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찍 깼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될 줄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새벽 2~3시쯤 나갈 채비를하고 집밖으로 나선다. 날씨가 꽤 풀려서 영하로 내려 가지도 않는다. 몸이 먼저 봄이 온걸 느낀다.

겨울은 빈자에게 가장 괴로운 계절이다. 과거에도 빈민들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가올 겨울을 걱정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여름보다 겨울이 괴로운 이유는 육체적 고통과 재산적 피해가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름의 더위는 불쾌하다. 땀을 잔뜩 흘리면 어지러워 질때도 있고 불쾌하지만 화장실에서,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끼얹으면 견딜만 해진다.

겨울의 추위는 그 자체로 고통이다. 잠에서 깨 찬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부터 이불을 나서는것, 나가면 손발이 곱는 고통을 느끼는것, 입술과 손과 얼굴이 건조해져 갈라지고 찢어질 듯 아픈것과 수도관이 얼거나 터지거나 보일러가 고장나거나 전기장판과 전기난로,과거에 연탄 떼는 것 모두가 재화의 손실로 이어진다. 육신과 정신과 재정의 고통이 한꺼번에 몰아친다.

이번 겨울도 가스비와 전기료가 많이 새어 나갔다. 아낀다고 아껴봤지만 혹시라도 동파라도 난다면 아낀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더 큰 고통으로 되돌아오는지라 더 아낄수가 없었다.

고요하게 눈 내리는 겨울은 낭만적이기도 하다. 겨울의 아름다움을 볼때 삶에 바짝 몸을 숙여 붙어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주택가들을 지나칠때 작은 나무들은 하얀 꽃을 피어내기도 했다. 새싹보다 꽃을 먼저 피워내는 생물학적 이유는 뭘까하고 잠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유없는 행동은 없고 불합리한 행동을 되풀이하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 말인즉 살아있다면, 생존하고 있는 것이 최대로 합리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태 살아있다면 린디효과로 앞으로도 살아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밤을 돌아다니며 봄을 느끼고 봄이 오면 하겠다던 약속을 되새겨본다. 취직을 하고 수영을 하고 여행을 떠나보고... 자유가 많아지면 선택이 어렵다.

걸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난 겁이 많고 게으르다. 달리 말하면 겁이 많아 신중하고 게을러서 한번 정하건 잘 바꾸지 않는다. 신중해서 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기마련이다. 뭐든 그렇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임대 간판들이 걸려있다. 누가봐도 장사안될 것 같은 가게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왜 실패할게 뻔한 도박을 하지? 골목마다 누군가의 꿈이었을 임대 붙은 상가와 비어있는, 한땐 시끌벅적했을 2층,3층 빈집들을 보며 지나칠때 연민과 씁쓸함을 느낀다.

나심 탈레브의 책을 읽으며 보았던 시스템 학습에 대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스템 학습이란 중대한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은 시스템의 본질적 특성에 따라 소멸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 남게 되는 방식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이런 선택(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걸러내는 사회적 시스템이 작동해 이들은 현실에서 도태되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는 수준의 영역에 이를 때까지 사회에서 밀려난다. 우리 사회는 이 같은 시스템 학습을 통해 진화하며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3만보 가까이 걸었다. 다리가 무겁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잡스런 생각도 사라진다. 새벽 해는 떠오르고 주택은 본 색깔을 찾아간다. 돌아갈 길이 걱정일때 새벽을 달리는 첫 버스를 보며 안도한다.

도서관 개관은 9시다. 집에서 태워온 우유 커피를 마시며 온 탓에 배도 고프지 않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볼까하고 억지로 움직이다 도서관 바로 앞에가서 시계를 본다. 9시가 되지 않았다. 한시간 혹은 몇십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포기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아침 버스를 타고 오는 길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맘 놓고 잔다면 종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되돌아와야 된다는 생각에 억지로 깨 있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문득 회사 다닐때 통근버스를 타며 느꼈든 그 피로와 부담감과 갑갑함이 떠오른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낫다. 오늘은 잠깐의 이벤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