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친회 문중회의가 있든 없든 족보는 족보학자들이 연구해봐야 그 진위여부를 알 수 있다

이미 조선후기부터 족보매입, 위조, 편입이 수백년간 판을 쳤기때문에,

희귀성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순수한 족보는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조선후기에 족보를 매입, 위조, 편입한 이유는,  애초에 '족보'를 만들고 따지는게 오로지 '출세'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음
 

다른 가문들을 차별화하여 조선사회에서 자기 가문의 상대적인 지위를 올리고자 한게'족보' 유행이다.



2. 종가 그딴거 아무 의미없다. 조선시대에도 방계의 방계의 차남이라해도 과거급제해서 높은 벼슬지내면 

곧바로 그 차남을 시조로 하는 '~공'이라고 하는 분파를 만들어서 빠져나감

 

애초에 조선시대에 '족보'를 중요시여긴 가장 큰 이유가 '출세'때문이었기 때문에 정통성, 종법을 중요시하고 이딴거는 전부 '출세'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3. 집성촌이야말로 개소리 중의 개소리다. 모든 한국인이 본관과 성씨를 갖게된 때는 1909년 조선통감부의 민적법 강제 시행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에 최소 60%의 한국인들은 본관과 성씨를 갖고 있지 않았음. 1909년 민적법 시행 이후, 노비들은 주인집의 본관과 성씨를 쓰도록 양해받아 마을 전체가 '집성촌'이 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집성촌은 오히려 전체 촌락중에 소수에 속하고, 조선시대는 신분별로 모여살지 않고, 사농공상이 서로 어울려 살았다. 신분별로 모여산건 고려시대가 그렇게 살았다. 집성촌이냐 아니냐로는 절대로 노비인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중기에 노비인구가 전체 인구의 40%에 달했음 어차피 한국인의 2/5는 노비의 후손일 정도로 심각했다.

어차피 조선시대 내내 '양반'신분은 전체인구의 10%도 안됐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양반'신분은 과거급제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의 4대 자손까지만 유지된다.

이 개꿀 신분이 4대 자손까지밖에 유지되지 않는다는걸 안타까워한 조선시대 양반들이 조선후기에 만들어낸게
이른바 '양반'행세를 하는거였다.

한때 양반신분이었던 족보와 재산을 가지고 지역의 지방관리, 양반들과 인맥 커넥션을 만들어서
향촌의 실질적인 지배자 노릇을 했던게 조선시대 썩어빠진 기득권층이었음.

이런 좆같은 세태를 꼬집은게 바로 박지원의 '양반전'이다.
대다수 조선농민들은 양반도 아닌 이 좆같은 색기들한테 양반대접을 하면서 고개수그리며 살아야했던게 현실이었다.

지금 뭐 문중이 있고, 족보가 있고, 선산이 있고, 머슴이 있고 어쩌구 하는 색기들의 태반은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다 이런 부류에 불과하다.

자세한 것은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라는 책을 참고바람.





4. 조선 노비에게 '김' '이' '박' 성씨를 강제한 것은 일제였고, 창씨개명으로 '하세가와' '사이토' '가네야마' 와 같은 성씨를 강제한 것도 일제였다

나라 스스로 민적법을 결국 실행하지 못하고 양반 계층들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일본이 한반도 이권을 전부 점령한 후에 겨우 1909년쯤에 되서야 민적법이 시행됐고 이는 500년간 조선을 꽉 잡고 있던 권력층의 멸망과도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창씨개명이 시행되면서 양반들에게 남아있던 자기 성씨에 대한 부심은 초전박살이 나고 만다. 




3줄요약
1. 조선사람들은 성씨가 없었고 대부분 그저 개똥이 라는 멸칭으로 불림
2. 일제가 통치의 원활함을 위해 김 이 박 과 같은 성씨를 강제로 부여함
3. 자기 조상 제사 지내는게 의미 없는 짓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