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여요전쟁(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ARAB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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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고려 의장기 高麗 儀仗旗]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큰 외침은 없었으나 1009년, 조정을 장악한 간신을 처리해 달라는

목종(顯宗)의 명을 받은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궁으로 진입해

김치양(천추태후의 애인), 유행간(목종의 동성애인) 등 권세가 7명을 처단하고

도리어 목종까지 폐위시켜 양국공으로 강등한 후 처리해버리는(독약을 보냈으나 목종이 거부하자 그날밤 자객을 시켜 시해함)

강조의 정변(康兆의政變)이 일어났다.

강조는 현종(顯宗)을 옹립하고 이로써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현종 또한 불우한 고아 생활과 암살 위협을 이겨냈던 터라

행동을 조심하면서 성실히 정사에 임해보려 하는데 가만 있을 거란이 아니었다.

이때다 싶어 거란 성종(聖宗)은 사신을 보내 목종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렇다. 고려 역사를 보면 바람 잘 날 없었는데 거듭된 외침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안정화가 될라 하면

반란이나 쿠데타 같은 내란이 일어나고 그것을 진압하면 또다른 외세가 까꿍 하고 나타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목종이 자살한 줄 알았던 현종은 거란의 사신으로 인해 진실을 알게 되지만 강조는 자신을 왕으로 앉혀준 실력자이기에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고 전권을 주어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선천)에 가서 거란의 침입을 대비케 했다. 


*행영도통사: 고려 시대에 외침이나 변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를 통솔하고 적을 막기 위해 파견되던 관직 및 기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중 전투 장면. 사진 KBS


<2차 여요전쟁 전개과정>

1. 고려는 통주로 30만 군대를 출병시키는 한편 잇달아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함.

2. 1010년 12월(양력), 거란 성종은 이를 끝내 생까고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 한겨울이라 얼어붙은 압록강 빙판 위를 건너감. 

3. 거란군이 처음 맞닥뜨린 성은 흥화진, 곧이어 전투가 벌어졌으나 서북면 도순검사 형부낭중(西北面 都巡檢使 刑部郎中)
    양규(楊規)가 이끄는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 실패. 3천의 고려군이 40만 거란군의 발을 묶어둠.

4. 거란군이 고려인 백성을 붙잡아 성종의 편지를 들려 흥화진에 보냄.
    성종: 전왕 송(목종)이 우리 조정에 복종해 섬진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세웠으므로
             이에 짐이 친히 정병을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만일 너희가 역신 강조를 잡아보내면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개경으로 쳐들어가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5. 고려가 동요하지 않자 성종은 흥화진 함락을 보류하고 흥화진 앞 무로대(의주 남쪽)에 20만 병력을 남긴채
    나머지 20만 병력으로 강조가 있는 통주로 향함.

6. 초반 강조의 고려군은 몇 차례 거란군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물리침.

7. 교만해진 강조, 진영에서 바둑을 둠(탄기(알까기))를 했다는 말도 있음)...

8. 강조에게 적이 삼수채를 격파하고 가까이에 이르었다는 보고가 올라 옴.
    강조: 압 안의 음식도 적으면 씹기가 어려운 법, 많이 들어오도록 둬라.
    휘하 장수들: ......

9. 여유 부리는 사이 갑자기 거란군이 본진에 쇄도함. 혼비백산한 강조는 자신을 꾸짖는 목종의 환각까지 봄.

10. 물밀듯이 밀려온 거란군에게 고려군 3만명이 목숨을 잃고 총사령관 강조는 납치 당함. 대패함.

11. 강조는 포박되어 성종 앞에 끌려 감.
      성종: 어떤가? 기왕지사 이리 된 거, 짐의 신하가 되는 건?
      강조: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당신의 신하가 될 수 있겠소?
      강조는 살을 발라내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아 결국 처형됨.

12. 거란은 강조의 서신을 거짓으로 꾸며 흥화진으로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양규는 거절함.
      양규: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고 온 게 아니다. 쓸데없는 수작 치우라고 너희 임금에게 전하거라.

13. 거란군은 항복하지 않은 성, 함락하지 못한 성은 남겨둔 채 남진을 계속 함.

14. 서경(평양, 당시 명칭은 호경)에 이르러 서경성을 공략하였지만 완강한 저항에 함락 실패.

15. 서경이 함락됐다는 잘못된 정보가 정해지면서 조정은 항복을 논의하기에 이름. 항복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강감찬이 반대하고 나섬.
      강감찬: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만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으니 예봉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시는 게 옳사옵니다. 우선 남쪽으로 파천하시옵소서.

16. 강감찬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종은 후비들과 함께 금군 50명의 호위를 받으며 피난길에 오름.
      현종의 피난길은 비참했는데 얼마 안되는 호위병 중에서 도망하는 이가 속출하고 행렬을 향해 활을 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향리들이 소란을 일으키기도 함. 창화현(양주)에 이르러서는 밤이 되자 신하, 환관, 빈첩들까지 모두 도망가버려 승지 몇 사람만이
      왕을 모시었고 호위를 책임진 무신 지채문(智蔡文)만이 홀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현종을 지켜냄.

현종의 피난길

17. 무신 하공진(河拱辰)이 2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종을 찾아옴.
      하공진: 거란이 본디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들어왔는데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사람을 보내 화친을 청하면 군사를 돌이킬 것이옵니다.
       점을 쳐서 길한 괘가 나오자 하공진에게 거란 진영에 표문을 전하게 함.

18. 한편 거란군은 개경에 들어와 태묘, 궁궐, 민가 들을 닥치는대로 불태우며 약탈함.
      하공진의 표문을 받은 성종은 돌아가면 고려국왕이 직접 와서 조회한다는 약속을 받고 하공진을 데리고 철군함.
      곳곳에 고려군이 건재하고 국경의 성들도 함락시킨 것이 아니므로 사방으로부터 협공당할 위험이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음.

19. 1011년 1월(양력), 거란군은 회군길에 올랐으나 고려군은 거란군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음.
      귀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이끄는 군대는 퇴각하는 거란군을 급습해 1만명을 죽임.
      흥화진을 지켜온 양규는 거란군이 곽주성을 함락하고 6천명을 남겨 수비하게 하자 야습하여 전멸시키고 백성들을 통주로 옮김.
      또한 무로대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해 2천명을 목 벰.

20. 그 뒤로도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러 곳에서 거란군의 분대를 맞아 승리를 이어 감.
      그러다 거란 성종이 지휘하는 본진을 마주치게 되는데 응원군도 없이 군사들은 끝까지 싸우다 전멸했고
      김숙흥과 양규도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전사함.

21. 그 밖에도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는 거란군을 악착같이 추격하였으며 피로에 지친 많은 거란군이 죽음을 맞이함.
      함락됐던 성들도 모두 수복함.

22. 나주까지 간 현종은 하공진이 보낸 글을 받아 보고서야 거란의 철군 사실을 알고 한층 여유롭게 귀경길에 오름.



<세줄 요약>
1. 목종 시해를 구실로 삼아 거란 성종이 고려로 친정(親征)함.
2. 통수 아니 통주에서 고려군 3만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 후 현종은 도망가고 개경이 함락 됨.
3. 양규, 김숙흥 등 고려군의 집요한 반격과 하공진의 표문으로 거란군이 전면 철수함.




<참고>
-박시백의 고려사(도서)
-나무위키(https://namu.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