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오는 이른바 ‘서울대 예산 쏠림’ 논쟁을 보면, 이 나라가 '공정'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가볍게 쓰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잘하는 곳에 더 투자해야 한다는 너무도 상식적인 말을 꺼내는 순간, 누군가는 곧바로 엘리트주의니 특권이니 하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국가 운영에서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 정의는 언제나 정치의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서울대에 예산이 많이 배정된 이유는 단 하나다. 서울에 있어서도, 이름이 좋아서도 아니다. 연구 성과, 국제 논문, 국가 전략 연구, 산업과 과학기술에 대한 실질적 기여,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꾸준히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국가는 세금을 투입할 때 ‘얼마나 나눠 가질 것인가’보다 먼저 ‘얼마나 공공 가치를 만들어냈는가’를 따져야 한다. 이 기준에서 서울대는 오랜 시간 동안 결과로 답해온 기관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엄지손가락엔 많이 주고 새끼손가락엔 적게 주는 게 공정하냐”는 비유가 등장한다. 이 말은 듣기엔 따뜻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손가락은 모두 같지 않고, 역할과 기능도 다르다. 엄지가 빠지면 손 전체가 무력해지지만, 새끼손가락이 엄지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대학이 같은 책임, 같은 성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같은 대학이니 같은 돈’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는 순간, 이는 공정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차별화가 된다.

 

공정은 성과를 무시하는 평등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은 성과를 낸 집단에 대한 처벌이고, 노력과 책임에 대한 면책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 구조가 남기는 것은 단 하나, 사회 전체의 수준 저하다. 잘해도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메시지를 국가가 먼저 던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데 들어갔다고 하면 그게 진짜 공정이냐”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공정은 출발선을 보정하는 문제이지, 도착선을 억지로 평평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이나 가정환경 때문에 기회가 불리했다면, 그것은 입시 이전의 교육 환경과 생활 조건에서 바로잡아야 할 사안이다. 이미 성과를 낸 대학의 연구 예산을 깎아 분배하는 방식으로는 어떤 불균형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방대가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방법이다. 서울대를 깎아서 지방대를 키우겠다는 발상은 손쉬운 정치적 제스처일 뿐, 실질적인 해법이 아니다. 지방대가 성장하려면 지역 산업과 연구 수요, 일자리와 생태계가 함께 자라야 한다. 돈의 액수를 맞춘다고 해서 서울대의 70%짜리 대학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연구는 숫자가 아니라 축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가 경쟁력은 평균을 올려서 생기지 않는다. 언제나 최상위 허브가 아래를 끌어올리는 구조에서 성장해왔다. 그 허브를 약화시키는 정책은 결국 전체를 가난하게 만든다. 분배는 성과 위에서만 지속 가능하고, 정의는 결과를 나누는 데서가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낼 기회를 넓히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 논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것은 교육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언어를 빌린 감정 정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면, 그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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