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카르티에는 시계장인 이름이다.

 

정확도는 일본 시계.

 

전재수는 부엉이 바위나 옥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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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시계는 원래 남자의 물건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남성성의 상징도 아니었고, 패션도 아니었다. 시계는 한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이었다. 조끼 안쪽에서 체인에 매달려, 시간을 본다기보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를 증명하는 장신구에 가까웠다. 손목에 뭔가를 찬다는 건 오히려 여성적이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1904년, 한 비행사가 불평을 늘어놓는다. 비행사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은 친구였던 '루이 카르티에'에게 말했다.

 

“비행 중에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 보기가 겁네 불편해 ㅆㅂ.”

 

두 손은 조종간을 잡고 있고, 주머니를 뒤질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카르티에는 산토스(Santos)라는 시계를 만든다. 손목에 차는 시계, 비행 중 바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계. 이때 만든 그 시계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명품 시계·주얼리 브랜드 카르티에(Cartier)다. 이름만 남은 우연이 아니라, 그대로 이어진 같은 계보다.

 

하지만 손목시계를 남자의 물건으로 완전히 바꿔버린 건, 비행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시간은 감각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었다. 포병 사격 시간, 부대 이동 시간, 공격 개시 시각. 회중시계를 꺼내는 순간은 곧 위험이었다. 결국 병사들은 시계를 손목에 묶었다. 그 단순한 선택이 이후 남성 손목시계의 출발점이 됐다. 손목시계는 그 순간부터 장신구가 아니라 생존 도구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 병사들은 그대로 손목시계를 차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전장에서 쓰던 물건은 곧 남성성의 상징이 됐고, 손목시계는 ‘여성용’이라는 인식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이때부터 시계는 기능을 넘어 정체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방수, 항공, 다이버, 레이싱, 우주. 시계는 점점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물건이 됐다.

 

 

이 지점에서 스위스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건 스위스가 처음부터 시계 강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자원도 없고, 바다도 없고, 농업도 넉넉하지 않았다. 대신 스위스에는 종교개혁이라는 독특한 환경이 있었다. '칼뱅주의'는 사치를 금지했고, 제네바의 금세공 장인들은 갈 곳을 잃었다. 장신구는 만들 수 없었지만, 시간을 재는 도구는 허용됐다. 그렇게 보석 장인들의 손기술이 시계로 옮겨갔다.

 

여기에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 장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기술은 폭발적으로 축적된다. 스위스 시계 산업은 공장이 아니라 마을 단위 분업으로 성장했다. 누군가는 기어를 만들고, 누군가는 스프링을 만들고, 누군가는 조립만 했다. 효율은 느렸지만 숙련도는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그래서 스위스 시계는 빠르지도 싸지도 않았지만, 오래가고 믿을 수 있었다.

 

 

일본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일본 시계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어떻게 더 정확하게, 더 싸게 만들 것인가.” 그 답이 쿼츠였다. 1969년 세이코의 쿼츠 시계는 시계 산업 전체를 뒤흔들었고, 정확도라는 기준에서 스위스는 완패했다. 일본은 망설임 없이 쿼츠를 받아들였고, 스위스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여기서 선택의 길이 갈린다. 일본은 기능의 승리를 택했고, 스위스는 의미의 재정의를 택했다. 정확도 경쟁을 포기한 대신, 스위스는 기계식 시계를 문화와 전통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시간은 더 이상 측정 대상이 아니라 소유하는 개념이 됐다. 불편하고 비싸고 굳이 필요 없는 물건이 오히려 남았다.

 

그래서 지금 남성 손목시계는 참 묘한 물건이다. 시간을 보기엔 휴대폰이 있고, 건강 관리는 스마트워치가 더 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자들은 여전히 기계식 시계를 찬다. 이유는 간단하다. 효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을 효율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손목 위에 올려두는 셈이다.

 

 

일본 시계는 시간을 관리하는 도구에 가깝다. 정확하고 성실하며 믿음직하다. 스위스 시계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약간의 오차를 감수하고, 불필요한 기계를 감당할 여유를 드러낸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선택은 분명한 성향을 드러낸다.

 

그래서 남자의 시계는 결국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생각 하는지를 말할 뿐이다. 줄이고 관리하려는 시간인지, 굳이 돌아가더라도 의미를 남기려는 시간인지.

 

 

지금 통일교 뇌물 문제로 정치권이 시끌시끌 하다. 특히 재수 없는 전재수의 카르티에 시계가 노무현의 논두렁 밭두렁 시계만큼이나 이슈에 오르내리고 있다.

 

"윤씨는 지난 8월 민중기 특검팀 면담에서 민주당 의원인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까르띠에·불가리 명품 시계 2개와 현금 4000만원을 건넸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재수의 변명도 가관인데, 서른살 이후 시계를 차본적이 없다고 한다. 아무튼 부엉이 바위는 아직도 제자릴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거리가 멀어 찾아가기 불편 하다면 아파트 옥상이라도 천천히 올라가며 생각해라.

 

ᆢ그리고 담배 한 대 피던가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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