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일본 공무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는 조선땅에 파견되어 전국을 돌면서 이곳저곳을 정탐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모아 1894년에 신문에 연재하고 다시 한권의 책으로 묶어서 간행했으니, 그것이 바로'조선잡기'라는 책이었다.

책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의 무능함+낙후함+불결함+부패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료적인 가치는 상당한한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이 책 내용이 향후 일본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고 한다.

몇 가지 인상깊은 내용을 뽑아봤다.


● 조선(朝鮮)은 어떤 나라인가?

 

01. 언어(言語)와 문장(文章)

언어는 전국모두가 같다. 다만 지역에 따라 억양과 사투리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일본과 비교하면 사투리의 지역차이는 심하지 않다.

가령 함경도사람과 전라도사람이 상봉하더라도 가고시마 일본 남부와 이와테 일본북부사람이 상봉하는 것처럼 기이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02. 한글의 교묘(巧妙)함

'언문(諺文)'이란 곧 조선 문자를 말한다. 교묘한 것은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 조선인들은 실로 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에까지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는지 의문이다.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도 겨우 중(中)하층 사회에서나 사용될 뿐이다.



03. 가야(伽倻)라는 국호(國號)

삼국시대의 수로왕이 도읍한 땅으로 국호를'가락(駕洛)'이라고 부르고, 대(大)가야(伽倻), 소가야(小伽倻), 고령가야(高靈伽倻)등의 5가야(伽倻)를 지배(支配)했었다.

바다를 낀 이 지역은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진구 황후(皇后)가 삼한을 정벌하기 위해 보낸 군대는 틀림없이 여기에 상륙했을 것이다. 가락(駕洛)은 곧'가라(伽羅)'다.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을 가리켜'가라(伽羅)'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여기서 기원했을 것이다.



04. 독립(獨立)한 적(的)이 드물다.

일본사람들은 흔히 조선은 지금 비록 쇠미해지기는 했지만 4천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로서 경외시 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문물 ,제도 ,기계 ,공예하나같이 사람의 시선을 끌만한 것이 없다. 거의 아프리카 오지 탐험을 연상시키게 한다. 조선역사를 탐독해봐도 그렇다. 상고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다른 나라에 속박되고 상대하지 않았던 시절이 드물다. 진정으로 독립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05. 대(大)·중(中)·소화(小化)사상(思想)

조선의 선비는 중국을 항상'중화(中華)'라고 말하고 스스로는 '소화( 小華)'라고 부른다. 그런 조선사람들은 나에게도 묻는다.

조선인 "일본은 어떻게 부르는지?"

혼마 "대화 "이렇게 말하면 곧 나를 꾸짖는다.

조선인 "이런 오만방자한 지고"

하지만 오만하여 자랑하는 것과 비루하여 주눅 든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그들은 이렇게 박식한 척 하면서 설명한다.

조선인 "중국을 중화(中華)라고 칭하는 것은 대중소(大中小)의 뜻이 아니라, 가운데 위치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임."

그렇게 책망하면 나도 한마디 한다.

혼마 "그렇다면 조선은 왜 소화(小華)를 칭(稱)하는가?" 그러면 조선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못한다.



06. 기후(氣候)

조선은 일본과 위도가 같다. 그러나 강수량은 대개 일본보다는 적다. 그리고 무척이나 춥다. 전라도와 경상도지역은 일본과 비슷한 기후를 느낄 수 있지만 충청도 위쪽으로 가면 기후가 변하여 급격히 추위를 느끼게 된다. 겨울이면 서울은 도로가 얼어서 봄에 얼음이 풀리는 때에 가옥이 경사지는 경우도 매우 많다.





● 조선인(朝鮮人)들의 기질(氣質)

 

07. 무사태평(無事泰平) : 느려터진 사회(社會)

일본의 목수라면 반나절 걸려서 할 수 있는 일은 조선의 목수는 3,4일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시간에 쫓기는 바쁜 삶이 없기 때문이다. 느리게 살아가는 것은 책망할 일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보기에 분명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08. 매운 음식(飮食)

조선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한다. 생선국, 된장국 등을 조리하는데, 모두 고추 혹은 고춧가루를 넣는다. 어린 아이들은 생강 혹은 무를 씹어,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데 마치 일본아이가 사탕을 먹는 것과 같았다. 타고난 취향이라고 해도자못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09. 싸움

조선사람들은 작은 일로 싸움을 시작하면 서로 마음이 격앙되어 입에 거품을 물고 설전하는 것도 잠시,서로 갓을 벗고 상투를 잡아 댕기며 한바탕 육박전을 치른다. 하지만 크게 치고 박고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은 언제나 옷이 찢어지고 그러면 옷값을 물어내라고 하는 수순이다.



10. 담배 사랑

조선사람들은 담배를 매우 좋아한다. 3척(尺)(90cm)이나 되는 담뱃대를 걸어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앉아서 누워서, 일을 쉬거나 침묵하는 사이에도 손에서 놓는 일이 없다.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그런다. 일본인 거류지에 목욕하러 오는 조선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탕안에 들어가서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

 



● 신분제(身分制)사회(社會)



11. 예의(禮儀)가 바른 나라?

조선과 같이 계급사회의 나라에서는 언어행동에도 자연히 계급이 있다.

예를 들면 '오라'라는 말에도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의 사용법(使用法)이 있다.

이리 오너라 :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

이리 오시요 : 같은 무리에게 하는 말

이리 오십시요 : 높은 사람에게 하는 말

이런 계급사회의 모습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상민들은 양반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고 앉으라는 명을 받지 못하면 앉을 수도 없고 도로변에서 이름 모를 양반이라도 걸어가면 담배를 뒤로 감추고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일본사람들은, 조선을 흔히 예의의 나라라고 하지만 실은 계급의 나라였다.



12. 노예제도(奴隸制度) : 노비(奴婢)

조선의 사정을 깊이 조사할 때 실로 놀랄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의 노예제도다. 조선에서는 양반이라면 모두 '노비'라는 노예를 데리고 있었다. 이들은 봉급(俸給)을 받고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경우다.

그렇게 노비가 되면 자자손손 영구히 주인집의 노예가 되어야 하고, 평생을 가축처럼 시키는 일만을 해야 했다. 이들은 평생 주인에게 묶인 신세가 되고 장가를 가도, 자식을 결혼시켜도 자기 의사대로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하거나, 쉬거나, 말하거나 하는 일까지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계속해서 먹을 수도 없다. 추워도 옷을 껴입을 수가 없다. 만사를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13. 양반(兩班)

양반이 소일하는 모양은 실로 한가해 보인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만 담뱃대를 물고 방에 누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재산가의 대부분은 양반들이다. 재산가들은 대개 관리가 되어 서민들로부터 강압적으로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조선 속담에는, 관리가 되면 3대가 앉아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관리중에서 가장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지방관 수령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관료가 된 자들은 지방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14. 양반(兩班)여자(女子)들의 진찰(診察)

조선에서는 양반가 부인이 병에 걸려 진찰을 받는다 해도 얼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얼굴을 뒤집어쓰고 손을 내밀어 겨우 진맥을 보게 한다.

 



● 부패한 관료와 행정시스템



15. 관리(官吏)

양반은 과거를 통과하면 어떠한 관직도 살 수 있는 것이 조선의 제도이다. 하지만 관직자 들은 대부분 어리석고 몽매한 자가 많았는데, 지방관수령들과 필담을 통해 대화를 나눠보면, 고루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은 둘째 치고 이들은 제대로 한자도 몰랐다. 사실 조선의 과거시험장은 공공연한 뇌물수뢰의 장소였으니, 가령 급제해도 뇌물을 쓰지 않으면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16. 지방관(地方官)

지방관의 임기는 3년을 만기로 삼지만 재임을 원하면 정부에 돈을 내고 관직을 사기도 한다. 이때 수령 군수는 3천냥 정도 관찰사도지사는 1만냥의 돈이 필요했다.



17. 관리(官吏)는 모두 도적(盜賊)

조선의 관리는 마음대로 백성의 재화를 빼앗는데, 그 정도가 도둑보다 더 할 정도다



18. 무관(武官)

무관들은 단지 그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병법서를 읽지도 못한다. 무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작자들이 정부에 돈을 내고 임용을 받는 것이다. 이들은 첨사,수사, 병사,병마절도사 등으로 불리지만 훌륭한 관직명만 있을 뿐

전혀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리들이다.



19. 병사(兵士)

조선의 병사들은 무뢰한을 모아 봉급을 주고 흑색의 목면옷을 입게 한 것이다. 이들 무뢰배는 품삯을 목적으로 병사가 된 것이다. 본래 국가를 지키려는 뜻은 전혀 없다. 게다가 병사는 조선사회에서 지위가 낮은 자들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그들은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병졸"전쟁나면? 얼른 총버리고 군복도 벗어야지. 민간인처럼 하고 있으면, 적병들도 죽이지 않겠지."

상황이 이랬으니, 이들은 도박자금이 모자라면 흔히 가지고 있던 총을 저당잡혔다. 정부는 이런 병사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할 때면, 이들 무리로 하여금 부잣집을 약탈하는 것도 묵인해주기도 했는데, 경성안에 겨울철 도적이 많은 것은 정부가 겨울 봉급을 병사에게 주지 않는 것이 한 원인이었다.





20. 무예(武藝)

조선의 무예중에는 현재 존재하는것은 궁술뿐이다. 칼과 창이 없지는 않지만, 그걸 연습하려는 사람들은 없다.

 



● 사법(司法)제도(制度)

 

21. 감옥(監獄)

죄인은 옥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 한 푼 없는 자는 감옥에서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반면에 뇌물을 바치는 경우에는 어떠한 큰 죄라도 쉽게 방면된다.

▲ 감옥(監獄)





22. 형벌(刑罰)

조선의 형벌은 하나같이 관리의 뜻에 따라 임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며 전국에 똑같이 적용되는 일정한 형벌이 없다.



23. 대리(代理)변제(辨濟)

조선에서는 빚을 갚지 못할 때에는 부자 형제가 대신하여 빚을 갚는 것을 의무로 하고 있다. 만일 형제 부자가 대신갚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 9족중의 한 사람에게 대신 변상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친척 중에 한 사람이라도 도박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이것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일본의 채권자들은 조선의 이런 습관을 이용해서 대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조선인들 중에는 점차 이런 관습의 부조리를 깨닫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경상도 밀양부사 등은 일본인의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조선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채권자들은 빚을 받지 못하는 피해를 보고 있다.

 



● 기이(奇異)한 풍속(風俗)

 

24. 조혼(早婚)

조선에서 가장 기이한 풍속은 조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자들은 12,3세의 나이로 장가를 간다. 그리고 부인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고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12,3세짜리가 20세전후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린 남녀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조선의 인구가 매해 감소하는 원인은 여기에 있을지도(실제로 1세기이전보다 인구가 100만명 가량 줄어 들었다.



25. 처(妻)를 손님에게 내 놓는다.

조선에서는 돈만 주면 처첩으로 하여금 손님의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게 한다.

이것은 남편과 상의한 뒤의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사람들 중에는 조선에 오래 머문 상인들의 경우, 이런 추한 풍속을 배워서 자신의 마누라에게 강요하는 자들도 있다.



26. 전염병(傳染病)환자(患者)

여름에 야외를 걷다보면, 곳곳에 초막을 짓고 수척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전염병에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조선에서는 역병을 죽을병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치유된 사람을 요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가족을 전염시키는 것을 걱정하여, 야외의 작은 집에 옮겨 놓는 것이다. 물론 약을 주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버려서 죽이는 것과 진배없었다.





27. 천연두(天然痘)로 죽은 아이의 장례식(葬禮式)

아이가 천연두로 죽을 때는 그 시신을 묻지 않고 가마니에 넣어서 새1끼로 가로 세로로 묶고 이것을 야외의 나무에 매달았다. 그렇게 하면 삼복의 더위에는 시신이 부패하여 썩은 액체가 지상에 떨어지고, 악취가 끝없이 사방에 흩어져서 코를 찌르게 된다. 그리고 시신이 모두 썩어 백골이 되면 뼈를 추려서 땅에 매장했다. 이런 풍속은 특히 한반도남쪽의

삼남지방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마마신이 찬바람을 맞고 떠나가라는 의미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 조선인(朝鮮人)들의 의복(衣服)문화(文化)



28. 한복(韓服)의 아름다움

조선의 한복은 정말로 아름답다.

한복의 풍치는 가히 세계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소매는 길고 갓은 크고, 불편한데 있어서도 세계 으뜸일 것이다. 조선사람의 거동이 우유부단하여 활발하지 못한 원인은, 이 세계 으뜸의 의복을 입는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옷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이 사는 집은, 개집과 돼지우리의 수준과 같다 하겠다.



29. 두루 주머니

조선인은 허리 주위에 반드시 2,3개의 주머니를 항상 늘어뜨리고 있다. 주머니는 담배를 넣는 것, 도박 도구를 넣는 것, 거울을 넣는 것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들은 용모를 꾸미는 버릇이 심해서 시간만 있으면 수시로 거울을 보고 수염을 다듬었다.



30. 모자(帽子)를 쓰지 않으면 벌금형(罰金刑)

조선에서 모자는 필수품이다. 그리고 계급과 직책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경성에 있는 일본인들은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모자를 써야만 했다. 만약 이를 어기면 벌금50전을 내야했다. 대신에 길에서 노상방뇨를 해도 벌금같은 건 없다.



31. 우산(雨傘)

조선에는 원래 우산이 없었다. 일본을 통해 보급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우산을 가진 자는 10명중 한두 사람 정도로 대개는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사람들은 비가 내릴 때는 갓 위에 기름종이로 만든 덮개를 부쳤어 비를 막고 옷은 그냥 젖은 채로 걸어 다닌다.



32. 부녀자(婦女子)의 기호(記號)

양반 부녀자는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습때문에, 의복 장식품 등을 조달하는 것에도 항상 모두 하인에게 구해오도록 시킨다. 그런데 부녀자에게도 엄연히 기호가 있다.

하인의 기호를 어떻게 부녀자의 기호에 맞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물건을 사는 것은 일체 남자에 맡기게 되니 조선의 부녀자는 남자의 생각 안에서 그 기호를 만족시킬 수밖에 없다.



33. 모자(帽子)만드는 기술(技術)

조선의 미술품 중에는 전혀 감복(感服)할만한 것이 없지만 삿갓이나 관 등을 말꼬리로 짜는 것을 보면 그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감탄하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거미가 거미집을 만드는 것 같이 섬세하다."



34. 빨래

개울가에 나가면 옷을 빨래하는 여인네들이 많은데 물에 담근 옷을 평평한 돌 위에 놓고 한자 정도되는 막대기로 두들겨서 때를 없앤다. 이렇게 하면 옷감이 상하기 십상이지만 때는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





● 조선인(朝鮮人)들의 식생활(食生活)



35. 풀

기근이나 흉년에 대처하는 것을 배우려고 하면 조선으로 와야 한다. 이들의 식탁에는 야외의 풀잎의 대부분이 반찬으로 올라온다.



36. 남은 음식(飮食)을 탐(貪)하는 자(者)

한 주막에 머물렀을 때였다.주모는 나의 돈 주머니가 무거운 것을 보고 좋은 손님이라 생각했는지, 저녁상을 한 상 가득히 차려왔다.

이윽고 내가 저녁밥을 들었을 때, 어떤 남자하나가 다가왔다.

주인은 그의 모습을 보자, 퉁명스럽게 얘기를 한다.

주모 "여기 무슨 용무가 있어서 왔어? 썩 돌아가."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남자 "나 일본사람 구경하려고 왔어."

주모 "네가 남은 음식때문에 왔다는 거 모를 줄 알고?"

이 말을 듣고 나는 설마 그러겠는가! 했다.

그래서 주인의 말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진짜로 그 남자는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은 그걸 주기 아까워서 그자를 그토록 나무랐던 것이다.



37. 구더기 낀 상어고기

상어의 지느러미는 중국인의 기호품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귀하다. 다만 상어잡이는 지느러미만 취하고 고기는 바다 가운데로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어느 날 한 일본 상인은 이렇게 버리는 몸통이 아깝다고

해서 몸통을 조선에 팔아볼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상어 몸통을 소금에 절였다. 그리고 부산을 향해 출발했는데 때마침 초여름이었는데 2,3일지나지 않아 고기는 부패하고, 이상한 냄새가 배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와 4,5일 후에는 구더기가 끓어서 거의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부산에 도착하면 콜레라의 매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겨우 가져왔는데 중도에 버리기도 그래서,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낙동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가서 고기를 팔만한 곳을 물색했다. 그래서 한 마을을 발견하고 상어를 팔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배 밑바닥에 닫아 두었던 상어고기를 꺼내서 해안에 운반했는데 냄새가 코를 찌르고, 구더기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지만 고기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마침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와서 사가기를 원했다. 한 근에 얼마씩이라고 하면, 그들은 가격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으면서도 크다, 작다만 평했다. 냄새나 구더기를 신경쓰는 조선인들은 전혀 없었다. 그러더니 곧 고기는 몽땅 동이 나버리고 일본 상인들은 뜻하지 않게 돈을 챙길 수 있었다.



38. 개

조선인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집집마다 기르는 개들은 전적으로 고기를 먹기 위해서였다. 한 마리의 가격은 일본 통화로 30~40전이었으니 귀한 손님이나 좋은 일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잡지 않았다. 마치 일본사람이 닭이나 돼지를 잡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조선의 개는 기본적으로 인분을 먹고 연명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똥을 싸면 개를 불러 혀로 항문을 핥게 만들었는데 그리고 개가 핥고, 나면 깨끗해졌다 하여, 그냥 아이의 바지를 입혔다.

 



● 조선(朝鮮)의 상업(商業)활동(活動)



39. 지폐(紙幣)에 대한 평가(評價)

공방전 엽전외에 통화가 없는 나라 사람의 생각은 황당했다. 조선인들은 지폐를 보면 이렇게 말했다."이게 돈이라고? 면직물에 붙인 인쇄물이 전부인데?"

"우리 속이려고 하는 거 아님?"

"만약 이런걸. 돈이라고 가지고 다니면 도적들한테 엄청 빼앗길 걸."



40. 조선(朝鮮)의 통화(通貨):당오전(當五錢)의 현실(現實)

현재 조선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상평전(上平錢)과 당오전(當五錢) 두 종류가 있다. 모두 공방전 엽전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상평전 5개의 가치를 지녔던 당오전은 지금은 그딴 거 없어졌다. 그냥 다 똑같은 엽전으로 취급되어 당오전은 이름만 있을 뿐 특별한 가치는 없었다.

▲ 구(舊)한말에 만들어진 상평통보와 당오전: 사실 생긴 것도 같았다.



41. 인삼(人蔘)

인삼은 조선 특유의 명산물이다. 산지는 경기도의 개성,용인, 충청도의 괴산, 전라도의 금산 등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개성 송도의 인삼이다. 품질이 좋은 것은 가격도 비쌌다. 그런데 조선에서 인삼밭을 가진 자는 반드시 부자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재배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삼을 재배하는 밭은 나무 울타리로 사방을 둘러싸고 함부로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 밭 주변에 작은 움막 원두막을 지어서 파수꾼을 두고 지키게 했다.



42. 시장(市場)

경성,공주,평양,개성 등 의 대도시의 시장은 나름 괜찮다, 해도 기타 소도시의 시장이라는 것은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지붕을 엮어 얹은 조잡한 가옥들이 2,30개씩 줄지어 선 형태가 전부다.

5일에 한 번씩 장이 들어서는데, 장날이 되면 가까운 곳에 있는 상인들이 모여서, 시장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팔려고 하는 물건을 진열한다. 그리고 매매는 대부분 돈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물건을 교환할 뿐인데, 그 모양이 마치 상고시대를 연상케 한다.

한편 장이 서는 날 외에는 바늘 한 개도 파는 곳이 없었으므로, 식용품부터 일용의 잡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날 사두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장날에 비라도 내린다면 장(場)을 열 수 없게 되므로 커다란 불편을 느끼게 된다.



43. 싸구려 물건(物件)판매(販賣)

서양의 상인들은, 일본은 싸구려 물건을 파는 나라라고 하여 일부러 일본수준에 맞는 조악한 제품을 가지고 오곤 한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조선은 싸구려 물건만 판다고 하여 또 조선수준에 맞는 조악한 제품만을 가지고 온다.



44. 중국인(中國人)

조선팔도가는 곳마다, 시장에서 중국인을 보지 않는 지역이 없다. 이런 중상인들이 파는 물품은 대략 바늘, 못, 댕기, 부싯돌, 성냥, 담뱃대 등이었다.

이들은 조선인들과 섞여서 시장에 점포를 펴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싼 옷을 입고 등으로 근검절약해서 나중에 귀국할 때는 큰돈을 벌어서 가게 된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쓸데없이 한탕주의에만 눈이 멀어, 평소에 이러한 행동을 조롱하고 또 중국인을 미천하게 바라본다.그렇기 때문에 조선에 온 일본 상인들은 재산을 모으기는커녕, 파산(破産)해서 빈털터리로 귀국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45. 조선에서는 자본이 필요하지 않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려면 커다란 자본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조선은 빈약한 나라다. 자본을 써서 사업을 영위할만한 나라가 아니다. 큰돈을 가지고 와봤자 그걸 쓸 방도가 없다. 요컨대 조선은 돈 없는 자라면 한번 도전해 볼 곳이다. 중국인들만 봐도 한 푼의 자본도 없이 와서 거액의 재산을 얻어 귀국하는 들이 많다.



46. 우물 안의 개구리

경성에 있는 영국 영사관의 고용인 최모 씨가 일찍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崔)씨 "영국인들은 하루 50냥씩의 담배를 피우더라. 50냥이면 일가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밑천인데 그 교만과 사치를 생각하면영국이라는 나라는 곧 망하게 될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거친 식사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형편의 조선인이 지금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계수나무를 장작으로 때고 옥(玉)으로 밥을 짓고 있는 부자(富者) 영국(英國)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루 50냥의 담배 값을 가지고 교만과 사치의 극치라니 우물 안의 어리석은 개구리는 참으로 막막하다.



● 조선(朝鮮)여행(旅行)



47. 여름여행(旅行)

방 안에는 빈대, 모기, 이, 벼룩이 많아서 도저히 실내(室內)에서 잠을 잘 수 없다. 여름에는 객사(客舍)의 주인도 실내로 안내하지 않고 안에 있는 정원 혹은 길 위에 돗자리를 깔고 목침(木枕)을 가지고 와서 그 위에서 자게 한다. 그래도 벌레들은 여러 무리가 되어 공격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마른 풀을 태워서 모기를 쫓아내면 모기가 모이지 않지만 사람들도 연기를 마시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점점 연기가 없어지는 것이 느껴지면 머지않아 모기떼가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친다. 특히 빈대는 한번 물면 일주일내내 아프다



48. 선착장(船着場)

조선의 강에는 대개 교량(橋梁)이 없다. 배로 건너가거나 배가 없을 때는 그냥 옷을 벗고 헤엄쳐가는 수밖에 없다.



49. 요리점(料理店)과 여관(旅館)

조선에 가보지 않는 사람들은 조선에도 일본과 같은 요리점,여관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의 요리점도 여관도 이름뿐이고, 차라리 없다고 해도 거의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요리점이라고 하는 것은'주막(酒幕)'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여기에는 따로 손님방이라는 것이 없다. 대충 한방에 마부,가마꾼, 여행객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이다.





▲ 주막(酒幕)

여관이 없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싸구려 여인숙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여관은 음식값을 받을 뿐이고 그 외에는 숙박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둥근 된장(메주)을 천정에 매달아 두는 집도 있어서 그 냄새가 매우 심하여 집안에 들어가면 곧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두통이 일어날 때도 있다.

또 조선사람은 담배를 좋아해서 여관의 실내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도 문을 열어 환기시키려 하지 않는다.

옆으로 누워 있는 자, 앉아 있는 자, 잠자는 자 깨어 있는 자, 방귀를 뀌는 자, 이를 가는 자, 한방에 십수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누워있다. 이 모양을 보면, 차라리 야외에서 노숙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다. 조금의 결벽증이라도 있는 자는 잠시도 여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다.

 

50. 길옆의 부뚜막

조선을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길 옆에 돌을 쌓고, 불을 때서 그슬린 흔적이 나는 작은 부뚜막을 보게 된다. 이것은 조선의 여행객이 스스로 밥을 지어서 식사를 한 흔적이다.

조선의 가난한 여행객은 흙으로 만든 작은 솥을 지고, 쌀을 사서 스스로 밥을 짓고, 되도록이면 여관에서 식사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순박한 풍조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이다.



51. 불결(不潔)함

불결함은 조선의 명물이다. 경성(京城)은 말할 것도 없고, 팔도(八道)가는 곳마다 도시다운 도시를 볼 수가 없다. 거리에는 가축의 배설물과 인분(人糞)이 가득 차있고 그 불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시장의 중앙에는 공동변소를 설치했지만 그것은 다만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을 두른 조잡한 것인데 그 똥을 받아먹으려 개와 돼지를 길러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렸다가 인분(人糞)이 나오면 받아먹는데, 그 모습을 보면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음식물의 불결함 역시 이 나라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썩은 생선과 야채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음식물을 조리하는 모양을 볼 때는 어떠한 호걸이라 해도 수저를 드는데 있어 주저할 수밖에 없다.

요리하는 자는 도중에 간을 보는데 자신의 입 속에 들어간 숟가락으로 계 )간을 본다.

젓가락 같은 것은 오랫동안 거의 씻은 일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김치 항아리를 젓는 등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방안에 들어가면 벽은 누런색으로 닿으면 의복이 더러워지고 지붕 밑에 진흙을 바른 천정은 낮아서 하품을 하면 목이 지붕에 닿을 정도다. 넓은 방이라고 해도 크기는 3평 정도며, 좁은 방은 0.5평에도 미치지 못한다.

방안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만일 가래 뱉을 때는, 앉아 있던 멍석을 들고 그 아래에 뱉고, 콧물이 떨어질 때는 손을 비비고 바로 벽에 바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혀 불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객사(客舍)에 목욕탕이 없는 것 또한 더욱 여행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여름은 빈대와 모기가 매우 많아서 지친 몸에도 잠을 자기 힘들고 파리와 같은 것은 사시사철 실내에 날아다니고 있다. 객사(客舍)의 문은 작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 조선(朝鮮)의 열악(劣惡)한 인프라



52. 좁디? 좁은 도로(道路)

어느 날 경성(京城)의 길을 조선인(朝鮮人)에게 필담(筆談)으로 물었더니 조선인(朝鮮人)이 친절(親切)하게 가르쳐줬다. 내가 찾아가려던 구포는 경성(京城)에서 큰 길과 접(接)한 곳이었다.

그런데 목적지(目的地)근처(近處)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작은 길 외에 큰 길은 보이지가 않았다. 혹시(或時) 잘못 들어왔나 싶어 샅샅이 뒤져보아도 결국(結局) 큰 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조선인(朝鮮人)이 말한 큰 길이란 어쩌면 이 작은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과연(果然)내 생각이 옳았다. 조선(朝鮮)의 도로(道路)가 형편(形便)없다는 사실(事實)에 몹시도 놀라는 순간(瞬間)이었다.

일본(日本)의 역사(歷史)서에서는, 흔히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이미 백성(百姓)에게 우차(牛車)법(法)을 가르쳤다고 나와 있지만, 이런 논두렁 같은 도로(道路)를 어떻게 우차(牛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釜山)에서 경성(京城)까지의 도로(道路)는 모두 이와 비슷하다. 일본(日本)의 마을길보다도 심하게 울퉁불퉁하여, 군대(軍隊)는 일렬(一列)로 가지 않으면 통행(通行)하기도 어렵다.

오직 의주(義州)~경성(京城)에 이르는 길만 도로(道路)가 다소(多少)정돈(整頓)되고 사이즈도 넓어져, 군대(軍隊)의 2열(列)행군(行軍)이 가능(可能)할 정도(程度)였는데 이는 중국(中國)과의 시대(時代)의 결과(結果)로서, 중국(中國)사신(使臣)의 왕래(往來)길이라 다른 길보다 더 좋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53. 민둥산

조선(朝鮮)의 산(山)은 대부분(大部分)민둥산으로 수목(樹木)이 없으며 조금만 가물어도 수원(水原)이 바로 말랐다. 이럴 때면 논밭이 갈라지고 벼 모시대종이 붉은색을 드러내어 백성(百姓)들이 고생(苦生)하고 근심하게 되었다.

일본(日本)에서는 높은 땅을 관계(關係)하는 데는 수차(水車)를 이용(利用)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程度)가뭄을 쉽게 극복(克服)할 수 있지만, 조선(朝鮮)에는 수차(水車)가 없어 겨우 물통으로 물을 퍼 올렸기 때문에 그 불편(不便)함은 실(實)로 말 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가뭄이 계속(繼續)되어 거의 수확(收穫)이 없을 때 조선인(朝鮮人)은 아녀자(兒女子)를 부잣집이나 중국인(中國人)에게 팔아서 노비(奴婢)로 만들어서 겨우 쌀과 보리를 구(求)했다.

흉년(凶年)에 백성(百姓)들은 기근(飢饉)으로 고통(苦痛)을 받아 부잣집 문(門)앞에 가서 밥을 구걸(求乞)하는 모습(模襲), 찢어진 옷에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뺨에 뼈가 튀어 나올 정도(程度)로 마른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지팡이에 의지(依支)해 겨우 걷는 모습(模襲)은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참담(慘憺)하다.

답답한 마음에 한번은 조선(朝鮮)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혼마"당신(當身)나라의 산(山)에는 왜 수목(樹木)을 심지 않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答)했다. 조선인(朝鮮人)"호랑이의 피해(被害)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애써 나무를 심지 않은 거임."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빠져나가려고 꾸며대는 말일 뿐이다.



54. 제방(堤防)

조선(朝鮮)팔도(八道)의 하천(河川)은 평소(平素)에는 물이 적거나 완전(完全)히 말라버린 상태(狀態)지만,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물의 양(量)이 바로 불어난다. 비온 뒤 여러 날이 지나면 홍수(洪水)가 범람(汎濫)하는데 이때 홍수(洪水)로 밭이 잠기는 것을 염려(念慮)해 조선(朝鮮)사람은 될수록 물가를 피(避)해 경작(耕作)을 하는 것이 보통(普通)이다. 제방사업(堤防事業)이 발달(發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경작지(耕作地)가 있어도 종자(種子)를 뿌리고 묘를 심는 것이 불가능(不可能) 하다. 예(豫)를 들어 부산(釜山)~구포(龜浦)사이에 김해(金海)라는 낙동강(洛東江)의 삼각주(三角洲)가 있는데 그 땅은 매우 비옥(肥沃)한 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미 한번을 쓸 수 없었다.



55. 공동체(共同體)정신(精神)의 부재(不在)

제방사업(堤防事業)에 한정(限定)되지 않더라도 무슨 사업(事業)에서든 사람들이 공동(公同)으로 일을 성사(成事)시키는 것은 조선(朝鮮)에서는 바랄 수가 없다. 도로(道路)가 수리(修理)되어 있지 않고, 위생적(衛生的)이지 못한 것도 공동체(共同體)정신(精神)이 부족(不足)한 결과(結果)다.

아무리 좋은 사업(事業)이라도 개개인(箇箇人)이 소자본(小資本)을 가지고 일시적(一時的)으로 도모(圖謀)하는 습성(習性)이 있기 때문에 안동포(安東布),화문석(花紋席),부채 등(等)의 특(特)이하고 우수(優秀)한 산물(産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공급(供給)은 수요(需要)를 따라가지 못한다. 널리 해외(海外)에 판로(販路)를 열려는 의지(意志)가 없으며 상공업(商工業)은 여전(如前)히 발달(發達)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