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는 태조 이래 거란에 적대적이었다
왕건은 후당(後唐), 후진(後晉) 등 중원의 왕조나 북방의 발해, 여진 등과는 화친을 이야기 하면서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여서 그런지 유독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니 상종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거란의 강성함을 무시할 순 없어서 북방 요충지에 성을 쌓고 정예군을 주둔시켜 대비하였으며
정종 때엔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준비를 한다는 *최광윤의 밀고를 받고 30만 규모의 광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나날이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거란은 본격적으로 송나라를 공략하기 전에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여걸 소태후의 주도로 993년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최광윤: 신라3최 중 하나인 최언위의 아들로 빈공진사로 후진에 유학을 갔다가 후진이 요나라의 침공을 받으면서 포로가 되었으나
요나라는 최광윤의 학식과 재주를 인정해 그를 관료로 삼음. 947년,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할 낌새를 보이자
‘거란이 장차 고려를 침공하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고려에 알림.

<1차 여요전쟁 전개과정>
1. 993년 5월(고려 성종 12년) 서북계의 여진이 고려에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준비중임을 알림. 여진의 속임수라 생각한 고려는 묵살.
2. 993년 8월(성종 12년) 서북 여진이 재차 거란의 침공을 알림.
고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였으나 이미 거란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감을 건넘.
3. 고려는 서둘러 각지의 군마를 모으고 지휘부를 꾸려 북계로 출병(상군사: 문하시중 박양유, 중군사: 내사시랑 서희, 하군사: 문하시랑 최량)
성종도 서경(평양)에 직접 행차하여 군사들을 격려.
4. 소손녕이 봉산군을 공격하고 글을 보내 옴.
소손녕: 우리 폐하께서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범하니 이에 정토(征討)한다.
우리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는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5. 고려에서 사신 이몽전을 거란군 진영에 보내 쳐들어온 이유를 물음.
소손녕은 너희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행하려 왔으니 화친을 원한다면 빨리 와서 항복하라고 함.
6. 고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하자는 분위기가 주류가 됨.
7.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서경이 함락될 경우를 대비해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맘껏 쌀을 가져가도록 함.
백성들이 실컷 가져가고도 쌀이 많이 남자 거란군이 이용하면 곤란하니 쌀을 대동강에 버리기로 함.
8. 서희가 쌀은 전쟁 수행에서 중요하며 백성들의 생명과 같으니 차라리 적이 이용할지언정 버리는 것은 안된다며 반대를 함.
그리고 이번에 땅을 떼어주면 두고두고 수치가 될 것이며 욕심 많은 거란이 옛 고구려 강역이었던 삼각산 이북의 영토들도 요구할 것이니
자신들이 한번 싸워보고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함.
9. 고려가 반응이 없자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저항에 함락 실패.
10. 소손녕이 다시 항복을 촉구하는 사신을 보내자 고려 지휘부에서 다시 논의가 시작 됨.
성종: 적진에 가서 말로써 적의 군대를 물리쳐 청사에 길이 남을 사람 손?
대신 일동: ......
고민하던 서희가 자신이 가겠다며 자원하고 나섬.
11. 서희는 강직하기로 이름 높았던 서필의 아들로 열아홉에 급제해 승진을 거듭, 광종 말년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관계를
재개시켜 외교적 수완을 보여줌. 소손녕이 침공했을 당시 중군사로서 고려군을 지휘하는 핵심 3인 중 한 사람이었음.
12. 소손녕의 진영에 이르러 상견례의 형식을 둘러싸고 신경전이 벌어짐.
소손녕: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고려의 대신은 뜰에서 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서희: 두 나라의 대신이 만나는 것이니 당치도 않다.
두 차례의 협상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서희는 빡쳐서 숙소에서 드러누워 버림. 결국 서희와 소손녕은 마루 위에서 마주 않음.
13. 소손녕: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가 멋대로 침략해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서희: 뭔소리?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때문에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이고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을 중시하는 것이오.
국경 문제로 말하자면 귀국의 동경도 도리어 우리의 지경에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우리가 침략했다 하시오?
또한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여진이 훔쳐서 거짓말하며 가로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소.
조빙(朝聘, 임금을 만나고 서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하지 않겠소?
14. 소손녕이 본국에 물어보자 고려가 화친을 청했다면 목적을 이룬 것이니 그렇게 하라는 답을 받음.
15. 소손녕이 서희에게 잔치를 베풀고 돌아가는 길에 많은 선물까지 줌(낙타 10두, 말 100두, 양 1,000두, 비단 500필).
16. 거란군은 순순히 물러갔으나 이 날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 함
17. 서희는 이후 2년에 걸쳐 압록강 안쪽 지역의 여진인을 몰아내고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안의진, 흥화진, 선주, 맹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확보하였으며 확보한 곳에 6주를 설치했으니, 흥화,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로 이른바 강동6주임.
*강동 6주의 위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 주류 사학계가 추정하는 강동 6주 위치>

<고조선 연구소의 윤한택 교수가 추정하는 강동 6주 위치>

<역사저술가 전우성이 추정하는 강동6주 위치>
18. 강동6주를 확보한 이듬해부터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기 시작함.
19. 한편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같이 거란을 치자며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북쪽 변방이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송이 거절하자 송과 단교 함.
<세 줄 요약>
1. 거란이 송나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전에 고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고려를 침공 함.
2. 교착상태에서 거란군 총사령관 소손녕과 고려군 부사령관 서희가 만나 담판을 짓고 거란과 화친하기로 하고 강동6주를 확보 함.
3. 이재명은 안된다.
<참고>
-박시백의 고려사(도서)
-나무위키(https://namu.wiki/)
2. 993년 8월(성종 12년) 서북 여진이 재차 거란의 침공을 알림.
고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였으나 이미 거란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감을 건넘.
3. 고려는 서둘러 각지의 군마를 모으고 지휘부를 꾸려 북계로 출병(상군사: 문하시중 박양유, 중군사: 내사시랑 서희, 하군사: 문하시랑 최량)
성종도 서경(평양)에 직접 행차하여 군사들을 격려.
4. 소손녕이 봉산군을 공격하고 글을 보내 옴.
소손녕: 우리 폐하께서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범하니 이에 정토(征討)한다.
우리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는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5. 고려에서 사신 이몽전을 거란군 진영에 보내 쳐들어온 이유를 물음.
소손녕은 너희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행하려 왔으니 화친을 원한다면 빨리 와서 항복하라고 함.
6. 고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하자는 분위기가 주류가 됨.
7.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서경이 함락될 경우를 대비해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맘껏 쌀을 가져가도록 함.
백성들이 실컷 가져가고도 쌀이 많이 남자 거란군이 이용하면 곤란하니 쌀을 대동강에 버리기로 함.
8. 서희가 쌀은 전쟁 수행에서 중요하며 백성들의 생명과 같으니 차라리 적이 이용할지언정 버리는 것은 안된다며 반대를 함.
그리고 이번에 땅을 떼어주면 두고두고 수치가 될 것이며 욕심 많은 거란이 옛 고구려 강역이었던 삼각산 이북의 영토들도 요구할 것이니
자신들이 한번 싸워보고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함.
9. 고려가 반응이 없자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저항에 함락 실패.
10. 소손녕이 다시 항복을 촉구하는 사신을 보내자 고려 지휘부에서 다시 논의가 시작 됨.
성종: 적진에 가서 말로써 적의 군대를 물리쳐 청사에 길이 남을 사람 손?
대신 일동: ......
고민하던 서희가 자신이 가겠다며 자원하고 나섬.
11. 서희는 강직하기로 이름 높았던 서필의 아들로 열아홉에 급제해 승진을 거듭, 광종 말년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관계를
재개시켜 외교적 수완을 보여줌. 소손녕이 침공했을 당시 중군사로서 고려군을 지휘하는 핵심 3인 중 한 사람이었음.
12. 소손녕의 진영에 이르러 상견례의 형식을 둘러싸고 신경전이 벌어짐.
소손녕: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고려의 대신은 뜰에서 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서희: 두 나라의 대신이 만나는 것이니 당치도 않다.
두 차례의 협상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서희는 빡쳐서 숙소에서 드러누워 버림. 결국 서희와 소손녕은 마루 위에서 마주 않음.
13. 소손녕: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가 멋대로 침략해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서희: 뭔소리?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때문에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이고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을 중시하는 것이오.
국경 문제로 말하자면 귀국의 동경도 도리어 우리의 지경에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우리가 침략했다 하시오?
또한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여진이 훔쳐서 거짓말하며 가로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소.
조빙(朝聘, 임금을 만나고 서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하지 않겠소?
14. 소손녕이 본국에 물어보자 고려가 화친을 청했다면 목적을 이룬 것이니 그렇게 하라는 답을 받음.
15. 소손녕이 서희에게 잔치를 베풀고 돌아가는 길에 많은 선물까지 줌(낙타 10두, 말 100두, 양 1,000두, 비단 500필).
16. 거란군은 순순히 물러갔으나 이 날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 함
17. 서희는 이후 2년에 걸쳐 압록강 안쪽 지역의 여진인을 몰아내고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안의진, 흥화진, 선주, 맹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확보하였으며 확보한 곳에 6주를 설치했으니, 흥화,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로 이른바 강동6주임.
*강동 6주의 위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 주류 사학계가 추정하는 강동 6주 위치>

<고조선 연구소의 윤한택 교수가 추정하는 강동 6주 위치>

<역사저술가 전우성이 추정하는 강동6주 위치>
18. 강동6주를 확보한 이듬해부터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기 시작함.
19. 한편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같이 거란을 치자며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북쪽 변방이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송이 거절하자 송과 단교 함.
<세 줄 요약>
1. 거란이 송나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전에 고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고려를 침공 함.
2. 교착상태에서 거란군 총사령관 소손녕과 고려군 부사령관 서희가 만나 담판을 짓고 거란과 화친하기로 하고 강동6주를 확보 함.
3. 이재명은 안된다.
<참고>
-박시백의 고려사(도서)
-나무위키(https://namu.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