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아비정전"을 구룡성에서 촬영한 배우 양조위 -
구룡성채(구룡채성)는 원래 청나라의 요새였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섬이 영국의 식민지로 영구 할양되자 청은 영국이 북진하여 구룡반도까지 점령하고 중국 본토를 노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구룡성채를 영국을 감시하는 기지로 썼다.
그러나 애로호사건(2차 아편전쟁)후 북경조약에서 청은 구룡반도까지 영국에 영구 할양하였고,
구룡성채는 자연히 영국령 홍콩의 영역에 들어선다. 물론 청은 성채만은 내줄 수 없다며 비지로 만들었고 청의 군인들과 행정관들이 주둔하게 된다.
세금도 북경으로 계속 내었고, 그러나 영국군은 성채를 공격하여 청군을 쫓아 버렸고,
이후 이 성채는 영국과 중국 둘 다 관리를 하지 않아 버려지기 시작했다. 성채는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하자 곧바로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은 영국이 수병 몇만명 가지고 방어하던 홍콩을 손쉽게 점령했고
(당시 영국은 중국의 전력을 우습게 보고는 홍콩과 광동 국경선에 전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채의 성벽은 카이탁 공항 확장공사를 위해 헐렸다. 성벽이 헐리자 중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대거 성채로 모이기 시작했고, 성채는 순식간에 슬럼화 되었다.
일본군이 쫓겨간 뒤에는 국공내전이 이어져 광동성에서 많은 피난민이 홍콩으로 몰려왔고 이들은 구룡성채에 정착하게 된다.
구룡성채는 중국땅이기 때문에 이곳에선 홍콩의 공권력 또한 닿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비지"인 셈인데 문제는 3불관(不觀)이라 하여 영국,중국,홍콩 식민정부 셋 다 손을 떼어 버렸다는 것.
한마디로 무정부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기어이는 중국 등지에서 도피중이던 지명 수배자등의 범죄자 부류들이 성채까지 들어왔고,
이곳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집단은 홍콩에서도 악명높은 범죄조직, 삼합회가 된다.
이곳에선 그야말로 삼합회의 말이 법이고 규칙이었던 것이다. 삼합회는 1974년까지 구룡성채를 지배하다가 홍콩경찰이 대테러부대 등을 동원한 대규모 검거작전을 전개하자 이빨빠진 호랑이 마냥 쫓겨나고 말았다.
무서운 삼합회가 쫓겨났지만, 구룡 성채는 이전보다 무질서한 팽창을 겪게 된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중국에서 넘어온 밀입국자의 수는 늘어났으며, 밀입국자들은 홍콩내에 합법적인 연고가 없었으므로 성채에 눌러 살게 되었고
이런 사람들이 늘자, 성채가 기형적으로 성장해 골목은 마구 꼬이고,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전등을 켜고 건물의 층수는 14층까지 올리게 된것이다.
(이 이상은 근처에 자리잡은 카이탁 공항의 영향으로, 비행기의 이착륙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 더 이상 층수를 올리는게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고층 슬럼이 형성된 것이다. 보통 슬럼가는 낮은 건물이나 판자집으로 대표되지만 구룡성채는 정치적 특수성과 최악의 머리수 때문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고층 슬럼가가 되었다. 성채의 외관은 매우 더럽고 흉물스러운 낡은 아파트 (거의 버려진듯한 집들) 의 집합체이며
햇빛은 한가운데 쪽에서만 보였다.
이름 모를 악취가 곳곳에 진동했으며 건물 옥상까지 쓰레기가 널려있고
복도에는 음식물을 줏어먹고 살찐 쥐들과 바퀴벌레 및 해충들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환경이었다.
1인당 평균 1.1평을 점유하는 극악의 구조였기 때문에 화장실과 세면장은 공동 (화장실은 문과 칸막이가 없는 중국식 화장실)이었다.
제일 심각한 건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둠 (음지)의 세계였기 때문에 살인, 매춘, 강간, 납치 같은 범죄율이 높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유한 홍콩인들은 더럽고 위험한 곳이라며 이곳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물론 오래된 중국의 거리로서 관광객을 모으기도 했고 맥당웅의 <성항기병> 등 영화 촬영지로도 쓰이기도 했다.
구룡성채의 이런 음란하고 퇴폐적인 이미지는 일본의 아니메,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사이버펑크 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깁슨의 뉴로맨서에서도
이와같은 홍콩의 이미지가 잘 나타난다.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만큼 홍콩에선 금지된 온갖 어둠의 요소들이 개판을 쳤다.
성매매가 합법적으로 자행 되던것은 물론, 홍콩에서도 금지된 개고기를 파는 식당들이 즐비했으며 마약을 제조하는 마약소굴도 곳곳에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면허를 박탈 당해 쫓겨난 치과 의사들이, 이곳 구룡성채 안에 자리 잡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야매 치과의사의 진료도 성행하는 등 "수상한 영업"의 본거지였다.
특히 야매 치과의사들의 비위생적 무면허 진료는 큰 문제였다. 당시 치과 치료는 비쌌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들은 무작정 찾을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구룡성채도 결국은 사람사는 동네였다. 이렇게 퇴폐적이고 험한 지역에서도 아이들은 옥상에 올라가 천진난만하게 놀았다.
구룡 성채 주민들과 영국인 선교사가 합심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소학교도 있었고, 노인을 위한 양로원도 있었으며
이발소도 있었고 국수, 만두, 죽을 파는 식당도 있어서 성채 주민들은 이 곳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심지어 성채 내 비밀 공장들 중에는, 시내에 내다 팔 에그타르트나 딤섬, 장난감을 만드는 공장도 많았다.
위생상태는 그나마 제일 괜찮았던 곳이라고 한다.

마약소굴, 매음굴, 야매의사가 몰려있는 "악의 소굴"이었지만 그 속에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물론 이들의 삶은 오히려 힘겨웠다.
"홍콩판 드림"을 꿈꾸고 가난한 중국을 탈출해 홍콩에 어렵게 건너갔지만, 이들의 현실은 쓰레기 더미에 묻혀 사는 불법 체류자에 불과했으니까.
성채 주민 중에는 심지어 성채 밖으로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문맹도 많았기 때문이다.
1986년, 더 이상 방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홍콩 식민정부는, 주변 일대에 경찰들을 파견하고 구룡 성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들어오고 범죄자들이 모두 잡혀가자 치안은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불량한 위생상태도 위생서의 단속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홍콩정부는 구룡 성채를 철거해 공원으로 재개발하게 된다. 이 때 성채 주민들과 토지보상 문제로 마찰이 빚어졌으나,
너무 슬럼화된 곳이라 사실상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마저 상실하여 미미한 보상만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렇듯 "인외마굴"로 불렸던 구룡성채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나, 한때 이곳과 쌍벽을 이루던 복합상가이자 중경삼림의 촬영지인 "충킹맨션"은 여전히 홍콩 침사추이에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