쑥이네요.”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무대에 앉아 있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알았다. 쑥은 너무 강했다. 쑥은 무엇과 만나도 쑥이 되었다. 그것이 쑥의 미덕이고, 쑥의 저주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쑥이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쑥, 고립되다.”
여론은 웃었다. 그리고 빠르게 지루해했다. 시청률이 떨어졌다. 제작진이 그녀에게 말했다.
“수민 씨, 자진 하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계속하시겠습니까.”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대답했다.
“자진 하차하겠습니다.”
그녀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숙명여대 홍보팀에 전화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학교 얼굴이 되지 못했습니다.”
홍보팀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음 학기 모집 요강에 쑥 사진 넣으려고 했는데, 그건 그대로 씁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전화를 끊고 웃었다. 역시 나는 상품이었구나.
4. 2인자의 등장
그때 무대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 영광 굴비 큰손집 딸. 지난 시즌 ‘정치창녀’로 몰린 사람. 그녀는 순살굴비 설비를 가지고 있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말했다.
“잠깐만요. 저는 수민 씨를 데리러 왔습니다.”
제작진이 당황했다. “지우 씨, 이번 시즌 출연자 아닙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웃었다. “저는 2인자입니다. 2인자는 무대에 난입할 권리가 있습니다. 규칙서 14조 3항에 그렇게 써 있습니다.”
규칙서에 그런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시청률이 오르고 있었다. 제작진은 그녀를 들여보냈다. 병맛은 시청률의 어머니였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수민 씨, 쑥이 이기는 게 문제입니까? 그럼 쑥이 이기게 하면 됩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쑥을 재료로 썼습니다. 그래서 쑥이 모든 걸 이겼습니다. 이번엔 쑥을 국물로 쓰겠습니다. 쑥을 우려낸 물에 굴비를 절이겠습니다. 거기에 한약재를 넣겠습니다. 당귀, 천궁, 감초, 대추, 황기. 그리고 굴비는 쑥 물에 절여서 ‘쑥굴비장’이 됩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물었다. “그게… 어장입니까?”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건 약입니다. 그리고 약은 원래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약은 몸에 어울립니다.”
5. 쑥굴비장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영광으로 내려갔다. 순살굴비를 준비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도로 내려가 쑥을 캤다. 두 사람은 영광의 작업장에서 쑥을 우려냈다. 쑥 물은 진한 녹색이었다. 거기에 한약재를 넣었다. 냄새가 이상했다. 바다 냄새와 약국 냄새가 싸우고 있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말했다. “좋아요. 싸우게 두세요. 싸우다 보면 섞입니다.”
40일 뒤, 뚜껑을 열었다. 쑥굴비장. 색은 검푸르고, 냄새는 약국 같고, 맛은… 이상하게 깊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맛을 보았다. 그리고 울었다.
“이건… 우리 할머니 냄새예요.”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웃었다. “좋습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가장 강한 브랜드입니다.”
그들은 쑥굴비장을 태백배추에 넣어 김치를 담갔다. 쑥굴비장 배추김치.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맛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건 김치가 아니라… 보약입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도 맛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반칙입니다. 약을 팔면 안 됩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대답했다. “약을 파는 게 아닙니다. 김치를 파는 겁니다. 다만 몸에 좋다고 써 놓는 겁니다.”
6. 선택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무대에 다시 섰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서 있었다. 제작진은 ‘2인자 난입’이라는 자막을 띄웠다. 시청률이 폭발했다.
사회자가 물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 씨, 파트너를 선택하십시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안동간고등어를 보았다. 태백배추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태백배추를 선택합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일어났다. “왜 저입니까.”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대답했다.
“간고등어는 이미 소금이 있습니다. 소금에 쑥을 넣으면 쑥이 소금에 죽습니다. 그러나 배추는 비어 있습니다. 배추는 무엇이든 품습니다. 쑥굴비장을 품으면 배추는 약이 됩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물었다. “그럼 저는요.”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대답했다. “도현 씨는… 다음에 제가 쑥굴비장 샌드위치를 만들 때 부르겠습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웃었다. “그건 약빤 샌드위치네요.”
관중석이 웃었다. 병맛은 전염됐다.
7. 서울대 재벌 신입생, 아빠를 데리고 오다
쑥굴비장 배추김치는 수출 실적을 빠르게 올렸다. 8주째 80만 달러. 그때 무대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 HS푸드 회장의 아들. 그는 김치를 한 입 먹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약입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말했다. “김치입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말했다. “약입니다. 김치 모양을 한 약입니다.”
그는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이거 드셔 보셔야 합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30분 뒤, HS푸드 회장 한정수가 무대에 등장했다. 정장 차림에, 손에는 건강검진 결과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김치를 한 입 먹었다. 그리고 두 입 먹었다. 그리고 세 입 먹었다.
회장이 말했다.
“이거… 내 속이 편하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나는 30년간 김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김치가 나를 편하게 한 적은 없습니다. 이건 다릅니다. 이건 김치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병맛은 정점을 찍었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HS푸드 회장, 김치에 감동하다.”
회장이 말했다. “인수하겠습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회장이 물었다. “또 조건입니까.”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대답했다.
“첫째, 쑥굴비장의 표준 배합비를 공개 표준으로 등록합니다. 둘째, 강화도 쑥 농가와 영광 굴비 작업장과 태백 배추 농가에 각각 설비를 투자합니다. 셋째, 지역 협동조합이 지분 51%를 갖습니다. 넷째, 회장님은 매일 아침 김치 한 숟가락을 드십니다.”
회장이 물었다. “넷째는 왜입니까.”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대답했다. “그게 브랜드입니다. 회장님이 드시는 모습이 광고입니다.”
회장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다만 나는 아침에 죽도 먹습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말했다. “죽에 넣으셔도 됩니다.”
회장이 웃었다. “그럼 계약입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은 아버지와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악수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저는 이번엔 인수가 아니라 동업을 배웠습니다.”
회장이 아들을 보았다. “누구한테 배웠냐.”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를 보았다. “저 사람한테.”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다. 결혼해라.”
관중석이 폭발했다. 병맛은 계약서보다 빠르게 퍼졌다.
8. 사랑, 그리고 쑥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과 자주 태백에 갔다. 그녀는 배추밭에서 쑥을 심었다. 태산이 물었다.
“배추밭에 쑥을 심어도 됩니까.”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대답했다. “쑥은 어디서든 자랍니다. 그래서 쑥입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웃었다. “당신은 쑥 같습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물었다. “칭찬입니까.”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대답했다. “칭찬입니다. 쑥은 뽑아도 뽑아도 자라니까요.”
그들은 배추밭에서 손을 잡았다. 쑥 냄새가 났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논산으로 갔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은 딸기밭에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론 조작자’였다. 도현이 말했다.
“하린 씨, 저는 이제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이 웃었다. “저는 아직 계산합니다. 버릇이에요.”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말했다. “그럼 같이 계산합시다. 혼자 계산하면 창녀고, 같이 계산하면 동업입니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이 웃었다. “그 논리는 위험합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말했다. “이 방송에서 위험하지 않은 논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딸기잼을 만들었다. 쑥은 넣지 않았다.
9. 에필로그 — 약국의 새벽
이듬해, ‘쑥굴비장 배추김치’는 수출 2,100만 달러를 넘겼다. HS푸드 회장은 매일 아침 김치를 먹고 건강검진 결과지가 좋아졌다. 그는 방송에 나와 말했다.
“나는 김치 덕분에 살았습니다.”
여론은 그를 ‘김치 회장’이라 불렀다. 병맛은 브랜드가 되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도로 돌아가 쑥을 심었다. 그녀는 숙명여대 홍보팀에 전화했다.
“모집 요강에 쑥 사진 넣으세요. 대신 제 이름도 넣어 주세요.”
홍보팀이 말했다. “이름은 왜입니까.”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대답했다. “저는 얼굴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영광에서 순살 설비를 돌렸다. 그녀는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과 자주 만났다. 서준이 물었다.
“지우 씨, 우리 결혼합니까.”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대답했다. “계약서부터 쓰세요.”
서준이 웃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습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은 태백에서 배추를 키웠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에서 쑥을 캤다. 그들은 주말마다 만나 김치를 담갔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안동에서 간고등어를 말렸다.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은 논산에서 딸기잼을 만들었다. 그들은 가끔 넷이 모여 ‘쑥굴비장 딸기잼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맛은 이상했다. 그러나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다.
어느 날, 다섯 사람은 영광의 바닷가에 모였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물었다.
“우리 이번엔 이긴 걸까.”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이 대답했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이번엔 제가 쑥을 이겼어요.”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웃었다. “아니요. 쑥이 당신을 이긴 겁니다. 그래서 약이 된 거예요.”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말했다. “다음 시즌에는 규칙을 바꾸겠습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물었다. “어떻게.”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대답했다. “이름을 지우는 규칙으로.”
이화여대 신입생 오하린이 웃었다. “그 말 이제 다섯 번째예요.”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로 하겠습니다.”
TV에서는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SKYI 수출전쟁,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TV를 껐다. 방 안은 조용했다. 간고등어 냄새와 배추 김치 냄새와 쑥 냄새와 딸기잼 냄새와 한약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이상했다. 약국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새벽 같기도 했다.
다섯 사람은 여전히 대학 신입생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끝.
배추로 짠 옷
— SKYI 수출전쟁: 광화문의 발명
등장하는 학교·기업·인물·방송은 모두 허구이며, 작중 여론의 조롱 표현은 소설이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상입니다.
1. 정치질의 심판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과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함께 퇴출되었다.
이유는 ‘정치질’이었다. 방송은 두 사람이 무대 뒤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몰래 찍어 내보냈다. 화면에는 화이트보드가 잡혔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주차: 쑥 고립 서사 → 동정 확보
2주차: 2인자 난입 → 시청률 상승
3주차: 회장 등장 → 권위 차용
4주차: 결혼 떡밥 → 여론 폭발
여론은 분노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 쑥 팔아 정치질.”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 또 판 짰다.”
“이 방송은 이제 정치판이다.”
그 말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 말이 문제였다. 시청자들은 정치판을 싫어하면서 정치판을 봤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도로 내려가며 말했다.
“나는 쑥을 팔았지, 정치를 팔지 않았습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영광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정치를 판 건 나가 아니라 이 방송입니다.”
방송은 두 사람의 인터뷰를 편집했다. 대신 두 사람이 눈물을 닦는 장면을 내보냈다. 시청률은 또 올랐다.
2. 이대의 귀환
이화여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오하린이 아니었다. 오하린은 이미 두 번 퇴출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후배를 추천했다.
“제가 또 나가면, 여론은 ‘또 저 여자’라고 할 겁니다. 이번엔 새 얼굴이 필요합니다.”
오하린의 매서운 눈에 들어온 후배가 있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 은행장의 딸. 아버지는 국내 3대 시중은행의 회장이었고, 어머니는 사학재단 이사였다. 윤서아는 이화여대에 입학할 때 이미 기숙사 방을 두 개 썼다. 하나는 침실, 하나는 옷방이었다.
오하린이 말했다.
“서아야, 이 무대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럽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싸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웃었다.
“언니, 저는 더러운 건 상관없어요. 비싼 게 중요하죠.”
오하린은 그 웃음을 보고 불안했다. 그러나 추천은 추천이었다.
3. 수천억의 정치판
세 번째 시즌이 시작될 무렵, SKYI는 이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졸업생들이 움직였다. 고려대 총동문회, 연세대 총동문회, 이화여대 동창회, 서울대 총동문회. 그 뒤에는 지자체, 협동조합, 유통 대기업, 사학재단, 그리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동의 간고등어 협동조합은 정치인을 통해 예산을 요청했다. 태백의 배추 농가는 국회의원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논산의 딸기 농가는 사학재단 이사들과 식사했다.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수출 지원금, 지자체 매칭 사업, 농림 예산, 청년 창업 펀드, 대기업 협력사 납품 계약. 어림잡아 수천억 원대였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은 회의실에서 말했다.
“이제 이 프로그램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건 대리전입니다. 지자체가 싸우고, 대학이 싸우고, 정치인이 싸웁니다. 우리는 그 싸움의 얼굴입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뭡니까.”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대답했다. “마스코트입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낮게 웃었다. “마스코트가 수천억을 움직이면, 그건 마스코트가 아니라 배우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4. 배추를 선택하다
새 시즌 첫 무대.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두 개의 제품 앞에 섰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의 안동간고등어,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의 태백배추.
사회자가 물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 씨, 파트너를 선택하십시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추를 집었다.
“태백배추를 선택합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일어났다. “왜 저입니까.”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대답했다.
“간고등어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이미 돈입니다. 배추는 아직 돈이 아닙니다. 배추를 돈으로 만들면, 그게 제 실력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배추, 돈이 되다?”
여론은 웃었다. 그리고 기대했다.
5. 규칙
그러나 규칙은 잔인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무대에 올라 말했다.
“이번 시즌 규칙입니다. 파트너를 하나 고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선택한 파트너와 나머지 파트너를 섞어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배추와 간고등어를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단순한 김치나 샐러드는 불가합니다. 새로운 카테고리여야 합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배추를 선택했는데, 왜 간고등어도 써야 합니까.”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이 대답했다. “그게 이번 시즌의 변증법입니다. 정과 반, 그리고 합.”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무대에서 내려와 밤새 회의했다. 그녀의 팀에는 마케팅 박사, 식품공학 석사, 특허 변리사가 있었다. 그들은 밤새 아이디어를 냈다.
배추 간고등어 젤리. 실패했다. 맛이 없었다.
배추 간고등어 아이스크림. 실패했다. 더 없었다.
배추 간고등어 향수. 실패했다. 향수가 아니라 하수구였다.
배추 간고등어 반려동물 사료. 개가 먹지 않았다. 개도 안다.
배추 간고등어 캔들. 켜자마자 집이 김치 냄새가 났다.
배추 간고등어 NFT. 아무도 사지 않았다. 돈이 있어도 사지는 않았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책상에 엎드렸다.
“돈으로는 아이디어를 못 사나.”
옆에서 비서가 말했다. “사실 수백억으로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좋은 아이디어는 팔지 않습니다.”
윤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빽으로 올라가자.”
6. 빽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아버지의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지자체 예산 담당자, 유통 대기업 임원, 사학재단 이사, 방송국 국장. 그녀는 밥을 샀고, 술을 샀고, 자리를 샀다. 방송은 그 장면을 몰래 찍었다. 아니, 찍히게 했다. 그녀는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 돈으로 무대 장악.”
“은행장 딸, 빽으로 순위 조작.”
“이 방송은 이제 재벌 놀이터.”
여론이 폭발했다. 시청자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시청률은 최고치를 찍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돈을 썼습니다. 그리고 돈을 쓴 게 왜 죄입니까. 이 방송은 처음부터 돈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그 규칙을 따른 것뿐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방송은 그 장면을 내보냈다. 그리고 자막을 띄웠다.
“그 말은 맞다. 그래서 더 싫다.”
윤서아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손은 떨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알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에 두 개 있다는 걸. 좋은 아이디어와, 사람의 마음.
7. 광화문
새벽 4시,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광화문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벗고 손에 들고 있었다. 발이 아팠다. 그녀는 걸었다. 세종대로를 따라. 울면서.
민중이 나를 무시한다.
그런데 나는 민중을 만난 적이 없다.
그녀는 세종대왕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동상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글을 만든 사람.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든 사람.
그녀는 멈췄다.
“동상…”
그녀는 동상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동상은 음식이 아니다. 동상은 물건이다.
배추로 동상을 만들면?
배추를 음식이 아니라 물건으로 쓰면?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새벽 4시 30분. 상대는 이화여대 의류패션학과 교수였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지금 깨워서.”
교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말했다.
“배추로 옷을 만들 수 있습니까.”
교수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미쳤습니까.”
윤서아가 대답했다. “네. 그런데 한번 들어보세요.”
8. 배추 섬유
이화여대 의류패션학과 실험실에 배추가 쌓였다. 태백의 배추 농가에서 폐기되는 겉잎과 잎맥. 윤서아는 그것을 사들였다. kg당 300원. 농민들은 웃었다.
“이걸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네.”
연구는 지루하고 더러웠다. 배추 잎맥에서 셀룰로오스를 뽑아내려면 펙틴을 분해하고 리그닌을 제거해야 했다. 알칼리 처리, 효소 처리, 표백, 세척. 실패, 실패, 실패. 7개월째, 섬유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 한 연구원이 말했다.
“모시랑 비슷하게 가면 어떨까요. 모시는 저마 섬유인데, 잎맥의 섬유를 그대로 뽑아 쓰면 질감이 비슷합니다.”
그들은 배추 잎맥을 삶고, 두드리고, 찢고, 다시 엮었다. 8개월째, 첫 실이 나왔다. 손으로 비틀어 만든 30cm의 실. 색은 연한 미색. 질감은 모시 같았다. 조금 더 거칠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그 실을 손에 들고 울었다. 광화문에서 운 것과는 다른 울음이었다.
그들은 이름을 붙였다. 배추모시. 영문명 BAECHU RAMIE. 상표 출원. 특허 출원. 산업재산권 7건. 윤서아의 아버지가 투자한 돈은 480억이었다.
9. 기괴한 디자인
문제는 디자인이었다. 전국 의류·패션디자인학과에서 공모전을 열었다. 주제는 “배추모시로 만드는 미래.” 응모작 3,400점. 심사는 윤서아가 했다.
선정된 디자인들은 기괴했다.
1번. 배추잎 코트. 어깨가 배추잎처럼 겹겹이 겹쳐 있었다. 입으면 사람이 아니라 채소였다.
2번. 잎맥 드레스. 배추 잎맥의 섬유를 그대로 살려, 몸에 잎맥이 흐르는 드레스. 마치 사람이 식물의 혈관을 가진 것 같았다.
3번. 속이 빈 재킷. 재킷 안쪽이 비어 있고, 그 안에 배추모시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브랜드명은 “빈 배추”.
4번. 김치색 코트. 발효 과정에서 나온 색을 그대로 살린 붉은 코트. 냄새는 없었다. 색만 김치였다.
5번. 절임 셔츠. 소금에 절인 배추의 질감을 살린 셔츠. 입으면 몸이 절여지는 느낌.
패션계는 조용했다. 그리고 조용한 게 아니라, 할 말을 잃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이건 옷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윤서아가 말했다. “그럼 사건으로 팝시다.”
10. 런웨이
패션쇼는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배경은 세종대왕 동상이었다. 모델들은 배추모시를 입고 걸었다. 관중석에는 농민, 정치인, 재벌, 기자, 그리고 그냥 지나가던 시민들이 섞여 있었다.
첫 번째 모델이 나왔다. 배추잎 코트. 관중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번째 모델. 잎맥 드레스. 웃음이 멈췄다. 세 번째 모델. 빈 배추 재킷.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네 번째 모델이 나왔을 때, 누군가 박수를 쳤다. 다섯 번째에서 박수가 퍼졌다. 마지막 모델이 나왔을 때, 광화문 광장은 박수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조롱하면서 박수를 쳤다. 이해 못 하면서 박수를 쳤다. 그런데 박수는 진짜였다.
기자가 물었다. “이게 왜 좋습니까.”
한 시민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런데 있어 보여요.”
다른 시민이 말했다. “저건 돈 있어 보여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싼 건 알겠어요.”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무대에 올라 말했다.
“민중이 저를 무시한다면, 저도 민중을 무시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민중은 이해하지 못해도 박수를 쳤습니다. 그게 민중입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그 말은 오만했고, 동시에 정확했다.
11. 여론의 재반전
여론은 다시 갈라졌다.
“은행장 딸, 오만하다.”
“저게 무슨 옷이냐.”
“근데 갖고 싶다.”
“배추로 옷을 만든 건 genius다.”
“아니, 그건 아빠 돈이다.”
“아빠 돈으로 genius를 만들면 그게 실력이다.”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논쟁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 배추모시는 ‘논쟁하는 옷’이 되었다. 사람들은 뜻을 몰라도 샀다.
첫 시즌 판매량은 1만 2천 벌. 수출 계약은 파리와 밀라노에서 왔다. 계약금은 300억. 윤서아의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480억 넣었는데, 300억 계약이면 아직 손해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대답했다. “아버지, 아직 1년입니다. 패션은 10년 봅니다.”
아버지는 웃었다. “너는 은행원이 아니라 도박꾼이구나.”
윤서아가 대답했다. “은행도 도박입니다. 다만 계산된 도박이죠.”
12. 남자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과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은 런웨이를 관중석에서 보았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말했다. “저 옷에 내 배추가 들어갔어.”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말했다. “저 옷에 내 간고등어는 안 들어갔어.”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웃었다. “너는 이번에 진 거야.”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번에 아무것도 안 했어. 그게 문제야.”
그들은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었다. 배추모시 모델들이 지나갔다. 관중들이 박수를 쳤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말했다. “나는 안동간고등어로 저런 걸 만들 수 있을까.”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말했다. “간고등어 가죽?”
둘 다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멈췄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이 말했다. “그거… 되나?”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말했다. “물고기 가죽은 실제로 있어. 비건 가죽의 반대인데, 어쨌든 가죽이야.”
그들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다음 시즌.”
13. 에필로그 — 광화문의 새벽
이듬해, 배추모시는 파리 패션위크에 섰다. 무대 배경은 세종대왕 동상 사진이었다. 프랑스 기자들이 물었다.
“이 옷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통역을 통해 대답했다.
“이 옷은 음식이 아닙니다. 이 옷은 농민의 겉잎입니다. 버려지던 것을 입었습니다.”
기자들이 박수를 쳤다. 그들은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수는 진짜였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안동에서 간고등어 가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은 태백에서 배추모시 원사를 대량 생산하는 설비를 지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은 HS푸드를 통해 유통망을 열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영광에서 순살굴비 설비를 돌리며, 가끔 광화문에 놀러 왔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에서 쑥을 캐며, 배추모시 염색약을 개발했다. 쑥으로 물들인 배추모시는 연한 녹색이었다.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은 논산에서 딸기밭을 지켰다. 그녀는 후배에게 전화했다.
“서아야, 이번엔 여론을 가지고 놀았니.”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대답했다. “아니요. 이번엔 여론이 저를 가지고 놀았어요.”
오하린이 웃었다. “그게 더 좋은 거야.”
어느 날 새벽, 윤서아는 다시 광화문에 섰다. 하이힐은 신지 않았다. 운동화를 신었다. 그녀는 세종대왕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저는 한글은 못 만들었지만, 배추로 옷은 만들었어요.”
동상은 조용했다. 윤서아는 웃었다. 그리고 걸었다. 이번엔 울지 않았다.
TV에서는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SKYI 수출전쟁,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아무도 TV를 켜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새벽을 맞고 있었다. 간고등어 냄새, 배추 냄새, 쑥 냄새, 굴비 냄새, 딸기 냄새, 그리고 배추모시의 미색 실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이상했다. 약국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광화문 같기도 했다.
끝.
밥상의 변증법
— SKYI 수출전쟁: 쌀의 반격
등장하는 학교·기업·인물·방송은 모두 허구이며, 작중 여론의 조롱 표현은 소설이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상입니다.
1. 광화문 이후
배추모시가 파리 패션위크에 서던 날, 고려대 안동간고등어 진영은 조용했다.
조용한 게 아니라, 이를 갈고 있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노트북으로 중계를 봤다. 프랑스 기자가 박수를 쳤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통역을 통해 말했다.
“이 옷은 음식이 아닙니다. 이 옷은 농민의 겉잎입니다.”
강도현은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안동의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저희 간고등어로는 옷을 못 만듭니까.”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간고등어로 옷을 만들면… 냄새가 나지 않겠니.”
“그럼 냄새를 없애면요.”
아버지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현아, 간고등어는 냄새를 없애면 간고등어가 아니야. 그게 문제야. 배추는 겉잎을 버려도 배추야. 우리는 버리면 우리가 아니야.”
강도현은 전화를 끊고 오래 앉아 있었다.
고려대 총동문회가 긴급 회의를 열었다. 회의실에는 안동간고등어 협동조합 이사장, 고려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졸업생 정치인 두 명, 그리고 정체불명의 투자자가 있었다.
이사장이 말했다.
“배추에게 밀렸습니다. 그것도 옷으로. 우리는 식품인데, 배추는 패션이 됐습니다.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예산 문제입니다.”
교수가 말했다.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배추모시보다 강력한 것.”
그때 문이 열렸다.
2. 전자 대기업 아들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이 들어왔다. DK전자 회장의 아들. 그는 명품 시계를 차고, 명품 가방을 메고, 명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고려대 총동문회 사람들이 그를 보았다. 차도헌이 말을 이었다.
“간고등어에 전자를 붙입시다. 스마트 간고등어. 온도 센서가 달린 간고등어. 숙성도를 앱으로 확인하는 간고등어. 이게 미래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교수가 물었다.
“간고등어에 센서를 달면… 맛이 달라집니까.”
차도헌이 대답했다. “맛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비쌉니다.”
투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게 중요하지.”
그래서 그들은 스마트 간고등어를 만들었다. 상자에 센서를 달고, 앱을 만들고, 구독 서비스를 붙였다. 월 9,900원에 간고등어 숙성 알림을 받는 서비스.
방송은 그를 무대에 세웠다.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은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입니다. DK전자 회장의 아들입니다. 저는 간고등어의 미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그리고 여론이 터졌다.
“또 재벌 아들이다.”
“서울대에 재벌 둘? 한서준, 차도헌. 이건 뭐, 재벌 동아리냐.”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있는 것들끼리 다 해처먹는 판.”
“간고등어에 센서? 그냥 간고등어 먹어라.”
여론은 분노했다. 그런데 시청률은 또 올랐다. 방송국은 그 분노를 예고편에 넣었다.
“재벌들의 고스톱, 그 판돈은 수천억.”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무대에서 내려와 차도헌에게 말했다.
“차도헌 씨, 당신 때문에 우리 이미지가 더 나빠졌습니다.”
차도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지보다 매출이죠.”
강도현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화를 냈다.
“간고등어는 매출이 아니라 새벽입니다.”
차도헌이 웃었다. “새벽이 얼마입니까.”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3. 기본으로
그날 밤, 고려대 총동문회는 다시 모였다. 이번엔 회의실이 조용했다.
이사장이 말했다.
“우리는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교수가 말했다. “간고등어입니다.”
이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전에 우리는 농민입니다. 어민입니다. 1차산업입니다. 우리는 기본을 잊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물었다.
“기본이 뭡니까.”
이사장이 대답했다.
“쌀입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배추는 김치가 됐고, 옷이 됐습니다. 딸기는 잼이 됐고, 인삼은 절임이 됐습니다. 굴비는 어장이 됐고, 쑥은 약이 됐습니다. 그런데 쌀은요? 쌀은 아직 밥입니다. 쌀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쌀은 그냥 밥입니다. 그게 쌀의 약점이고, 쌀의 힘입니다.”
교수가 물었다. “쌀로 뭘 합니까.”
이사장이 대답했다. “모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쌀을 데려옵시다.”
4. 여주 쌀농가 아들
며칠 뒤,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여주에서 올라온 쌀농가 아들. 그의 집은 대대로 여주에서 쌀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왕에게 진상하던 쌀”이라고 자랑했고, 아버지는 “이제 왕은 없지만 밥은 있다”고 말했다.
정하람은 회의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저는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입니다. 여주 쌀농가 아들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사장이 물었다. “뭘 모르십니까.”
정하람이 대답했다. “제가 여기 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쌀은 반찬이 아닙니다. 쌀은 밥입니다. 밥은 싸우는 게 아닙니다. 밥은 차리는 겁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교수가 말했다.
“그게… 철학입니까, 변명입니까.”
정하람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 집은 300년 동안 밥을 지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300년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이사장이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새 얼굴입니다.”
정하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싫습니다.”
“왜.”
“저는 무대에 서본 적이 없습니다. 말도 잘 못합니다. 그리고 쌀은… 재미없습니다.”
이사장이 웃었다.
“재미없는 게 우리의 무기입니다.”
5. 쌀의 절망
새 시즌 첫 무대.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은 쌀 한 포대를 들고 나왔다.
“저는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입니다. 여주 쌀농가 아들입니다. 이건 쌀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했다. 사회자가 물었다. “그다음은요.”
정하람이 대답했다. “그다음은… 밥입니다.”
관중석이 웃었다. 정하람은 웃지 못했다. 그는 알았다. 이 무대는 병맛을 원했다. 쌀은 병맛이 아니라, 그냥 밥이었다. 밥은 병맛이 될 수 없었다. 밥은 너무 정상이었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
시청률이 떨어졌다. 여론은 지루해했다.
“쌀은 재미없다.”
“역시 밥은 밥이다.”
“간고등어 진영 망했네.”
정하람은 기숙사에서 밤새 뒤척였다. 그는 노트에 적었다.
쌀로 뭘 할 수 있나.
쌀 아이스크림? 이미 있다.
쌀 케이크? 이미 있다.
쌀 향수? 이상하다.
쌀 NFT? 아무도 안 산다.
쌀 모시? 죽 된다.
쌀 가죽? 밥풀 가죽? 이상하다.
그는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왜 여기 있나.”
6. 도네이션
그때, 인터넷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안동의 간고등어 작업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영상을 올렸다. 새벽 4시, 소금을 뿌리며 그녀가 말했다.
“쌀 아들, 기운 내. 우리도 늘 이렇게 진다. 그래도 새벽은 온다.”
그 영상은 퍼졌다. 그리고 도네이션이 시작됐다.
“쌀아 이겨라. 1,000원.”
“나는 매일 밥을 먹는다. 쌀이 이기면 내가 이기는 거다. 5,000원.”
“배추가 옷이 되고 딸기가 잼이 되는데, 쌀은 왜 아무것도 안 되냐. 그게 슬프다. 10,000원.”
“우매한 민중이 울며 돈을 보낸다. 3,000원.”
“쌀아, 너는 재미없다. 그런데 너는 필요하다. 100,000원.”
정하람은 도네이션 알림을 보며 울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울었다.
그는 노트에 적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쌀은 혼자가 아니다. 쌀은 매일 아침 모든 밥상에 있다. 쌀은 아무도 모르게 이긴다.
7. 병맛의 시도들
정하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병맛에 도전했다.
쌀 런웨이. 쌀을 뿌린 무대 위를 모델이 걸었다. 미끄러졌다. 실패.
쌀 향수. 밥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배고파졌다. 판매 부진.
쌀 스마트워치. 쌀알 모양 워치. 차도헌이 “우리 특허 침해”라며 소송을 걸었다. 실패.
쌀 명상 앱. “밥을 씹으며 명상하세요.” 다운로드 300. 그중 290은 직원. 실패.
쌀 콘서트. 쌀 포대를 악기로 연주. 관중 12명. 그중 11명은 도네이션한 사람. 실패.
여론은 웃었다.
“쌀, 병맛에 도전하다가 그냥 병이 되다.”
정하람은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사회자가 물었다.
“뭘 모르십니까.”
정하람이 대답했다. “제가 왜 쌀로 뭔가를 만들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쌀은 이미 있습니다. 쌀은 이미 밥입니다. 저는 쌀을 뭔가로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쌀을… 차리면 됩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쌀, 갑자기 뭔가를 깨닫다.”
8. 밥상
정하람은 밤새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지었다.
그는 밥솥을 열었다. 김이 올라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배추는 김치가 됐다. 간고등어는 샐러드가 됐다. 딸기는 잼이 됐다. 인삼은 절임이 됐다. 굴비는 어장이 됐다. 쑥은 약이 됐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어디에 놓입니까.
밥상입니다.
밥상은 어디서 옵니까.
쌀입니다.
정하람은 노트에 적었다.
쌀은 반찬이 아니다. 쌀은 밥상이다. 밥상은 네트워크다.
그는 회의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려대 총동문회에 말했다.
“우리는 쌀로 뭔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게 잘못이었습니다. 쌀은 만들지 않습니다. 쌀은 받칩니다.”
교수가 물었다. “받친다?”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상입니다. 배추모시는 옷입니다. 옷은 사람을 받칩니다. 그런데 밥상은 음식을 받칩니다. 쌀은 모든 반찬을 받치는 자리입니다. 간고등어도, 배추도, 딸기도, 인삼도, 굴비도, 쑥도, 전부 밥 위에 놓입니다. 쌀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쌀은 배치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사장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우리는… 플랫폼을 만들자는 겁니까.”
정하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상 플랫폼입니다. 이름은 ‘한상’ 입니다.”
9. 네트워크
정하람은 움직였다. 그는 먼저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을 찾아갔다.
“태산 씨, 밥상에 배추김치를 올려 주세요.”
박태산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당신 밑에 들어가는 겁니까.”
정하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밥상은 위아래가 없습니다. 밥상은 자리입니다. 배추는 배추 자리에 놓입니다. 간고등어는 간고등어 자리에 놓입니다.”
박태산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배추가 주인공이 아니게 되는 건가.”
정하람이 대답했다. “배추는 주인공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됩니다.”
박태산이 웃었다. “그게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더 오래갑니다.”
그다음,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를 찾아갔다.
“지우 씨, 밥상에 순살굴비를 올려 주세요.”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웃었다. “나는 정치창녀 아닙니까.”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상에는 정치가 없습니다. 밥상에는 자리만 있습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는 어장을 올리겠습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도 찾아갔다.
“수민 씨, 밥상에 쑥을 올려 주세요.”
배수민이 웃었다. “쑥은 어디에도 안 어울린다고 했는데.”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게 없습니다. 쑥은 나물 자리에 놓입니다.”
배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는 쑥나물을 올리겠습니다.”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도 찾아갔다.
“선배님, 밥상에 딸기잼을 올려 주세요.”
오하린이 웃었다. “잼이 밥상에?”
정하람이 대답했다. “후식 자리입니다.”
오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는 후식을 맡겠습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도 찾아갔다.
“서준 씨, 밥상에 유통을 붙여 주세요.”
한서준이 물었다. “나는 무엇을 받습니까.”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상은 당신 없이도 차려집니다. 그런데 당신이 있으면, 밥상이 전국에 퍼집니다.”
한서준이 웃었다. “좋습니다. 나는 유통을 맡겠습니다.”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도 찾아갔다.
“도헌 씨, 밥상에 센서를 붙여 주세요.”
차도헌이 눈을 빛냈다. “센서?”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상 온도 센서. 밥이 식으면 알려 주는 센서. 그건 쓸모가 있습니다.”
차도헌이 웃었다. “처음으로 쓸모 있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10. 이화여대의 선택
마지막 무대.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배추모시 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두 개의 제안이 있었다.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의 ‘한상’ — 밥상 플랫폼.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의 ‘스마트 간고등어 2.0’.
윤서아는 두 제안서를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차도헌 씨의 제안을 읽었습니다. 센서, 앱, 구독.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건 간고등어를 비싸게 만드는 겁니다. 비싼 것은 브랜드가 아닙니다. 비싼 것은 그냥 비쌉니다.”
차도헌의 얼굴이 굳었다. 윤서아가 말을 이었다.
“저는 정하람 씨의 제안을 읽었습니다. 밥상. 쌀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쌀은 받칩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받치려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하람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밥은 지을 줄 압니다.”
윤서아가 웃었다. “그거면 됩니다.”
그녀는 정하람의 손을 잡았다.
“저는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 씨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제 배추모시를 ‘한상’의 식탁보로 올리겠습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배추모시, 식탁보가 되다.”
윤서아가 말을 이었다.
“배추모시는 옷입니다. 그런데 옷은 밥상에 앉을 때 입는 겁니다. 저는 배추모시를 팔지 않습니다. 밥상 위에 놓겠습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오고, 옷을 보고 갑니다.”
정하람이 말했다. “그리고 쌀은 남습니다.”
윤서아가 웃었다. “네. 쌀은 남습니다. 쌀은 언제나 남습니다.”
11. 여론의 재반전
여론은 또 갈라졌다.
“쌀이 이겼다.”
“아니, 쌀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게 쌀의 힘이다.”
“밥상 플랫폼? 그거 그냥 밥상 아니냐.”
“그래서 genius다.”
“아니다, 병맛이다.”
“병맛이 genius다.”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논쟁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
‘한상’은 첫 시즌 매출 800억을 기록했다. 쌀은 여전히 쌀이었다. 그런데 이제 쌀은 밥상이 되었다. 밥상 위에는 간고등어가 있었고, 배추김치가 있었고, 순살굴비 어장이 있었고, 쑥나물이 있었고, 딸기잼이 있었고, 배추모시 식탁보가 있었다.
정하람은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이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밥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밥을 지으니, 모두가 왔습니다.”
방송은 그 장면을 내보냈다. 자막은 이랬다.
“밥은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온다.”
12. 사랑, 그리고 새벽
그날 밤, 정하람은 여주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겼냐.”
정하람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밥은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웃었다. “그거면 됐다.”
정하람은 논두렁에 앉았다. 옆에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앉았다. 그녀는 배추모시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에는 밥풀이 묻어 있었다.
윤서아가 말했다. “나 여기 와도 돼?”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상은 누구나 앉을 수 있습니다.”
윤서아가 웃었다. “그럼 나 매일 와도 돼?”
정하람이 대답했다. “밥은 매일 짓습니다.”
그들은 논두렁에 앉아 새벽을 기다렸다. 여주 들판에 안개가 깔렸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윤서아가 물었다. “너는 나를 선택한 거야, 아니면 내 배추모시를 선택한 거야.”
정하람이 대답했다. “나는 밥상을 차린 거야. 너는 그 밥상에 앉은 거고.”
윤서아가 웃었다. “그게 더 로맨틱하네.”
13. 에필로그 — 한상
이듬해, ‘한상’은 수출 3,400억을 넘겼다. 쌀은 여전히 쌀이었다. 그런데 쌀은 이제 플랫폼이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안동에서 간고등어를 말렸다. 그는 ‘한상’의 첫 번째 반찬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게 이기는 건가요.”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은 태백에서 배추를 키웠다. 그는 ‘한상’의 두 번째 반찬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배추는 주인공이 아니게 됐습니다. 그런데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됐습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배추모시 식탁보를 짰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옷을 팔지 않습니다. 나는 밥상 위에 놓습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은 유통을 맡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이번엔 아무것도 인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제 손을 거칩니다.”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은 밥상 온도 센서를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처음으로 쓸모 있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성신여대 신입생 지우는 영광에서 순살굴비 어장을 만들었다. 숙명여대 신입생 배수민은 강화에서 쑥나물을 만들었다.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은 논산에서 딸기잼을 만들었다.
어느 날, 모두가 여주의 논두렁에 모였다. 정하람이 밥을 지었다. 강도현이 간고등어를 구웠다. 박태산이 김치를 담갔다. 지우가 어장을 올렸다. 배수민이 쑥나물을 무쳤다. 오하린이 딸기잼을 내왔다. 윤서아가 식탁보를 폈다. 한서준이 자리를 배치했다. 차도헌이 밥상 온도 센서를 붙였다.
그들은 밥상을 둘러앉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밥을 먹었다.
정하람이 조용히 말했다.
“쌀은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런데 쌀이 없으면, 이 밥상은 없습니다.”
윤서아가 말했다. “그게 네트워크야.”
정하람이 웃었다. “그게 밥이야.”
TV에서는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SKYI 수출전쟁,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아무도 TV를 켜지 않았다. 그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간고등어, 배추김치, 순살굴비 어장, 쑥나물, 딸기잼, 그리고 배추모시 식탁보가 있었다.
쌀은 조용했다. 쌀은 언제나 조용했다. 그리고 쌀은 언제나 이겼다.
끝.
시동 걸린 밥상
— SKYI 수출전쟁: 사랑은 엔진이다
등장하는 학교·기업·인물·방송은 모두 허구이며, 작중 여론의 조롱 표현은 소설이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상입니다.
1. 밍밍한 쌀
‘한상’은 1년 만에 무너졌다.
정확히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냥 심심해졌다.
쌀은 아무것도 안 했다. 쌀은 받쳤다. 쌀은 조용했다. 쌀은 매일 아침 밥상에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쌀을 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 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여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상? 그거 그냥 밥상 아니냐.”
“쌀이 이겼다고? 쌀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밍밍하다. 너무 밍밍해.”
“젓갈이 없다. 젓갈이 없으면 쌀은 아무것도 아니다.”
“간고등어 보고 싶다. 짜고 비린 그 맛.”
시청률이 떨어졌다. 도네이션도 끊겼다.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은 무대에서 말했다.
“저는… 쌀입니다. 쌀은 밍밍합니다. 그게 쌀의 본질입니다. 젓갈이 없으면 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걸 인정합니다.”
방송은 그 장면을 내보냈다. 자막은 이랬다.
“쌀, 자기 본질을 인정하다. 시청률도 인정하다.”
그날 밤, 정하람은 여주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맞았다. 쌀은 원래 밍밍하다. 그런데 네가 틀렸다. 쌀은 밍밍한 게 아니라, 밍밍한 척하는 거다. 쌀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쌀은 혼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아무하고나 어울려. 그게 쌀의 힘이지.”
정하람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저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밥상은 그대로 차려. 다만 이번엔 네가 밥상을 차리는 게 아니라, 밥상에 뭐가 올라오는지를 봐.”
2. 민중은 간고등어를 원한다
민중은 다시 간고등어를 원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의 SNS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도현아, 너는 짜다. 그래서 좋다.”
“쌀은 밍밍해. 너는 비려. 너는 사람이다.”
“안동간고등어 사러 갑니다. 쌀은 나중에.”
“도현아, 이번엔 이겨라. 제발.”
강도현은 그 댓글을 읽으며 기뻤다. 그리고 슬펐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가난했다.
안동간고등어 작업장은 절반이 되었다. 아버지의 라인은 하나 남았다. 협동조합은 빚이 있었다. 수출은 되고 있었지만, 마진은 없었다. 강도현의 통장 잔고는 47만 원이었다.
무대는 돈을 요구했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의 선택을 받으려면, 규모가 필요했다. 규모를 만들려면, 자본이 필요했다. 자본은 강도현에게 없었다.
그는 노트에 적었다.
나는 짜다. 그러나 짠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 무대는 맛의 무대가 아니다. 자본의 무대다.
나는 자본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자본을 빌려야 한다.
어디서? 서울대에서.
3. 서울대에 간청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의 사무실. HS푸드의 서울 사무소 한쪽을 쓰고 있는 방이었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이 문을 열었다.
“서준 씨, 투자해 주십시오.”
한서준은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
“30억.”
한서준이 웃었다. “30억으로 뭘 합니까.”
강도현이 대답했다. “안동의 작업장을 되살리고, 물류를 붙이고, 수출 라인을 늘리겠습니다.”
한서준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도현 씨,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저는 회사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강도현이 대답했다. “간고등어를 드리겠습니다.”
한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간고등어는 이미 제 유통망에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강도현은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한서준이 대답했다.
“당신이 가진 것을 가져오십시오. 당신은 가난합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원합니다. 그 원함을 상품으로 만드십시오.”
강도현은 그 말을 듣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서울대 신입생 차도헌을 만났다. 차도헌이 말했다.
“도현 씨, 우리 센서 사업에 투자하시겠습니까.”
강도현이 대답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차도헌이 웃었다. “그럼 안 됩니다.”
그는 걸어갔다. 강도현은 복도에 서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서울이 보였다. 그는 안동의 새벽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소금을 뿌리던 손.
4. 논산으로
강도현은 논산으로 내려갔다.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은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따고 있었다. 그녀는 세 번 퇴출된 사람이었다. ‘정치창녀’, ‘여론 조작자’, 그리고 그냥 ‘지겨운 사람’. 그녀는 이제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논산딸기 협동조합의 실권자였다.
강도현이 말했다.
“하린 씨,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하린이 딸기를 하나 따서 건넸다.
“먹어 봐.”
강도현이 먹었다. 달았다.
오하린이 말했다. “너는 지금 달콤한 말을 하러 왔지.”
강도현이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초라한 말을 하러 왔습니다. 저는 가난합니다. 이대 윤서아 씨의 선택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오하린이 물었다. “나는 왜 너를 도와야 하지.”
강도현이 대답했다. “제가 이기면, 논산딸기가 다시 무대에 섭니다. 제가 이기면, 서울대 투자금이 논산으로도 옵니다.”
오하린은 오래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도현 씨,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뭘 모릅니까.”
오하린이 대답했다.
“이 무대의 진짜 규칙. 이건 맛의 전쟁이 아니야. 자본의 전쟁도 아니야. 이건 감정의 전쟁이야. 사람들은 간고등어를 원하는 게 아니야. 사람들은 네가 이기길 원하는 게 아니야. 사람들은 네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원해. 그게 시청률이야.”
강도현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그럼 저는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오하린이 웃었다.
“그건 네가 정할 일이지.”
5. 태백의 눈치
박태산은 그것을 보았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은 논산에 배추를 납품하러 왔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앞에서 강도현과 오하린이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오하린이 웃고 있었다. 강도현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태산은 차를 세웠다. 그리고 오래 보았다. 그는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냥 돌아갔다.
태백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저는…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아버지가 물었다. “여자 때문이냐.”
박태산이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말했다.
“배추는 서리를 맞아야 단단해진다. 그런데 서리를 맞으면 아픈 법이다.”
박태산은 전화를 끊고 차를 세웠다. 그는 핸들을 잡고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걔는 내 여자야.”
그는 그 말을 소리 내어 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말에 놀랐다. 그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배추밭 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질투하는 남자였다.
6. 정치판이 사랑이 되다
그때부터 무대가 달라졌다.
방송은 회의 장면을 내보내지 않았다. 대신 세 사람이 마주 앉은 장면을 내보냈다. 강도현과 박태산과 오하린. 카메라 앵글은 오하린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자막은 이랬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시청률이 폭발했다.
여론은 분석을 시작했다.
“도현은 하린을 사랑한다. 그런데 돈이 없다.”
“태산은 하린을 사랑한다. 그런데 표현을 못 한다.”
“하린은 도현을 원한다. 그런데 힘이 없다.”
“하린은 태산을 원한다. 그런데 심심하다.”
“결국 하린은 힘을 원한다. 힘은 서울대에 있다.”
여론은 정확했다. 그리고 여론은 잔인했다.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은 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노트를 폈다. 그리고 적었다.
나는 세 번 퇴출됐다.
나는 정치창녀라 불렸다.
나는 여론 조작자라 불렸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게 더 무섭다.
나는 결국 여자다.
힘과 권력을 원한다.
아니, 정확히는 힘과 권력이 없으면 사랑도 지킬 수 없다는 걸 안다.
그게 내가 세 번 퇴출되면서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와 권력을 쥔 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서울대다.
그녀는 펜을 놓았다. 그리고 웃었다. 웃음이 무서웠다.
7. 서울대, 자동차 가문
서울대 신입생 권태윤이 등장했다. BS모터스 회장의 차남. 그는 회의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저는 서울대 신입생 권태윤입니다. BS모터스 회장의 차남입니다. 저는 자동차를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정치판을 봤습니다. 여러분은 자동차를 만들 줄 모릅니다. 여러분은 부품을 만듭니다. 좋은 부품을. 그런데 부품은 차가 아닙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한서준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만들겠습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차를 만들겠습니다.”
차도헌이 웃었다. “여기는 차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권태윤이 그를 보았다. “여기는 감정을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감정은 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사람들은 슬플 때 차에 타고, 기쁠 때 차에 타고, 사랑할 때 차에 탑니다. 저는 그 차를 만들겠습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자막을 띄웠다.
“자동차 가문, 감정을 만들다.”
8. 권태윤의 전략
권태윤은 밤새 회의했다. 그의 팀에는 자동차 설계자, 마케팅 전문가, 그리고 심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음식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대의 진짜 상품은 음식이 아닙니다. 선택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누구를 선택하는지를 보러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을 팔면 됩니다.”
심리학자가 물었다. “어떻게 팝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구독입니다. 매달 소비자가 선택합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이달의 밥상” — 월 29,900원.
매달 소비자가 반찬을 고른다. 간고등어냐, 배추냐, 딸기냐, 인삼이냐, 굴비냐, 쑥이냐. 소비자가 고른 반찬이 집으로 온다. 그리고 그 반찬은 차의 트렁크에서 신선하게 배송된다.
차도헌이 물었다. “그게 왜 차입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트렁크가 냉장고입니다. 뒷좌석이 밥상입니다. 대시보드에 밥솥이 있습니다. 이 차는 달리는 밥상입니다. 아침에 차에 타면, 밥이 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트렁크에는 그달의 반찬이 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웃었다. 웃음은 퍼졌다.
한서준이 말했다. “그건… 병맛입니다.”
권태윤이 대답했다. “병맛은 시청률입니다. 그런데 저는 병맛으로 끝내지 않겠습니다. 저는 병맛을 인프라로 만들겠습니다.”
9. 세 사람, 한 대의 차
권태윤은 강도현과 박태산을 불렀다.
“두 분, 제 차를 타 보시겠습니까.”
그는 시제품을 가져왔다. 흰색 SUV. 트렁크를 열자 냉장고가 나왔다. 안에는 간고등어와 배추가 나란히 있었다. 뒷좌석을 펼치자 작은 밥상이 나왔다. 대시보드에는 밥솥이 있었다.
강도현이 말했다. “이건… 차가 아닙니다.”
권태윤이 웃었다. “그게 요점입니다. 이건 차가 아닙니다. 이건 아침입니다.”
박태산이 말했다. “그런데 왜 우리입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이 차의 부품이기 때문입니다. 간고등어는 트렁크에, 배추는 김치통에, 딸기는 잼칸에, 쌀은 밥솥에, 쑥은 향기 필터에, 굴비는 어장통에. 당신들은 부품입니다. 그런데 부품 없이는 차가 안 갑니다.”
강도현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받습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당신들은 지분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 차의 이야기가 됩니다.”
박태산이 물었다. “이야기?”
권태윤이 웃었다. “이 차의 이름은 ‘새벽’ 입니다. 그리고 이 차의 광고는 이렇게 갑니다. 세 사람이 한 대의 차에 탄다. 한 사람은 짜고, 한 사람은 맵고, 한 사람은 달다. 그런데 그들은 같은 아침을 먹는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강도현과 박태산은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미쳤다. 그런데 맞다.
10. 선택의 상품화
런칭 날, 권태윤은 무대에 섰다.
“저는 서울대 신입생 권태윤입니다. BS모터스 회장의 차남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차를 팔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선택을 팔겠습니다.”
그는 스크린을 켰다. 화면에는 이렇게 떠 있었다.
“이달의 밥상 — 구독.”
“이달의 반찬을 고르세요. 간고등어, 배추, 딸기, 인삼, 굴비, 쑥, 쌀.”
“당신이 고른 반찬이 ‘새벽’ 차의 트렁크에 실려 당신의 아침이 됩니다.”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사회자가 물었다. “그럼 이 무대의 선택은 누가 합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소비자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권태윤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이 무대의 선택은 이화여대가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화여대입니까. 왜 한 사람이 모두의 아침을 정해야 합니까. 소비자가 정하면 됩니다. 소비자가 매달 고르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도 정치창녀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달의 반찬이 됩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그리고 누군가 박수를 쳤다. 박수는 퍼졌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가 일어났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저는 무엇입니까.”
권태윤이 대답했다. “당신은 큐레이터입니다. 당신이 이달의 밥상을 디자인합니다. 배추모시 식탁보를 깔고, 어떤 반찬이 어울리는지를 당신이 정합니다. 당신은 선택받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을 디자인하는 사람입니다.”
윤서아는 오래 그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거… 좋네요.”
11. 오하린의 선택
그러나 오하린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 뒤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화여대 선배였다. 세 번 퇴출된 사람. 논산딸기의 실권자. 그리고 두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그녀는 무대에 올라갔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저는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입니다. 논산딸기 협동조합 대표입니다. 저는 세 번 퇴출됐습니다. 정치창녀라 불렸습니다. 여론 조작자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사랑의 대상이 됐습니다.”
관중석이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권태윤 씨의 제안은 훌륭합니다. 선택을 소비자에게 넘긴 것. 그건 제가 세 번 퇴출되면서 배운 것을 정확히 뒤집은 겁니다. 저는 선택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권태윤 씨는 선택을 나눴습니다.”
그녀는 강도현을 보았다. 박태산을 보았다.
“도현 씨는 짭니다. 태산 씨는 맵습니다. 저는 답니다. 우리 셋은 원래 한 밥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대가 우리를 갈라놓았습니다. 누가 누구를 선택하는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게 시청률이었으니까.”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저는 이제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는 논산으로 돌아갑니다. 딸기밭으로. 그리고 이 차의 트렁크에 제 딸기를 실어 보내겠습니다. 그것이 제 선택입니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강도현이 일어났다. 박태산도 일어났다.
강도현이 말했다. “하린 씨, 저는…”
오하린이 손을 들었다. “도현 씨,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태산 씨,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누가 저를 선택하는지로 제 가치를 정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가치를 제가 정하겠습니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방송은 그 장면을 클로즈업했다. 자막은 이랬다.
“선택받지 않겠다. 선택하겠다.”
12. 사랑
그날 밤, 세 사람은 논산의 비닐하우스 앞에 앉아 있었다.
강도현이 말했다. “하린 씨, 저는 아직 가난합니다.”
오하린이 웃었다. “나도 압니다.”
박태산이 말했다. “저는 아직 질투합니다.”
오하린이 웃었다. “나도 압니다.”
강도현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오하린이 대답했다.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매일. 그리고 가끔 싸웁니다. 그리고 다시 밥을 먹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박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배추밭입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강도현이 말했다. “그게 간고등어입니다. 매일 새벽에 소금을 뿌리는 것.”
오하린이 웃었다. “그게 딸기입니다. 매일 새벽에 따는 것.”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멀리서 권태윤의 차가 지나갔다. 트렁크에는 그달의 반찬이 실려 있었다.
13. 에필로그 — 새벽이라는 차
이듬해, ‘새벽’은 4만 대가 팔렸다. 자동차 업계는 웃었다. 그리고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차를 사는 이유가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이달의 밥상’ 구독자는 120만 명이었다. 매달 소비자가 반찬을 골랐다. 간고등어의 달, 배추의 달, 딸기의 달, 인삼의 달, 굴비의 달, 쑥의 달, 쌀의 달. 어느 달에도 아무도 버려지지 않았다.
고려대 신입생 강도현은 안동의 작업장을 되살렸다. 그는 여전히 짰다. 연세대 신입생 박태산은 태백의 농가를 협동조합으로 묶었다. 그는 여전히 맵었다. 이화여대 선배 오하린은 논산의 딸기밭을 지켰다. 그녀는 여전히 달았다.
이화여대 신입생 윤서아는 ‘이달의 밥상’ 큐레이터가 되었다. 그녀는 매달 식탁보를 디자인했다. 배추모시는 이제 밥상 위에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옷을 팔지 않습니다. 나는 아침을 디자인합니다.”
서울대 신입생 권태윤은 말했다.
“나는 차를 팔지 않습니다. 나는 새벽을 팝니다.”
서울대 신입생 한서준은 유통을 맡았다. 차도헌은 밥솥 온도 센서를 만들었다. 고려대 신입생 정하람은 여주에서 쌀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밍밍했다. 그런데 이제 아무도 쌀을 무시하지 않았다. 쌀은 모든 차의 대시보드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새벽, 오하린은 논산의 비닐하우스 앞에 앉아 있었다. 강도현과 박태산이 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앉았다. 멀리서 ‘새벽’ 차 한 대가 밭길을 지나갔다.
강도현이 물었다. “우리 이번엔 이긴 걸까.”
박태산이 대답했다. “모르겠다. 다만 이번엔 아무도 반찬이 되지 않았다.”
오하린이 웃었다. “아니. 우리는 모두 반찬이야. 그런데 이번엔 우리가 밥상을 골랐어.”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 간고등어, 배추김치, 쌀밥. 아주 평범한 아침이었다.
TV에서는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SKYI 수출전쟁, 새로운 지도층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아무도 TV를 켜지 않았다. 그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밥상은, 아주 느리게, 아주 조용히,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