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폭도)들에 의해 전남도청에 2천여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탄으로 조립돼 있었다.

1980년 5월 24일 21세의 전남대생 김창길은 이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혀 전라도 계엄분소(전교사)에 은밀히 알렸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소준열 계엄 분소장은 배승일 문관을 이틀동안(25,26일) 도청으로 보내 폭탄을 해체시켰다. 배승일과 김창길이 이틀 동안 목숨을 걸고 피를 말려가면서 해체해야 할 정도로 폭도들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는 어마어마했다. 이 두사람은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폭탄을 해체시킨 것이다. 

배승일은 1977년 전북 이리역 폭발 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도청 지하실에 가득 쌓인 폭발물을 본 순간 자칫 광주 시가지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초토화 될수 있다는 아찔한 위기감에 밤을 새 작업했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배승일은 죽음을 무릅쓴 채 현장에 잠입하여 2000여 개의 다이너마이트와 450여 발의 수류탄 뇌관을 제거한 공을 세워 1980년 전두환 정부로부터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하지만 2006년 참여정부의 좌익 운동권 세력은 그의 훈장까지도 박탈했다. 그러나 그는 행정법원에 소송을 걸어 2007년 1월 훈장을 되찾았다.

 
2007년 1월 16일 연합뉴스보도: 5.18광주사태 당시 전남도청에 설치된 폭발물을 제거해 광주시민들을 구한 배승일(53)씨가 2006년 광주 진압작전 관련자로 분류돼 훈장을 취소당했다가 소송을 통해 되찾은 훈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전라남도 도청 민원실 지하에서 다이너마이트 2100발(8톤)과 수류탄 450발이 배승일씨에 의해 성공적으로 해체·수거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수거된 폭약의 양은 가히 충격적인 수준이다. 도청 외에도 다양한 곳에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물이 설치됐었다는 방증이다. 
 
이에 대해 A씨는 “일반 시민으로선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양이었다”며 “수거한 양만 해도 탄약고 몇 개를 지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심지어 “막 왕창 쏟아졌다”는 표현까지 그는 입에 담았다. 

자칭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며 무기확보에 나선 결과, 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도청 시민군의 화력은 기관총.카빈소총.M1소총등 총기류 2천5백여정, 수만발의 실탄, 다이너마이트등 폭약류, 이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였다.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광주에 와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정도로 시민군들의 화력이 막강했기에 공수부대(특수부대) 위주로 투입되었음에도 군인 사상자가 많았던 것이다 (22명 사망, 109명 부상). 


 

1980년 5·18 당시 방독면을 쓴 남성들이 인명살상용 세열 수류탄과 폭약, 도화선 등을 분류하고 있다. 인화성 폭발물을 다룰 땐 가스가 분출된다는 점을 인지한 행동이란 점에서 폭약 처리에 능숙한 이들이 순수 시민인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방독면을 쓰고 폭발물을 분류할 정도로 당시 시민군들은 체계가 잡혀있었다. 일반 시민군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문가답게 무기와 폭약들을 분류 및 처리하고 무장하였다. 

당시 시민군(폭도)들이 전남도청안에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는 TNT로 2100발로 작은 핵폭탄 수준이었다. 반경 4km를 초토화시킬수 있기에 폭탄이 터지면 광주광역시 도시전체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이 다이너마이트를 해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배승일 문관 한사람뿐이었다. 즉 이 다이너마이트는 시민군이 아닌 다른세력(북한특수군)이 조립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때문에 5.18 광주사태는 사실상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