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 쉽게 핵심만 말씀드릴게요. 918년,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자마자 사촌아우 왕식렴으로 하여금 고려 평양[현 요령성 환인만족자치현]을 개발하게 하고 얼마 뒤 이를 서경으로 격상시킵니다. 922년경, 서경을 북진의 거점으로 삼은 태조는 발해[대씨 고려]가 무너져 가는 그 통치 공백의 시점을 놓치지 않고, 일시에 이통하[현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그 강을 기점으로 동편에 위치한, 그러니까 훗날 보주[포주]가 되는 용만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때 강 서편에는 발해의 부여성이 위치했으므로 빼앗아 차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태조에게는 남방의 백제나 신라를 복속시키는 것보다, 북방의 강역을 최대한 확장시켜 고려의 땅으로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시되는 급선무였습니다. 925년, 발해 태자 대광현이 나라가 멸망하기 일보직전에 수만 호의 백성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합니다. 

 ※발해의 귀부: 이는 최소 수십만에 이르는 대대적인 인구 (호적의) 이동 및 영토 주권의 이전으로, 밀집형 정주 도시 대비 호당 거주 인구와 1인당 토지 점유 면적이 월등히 높았던 북방 지대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할 때, 단순한 집단 망명이 아닌 “범국가적 규모의 구조적 통합”임을 시사합니다. 이때 1호를 관료·군인·장인·농민이 체계적으로 결합해 1인의 수장 아래 묶인, 수십 명 단위의 혈연·지역 공동체인 '복합 행정 단위'로 이해할 시 실질 유입 인구는 총 백만 명을 훨씬 상회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근대 사회의 귀부란, 일시에 집단 수용이 불가능한 거대 인구의 물리적 실제 이동이 아니라, 행정문서상 거주하는 땅의 공식적 소유권을 넘기고 타국의 민이 되어 실질적 보호 아래 놓이는 '통치권의 귀속'을 의미합니다. 《고려사》에 숱하게 등장하는 귀부, 귀순의 기록을 모두 실제 인구의 물리적 이동으로 본다면, 국경을 넘어오는 동시에 유입민들의 거주지를 즉시 나누어 정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전까지 국경에서 이들을 재우고 먹일 막대한 재정과 행정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재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행정상 이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수만 가구 규모의 인구를 일시에 수용한다는 것은 현대 국가인 '대한민국의 행정력을 동원하더라도 불가능'한 물리-지리-행정학적 상수로, 전근대 국가가 실제 유민들이 살아갈 땅을 정해 거주지를 나누어 줄 수 있는 한도는 수만 호는커녕 수천 호, 수백 호도 쉽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이 같은 기록들을 전부 영토권의 이전이 아닌 그저 인구의 이동, 즉 망명일 뿐이라 주장하고 있죠. 아무튼,, 발해의 영토가 고려에 귀속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26년, 거란이 상경 용천부에 '괴뢰정부인 동란국'을 세우고, '그 땅을 강제 점령' ☞ 928년, 동란국이 현지 유민들의 거센 저항을 견디지 못해 상경성[홀한성] '통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국왕 예룰드베이를 포함한 주요 행정부가 요양고성의 '동평군으로 이동'하고 주민들은 그곳에 강제 이주 ☞ 930년, 예룰드베이가 후당에 망명하면서 동란국은 사실상 자치 기능 전면 상실 내지 '통치의 공백' 야기 ☞ 936년, 동란국 폐지. 고려 태조의 4국[고려+발해+후백제+신라] 통합.

 훗날 거란은 발해 땅을 점유하지 못한 오욕을 지우고, 상경 용천부의 상징성을 이어 가기 위해 옛 부여성 자리에 위치했던 황룡부에 '용천부'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대광현 귀부 사건의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보시다시피 대씨 고려[발해] 태자의 귀부와 그 유민의 수용은 발해 왕실이 보유한 요동 및 만주 강역 전체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과 '정통성'을 고려가 공식 승계했음을 의미합니다. 고려는 행정문서상 이 땅들의 소유권을 먼저 넘겨 받았고, 현종-문종 대에 이르러서 이른바 '다층적 지배구조에 의한 실효적 영토 지배'를 완성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여백이 있다면 후술하기로 하겠습니다.

 자, 그럼 다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926년, 거란 태조는 고려 태조가 보존시킨 압록강[현 이통하] 서편의 발해 부여성을 빼앗아 차지했으며, 이로부터 불과 며칠이 지난 후 상경 용천부의 홀한성을 무너뜨려 발해를 멸망시키고, 부여부를 황룡부로 고쳐 고려와 대치하였습니다.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켜 화가 오른? 고려 태조는 이에 질세라 이통하 이북 혼동강[현 송화강] 유역의 여울목인 마헐탄이란 곳을 고려와 거란의 경계로 설정하고, 거란 황룡부를 지척에서 압박하는 동시에 언제든 북쪽으로 더 치고 올라갈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928년, 발해 영토 지배에 실패한 거란은 이제 서쪽으로 눈을 돌려 요양의 주도권을 노리지만, 이를 두고보며 가만히 있을 고려가 아니었습니다. 936년, 발해-백제-신라의 소유권을 얻어 드디어 4국 통합의 해동천하를 이룩한 태조는, 여세를 몰아 아예 거란을 멸망시키고 그 땅까지 차지하기 위해, 중국 5대 왕조 중 하나였던 후진의 황제 석경당에게 거란을 앞뒤로 협공하자는 밀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후진은 거란 태조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태종 예룰드더광에 의해 이미 거란의 속국 신세로 전락해버린 상황이었죠.

 그로부터 불과 2년이 지난 938년, 본격적으로 고려를 압박하기로 마음먹은 거란이 요양고성에 설치했던 동평군을 남경으로 하였다가 다시 동경이라 고치고, 동경 요양부를 신설하며 그 일대를 본격적으로 장악해 나갑니다. 942년, 거란은 고려의 정세를 염탐하고자수교를 맺자는 명목으로 낙타와 함께 사절단을 보내지만, 태조는 단호히 거절하며 사신들은 유배를 보내고 낙타는 다리 아래에 묶어 모두 굶겨서 죽여버립니다. (여기까지가 태조 대의 영토사이며, 전체를 이 같은 템포로 설명드리면 글이 상당히 길어질 것을 염려해 이후부터는 정말 핵심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은 따로 댓글로 남겨주세요)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960년, 제4대 황제 {{광종}}
의 시대를 맞이한 고려는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던 요양 땅에 대한 주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서경을 황제의 도읍인 '황도' 개경에 버금가는 서쪽 도시라는 이름의 '서도'로 고칩니다. 또한 즉시 요하 유역에 군대를 출동시켜 가주와 송성을 차지하면서, 거란 동경으로부터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리 영토를 개척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훗날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6대 황제인 {{성종}} 시기 여러분 모두 잘 아시는 거란의 1차 침공이 일어납니다. 마침 이 무렵 태조가 확장한 압록강[현 이통하] 국경 부근에 여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서희 장군이 이들을 전부 몰아내고 강의 동쪽에 8주를 설치한 다음 강을 기점으로 고려와 거란 양국 사이 경계를 정하는, 공식 외교 합의를 맺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겠다 판단한 거란이 마침내 해당 합의를 깨고 대규모 침략을 강행한 것이 바로 본격적인 고려-거란 전쟁의 서막입니다. 거란사 최고의 명군이라는 예룰드룽쉬(야율융서)와 한국사 최고의 명군 {{현종}}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여, 승부가 쉽게 가려지지 않았으나 현종과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을 찍은 고려가 결국 이 길고도 치열한 대전쟁의 마지막 승자가 됩니다. 다사다난했던 삶을 이겨내고 극적인 성공을 이루어낸 현종 황제의 스토리는 다들 잘 아실 테니 따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고려를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한 현종의 치세에, 이 전쟁을 주시하던 수많은 나라들이 귀부 혹은 내조하거나 조공을 바치며 해동천하의 일원이 되기를 간청합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인 현종 시대에 고려의 외연은 만주 동북부를 넘어 연해주 심처에까지 파고들었으며, 처음엔 외방 조공국의 지위에서 출발한 여러 나라와 부족집단은 이윽고 제국 내 광활한 특수실효지배영토로 편입됩니다. 현종이 이 거대한 강역 확장의 초석을 마련했고, 드디어 고려의 황금기 내지 최전성기로 일컫는 {{문종}} 시대에 이르자 오늘날 '장광재령을 넘어 아무르강 하바로프스크 일대 및 피터대제만 유역의 파르티잔스크'까지 약 47~50개 이상의 주요 거점 도시에 귀순주를 설치합니다. 고려는 여진 번장들에게 고려식 이름과 공무용 붉은 도장(주기)을 하사해 고려의 지방관으로서 행정 사무를 맡아보게 했습니다. 그 땅에 고려식 성들을 쌓고 달력을 내려 고려의 시간 질서가 지배하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강력한 사법권을 행사하여 고려의 율법이 적용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유사시에는 병력을 징발하고 평상시에는 변경 수비를 담당하게 하여, 다층적 지배구조의 강역 통치 체계를 완성시킵니다. 

 그렇게 오랜 태평의 세월이 흘러 황금기의 막바지인 {{예종}} 시기에 와서는, 고려-거란 전쟁 당시 예룰드룽쉬가 무단 점거했던 보주를 되찾아 서북 국경의 방어라인을 다시 완전한 형태의 압록으로 회복합니다. 동북으로는 그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한 완안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직접통치를 통한 정규실효지배지[직할지]의 물리적 경계선을 북상시키기 위해 고려-여진 전쟁을 선포합니다. 윤관과 척준경 등의 활약으로 기존 정주에서 9성 북단인 길주까지 경계를 확장하였다가, 여진의 거센 저항에 따라 9성 남단 공주[공험진]까지를 최종 행정라인으로 설정하고 그 위쪽은 다시 특수실효지배영토로 재전환시켰습니다. 금나라와는 그렇게 갈라전을 완충지대로 두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군사적 침범을 하지 않았으니, 외부적으로는 또 한 차례의 평화기라 할 만한 시절이었습니다. 또 다시 긴 시간이 지나 몽골의 원나라가 들어섭니다. 홍복원 및 최탄 등의 매국노들이 서경[환인] 이북 40개 성을 전부 적에게 들어다 바치면서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요심 땅의 행정권을 잠시 이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북방 강역에 대한 통할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자 지역 사이 유대가 단절되며, 자연스럽게 광활했던 특수지들은 원나라 치하 자치 구역들로 흡수돼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제국의 마지막 불꽃인 {{경효대왕·공민왕}} 때에 이르자 기나긴 굴종의 세월을 종식시켜 문종 시대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기치를 들어 올립니다. 서경 동녕부와 화주의 쌍성을 수복했으며, 지용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을 공략하게 하니, 1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다시 요심 땅의 주권을 되찾은 것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옛 고구려의 평양성이자 거란 동경 요양부의 자리인 요성까지 차지해 일시적으로 서북계 최대 영토를 확보합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군사상의 문제로 요성 성곽 자체에서는 퇴각을 하였으며, 대신 이후 화주 이북 요심 땅에 관리를 파견하고 세를 거두어 백성들을 다스리는 실효지배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우왕}} 시기가 되면서  중국 땅엔 농민 출신으로 일어나 한족을 통일한 주원장이란 자가, 돌연 '원나라가 지배했던 지역은 전부 명나라의 소유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더니, 이내 고려가 영토 주권을 행사하여 실효지배 중이던 철령 일대[현 요령성 개원시]에다가 막무가내로 '철령위'라는 군사행정기구를 설치하겠다 통보합니다. 

 이에 경악을 금치 못한 고려 정부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간교한 술책에 능했던 주원장은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의 행정권이 원에 이양됐던 시기를 들이밀며, 당시 고려의 국경은 철령이 아닌 압록강[현 북한 압록강 혹은 애하]이 아니었느냐 따졌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고려 고유의 서북 경계이던 본래의 압록[현 이통하-혼하]을 인정하지 않겠음은 물론, 요동에서 요동의 주인인 고려를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할 궤변이었습니다. 그리곤 곧이어 자신들이 가만히 조사해본 결과, 고려가 주장하는 철령 역시 현 요령성 개원 일대가 아닌, 그로부터 동남쪽 5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면서 느닷없이 쌩뚱맞은 유령 좌표를 찍더니, 여기까지가 너희 고려 땅이다!라는 엄포를 놓습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고조선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중국에게 멸망당한 수난사들을 쭉 나열한 국서를 보내 노골적인 협박을 일삼는 등, 세계 역사를 뒤져봐도 다시는 없을 외교적 폭압의 끝을 보여줍니다. 

 하루 아침에 눈 뜨고 멀쩡한 요동 땅 수백리를 강탈 당하게 생긴 고려는, 이참에 군대를 출동시켜 아예 국경선을 영구적으로 확정하리라 작정하고,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 장군이 철령위 설치를 위해 요동에 공고문을 붙이러 들어온 명나라 기군을 도륙냅니다. 이내 고려의 5만 군대가 요동으로 출병하니 이것이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요동정벌의 실체입니다. '정벌'이란 용어는 본래 내 땅이 아닌 곳을 공격해 징벌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이 자체가 '위화도 회군'의 원죄를 덮기 위한 교묘한 프레임인 것입니다. 이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성계}가 회군하여 조선을 세우고, '음양산정도감'이란 기구를 설치해 광활한 대지의 도시 지명들을 전부 한반도 땅 밑으로 이식했으며, {세종} 때에 명나라와 조선 양국이 각각 《명사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함으로써, 요동은 공식적인 명나라의 땅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민족 고유의 영토 주권'과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이라는 두 선택지 사이 현실적 고민을 해야 했던 세종은, 결국 후자를 택하였습니다. 《고려사》편찬 당시 직서의 원칙을 세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제한적 직서'의 필법에 따라 '대사천하' 등 용어를 개변시키고 고려의 수많은 특수지 영토 기록을 누락하거나 삭제했으며, 조선의 개창자이자 할아버지인 이성계를 역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왕과 최영을 영토욕에 눈이 먼 미치광이와 노망난 영감탱이로 만들어, 마치 '이들의 무모한 탐욕과 야욕을 바로잡은 회군이야말로 구국의 결단'이라는 프레임을 완성시킵니다. 복잡했던 국제 정세를 역이용하여 '요동은 원래 우리 땅이 아니었다'라는 짧은 명제 하나를 박제시켜둠으로 인해, 지금까지 그 왜곡된 역사 인식이 600년 넘게 이어져 온 것입니다. 동서고금에 찾기도 힘든 대국민 사기인 것이죠.




*[104] '(고려의 경계는) 서북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된 것이다' {고려의 동북면 강역이 역사상 고구려의 범위를 초월하여 확장되었음을 명징하게 입증하는 지리적 실체의 폭로 ☞ 고려가 만주 동북부와 연해주 일대까지 정규실효지배지[580개 주군]의 직할 행정망을 성공적으로 이식했음을 증명하는 핵심 증거이자 실체적 단서}
《고려사 지리지, 서문⒝》

*[106] '우리(我)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너비와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 고려(高麗) 태조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도읍을 정하니 삼한(三韓)의 땅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고려가 다스린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極矣)를 이루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본거지로 삼아 삼한을 통합하고 직접 다스린 행정 단위[직할지 주군]만 580여 개, 그 강역의 둘레는 무려 10,000리에 이르렀음을 단호히 선언한 지리적 위용 ☞ 요동[서북]과 만주[동북]를 아우르던 동방의 대국으로서 당시 고려가 지닌 제국적 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정적 사료 / 고려가 번영을 누린 시기야말로 우리나라[동국] 영토가 극치에 달했던 절정이었음을, 현존 유일한 고려 국가의 정사 지리지를 통해 단적으로 증명}
《고려사 지리지, 서문⒞》




이상, 그 어디서도 알려주지 않는 충격적인 한국사의 진실. '고려의 영토 변화 개괄' 설명을 마칩니다. 본문의 모든 설명은 전부 관련 사료 원문과 최신 연구 논문 및 기타 데이터의 요점을 추려내, 단 한 줄도 버리지 않고 정리한 제 핵심 자료집으로 입증한 내용들이니, 정확한 출처를 원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편하게 댓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