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측에서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내몽골대학 교수가 이성계 왕가가 티무르 왕가랑 연관있다는 거를 공식인정했는데 사대주의 한국 사학계는 눈치만 보고 찍소리도 못하는 사학자들에게 교육을 받는 학생들 인공지능 되는거 아닌지
전주이씨 이의방 (1170(고려 의종 23) 견룡행수로 재직 중 정중부, 이고(李高), 채원, 이의민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뒤 좌승선이 되고 11743월에 그의 딸을 태자비로 삼은 뒤 더욱 기세등등하여 국정을 함부로 하자 정중부와의 사이도 나빠졌다. 그해 12월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하자, 토벌군을 출동시키는 혼란중에 정중부의 아들 균()의 명령을 받은 승려 종참에게 불시의 공격으로 죽음을 당했으며, 개성 출신 정중부에 의해 이의방 형제와 일파도 모두 살해당했다)
이의방 동생 이린의 후손이 이성계라는건 당시 여진족을 한민족의 방계 민족으로 얕보던 시대상으로 전주이씨로 족보를 위조했다는 주장이 있다
 
고려사에는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는 이양무에 대하여 고종 8(1221) 4월에 과거 급제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역사적 조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의방의 죽음으로 전체 혈족들이 몰살되었는데 설령 이양무 혼자 살아남았다 해도 대역죄인으로 전주에 계속 있으면서 1221년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린이 죽은 시점에서 이양무가 1살이었다고 해도 47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만약 이양무가 10세만 되어도 이양무는 63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이안사가 산성 별감(山城別監)과의 불화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는데 이때 170여 가()가 이안사를 따라갔다고 한다. 또 그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삼척에 다시 부임하려 하니 이안사는 배를 타고 의주(宜州 : 함경도 덕원)로 피하는데 이때도 170여 호()가 따라갔다고 한다.
 
지도자나 씨족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농경민들의 행태는 아니다. 이것은 유목민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안사가 함경도 덕원(의주) 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엉뚱하게도 이안사와 아무 관련이 없는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이안사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뒤따라왔다고 한다.
[출처]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작성자 곡주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고려계() 몽골 군벌세력이었으며, 조선왕조는 북방 유목 전통을 기반으로 건국한 국가였다는 국내 학계의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5년 천호장과 다루가치 원나라의 지방관리 지위를 원 황제로부터 하사 받았다 문제는 천호장은 몽고족이 아니면 임명되는 일이 극히 드믈다
1290년 옷치긴가의 내분으로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익조)는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함흥 평야로 이주했지만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직위는 이행리의 증손자 이성계 때까지 5대에 걸쳐 세습됐다.[출처: 중앙일보] "이성계는 몽골군벌" 논문 학계 파란
 
시리즈콜라보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 태조] 이성계는 과연 여진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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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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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4. 17:2619,867 읽음 비밀글
통계
여진족은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다민족 국가로 이뤄진 고구려의 백성이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종족이 갈라지면서, 한민족은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하며 민족의 활동 무대를 스스로 한반도 안으로 축소하는 우를 범했다. 그 사이 여진족은 두 차례나 중원을 정복했다. 금나라와 청나라가 그것이다. 금나라는 북송 때 요나라를 꺾고 영역을 장강 근처까지 확대했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패권국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아예 중국 전역을 석권했다. 영토가 원세조 쿠빌라이가 중원을 장악했을 때보다 훨씬 컸다.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금나라, 청나라 등을 한반도와 따로 떼어서 만주사滿洲史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중국과 일본 및 러시아의 사학계에서 보면 청나라의 이런 모습은 광개토왕의 재현에 가까웠다.

청나라 지도
경제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서 적어도 1800년 무렵까지 청나라는 세계 무역수지의 40% 이상을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이름뿐인 삼국통일인 통일신 라 이후 그 뒤를 이은 고려와 조선에서는 이런 위업을 이룬 적이 없다. 스스로의 역량을 한반도 안으로 축소한 데 따른 업보에 가깝다. 그런데도 고려와 조선은 지속적으로 여진족 또는 후대의 만주족을 야만족으로 멸시하며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폐自閉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사실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스스로 여진족 출신임을 적극 부인하며 족보를 위조한 데서 그 폐해의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21세기 현재까지 중국에 대해 만주가 한민족의 영토였음을 당당히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지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흰소리를 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이성계가 고려의 병권을 손에 틀어쥔 뒤 새 왕조를 개창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백성의 후신인 여진족 출신임을 당당히 밝히지 못한 것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에 이르기까지 동족 국가인 발해 자체를 아예인 정하지 않으려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폐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폐풍이 후기신라 200년과 고려 500년을 포함한 700년 동안 면면히 유지돼온 것이다. 이성계가 아무리 정몽주 등을 제거한 뒤 병권을 틀어 쥐었다 할지라도 700년 동안이나 이어진 여진족에 대한 멸시 풍조를 일거에 뒤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이성계가 취한 방법이 바로 거짓족보 즉 위보僞譜의 조작이었다. 사실 이는 크게 탓할 일도 아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위보를 통해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한 사례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가장 심한 것은 조선조의 개국보다 1세대가량 앞서 개국한 명나라의 위보 조작이었 다. 명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조상이 멀리 남송대의 주희朱熹에 연결된다는 식으로 조작했다. 이성계가 자신의 조상이 원나라 말기 전주 일대를 배경으로 한 향리鄕吏 출신이었다는 식으로 위보를 조작한 것은 매우 겸손한 편에 속한다. 그가 자신의 조상을 이토록 낮춘 것은 고려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향반鄕班을 주축으로한 가문 위주의 귀족사회로 유지된 데 따른 것이다. 향리 이상의 인물로 조상을 조작하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보는 게 옳다. 이성계의 집안이 여진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성계는 기본적으로 정도전으로 상징되는 신진사대부 개혁세력과 연대해 조선조를 개창했다. 이들은 엄 격한 가문 배경을 요구하는 주류세력이 아니었다. 굳이 이성계의 먼 조상이 여진족 출신인지 여부를 시시콜콜하게 따질 이유가 없었다. 당시 이성계가 여진족이 아닐 가능성을 뒷받침한 것은 모두 증언이었다. 더구나 이런 증언은 모두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뒤에 나온 것들이었다. 이성계의 집안이 본래 전주에서 살았으나 지방관의 미움을 받아 삼척을 거쳐 멀리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거주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식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로 굳어져 태조실록』 「총서에 그대로 기록됐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으로 볼지라도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임을 뒷받침 하는 물증이 제법 많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성계의 가문이 세거世居한 지역이다. 그가 역사무대에 등장할 당시 그의 집안은 지금의 함흥 인근인 함주에 거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세금과 요역을 면탈할 목적으로 흘러들어간 고려 백성들이 제법 많았으나 어디까지나 여진족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당시 고려의 백성들이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170여 가구나 되는 방대한 무리를 이끌고 고향에서 쫓겨나 여진족 거주지로 달아났다는 얘기를 믿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고려의 영토를 넘어 여진족만이 살고 있는 두만강 유역까지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둘째, 이성계 집안이 농업이 아닌 목축업을 경영한 점이다. 태조실 록』 「총서에는 이안사가 석성을 쌓고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이 함주 로 진출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목축에 편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이성계의 집안이 대대로 목축업을 영위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 본래 전주에서 농업을 경영한 지주 가문이었다면 여진족 거주지에 가서도 어떻게든 농토를 개척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이다. 셋째, 이성계의 휘하 장수 대부분이 여진족 세력가로 구성된 점이다. 세종실록의 재위 19년인 143787일자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최측근인 여진족 출신 장수 이지란李之蘭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였다. 이지란 이외에도 금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 와 허난두許難豆, 최야오내崔也吾乃 10여 명 이상의 여진족 세력가들이 지속적으로 이성계를 곁에서 보필했다. 상식적으로 볼지라도 여진족 출신의 장수가 아니고는 여진족 장교나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정규군과 사병을 통틀어 고려 말에 존재한 군사집단 가운데 단결력이 가장 강했던 군단이 바 로 이성계가 이끄는 오동斡東 이르건伊爾根사병私兵 집단이었다.

여기의 오동은 지금의 간도 일대를 가리키는 만주어이고, ‘이르건은 여진女眞을 뜻하는 만주어로 백성을 뜻하는 말이다. 간도 일대의 여진족으로 구성된 무장집단을 뜻하는 말이 바로 오동 이르건이다. 청나라의 건국설화를 기록해놓은 만주원류고를 보면 숙신肅愼이 시간이 지나면서 주신珠申또는 주리진朱里眞등으로 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르진이 바로 루전으로 발음된 여진女眞의 어원이 됐다. 훗날 청태종 홍타이지는 후금에서 대청大淸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칙령을 내려 여진족의 비칭卑稱루전은 물론 전래의 주신등에 대한 사용을 엄금하면서 만주滿洲용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한족이 루전등의 용어를 비칭으로 사용한 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오동 이르건을 막강한 무력집단으로 거느린 이성계를 여진족으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봐야 한다. 이성계가 위보를 조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태조실록』 「총서의 내용을 일별하면 이를 더욱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성계의 조상 가운데 역사성을 지닌 최초의 인물은 목조 이안사이다. 태조실록은 신라 김춘추金春秋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의 사위가 된 이한李翰의 후손이 대대로 장상將相이 됐다고 기록해놓았으나 이는 조작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태조실록』 「총서는 이성계의 가계를 매우 유서 깊은 집안으로 묘사해놓았다. 태조의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단, 는 군진君晉이다. 전의 이름은 이성계李成桂, 는 송헌松軒이다. 당초 사공司空 이한李翰이 신라에 벼슬해 태종 무열왕의 10대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이후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과 아간阿干 이광희李光禧, 사도司徒 이입전李立全, 이긍휴李兢休, 이염순李廉順, 이승삭 李承朔, 이충경李充慶, 이경영李景英, 이충민李忠敏, 이화李華, 이진유李珍有, 이궁진李宮進,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 내시집주內侍執奏 이인李隣, 장군 이양무李陽茂 등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마침내 장군이양무가 상장군 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그가 바로 목조穆祖이다.”말할 것도 없이 이안사의 조상으로 거론된 인물 대다수가 가공인물이다. 그러나 역대 왕조 모두 자신들의 선조를 가공인물로 채워 넣은 만큼 이를 크게 문제 삼을 것도 없다. 대략 이성계의 가계는 이안사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대과는 없다. 앞서 살펴봤듯이 여러 정황에 비춰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참고자료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강력한 왕권이 살아있던 조선의 전성기
저자 신동준|미다스북스 |2019)
 
 
170여 가구가 전주에서 이안사를 따라 삼척으로 갔다가 다시 원산으로 갔다가 여진족땅으로 갔다는데
군대가 그렇게 갑자기 움직여도 군량미가 부족할텐데
당시는 대가족 제도로 아이도 많이 낳던 시절이고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할아바지 할머니도 함께 살던 시절이라
170여 가구면 1700여명 넘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최소로 잡아도 1000명이라고 해도
그많은 사람을 데리고 삼척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원산으로 갔다가 여진족 땅으로 갔다는게
믿을 수 없다 그많은 인간들을 데리고 도망가는데 어떻게 다먹여 살리냐
목동이라면 모를까?
 
태조실록에는 이안사가 고향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산성별감과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이안사에게는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역 수령이 산성별감(山城別監)에게 그 관기를 주려고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 일로 이안사는 삼척으로 터전을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자신과 불화가 있었던 산성별감이 그 지역 책임자로 부임해 왔다. 얼른 자리 털고 뜨는 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어느 정도 자체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던 이안사는 의주에서도 곧 세력가가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런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서, 원나라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지만,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두 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 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항복하는 편이 떡고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고려 국경을 넘어 항복한 후 이안사는 같은 집안 사람을 산길대왕에게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더 북쪽으로 가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하였다. 알동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는 첫째 부인 소생이나 둘째 부인 소생이나 모두 다 적통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적통, 어느 어머니의 신분이 더 높다고 적통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이름을 보았을 때 ''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이원계와 이성계의 사촌의 이름을 보면 마찬가지로 ''자 돌림인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화는 몰라도 최소한 이원계는 적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성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그러니까 이것은 왜곡 이다-참고자료 나무위키 )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조작같은 느낌이 든다
정중부에 제거된 이의방 형제와 일파도 모두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의방 동생 이안사는 어떻게 살아남았다고 구라를 치는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족보도 위조라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 족보도 위조됐다고 하고 왕건은 원래 성이 없었다
 
티무르는 몽골계(차가타이한국) 다루가치 집안으로서...몽골과 트란속사니아 사이를 줄타기한다.
몽골보다는...동쪽의 트란속사니아에 입조를 하며...나중에 배신한다
리성계도...몽골계 다루가치 집안으로서...몽골과 고려사이를 줄타기한다. 역시, 몽골보다는...고려쪽을 최후로 선택한다...역시,고려를 배신한다. 티무르의 집안과...리성계의 집안은...티무르(태무진,첩목아)란 이름을 매우 애용했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와 이성계는 태어난 년도와 죽은 년도가 비슷하다
이성계 몽고 이름이 티무르였다
 
티무르제국 조선의 건국시기,건국배경,건국방법등이 비슷하다
  티무르의 막내아들(5) 쇼호르는...티무르를 황제에 올린 공신
리성계의 막내아들(4) 이방원도...이성계를 조선 왕에 올린 공신
티무르도 인도 원정시 입은 화살 부상으로...다리를 절어 티무르랭(절름발이 티무르)란 적들의 비아냥을 삿다니
 
이성계도 낙마사고로 중상을 입었다는데
정몽주가 이성계 병문안을 온 기회를 역으로 이용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이유가 이성계를 이방원이 죽인걸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함흥차사는 이방원이 꾸민사건으로 해석할수 있다
이방원이 암살한 이성계를 신하들이 가지말라는데도 끝까지 가는 신하는 이방원 부하들이 죽이고 이성계가 활을 쏴서 죽였다고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티무르는 막내아들 쇼호르를 제끼고. 장남의 장자...,장손자를 태자로 책봉합니다. 리성계도 이 막내아들 리방원을 제끼고.. 장남의 장자...,장손자를 태자로 책봉합니다.
 
티무르의 막내는...병든 형을 상왕에 옹립...자신이 왕에 등극하며...태자는 제거합니다.
이성계의 막내 이방원도,,동일. 티무르의 손자. 울르그벡은...서양 천문학,수학,문학의 아버지
리성계의 손자...세종대왕은...조선 천문학,수학,문학의 한글을 창제한다
 
우르그벡은 단명한것으로 나오나... 제가 본 우즈벡 소개글엔...그 제위기간이 세종대왕과 동일한 걸로 나온다세종 당시엔...울르그벡이 서아시아에 없었기에...당사자들인 우즈벡인들도 헷깔리는것 같습니다
   
티무르 제국 티무르는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이성계와 정도전도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라는 일부의 주장을 황당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이 대부분은 로마 카툴릭 교회 신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마카톨릭 예수회가 유태인의 조상의 계보를 알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임진왜란 배후가 예수회가 확실하다면
이성계가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역사교육에서 이런 중요한 사실을 배운적이 없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고 본격적으로 상고사 고문서를 불태우고 역사왜곡을 하기 이전에
이미 일루미나티 세력이 조선의 역적들을 사주하여 수많은 서적을 불태우고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티무르의 무덤을 스탈린이 열자마자 히틀러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하고 수세에 몰리던 스탈린이 티무르의 무덤의 비밀을 밝히지 않고 닫자
다시 소련이 처음으로 독일에 승리한 배경에 일루미나티가 개입한 것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일루미나티 세력이 고대상고사를 전부 왜곡시키고 조작하는데 수천만명을 학살하고 수많은 서적을 태우고 그렇게 광란의 악마의 발악을 하며 고대 역사를 은폐하려 했던건 분명해 보인다 이순신은 군인으로 독보적인 존재고 정치인으로는 정도전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방원에 암살되지 않고 정도전이 조선의 기반을 잡고 이어졌으면 역사는 180도 달랐을 것이다
강아지 구충제 '펜벤다졸'을 복용하며 치료 후기를 올리던 말기 암 유튜버가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고인의 죽음과 펜벤다졸이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튜버 A씨의 딸은 "부친께서 지난 13일 사망했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뭘 먹다가 식도가 막혀서 죽었다고 하는데 암치료제 파는 약장사들은 벌써 개구충제 먹고 암으로 죽었다고 조작질 낚시에 걸리듯 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판단은 전체적으로 보고 신중히 판단해야 하지만 암치료 약장사들이 강아지 구충제 복용 못하게 자꾸 이간질 하는 것 보니까 강아지 구충제가 암치료에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이성계도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티무르는 여진어,몽고어로 철이라는 뜻입니다.
이성계(李成桂) 몽고식 이름이 아니르 티무르
이성계가 티무르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와 동일인물 이라는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건 예수회가 임진왜란 배후란 진실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가르치지 않는건 뭐일까?
이성계가 티무르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와 동일인물 이란걸 숨기려는 것일까
그래서 전주이씨로 조작했나?
이성계는 몽골 군벌세력은 확실하다
이성계는 티무르 제국과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티무르도 인도 원정시 입은 화살 부상으로 다리를 절어 티무르랭(절름발이 티무르)란 적들의 비아냥을 삿다니.사마르칸트 구르 아미르 에서 발굴된 티무르의 유골은... 키타이 인 치곤 큰 키이며 양쪽 다리가 불구였었던 흔적이 역력하단 유골 판정
이성계도 화살을 맞고 다리에 부상이 있었다
이성계와 티무르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가설도 있지만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건 서양학자들이 티무르 제국을 싫어하여 나라 이름도 제대로 없고 티무르 이름을 따서 티무르 제국이라고 한다
서양학자들이 왜 그렇게 티무르 제국을 싫어할까? 무슨 중대한 역사적 비밀을 숨기려는 것일까? 정도전과 이복형제까지 죽여 조선의 왕위를 찬탈한 이방원은 북방민족에 보복 공격을 당할까봐명나라가 조공을 요구도 안했는데말 300필 주고 조선의 왕으로 인정받고 그후 명나라가 대놓고 처녀 조공 까지 요구이방원 직접 최고의 미녀를 선발 조공으로 명나라에 바친 역적 이방원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모화사상을 숭배하여
환국의 일원 중앙아시아 연합국과 연결 고리가 그때부터 끊어지고 중국과 혼혈이 가속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