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추파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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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엔추파도스. 침투된 자들. 이 단어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정작 그 대상이 되어야 할 자들이 이 말을 뒤집어 쥐고 있다. 분열을 말하는 쪽이 침투자라고.

 

나는 운동권 강사에게 정치학을 배운 보수주의자다. 저들의 언어를 안다. 저들이 어떤 문법으로 세상을 정리하고, 어떤 틀 위에서 정치를 굴리는지 안다.

 

이 구조는 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저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같은 문법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아직도 저 울타리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걸 정리해야겠다고 느꼈다.

 

저들의 언어로 저들을 해체하겠다. 부정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원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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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변증법이라는 무기

 

정반합. 이 단어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정(正)이 있고, 그에 대한 반(反)이 있고, 둘의 충돌에서 합(合)이 나온다. 그리고 이 합은 다시 새로운 정이 되어 다음 반과 부딪히고, 또 다른 합을 낳는다. 이 과정을 통해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인간 해방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이것이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좌파의 운영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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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영체제가 사용자에게 주는 것은 하나다. **면죄부.**

 

역사가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 순간,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그 방향 위에 놓인다. 실패는 "아직 합에 도달하지 못한 과정"이 되고, 타인에게 끼친 피해는 "역사의 진행에서 불가피한 비용"이 된다. 방향이 선(善)이니까, 그 위에 선 자기도 선이다. 이것이 좌파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구조다. 멍청해서가 아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도록 설계된 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을 보자. 수천만이 죽었다. 그런데 좌파 내부에서 이것은 어떻게 처리되었나. "진보의 이름을 빌린 미치광이." 개인의 광기로 격리하고, 서사는 보존한다. "사회주의의 방향은 맞았다, 스탈린이 미쳤던 것이다." 수천만의 죽음 앞에서도 "진보라는 방향 자체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은 나오지 않는다. 나올 수 없다. 방향을 의심하는 순간 면죄부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은 이것을 자정(自淨)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스탈린도 비판한다. 우리에게는 자정 기능이 있다." 그러나 방향성을 전제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 면역체계가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이 자기부정이 아니듯, 서사를 보존하기 위해 개인을 도려내는 것은 자정이 아니라 체제의 증식이다. 방향은 절대로 심판대에 올라가지 않는다. 올라갈 수 없다. 그것이 이 도구의 설계다.

 

이 진영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좌파는 멍청해서 그렇다." 멍청함이든 무임승차든 선동이든, 뭐라 부르든 좋다. 그러나 멍청함만으로 이 정도의 자기방어 시스템이 작동하지는 않는다. 실패를 과정으로, 피해를 비용으로, 학살을 개인의 일탈로 처리하는 이 연금술은 도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도구가 정반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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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도구를 공유하는 자들이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김대중과 나란히 드러눕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훗날 보수의 탈을 쓰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드러눕던 시절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민주화의 과정이었으니까." 방향이 면죄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서 시작된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같은 뿌리, 같은 문법, 같은 면죄부.

 

이들이 보수우파가 맞는가.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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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페이스메이커는 왜 포기하는가

 

1편에서 나는 정반합이 좌파의 면죄부라고 썼다. 방향이 선이니까, 그 위에 선 자기도 선이 된다고. 이번에는 그 방향 위에서 배역을 나눠 맡은 자들의 이야기를 한다.

 

정반합의 구도 안에서 보수의 자리는 정해져 있다. 반(反)이다. 그런데 이 반은 정에 맞서는 반대가 아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되,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이다. 방향은 공유한다. 목적지도 공유한다. 다만 너무 빨리 가면 체제가 흔들리니까, 적당히 제동을 걸어주는 것. 그것이 이 구도 안에서 "보수"에게 주어진 임무다.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다. 선두 주자와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 같은 코스 위에 있다. 다만 속도를 조절해주다가 정해진 지점에서 빠진다. 빠지는 것이 실패가 아니다. 빠지는 것이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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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도를 알면, "결정적인 순간에 포기한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엄을 해제한다. 탄핵에 동의한다. 계엄을 사과한다. 헌재 판결을 존중한다. 윤어게인을 손절한다. 코리아 퍼스트로 바꾸려 한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수행이다. 정해진 지점에서 빠지는 페이스메이커가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배신이 아니냐고? 배신은 같은 편이었던 자가 돌아설 때 쓰는 말이다. 처음부터 같은 편이 아니었던 자에게 배신이라는 단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같은 방향, 같은 목적지, 같은 이해관계. 부정선거의 이해관계마저 공유하는 자들이 결정적 순간에 같은 쪽으로 서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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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것이 보이지 않는가.

 

정반합이라는 틀이 이것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정과 반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야 무대가 성립한다. 유권자가 "좌우 대결"이라고 믿어야 역할극이 굴러간다. 그래서 저들은 싸우는 척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분노하는 척하고, 대립하는 척한다. 그러다 결정적 순간이 오면 —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복귀에는 언어가 준비되어 있다. "대승적 결단." "책임 있는 태도." "성숙한 보수." 전부 합(合)으로 수렴하는 것을 포장하는 말이다. 후퇴가 아니라 성숙이라고, 굴복이 아니라 종합이라고. 정반합이라는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자동 번역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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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묻겠다.

 

이 구조를 보면서도 저 당에 기대를 거는 것은 무엇인가. 페이스메이커에게 완주를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빠지는 것이 임무인 자에게 "이번엔 끝까지 뛰어라"고 외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다음 편에서 쓴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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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진짜 엔추파도스

 

엔추파도스. 침투된 자들. 이 단어가 이 진영에서 힘을 얻고 있다. 국민의힘 안에 적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마다 무너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예상대로, 역프레임이 나왔다. "분열을 조장하는 너희야말로 엔추파도스다."

 

나는 둘 다 틀렸다고 본다. 엔추파도스라는 진단 자체는 정확하다. 방향이 틀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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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안에 침투자가 있다"는 말의 전제는 이것이다. 원래는 건강한 보수정당이었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오염시켰다는 것. 그 침투자를 색출하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 건강한 원본이 있었는가.

 

계보를 보자. 박정희 견제 세력에서 줄기가 갈라졌다. 하나는 좌익으로, 다른 하나는 우익의 탈을 쓰고. 김영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김대중과 나란히 드러눕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3당합당으로 보수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 그 껍데기가 한나라당이 되고, 새누리당이 되고, 국민의힘이 되었다.

 

건강한 원본 따위는 없었다. 보수정당의 탈을 쓴 것이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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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엔추파도스의 방향을 바로잡는다.

 

당 안에 침투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당 자체가 대한민국 보수우파에 침투한 엔추파도스다.**

 

보수우파의 자리를 차지했다. 보수우파의 언어를 썼다. 보수우파의 표를 먹었다. 그러면서 1편에서 쓴 그 방향을 공유하고, 2편에서 쓴 그 임무를 수행했다. 진보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서 속도를 조절하는 페이스메이커. 결정적 순간에 빠지는 것이 역할의 이행인 자들. 이들이 대한민국 보수우파의 자리에 앉아 있다.

 

이것이 침투가 아니면 무엇인가.

 

특정 인물이 엔추파도스가 아니다. 당 전체가 구조적 엔추파도스다. 개별 간첩이 숨어든 것이 아니라, 간첩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보수우파의 간판을 달고 수십 년째 영업 중인 것이다. 그 안에 당적을 두고 준거집단으로 삼는 이상, 개인의 소신은 구조 안에서 소멸한다. 물살의 방향은 개인의 팔짓으로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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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역프레임은 왜 나오는가.

 

당연하다. 자기 정체를 규정하는 언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엔추파도스라는 단어가 당 안의 누군가가 아니라 당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단어를 빼앗아 반대편에 던진다. "침투자는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이것은 반박이 아니다. 방어 반사다.

 

그리고 이 방어 반사야말로 저들이 자기 뿌리를 알고 있다는 증거다. 모르면 방어할 필요가 없다. 단어가 자기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뒤집어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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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한다.

 

엔추파도스는 정확한 진단이다. 다만 지금까지 방향이 틀려 있었다. 당 안에 침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 자체가 대한민국 보수우파에 침투한 엔추파도스다. 같은 뿌리에서 나와 보수의 탈을 쓰고, 보수의 자리를 점거하고, 보수의 표를 가져가면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온 자들. 수십 년간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투인 줄도 몰랐던 것이다. 너무 오래되어서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저 간판 아래 기대를 거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편에서 쓴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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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포르노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이 아니다. 보수의 자리에 침투한 엔추파도스다. 같은 방향, 같은 뿌리, 같은 이해관계. 결정적 순간에 빠지는 것이 임무인 페이스메이커. 이것을 1편에서 3편까지 썼다.

 

그런데 이 구조를 이미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부정선거를 봤다. 결정적 순간의 포기를 봤다. 역프레임을 봤다. 다 봤다. 그런데도 저 간판 아래에 기대를 건다. "이번엔 다르겠지." "이 인물은 진짜겠지." "이번 대표는 싸우겠지."

 

이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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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다.

 

포르노의 구조는 단순하다.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주는 감정적 쾌감을 소비한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면서, 그 장면이 주는 자극으로 욕구를 해소한다. 해소했으니 현실에서 움직일 동력은 사라진다.

 

국민의힘에 기대를 거는 행위가 이것이다. "이번엔 싸우겠지"라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강경한 발언이 나오면 흥분한다. 대립하는 장면이 연출되면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포기하면 — 분노하고, 실망하고, 그리고 다음 회차를 기다린다. "다음 인물은 다르겠지." 다음 회차가 나온다. 또 소비한다. 또 배신당한다. 또 기다린다.

 

이 순환이 끊어지지 않는다. 끊어질 수 없다. 포르노의 본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반복 소비가 가능하다. 실현되면 더 이상 볼 이유가 없다. 실현되지 않아야 다음 회차가 성립한다. 국민의힘이 결정적 순간에 포기하는 것은 이 포르노의 다음 시즌을 여는 장치다. 배신이 콘텐츠가 되고, 분노가 소비가 되고, 기대가 다시 상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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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포르노에는 공급자가 있다.

 

저들이 싸우는 척하는 장면.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 분노하는 척하는 장면. 전부 콘텐츠다. 2편에서 썼다. 저들의 임무는 속도 조절이다. 그런데 속도 조절자가 가끔 격렬하게 달리는 척해야 관객이 떠나지 않는다. 페이스메이커가 잠깐 치고 나가는 장면을 보여줘야 "이번엔 진짜 뛰는구나"라는 착시가 유지된다.

 

결정적 순간에 빠지는 것이 임무이고, 빠지기 전까지 달리는 척하는 것이 콘텐츠다. 이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이번엔 다르다"고 믿는 것이 포르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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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둔다.

 

나는 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와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위를 외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진단을 하고 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네가 소비하고 있는 것은 보수우파 정당의 투쟁이 아니다. 보수우파의 자리에 침투한 엔추파도스가 생산하는 콘텐츠다. 싸우는 척하는 장면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고, 배신당하면 분노하고, 분노가 가라앉으면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것. 이것이 네가 하고 있는 일이다.

 

이것을 알고도 계속 볼 것인가. 그것은 네 선택이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