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 'AI 아일랜드'에 버려진 AI 진료실과 AI 약 자판기./사진=이벌찬 특파원
3줄 요약
- 중국의 첨단 기술 발전상은 과연 ‘국가 주도 사기극’일까?
- 불완전한 제품과 버려진 기기들은 ‘차이나 스피드’의 사소한 부작용
- 빠른 상용화 앞세워 배터리·로봇· AI 등 전략 산업에서 한국 추월
“구역질 나게 하고 도시를 흙빛으로 물들였다.” 베이징에 다녀온 조선 선비 권시형은 ‘석단연기’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석탄으로 만든 청나라의 무기와 농기구는 조선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했습니다. 조선에서는 30년 뒤에야 “석탄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란 상소가 올라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중국 첨단 기술 발전의 ‘불편한 비결’을 전해드립니다.
체면보다 속도 선택한 중국
‘차이나 스피드’로 기술 확보
부작용 감수한 전력 질주로
상하이 골목에 버려진 첨단 기기들
150년 전 베이징의 석탄 연기가 우리 조상들을 불쾌하게 했다면, 오늘날엔 이 도시에서 버려지고 방치되는 첨단 기기들이 중국을 얕잡아보게 합니다. 베이징 도심의 고층 건물 뒤편에는 쓰레기처럼 방치된 AI(인공지능) 기기들이 흔히 보입니다. 올 초 베이징 남부 이좡경제기술개발구를 찾았을 때는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AI 키오스크 4~5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5월 방문한 상하이 푸둥 첨단 산업 단지에서는 ‘1인용 AI 진료실’과 ‘AI 약품 판매기’ 등이 녹슨 채 골목에 버려져 있었고, 자동 분리수거 기능을 갖춘 AI 쓰레기통들의 전원은 꺼져 있었습니다.
더 황당한 장면을 소개해 볼까요. 상하이 창닝구 훙차오루의 어르신 복지 식당인 ‘훙차오 AI 식당’에서는 ‘AI 계산대’ 자리에 인간 직원이 서 있었습니다. 2021년 AI 이미지 인식 기능을 탑재한 자동 계산대를 도입했지만, 손님들이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불쾌한 장면들 아닌가요. 중국이 첨단 기술을 뽐내려고 만든 기기들이 애물단지가 되고, 값비싼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랑하는 기술 개발 역량과 거대한 소비 시장이 허상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석단연기의 교훈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요. 이 불쾌한 풍경에서 중국 첨단 기술 발전의 ‘장관(壯觀)’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설익은 기술이라도 괜찮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미국에 뒤처진 기술력을 따라잡기 위해 설익은 기술이라도 일단 상용화 단계로 밀어 넣는 전략을 썼습니다. 정부, 기업, 연구 기관의 삼각 편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차이나 스피드’ 전략을 구사한 거지요. 제가 만났던 베이징의 한 첨단 기술 기업 관계자는 “중국은 빠르게 기술을 개발해 시장에 ‘던지고’, 피드백을 받아 개선하는 방식으로 고도화했다”며 “기술 제품 과잉 생산은 사소한 부작용”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전략이 성과를 냈다는 점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국의 첨단 기술 역량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나, 이제 BYD(전기차), CATL(배터리), DJI(드론), 화웨이(5G) 등 세계 1위 첨단 기술 기업들을 다수 보유하게 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 드론 제조업체 DJI는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품질 불만이 끊이지 않았지만, 소비자 피드백을 반영하며 개선을 거듭한 끝에 세계 민간 드론 시장의 80%를 점유하는 공룡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중국의 신에너지차(전기차 포함) 판매량은 지난해 1000만대를 돌파하며 세계 판매량의 70%를 차지했습니다. 세계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도 중국이 야금야금 점유율을 확대하는 중입니다. 한때 ‘삼성의 발명품’으로 불리던 폴더블 스마트폰의 중국 출하량은 삼성의 4배입니다. 미국이 독주하던 AI 분야에서도 중국은 ‘딥시크 쇼크’를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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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노이드 로봇에서도 ‘속도전’
AI 다음 기술 전장인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에서도 중국은 ‘차이나 스피드’를 무기로 경쟁의 판도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6일,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선전시의 한 IT 행사장에서 찾은 휴머노이드 로봇 회사 리궁(里工) 부스에선 엔지니어 왕씨가 오가는 방문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로봇의 양팔 움직임을 테스트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년에 생산한 휴머노이드 30대는 대부분 시장에서 테스트 중”이라며 “현재는 고객 확보나 수익보다 빠른 기술 혁신이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리궁은 중국의 로봇팔 전문 기업 중 가장 빠르게 휴머노이드를 출시한 회사입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최근 공개한 ‘휴머노이드 100’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해 2월까지 휴머노이드 로봇 모델을 공개한 전 세계 66곳 기업 중 중국 기업은 전체의 61%(40곳)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캐나다 기업은 24%(16곳)로 2등이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삼성전자의 로봇 자회사 레인보우로보틱스 단 1곳에 불과했습니다.
체면보다 속도를 택한 시진핑
올해 들어 시진핑 국가주석은 공개적으로 중국 첨단 기술 전략의 핵심은 상용화 속도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4월 25일 중공중앙정치국 집단 학습에서 “기초 이론과 핵심 기술 등에서 중국 AI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지만, 격차를 직시하고 AI 기술 혁신과 산업 발전, 응용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완벽한 기술 연구’보다 ‘발 빠른 기술 실험’이 중요하다는 국가의 메시지에 전문가와 기업인들은 호응했습니다. 주쑹춘 베이징 AI국가중점실험실 소장은 “미국식 연구 중심 AI 전략을 따라간다면 중국은 영원히 후발 주자일 수밖에 없다”면서 기술 응용 예찬론을 펼쳤습니다. 중국의 AI 대부 리카이푸 전 구글차이나 대표는 “범용 인공지능(AGI) 시대가 도래했을 때, 중국은 이미 사회 전반에 응용 인프라가 갖춰져 있을 것”이라며 조기 데이터 확보와 사용자 경험 축적은 서구 기업들이 넘지 못할 장벽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국가의 메시지 덕분인지 중국에선 실험적인 기술 이벤트가 날마다 열리는 중입니다. 지난 4월 베이징 이좡경제기술개발구에서 세계 최초로 열린 휴머노이드 로봇 마라톤 대회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대의 중국산 로봇이 21㎞ 코스를 달리면서 온갖 추태를 부렸습니다. 인간 소녀 얼굴을 한 로봇은 출발하자마자 넘어져 기권했고, 절반 이상의 ‘로봇 참가자’는 중도 탈락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기술 기업들은 얻은 게 더 많다고 합니다. 대회에 참가한 한 로봇 기업 관계자는 “마라톤에 참가해 얻은 데이터 자체가 큰 수확”이라고 말했습니다. 2시간 40분 42초 만에 완주하여 우승을 차지한 베이징휴머노이드로봇혁신센터·유비테크의 ‘톈궁 울트라’는 중국 투자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로봇으로 떠올랐습니다.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왜 중국에서 유독 빠른 상용화가 가능할까요. 국가가 규제 문턱을 낮춰주고, 무한한 자금을 조달하며 기술 기업들의 실패를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2015년 시작된 ‘중국 제조 2025’ 전략에 따라 중국에선 막대한 정부 자금이 도전적인 기술 연구와 기업의 첨단 제품 과잉 생산에 쓰였습니다. 중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우한시는 사실상 도시 전체가 자율 주행 구역일 정도로, 중국 정부는 규제 완화에도 진심입니다.
돈 얘기를 조금 더 해봅시다. 로디엄그룹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최근 5년간 세제 혜택으로 중국 기업을 지원한 금액은 1850억달러(약 250조원)에 달하고, 국가 기금의 첨단 기술 투자 규모는 5년간 5배로 늘어난 520억달러(2020년 기준)였습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조성한 ‘대기금’은 1·2차 도합 983억달러(약 135조원)에 달하고, 작년엔 65조원을 추가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차이나 스피드’를 무턱대고 칭송하는 건 아닙니다. 특파원으로서 중국 현장을 누비며 다양한 부작용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샤오미 자율 주행차 사고로 20대 여성 3명이 사망했지만, 당국은 여론을 통제하며 자율 주행 기술 확산을 ‘보호’했습니다. 전기차 업계에선 꼼수로 보조금을 타고, 시장 확보를 위한 극한의 가격 인하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증정식(增程式)’ 전기차란 것도 등장했습니다. 이는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사이의 중간 형태로, 전기 주행 도중 배터리가 부족하면 엔진을 돌려 충전합니다. 사실상 하이브리드차로 봐야 하지만, ‘엔진이 발전 용도로만 쓰인다’는 이유로 친환경 보조금 혜택을 받습니다.
기술 상용화는 빠른데, 적용의 수준은 여전히 낮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SAS 인스티튜트 조사에 따르면, 중국 기업의 83%가 AI 모델을 업무에 사용하고 있다고 답해 미국(65%)을 앞질렀지만, 실제 효율적인 응용 체계를 갖춘 기업은 19%에 불과해 미국(24%)에 뒤처졌습니다. 중국은 이런 부작용을 감수하고 오로지 첨단 기술 확보를 위해 질주하는 중입니다.
비웃기엔 무섭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상하이 골목에 버려진 첨단 기기를 보며 비웃을 수 있던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중국은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벌리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중국 1위 D램 제조사 창신메모리가 첨단 제품(DDR5)을 본격 공급하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배터리 시장에선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한국 3사의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이 19%(1분기)로 떨어지며 60%를 넘긴 중국 3사에 크게 못 미칩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한국 3사의 점유율은 24%였습니다. 드론이나 전기차 분야에선 중국과의 경쟁을 논하는 게 무의미합니다.
반도체·배터리·선박·로봇·AI·바이오 등 중국이 기술 돌파를 위해 속도를 내는 첨단 산업 분야가 한국의 주력 산업과 모조리 겹치는 현실이 걱정될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