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서울을 포함한 서부전선은 중요한 곳이었기에 전력이 막강한 미군과 UN군이 지키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곳인 동부전선을 한국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에 중공군은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동부전선으로 밀고 내려왔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서부전선은 화력이 막강하니 약한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동쪽땅이라도 뺏어보자!"
이때 중공군 1개 중대(100여명)가 강원도 인제의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다. 이 고갯길은 국군 3군단 3개 사단(4만 명)의 유일한 보급로였다.

- 현리로 몰려든 한국군
국군은 오마치 고개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당황하였다. 중공군의 병력수를 파악하지도 않고 그들의 인해전술에 포위당했다고 여겨서 각 사단마다 후퇴 명령을 내린 것이다. 4만 대군이 중공군 100명이 무서워서 도망친 것이다. 이렇게 4만명이 달아난 곳이 현리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좁은지역에 4만 대군이 모인 바람에 무전기 전파가 방해가 되어 지휘계통이 마비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선통신망조차 매설을 깊게 하지 않아 전투개시전 중공군의 거센 포격에 유선망이 거의 끊어져 버렸다.
이때 유재흥 3군단장이 헬기를 타고 현리로 와서 사단장들과 작전회의를 열었다. 유재흥 장군은 "오마치 고개의 중공군 병력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 파견하여 돌파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헬기를 타고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이때 병사들이 헬기를 보고 "저기 군단장이 도망친다!"라고 외쳤다.
이에 공포에 질린 4만 대군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시 9사단 군수참모였던 김재춘은 ‘군단의 패주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9사단장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산속으로 도망치다 지친 국군병사들이 길에 주저앉자 북한군과 중공군이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 수십 명의 공산군들이 수천명의 국군을 뒤쫓아서 결국 2만여명의 국군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들 포로들은 인민군에 편입되어 이후 국군을 공격하게 된다.
밴 플리트 장군은 급히 유재흥 3군단장에게 연락했다.
밴플리트: General Yu, where is your corps?(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I don't know.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Where are your two divisions? Have you lost all your artillery, your transportation?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I think so. (그런 것 같습니다.)
밴플리트: General Yu, your corp is disbanded...report to General Chung for reassignment.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
밴 플리트는 격분하여 3군단을 해체시켰고 3군단은 창설 8개월 만에 해체되는 굴욕을 겪었다. 미 공군기는 현리 일대를 수색하며 한국군들이 버린 장비들을 폭격하였다. 중공군이 미군 장비들을 노획하여 전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현리전투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4대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 임진왜란 용인전투
2. 임진왜란 칠천량 전투
3. 병자호란 쌍령전투
4. 한국전쟁 현리전투
6.25 전쟁때 한국군의 수준은 낮았다. 장성과 지휘관들의 전략 및 작전은 시대에 뒤처져 있었고 병사들의 훈련상태도 엉망이었다.

<한국전쟁때 국군 모습>
부대를 통솔하기는 커녕 제일 먼저 도망쳐서 현리전투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인품도 엉망이었다. 군단장까지 지낸 인물이었지만 똥별스러운 일화들이 다수 전해진다.

<최석 장군>
1. 자신이 결재까지 한 사안임에도 이후 자신에게 뒷탈이 있거나 맘에 안들면 부하를 불러서 "내가 이걸 제대로 읽고 재가한건가? 그 때 왜 안막은건데?" 라며 생트집을 잡아 갈궈댔다고 한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당시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였다.
2. 9사단장 재직 시절, 그것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헌병대장 김시진에게 싱싱한 생선회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여 김시진은 그 말대로 생선회와 위스키까지 간신히 구하여 대령했는데 정작 최석은 노발대발하며 김시진을 두들겨 팼다고 한다. 알고보니 최석은 밤일을 같이 할 여자를 데려오라는 뜻이었는데.... 고지식한 김시진은 진짜 생선회를 마련해왔기 때문이다. 이를 속칭 '생선 사건'이라고 했으며 이 일은 꽤나 유명했다고 한다. 이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김시진이 순박한 사람이라며 청와대로 콜업하여 경호실 차장, 정보비서관, 민정수석 등으로 중용하였다. 이 생선 사건 때문에 최석에게 결정적으로 환멸을 느낀 박정희는 몸이 안좋아서 근무할 수 없다며 진단서를 제출하고 대구에 내려가서 요양하겠다고 통보한 후 대구 소재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3. 중공군과 한창 대치하는 상황이던 1951년 겨울, 다들 엄동설한에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한데 군수물자에 자신이 쓸 포마드를 포함되지 않았다며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4. 올라온 작전안을 읽지도 않고 승인해놓고 연대 배치가 잘못됐다며 참모들을 모욕하고 주먹까지 휘두른 적도 있으며, 휘하 대대장들을 자주 폭행했다고 한다.
-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분석한 한국군의 문제점
리지웨이는 한국군이 똥군기가 심하고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고 분석했다. 이로인해 병사들이 자신의 전우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한국군은 "돌격 앞으로!"라는 전진명령을 받아도 옆을 보고 눈치만 살피고 전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에만 의존하여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장교들의 수준이 낮아서 지휘력이 엉망이었고 부패도 심했다.
이에 리지웨이는 한국군 장교를 제대로 양성하려고 노력하였다. 1951년 12월 대구에 참모학교를 설치하고 이듬해인 1952년 1월에는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1951년 말에는 장교 250명을 선발해서 미국으로 단기 유학을 보냈다.
이러한 노력은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결실을 보게 된다.
- 장성들 가슴에 수류탄을 달게하다.
어느날 전방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장성 및 지휘관들에게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라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슴에 수류탄을 매달고 다니는 리지웨이의 모습에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군 장성들과 지휘관들은 모두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면서, 용기와 기백을 가지도록 하라!"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녔던 미8군 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