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전 내부나 사람의 내면의 모든 것이 불결해지면, 사람이 더 이상 깨끗하게 할 수 없다. 빗자루에 배설물과 오물이 가득 하면, 어떻게 방을 청소하는데 쓸 수 있겠느냐?! 안타깝게도 나 자신이 손을 사용해, 성전이 깨끗하게 되도록, 온갖 종류의 질병과 다른 겉보기에 불행한 일들의 고통스러운 수단을 통해 강제로 성전을 청소해야만 한다.
6. (성전 안의) "판매자"와 "구매자"는 인간 안에 있는 낮고 불순한 열정이다. 판매용으로 제공되는 가축은 가장 낮은 수준의 동물 감각을 나타내며 동시에 이로 인해 생긴 혼의 어리석음과 눈이 먼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사랑은 감각적인 잉태하는 성적사랑도 부족한 황소의 사랑과 비슷하다. 황소는 유일하게 가장 거친 기생생물과 같이 먹는 것에 대한 사랑에 의해 유지되고, 그의 인지력은 알려진 양의 인지력과 같다!
7. 환전자와 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들은 이미 인간의 동물적인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말하고 보여준다. 동물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배고프면, 한 늑대는 다른 늑대를 먹는다. 이런 환전자 또는 그러한 동물적인 자기 사랑은 모든 고통스러운 강제로 사람에게서 제거되야만 하며, 이런 사랑을 부추기는 모든 것은 뒤집히고 엎질러져야만 한다!
8. 예, 그럼, 왜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을까요? 심지어 그러한 사랑조차도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고귀한 씨나 또는 밀의 곡물은 동물의 오물로 잘 거름이 된 밭에서 가장 잘 자라나, 풍성한 수확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물질을 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들에서 모든 거름을 빼내야 한다면, 귀한 밀의 곡물은 잘 자라지 못할뿐 아니라 수확량이 매우 나빠질 것이다.
9. 처음에 큰 더미로 밭에 가져오는 오물은 여러 군데 나누어 던지고 흩어야 한다. 그럴 때 땅에 유익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큰 더미로 남으면, 오물이 있는 곳의 모든 것을 질식시키고, 다른쪽 밭에 쓸모가 없다.
10. 여기에 내가 환전자의 돈을 흘렸을 뿐, 나에게 매우 쉬웠을지라도 완전히 파괴하지 않은, 복음서에 나오는 성전 청소의 역사를 한 이유가 있다.
11. 그러나 성전 안에 있다가 밖에 있는 옛 장소로 가야했던 비둘기 판매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 그것은 순전히 세속적 관계에 관한 모든 종류의 의식, 품위, 공손함, 상냥함 등으로 구성된 외적 미덕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이 먼 상태가 이를 내면의 삶의 가치로 높이고, 이를 인간의 진정한 생명으로 만들고, 뿌리내리게 하기 원하는 것이다.
13. 비둘기는 공중의 동물이며 근동 지방에서 편지 전령, 특히 사랑의 문제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상형 문자로써 고대 이집트인에게는 부드럽고 섬세한 대화를 의미했다. 이처럼 비둘기는 성전에서 이뤄진 대화의 표시로 사용되었다. 비둘기는 또한 평범하고 상징적인 제사용 동물로, 일반적으로 젊은 부부가 대개 첫 아이를 낳았을 때, 그들이 외적인 내용과 예의, 의식적인 장식들을 벗어나, 이제 진실되고 내적이고 생명을 주는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로 성전에서 이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다.
14.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의 질서에 따라 가장 외부의 것은 가장 외부에 속한다. 나무 껍질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나무의 속 골수에 있을 수 없지만, 껍질에 속한 모든 것은 껍질에 보관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무 껍질이 적당한 정도로 그의 자리에 있으면, 나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무에서 먼저 골수를 가져오고, 나무 껍질을 나무의 골수로 밀고 싶다면, 나무는 즉시 시들어 죽어야만 하게 될 것이다.
15. 따라서 이는 사람들이 모든 외적인 미덕을 내적인 생명의 일로 만들면 안된다는 표시이다. 고상한 사람이 외적인 미덕을 통해 단지 대화하는 인형이 (상점이) 된다. 이 비둘기 장사는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외적인 것들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모든 그들의 외적인 것들의 장인이 된 사람들이 그들의 물건을 내적인 생명의 것으로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또한 좀 더 예의 있게 그들에게 성전에서 나가라 하고, 적절한 장소를 알려 주었다.
16. 이것이 앞에서 이뤄진 성전 청소의 영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사람과 성전 사이의 바르고 변하지 않는 상응을 통해 이런 상응은 절대로 사람이 아니고, 단지 모든 것을 보고, 아는, 영원한 지혜로서의 하나님 만이 행하고 말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17. 그러나 주님은 왜 그러한 청소 후에 성전에 머물지 않았는가?
18. 왜냐면 주님만이 사람 안에서 영원한 거처를 취할 수 있기 위해 사람의 내면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러한 청소 후에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인형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19. 그러므로 주님은 아직 강제로 청소된 사람의 내면에 자신을 맡길 수 없다. 주님 만이 인간의 내면이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하신 주님은 다시 성전을 떠나, 마치 우연처럼 사람의 내부로 흘러 들어가지만, 주님이 게으름 가운데 그 안에 머무르고, 그를 지원하라는 사람의 요구를 따르지는 않는다. 사람은 다시 자립성이 완전히 깨어나야 하며, 자립성을 통해 비로소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듯이 온전한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