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2차세계대전때부터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최강 미국도 게릴라전에는 약했다. 만약 일본이 태평양 전쟁때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펼쳤다면 미국이 굉장히 고전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때 중공군의 게릴라전에 고전하면서 한반도 통일에 실패하게 된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또다시 게릴라전에 고전하게 된다. 베트남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수많은 전쟁 전문가들이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면 북베트남군의 게릴라전에 고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것은 코끼리(미국)와 호랑이(북베트남)의 싸움이 될 것 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베트남)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1946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 통신원 쇼에브런과 한 인터뷰에서


1964년 8월 2일 베트남 북부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를 선제공격하였다 (통킹만 사건). 이 사건이 베트남전 시작의 서막을 알리는 총성 역할을 하게 된다. 

 



세계최강 미국은 기세등등하게 베트남에 상륙하여 전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열대밀림 지형을 활용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하면서 맡은 전선에서 제대로 전진조차 못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한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미국은 마지막 희망으로 한국군의 참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군은 2차세계 대전 이후 별다른 전투가 없어서 전투력이 떨어진 다른 서방 동맹국들과 달리 치열한 6.25 전쟁을 경험했기에, 장교들과 사병들의 전투력이 상당했고, 철저한 반공주의 교육과 중공군, 북한 공산군 게릴라들과의 전투경험으로 공산군 게릴라전에 익숙하였고, 같은 아시아 국가였기에 아시아 사회에 대한 이해도도 풍부하였다. 

미국은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집요하게 베트남전에 파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정치경제학 학사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재였다. 영미권에서 오랫동한 수학하였기에 국제경험, 영미권 문화 및 인물들에 대한 이해도가 풍부하였다. 특히 명석한 두뇌에 애국심을 가져서 강대국을 상대로 국익외교를 잘하였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


미국대사: "한국은 어째서 우리 미국을 돕지 않는겁니까?"

이동원 외무부 장관: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미국대사: "우리는 6.25 전쟁 때 한국을 위해 중공군과 북한군과 싸웠고, 미군 50,000여명이 전사했습니다. 지금 우리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어려움에 빠져있는데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동원 외무부 장관: "대사께서는 어떻게 미국과 한국을 같이 놓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현재 북한군을 상대해야하기에 군대를 함부로 베트남으로 뺄수가 없습니다." 

미국대사: ....

이동원 외무부 장관: "알겠습니다. 일단 대통령 각하를 만나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피웠던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임자는 어떻게 생각해 파병해야 되겠지?"

이동원 외무부 장관: "각하! 미국은 현재 우리 한국군의 전투력을 보고 파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는 대신에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국군 현대화 및 경제원조를 받아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미국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소?"

이동원 외무부 장관: "제가 미국대통령과 만나서 직접 담판을 짓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미국대통령이 임자를 만나주겠소?"

이동원 외무부 장관: "지금 급한것은 우리가 아니라 미국입니다.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렇듯 박정희 대통령은 유능한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전권을 맡기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이후 이동원 장관은 미국으로 날아가서 미국 존슨 대통령과 1:1 면담을 하였다. 약소국의 일개 장관이 세계최강 미국대통령과 당당하게 국익협상을 했던 것이다. 이때가 이동원 장관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미국 존슨대통령과 대화중인 이동원 외무부장관>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미국 존슨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하는 대신에, 미국으로부터 국군현대화 및 경제원조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 베트남 전에 한국군이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고 마음껏 전투를 하겠다는 약조도 받아내었다.

그리고 1965년 5월 미국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미국 대통령을 미국에 초대하였는데, 미국대통령 전용기를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서 위성전화기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서 내리는 박정희 대통령>



게다가 미국에 도착하자 미국최대도시 뉴욕에서 모든 교통을 통제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서 카퍼레이드까지 해주었다. 
 
 











- 외무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다
1966년 이동원 외무부 장관은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모교였던 미국 켄트주립대학교(Kent State University)에서 이동원 장관을 위해 환영행사 및 파티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이에 이동원 장관은 뉴욕 유엔본부에 가기전에 오하이오주 켄트에 들러서 파티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신나게 파티를 하고 나니 폭설이 내려서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었다고 한다. 이동원 장관이 발을 동동구르고 있을때 지역의 부호가 경비행기를 이륙시켜 뒤늦게 뉴욕에 도착했지만 유엔총회는 이미 끝난뒤였다.

이동원 장관이 유엔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동원 장관의 실책이라고 비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결국 외무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