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中世, middle ages (476-1453)

흔히 서구 중세의 시작과 끝을 로마와 로마의 멸망이라 부른다.

전자는 서기 476년에 멸망한 서로마이며 후자는 1453년에 멸망한 동로마 제국인 비잔티움 제국을 말하는데

오늘은 약 천년간의 중세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 메흐메트 2세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무라드 2세가 죽자 그의 셋째 아들이 다시 즉위하게 돼

그는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

메흐메트 2세는 이전에도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 했었지만 정치적 미숙함과 군사반란으로 인해 아버지에 의해 폐위 당해버려

 

그 후, 그의 아버지인 무라드 2세가 승하하자 1451년에 다시 술탄으로 복위했어




▲ 프랑스 화가 도미나크 앵그르가 하렘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그러나 다시 복위한 메흐메트 2세는 정치적인 권위가 필요했어

당시 지방 귀족들은 서로 날뛰고 있었고 메흐메트 2세는 출생성분도 좋질 않았거든

그의 어머니는 하렘의 그리스도인 노예 출신이었는데 

이슬람이 모계보다는 부계를 더 중시하는 사회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을 거야

이런 상황속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권위를 강화시켜줄 업적이 필요했지..

당시 군주가 업적을 쌓는데 있어서 전쟁만큼 좋은것이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고자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기로 마음먹게 돼




▲ 당시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의 지도


▲ 콘스탄티노플 전경

이후, 오스만 제국은 기존 비잔티움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펠레폰네소스 반도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만을 남겨두고 있었어

참고로 메흐메트 2세의 아버지인 무라드 2세도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시도 했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는 못했었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이 가진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 불리는 삼중성벽(Walls) 때문이었어





▲ 콘스탄티노플을 난공불락으로 만들어준 테오도시우스 성벽


▲ 성벽의 방어구조


▲ 해자(Moat) :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의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덩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1차로 해자(Moat)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해자를 넘어도 2차로는 높이 6m 정도의 외성벽(Outer Wall)이 있었고

무수한 피해를 입은 끝에 외성벽을 넘어도 마지막 방어선인 내성벽(Inner Wall)이 버티고 있었는데

내성벽의 높이는 무려 12m 였고 성벽의 두께 또한 6m 정도에 달했다고 해

이러한 삼중성벽이 있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이라 불릴 수 있었어



아마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바라보던 침략군은 노무쿤처럼 허탈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 보스포루스 해협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 '루멜리 히사르'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침공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서방세계의 자존심이자 이슬람 세력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었기에

침략을 당할때마다 서양세력의 지원군이 흑해나 지중해를 통해 오곤 했었어

이런 사실을 잘 알았던 메흐메트 2세는 흑해를 통해 오는 지원군을 차단하고자 '루멜리 히사르'라는 요새를 건설해버려

그러나 지중해 같은 경우 보스포루스 해협처럼 길목이 있는것도 아니었기에 쉽게 막을 수 없었지만

여기에는 메흐메트 2세에게 운이 따르게 돼





▲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1337-1453)

당시 영국프랑스는 벡년전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치고박고 싸우고 있었고

이탈리아 같은 경우 교황청이 있는 곳이기에 오랫동안 교황권을 둘러싼 대립을 했던

비잔티움 제국과는 사이가 좋질 못 했거든..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신성로마제국 또한 내부 분열로 인해 도와줄 사정이 되질 못했어

한마디로 콘스탄티노플을 도와줄 세력이 실질적으로 없었다는 거지





▲ 출전하는 오스만 제국군

콘스탄티노플에 있어서 암울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1453년 4월, 침공 준비를 마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드디어 콘스탄티노플로 출병하게 돼




- 2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