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칼럼] 역사는 창작자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 「암살자(들)」을 바라보며
김명수 칼럼니스트
경가데일리: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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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창작자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 「암살자(들)」을 바라보며
■ 들어가는 말 — 국민은 묻는다
많은 국민은 영화 「암살자(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과연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을 이처럼 허구적으로 재구성해도 되는 것인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은 영화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한 인간이 목숨을 잃었고, 한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며, 대한민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비극이었다.
당시 특별수사본부는 문세광이 북한 및 조총련과 연계된 지령을 받아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오늘 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당시의 공식 결론과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제작진은 이를 "영화적 상상력”과 “창작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비극의 진실까지 뒤집어도 되는가.
영화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죽은 사람의 명예와 유가족의 상처까지 건드려도 되는가.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천륜까지 영화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한 자녀가 어머니를 잃었다.
한 가족이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배후에 남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제시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허구 한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의미를 뒤집고, 인간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신뢰인 부부의 천륜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서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상상력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과 천륜까지 상상력의 놀이터가 되어야 하는가.
죽음은 허구가 아니다.
유가족의 눈물도 허구가 아니다.
한 시대를 살아온 국민들의 기억 역시 창작자가 마음대로 다시 쓸 수 있는 백지가 아니다.
■ 가설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역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가설과 사실의 혼동이다.
영화 한 편은 수십 권의 역사책보다 대중의 기억에 더 강하게 남을 수 있다.
특히 영화는 영상과 음악, 배우의 연기를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영화 속 의혹이 “가능성”이라는 외피를 쓰고 등장하더라도, 그것을 본 사람의 기억 속에서는 어느 순간 사실처럼 굳어질 위험이 있다.
바로 여기에 역사영화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상상력은 증거가 아니다.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극적 설정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역사를 새로 쓰고 싶다면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라 증거와 기록, 사료와 검증으로 말해야 한다.
■ 표현의 자유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표현의 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창작자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을 자유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특히 실존 인물과 실제 희생자가 존재하는 현대사를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영화니까 괜찮다”는 말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제작진이 창작이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관객에게 미치는 역사적 영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제 사건을 다룰수록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창작인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책임이 커진다.
표현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다.
책임을 다하는 표현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 역사를 허구로 만들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이 영화를 단순히 재미있는 영화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한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얼마나 존중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살아 있는 증언과 기록이 남아 있는 현대사를 다룰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역사는 정권의 소유도 아니고, 특정 진영의 소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영화 창작자의 소유도 아니다.
역사는 국민 모두의 공동 자산이며,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공동의 기억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된다면 기존의 역사적 판단을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증거와 검증이어야 한다.
영화적 상상력이 역사의 증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 맺는 말 — 영화보다 무거운 것이 있다
나는 창작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작의 자유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 자유가 역사적 책임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ㆍ역사는 창작자의 놀이터가 아니다.
ㆍ죽음은 흥행을 위한 소품이 아니다.
ㆍ유가족의 슬픔은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ㆍ천륜은 정치적 서사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특히 국가적 비극과 실존 인물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는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기억까지 마음대로 창작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시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앞에서 겸허하게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영화 한 편을 재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 사회에 묻고 싶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역사와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지켜낼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는 놀이터가 아니다.
역사는 우리의 기억이고, 우리의 책임이며, 다음 세대에 물려줄 유산이다.
2026년 9월 29일
한국문화인보연구원
김명수 박사(육사 31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