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불교 유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크게

1. 산속 깊이 있는 아기자기한 산사들

2. 자그맣고 지붕이 아담하면서 전체적으로 통통한 느낌의 석탑

3. 상록하단, 윗부분은 녹색으로, 아랫부분은 어두운 붉은색의 천편일률적인 단청

이 세가지로 나뉘는데, 쉽게 알기위해 한번 예시로 사진을 봐보자.


깊은 산 속에 숨겨져있듯 자리잡은 산사들


경산시 선광사 3층석탑.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형태를 갖추고있음. 



상록하단의 단청. 처마 밑의 빛이 잘 닿지 않는 곳은 어두운 녹색으로, 그리고 그 밑은 붉은 색으로.



하지만 사실 이 세가지 이미지가 한국 고건축의 전부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이유를 짚어보자면,

1. 사찰들이 산 속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도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대규모의 사찰들은 파괴되거나 더 이상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재정난에 허덕이다 무너졌고, 무너진 사찰들은 대부분 방치된 채 사라져버림.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온 도심의 전통 사찰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국가의 외면아래 상당수 사라짐. 불교가 쭉 융성했던 일본의 경우, 많은 수의 사찰들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고, 사실 우리나라도 조선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음. 

2.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신라양식의 석탑이 전국의 표준이 되어 그 후로도 신라 양식의 석탑이 주가 됨. 신라탑의 가장 큰 특징은 3층을 기본으로 하되, 탑이 너무 왜소하게 보일 것을 우려해 탑의 상층부와 지붕을 두껍게 하여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 뭉툭한 느낌을 줌.

3. 현재 대한민국 전통건축에서 99프로 보이는 이 상록하단 단청은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티벳불교의 영향인데 고려 말기 이후의 모든 건축물은 이러한 단청을 띄고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때만 하더라도 거대한 불교 건축물들이 도심 안에 버젓이 존재했다.


일본 나가노현의 젠코지란 절인데, 도시 한복판에 상점들과 함께 절이 위치해있음. 

그리고 그 건축양식과 기법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한 한옥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음. 대표적으로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황룡사, 고구려 정릉사등이 있음. 중국을 전탑, 한국을 석탑,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목탑들이 삼국-고려시대에 세워졌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99프로 사라졌다 ㅅㅂ. 그 중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에 대해 쫌만 알아보자.






익산 미륵산 앞에 있었던 미륵사지의 발굴 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가람배치도다. 중문 가운데에 1개의 목탑과 양 옆으로 돌로 만든 2개의 석탑이 있었고 그 뒤로는 불상을 모신 금당이 있었음. 그리고 이 모든 건물들을 회랑이라는 긴 복도식 건물로 감싸고 있다. 



황룡사의 가람배치도인데, 기록상 황룡사 창건에 백제건축가 아비지가 초청되어 시작부터 끝까지 총괄했다고 함. 그래서 그런지 배치가 비슷하다. 당시대 백제 건축기술이 얼마나 나 뛰어났는지 알수있다. 백제의 기술은 일본에도 건너가 꽃을 피움. 나라의 호류지(법륭사), 오사카의 시텐노지(사천왕사)가 백제기술로 지어진 사찰이라고 함.  



아무튼 미륵사지의 이 모습을 모형으로 복원해보니




전체적으로 봐도 우리가 아는 조선 말의 아기자기하고 흙내나는 한옥과는 꽤나 다른 모습임. 특히 웅장한 탑의 모습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국사 석가탑의 모습이랑 차이가 많이 난다. 


미륵사는 639년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는데, 당시 백제의 총 인구는 3백만명 될까 말까했다고 한다. 무왕은 근초고-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자꾸만 쪼그라져가던 백제의 전성기를 다시 되찾았던 왕인데 본인 파워를 선보이고자 미륵사라는 대사찰을 지었다고 추측됨. 

미륵사는 어마어마한 규모때문에 30년이 넘는 기간과 많은 국가재정이 투입된, 백제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절이었음. 보통 백제식 절이라 하면 한 개의 탑과 한개의 금당(불상을 모시는 곳. 현대의 대웅전이라 보면 됨)을 둔 "1탑 1금당" 식인데, 미륵사는 3탑 3금당의 형식을 띄고 있음. 즉 돈지랄로 세운 어마어마한 절이자 아마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숭례문 그냥 곧바로 제끼고 국보1호였을 가능성도 있는 절이었다. 현재 복원된 석탑도 아시아 최대 크기의 석탑이라고 한다. 


물론 현재는 복원된 석탑 두개만이 서있는 허허벌판이다. 저 산기슭의 평편한 땅 전부가 미륵사지로 차있었음. 정면 260m, 남북으로 640m 토탈 16만 m^2으로 황룡사의 두배 면적이었다고 한다. 백제가 얼마나 이 절에 모든 것을 박아넣었는지 가늠할수 있음.




근데 같은 불교국가였던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유지보수를 통해 조선초기까진 어찌어찌 절이 남아있었던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고 조선후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사지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초까지 간신히 남아있다가 유교만 오질라게 숭상했던 사대부들과 왕조의 무관심아래 절이 무너지고 아무도 복구를 하지 않아 그대로 먼지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유교 ㅆㅎㅌㅊ.
 

이 미륵사에서 주목할만 한 것은 가운데의 9층 목탑과 석탑인데

목탑은 정사각형 기단 한변만 19.2m, 높이가 55-6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의 아파트 20층 규모. 그냥 긴말말고 복원된 모형으로 봐보자.




그리고 이 목탑의 양 동쪽과 서쪽에 각 각 한개씩 석탑을 세우 균형미를 맞췄는데, 이것도 일단 사진으로 봐보자.



돌로 기단을 쌓고, 목탑의 구조를 돌로 쌓은 형태라 보면 된다. 이 두개의 석탑은 20m 정도로 아파트 9층 높이의 규모라고 한다. 신라석탑과는 달리 나무로 쌓은 탑을 재료만 바꾸어 돌로 쌓아올린 형태다. 백제 석탑은 전체적으로 지붕이 거대하면서 끝부분으로 갈수록 얇아지고 위로 살짝 들려있는데, 목탑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함. 

눈썰미 좋은 게이들은 어디서많이 봤다 할법한데 사실 이 석탑중 서쪽에 있던 서탑은,

벼락에 맞아 파괴되고, 유교만 쌔빠지게 빨던 조선왕조의 무관심아래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음. 이 석탑의 뒷모습은 더 처참했음.



사실 이정도 상태로 1300년 이상 완전히 안무너지고 지내왔다는게 용할정도다...ㅠㅠ

암튼 학술조사중 이러한 석탑의 상태를 발견한 1920년대의 일본학자들은 일단 붕괴되는 것이라도 방지하기 위해 당시 최첨단 건축재료였던 시멘트를 사용하여 석탑을 임시 보강하기로함.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약 80년간 남아있게됨.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게, 일본이 고의적으로 저런 못난 모습으로 석탑을 망쳐놨다고 하는데 사실 그당시 건축기술로 할 수있던 최선이 시멘트였고, 일본애들은 그 당시 자기네들 문화재 복원할때도 시멘트를 이곳저곳 가능한한 최대한 많이 사용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아무도 관심 조또 주지않던 석굴암 등의 국내 유명 유적지들을 발굴하고 임시로나마 보존하려고 노력한건데 아무도 모르더라 ㅅㅂ

아무튼 그래서 이 서탑은 2001년부터 해체와 복원을 거쳐서 2019년 깔끔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남.




사실 이 서쪽의 석탑은 9층까지 존재했으나 복원당시 6층까지만 남아있던 상황이었기에 그냥 6층까지만 복구하기로 결정함. 복원 당시 가장 무거웠던 돌은 한조각에 2톤씩 했다던데 유럽이나 이집트도 아니고 거중기나 뭐 암것도 없었던 7세기 백제인들이 대체 어떤식으로 9층까지 저 돌들을 쌓아올렸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동쪽에 있던 동탑은 사실 더 이른 1993년에 복원됬는데,



손으로 일일이 돌을 쪼아 만든게 아닌 그냥 기계로 매끈하게 마감해버려서 부조화가 좀 심하다 솔직히. 어찌됬건 원래의 석탑 모양이 이랬을것이라고 처음보는 사람에게 도움되긴함. 애도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 풍경과 녹아들겠지 그래도...



다시 돌아가서 전반적인 미륵사지의 모습을 투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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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중금당이라고 해서 목탑 뒤에 위치해있었음. 목탑과 더불어 절의 메인 빌딩. 


정면


사선에서 본 모습. 중문-목탑-금당의 일직선 구조로서 전형적인 백제의 빌딩 배치. 

가운데는 중문이라 하여, 본격적으로 사찰내로 들어가는 문임. 중문 바로 뒤에 거대한 목탑이 보인다.
중문 앞을 지나가는 스님 모형의 크기로 봐도 저 목탑은 아마 당시 신라의 황룡사와 더불어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목탑들 중 하나였을 듯.

사실 이러한 백제의 가람배치는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는데, 백제기술자들이 건립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알려진 호류지를 함 봐보자.


일본 나라의 호류지의 중문과 뒤로 5층 목탑. 백제의 배치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건 오사카의 시텐노지란 절인데, 중문-목탑-그뒤로 살짝 보이는 금당의 백제 형식. 
특히 이 절은 백제인들이 세웠다고 기록되어서 백제 건축을 복원할 때 상당히 많이 참조되는 절이기도 하다. 
100프로 장담은 못해도 백제시대의 건물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일본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했을 것임. 시텐노지의 경우 단청이 현재 한국의 화려한 단청과는 거리가 있음. 기록을 봐도 당시 백제에서 가장 흔했던 재료마감법은 위 시텐노지에서 보이듯 강렬한 붉은색의 주칠이었음. 

호류지로 다시 돌아가 좀 더 살펴보자


왼쪽의 금당과 오른쪽의 목탑. 미륵사지의 형태와 닮은점이 눈에 들어온다. 





호류지의 목탑. 얇으면서도 날렵한 모양의 지붕과, 살짝살짝씩 들어올려진 추녀, 난간의 모양, 지붕 밑으로 길게 빼진 하앙이라는 건축부재들, 그리고 전반적으로 긴장미가 흐르면서도 안정된 모습의 목탑은 백제인들이 일본에 남긴 백제건축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한발짝 더 나아가서 꽤나 수준높은 목조건축물들을 만들어 냈음. 신라의 통일 후로 자취를 감춘 백제건축들이 이런식으로 일본에 살아 남아있음이 다행이다ㅠㅠ


그래서 2010년 부여에 백제문화단지를 복원할때 목탑의 경우, 일본 호류지 목탑을 많이 참조해서 쌓아올렸다.



부여에 재현된 백제사찰 능사. 중문-목탑-금당 형태를 충실히 복원해냄. 


목탑을 봐보자. 붉은색의 주칠단청이 빠진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일본 호류지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왼쪽은 부여에 복원된 능사 목탑이고 오른쪽은 호류지의 목탑. 

빨간 동그라미는 하앙이라는 재료인데 지붕의 무개를 효율적으로 전달해주는 나무 부재임. 이 하앙으로 인해 서까래를 더 길게 빼내 지붕을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수 있음. 백제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로 생각됨. 근데 어쩐 일인지 신라는 ㅅㅂ 삼국을 통일한후 이러한 기술들을 새 건축물을 지을때 하나도 도입하지 않은 것 같다. 그 후로 한반도에선 이러한 기법들이 실종되어버리고 일본에서만 지금까지 살아남음. 

백제인들이 전해준 기술을 토대로, 일본은 높은 수준의 건축구조를 이루어 내는데 나중에 시간되면 따로 써보겠다. 


대표적으로 교토의 히가시혼간지. 정면 76m, 측면 58m, 높이 38m로 부피로 따질때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이거에 대해 쓸려면 또 길어져서 다음 글로 넘긴다. 


3줄 요약

1.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한 이미지의 한국 건축은 사실 조선 후기대의 모습.
2. 삼국시대 때는 장대한 규모의 건물들 목탑, 석탑들이 많았었음.
3. 백제의 건축술은 한반도에선 명맥이 끊겼지만 일본으로 넘어가 살아남아 더 발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