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알수록 존경할수 밖에 없는 갓승만의 항일운동 업적 

 

01  미 의회 독립동정안 상정 및 표결 - https://www.ilbe.com/view/11196174623

02 일본을 국제사회에서 퇴출시킨 제네바 대첩 

03 조선인들의 태평양 전쟁참전

04 조선반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VOA 민사심리전 

 

이승만은 외교 독립운동을 정말 화려하고 위력적으로 펼친 사람이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과의 균열이 생기는 그 순간이 독립의 기회로 보고 있었으니
미일간 이간계를 수십년간 시도했던 사람이며 일본을 국제무대에서 고립시키는데
공헌을 했고 이 역사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 기려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폭주 만주진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열강국으로 등극하며 미영의 묵인하에 1910년 조선을 차지했고
그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 1차 대전 전승국 지위(1919년)를 얻고 국력을 확장시켜 만주로
진출하려 했다.

일본은 장개석과 싸우던 중국군벌 장작림과 한편먹고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차에 만주군벌 장작림이 폭탄테러로 죽고 그의 아들이 장학량이 국민당군과

협력하자 일본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노골화 되었다. 

 

장작림


 


일본의 만주사변과 대륙진출에 미온적인 열강들 
일본이 군사적으로 만주지역을 장악할때까지 열강국들은 대체적으로 소극적인
반응이였다. 다름아닌 경제 대공황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협력관계 였음으로 이에 대해서 다소 옹호적인 입장까지 보여주기도 했었다.

 

만주국이 세워지자 국제사회의 반대에 직면한 일본 

일본은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만주철병을 거부권행사하는등의
행동을 해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으나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벌여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국제연맹에서 논의되었다.

 

리튼 조사단 





제네바에 이승만이 나타나다. 
1932년 11월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도에서
이승만의 입지와 능력이 어느정도 였는지 다시한번 입증해줬으며 무국적자 이승만은
미국부부가 인증한 특별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준 특혜까지 제공해줬으니  식민지 조선국

신분의 이승만의 외교적 능력은 현대 일게이들이 자랑스러워 해도 될만한 일이다.  
아쉽게도 이 특별여권은 분실되었다. 아마 현존했다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 했을듯 ~ 

 

임시정부의 신임장 


 

제네바에서 이승만과 조선인들이 외교총력전을 펼치다. 

이승만은 제네바에 도착해서 온갖 중국에게 박대를 당해도 당당하게 언론플레이를 펼치면서 
조선인들과 협력하며 국제연맹에서 조선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홍보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여기에 만주국 침략성에 대해서 리튼보고서와 함께 조선인에 대한 스토리까지 첨부하여 홍보서를
발간했는데 이 제목이 The Koreans In Manchuria 이다. 

 

 


 

 

이승만의 일기를 읽으면서 항일운동 업적을 기억하자 

이승만의 일기를 읽어보면 이승만의 외교력 수준이 어느정도 였는지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다.

 




1월 30일

중국인들이 만주의 한인 문제를 국제연맹에 상정한 이후에 우리도 국제연맹에 제출할 청 원서를 준비하느라고 바빴다. 나는 중국인들이 한국 문제 상정을 주저하는 그들만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마냥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할 수만은 없다고 콜린스에게 말했다. 그는 중국인들이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답했다. 이것이 우방 기 자들 사이에서 형성된 일반적인 공감대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꿔타이치는 일주일 후 돌아올 예정으로 런던으로 떠났고, 콜린스는 남아서 우리를 도왔다.

2월 1일

콜린스가 와서 당장 옌을 만나 우리 문제를 속히 상정할 것을 부탁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 러고는 만주국을 지지하는 약 586건의 만주 관련 문건을 언급하며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된 회람의 사본 하나를 가져왔다. 그중에는 만주국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탄생되었는가를 언급 하는 길림어(Kirin)로 쓴 두 명의 한인 이름도 있었다. 나는 서영해에게 한국통신부(Agency Korea)의 이름으로 항의서를 작성하여 이를 중국 정보부에 전달하여 등사하도록 했다.

2월 2일

옌 박사를 방문하여 한국 문제를 언제 상정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하루나 이틀이면 할 것 이니 자신들이 먼저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후에 블랑코를 만나러 갔다. 대화 중에 그는 아편퇴치동맹(Anti-Opium League)을 대 신하여 국제연맹에 보내는 서신을 보여 주며 ‘지난 3년간 이 일을 해왔는데 이제야 지난 1월 27일 국제연맹의 회원인 누군가가 내 서신을 회원국들에게 돌리도록 국제연맹 사무국에 요 청하여 그렇게 되었다. 이제 나도 공적인 신분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무엇인가 를 이루려면 당신이 직접 해라. 레스터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이 문제에 매우 관심이 있 어 보였다. 그에게 서신을 보내 그가 국제연맹 사무국이 회람을 돌리도록 하면 어떨까? 레스 터가 요청을 하면 사무국이 당신 서신을 돌릴 것이고 그러면 당신 서신도 공적인 지위를 갖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국제연맹에 보낼 서신을 작성해 줄 것을 부탁 했다. 그는 내 청을 수락하며 나중에 내게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2월 4일

오전 10시에 데이비스(Merle Davis)의 집으로 가서 리튼 경(Lord Victor BulwerLytton)321)과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타코머라이 (Tacomerai) 애비뉴 5번가 친우회(Friends Society)의 픽카드(Bertram Pickard)322)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길게 통화를 한 후 즉시 그를 만나 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나는 고풍스 런 도시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베드로 대성당 인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갔다. 픽카드는 내게 로마인들이 건축한 건물인 그의 사무실 아래에 있는 오래된 벽을 가리켰 다. 그러고는 그 옛날 녹스(John Knox)323)와 캘빈(John Calvin)324)이 설교를 했던 교회가 그의 사무실과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데이비스와 통화를 한 후 나를 리튼과 연결시켜 줄 방 법을 모색하려 여러 사람들과 통화를 했으나 그들은 리튼이 나를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라 며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중국과 일본 의 충돌을 어느 정도 해결하는 것인데 이 문제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려움을 겪고 있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 문제는 거기에서 한 발 나아가야 하는 더 복잡한 문제이며, 또 한 뒤로 소급하여 더 오래된 일들을 다루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느 회원 국도 선뜻 이를 다루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 문제를 상정하는 것이 평화라는 기제에 초를 치는 행위가 결코 아니며 「리튼 보 고서」도 만주 한인들의 심각성을 명확히 잘 보여 주고 있지 않느냐고 즉각 항의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리튼 보고서」가 일으킨 반향을 다각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이를 위해 만주국 통치를 지지하기 위해 만주와 관련된 소위 586건의 서류를 제시했고, 이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는 이전에 언급한 두 명의 한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만 주의 한인들이 일본의 만주국 통치에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우 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피력했다.

그러자 픽카드는 내게 그런 증거가 있으면 리튼 경이 나를 만나려 할지도 모르겠다며 다 른 방으로 가서 전화로 약속을 잡아 보겠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와서 다음 주 월요일 오전 11시에 리치몬드 호텔에서 세실 경(Lord Bobert G. Cecil)325)과 만나도록 약속을 했으니, 내가 만주국에 반대하는 한인들의 증거를 제시하면 세 실 경이 나를 리튼 경과 만나도록 주선해 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콘스탄틴 6번가 국 제의원연맹(Bureau Interparliament)의 크리스천 랭(Christian L. Lange)326)과의 만남도 주선해 보겠다고 했다.

픽카드가 오후에 전화를 해서 노르웨이 대표인 랭 박사가 「리튼 보고서」를 검토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임명한 위원회의 19명 위원 중 한 명이라고 전했다. 그에게 전화를 해서 오후 5 시에 그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서영해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갔으나 서영해는 밖 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는 중년이 지나 보였고 영어를 잘 구사했다. 나는 랭 박사에게 전반적인 내용을 이야기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중국과 일본의 문제가 미 묘한 시점이어서 한국 문제를 상정할 회원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한국의 독립 문제가 상정될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현재로서는 당신이나 국제연맹의 다른 회원국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상정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직면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제연맹과 중국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란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 느냐 아니면 일본의 요구에 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한인들도 포함하여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 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면서, 국제연맹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 「리튼 보고서」가 틀렸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온간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서류를 반박할 증 거를 가지고 있다. 이를 국제연맹에 제출하려고 하는데 뉴스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준 공문 서의 자격(semi-official status)으로 제출하길 원한다. 사무국에게 이를 회원국들에게 돌 리도록 요청하려면 중국보다는 다른 회원국이 제출하길 바라며, 이것이 현재로서는 내가 바 라는 전부라고 답했다. 그는 나의 의도를 알겠다고 했다. 그는 또한 스웨덴 대표인 스웨덴 수상이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고 언질을 주며 나를 위해 그와의 만남을 주선해 보겠노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돌아왔다.

 

2월 7일

스페인 대표 마다리아가와 접촉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는 군축회의의 매우 중요한 위원회 의장이어서 하루 종일 숙소인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인 성명서를 준비했다. 국제 연맹의 사무총장328)에게 보낼 서신 150부와 「리튼 보고서」 발췌본 150부를 모두 2월 7일자 로 두 개의 별개 문건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길버트 미 영사를 만났을 때 그는 우리의 서신 을 국제연맹에 보내기 전에 마다리아가와 레스터가 우리를 대신해서 서신을 제출해 줄지 모 르니 마다리아가와 우선 의논해 보라고 귀띔했다. 그래서 하루를 더 기다려 보기로 작성했다. 서영해가 옌 박사의 요청으로 국제연맹 사무국 이 발송할 회람 사본을 가져왔다. 이 서신은 만주국 설립을 지지하는 길림성의 만주인들과 두 명의 한인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일전에 일본인들이 제출한 소위 586건 서류에 대항하 여 ‘호놀룰루 한인민족주의당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329)가 옌 박사에게 보낸 전문에 관한 것이었다. 호놀룰루의 한인들이 나의 제안으로 옌 박사에게 이 전문을 보내어 배포가 되었고 그 결과 일부 신문에서도 보도가 되었다.

2월 8일 아일랜드 대표 레스터가 전화를 하여 날더러 그쪽으로 오라고 했다. 준비된 우리 서신 사본 한 부를 그에게 가지고 갔더니 매우 잘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사본을 하나 달라고 해서 가져 간 것이다. 그는 본국의 정부가 지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나 우리 서신을 유포하도록 사무국에 요청할 수 있으면 기쁘겠다고, 자신이 해도 되는지 아일랜드 정부에게 지시를 의뢰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후에 국제연맹으로 서신을 등기로 발송했고, 약 60통은 회원국들에게, 나머지는 특파원들에게 발송했다. 서영해도 친구들에게 준다고 몇 부를 가져갔고, 더 달라고 해서 두 배인 50부를 더 주문했다. 콜린스는 2월 6일에 꿔타이치와 파리로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런던으로 간 것이었다. 서영해는 프랑스어로 발간되는 제네바 신문들이 다음 금요일에 프랑스어와 영어로 우리 의 항의를 소개할 한 라디오 방송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또 국제연맹 에서 서울의 「동아일보」로 짧은 메시지를 전송하러 갔을 때 일본 언론 지부장이 와서 자신이 이미 서울에 우리 서신의 거의 전부를 전송했기 때문에 전송하느라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 다고 말했다고도 전했다. 그러므로 그 일본인 덕분에 우리들의 활동이 일본이 낸 비용으로 한국에 보고될 것이라고 했다.

 

2월 9일

블랑코를 만났다. 그는 우리 문제를 제기하는 호소문 제출이 잘 처리되었다고 내게 축하 를 하고 싶어 했다. 내용이 짜임새 있게 잘 작성되었고, 특히 앞부분은 노련한 정치가와 같 은 방식으로 되어 있어 사무총장이 이를 읽고 배포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들도록 했다고 말했다. 길버트도 아주 잘되었다고 말하며 그(블랑코)가 문건 작성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블랑코는 이렇게 잘 짜인 성명서를 자신이 작성한 것으로 생 각하는 것은 과찬이라며 겸손해 했다. 그러고는 우리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본을 비회원 국과 미국, 소련에게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이미 다 발송했다고 전하며 그런 제안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서영해는 중국 언론 지부가 국제연맹에 보낸 우리 서신을 보고하느라고 중국에 700자를 전송했다고 보고했다

2월 10일

우리는 프렌티스 길버트 영사에게 우리 서신 사본을 보내 스팀슨(Henry L. Stimson) 국 무장관과 리트비노프(Maxim M. Litvinoff)330) 소련 대표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호놀룰루에서 온 전보에는 나의 전갈을 뉴욕을 통해 받았다고 전하며 500불을 보내왔다.

 

2월 11일

뉴욕에서 발송된 전보는 「뉴욕 타임스」가 우리의 전문을 보도했음을 전했다. 오전 11시에 제네바의 스위스 뉴스 신디케이터를 대표하는 디브리스(E. Debries) 박사가 약속한 대로 와서 오후 12시 45분까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 신문에 긴 칼럼을 쓸 것이며 이를 전송하기 전에 내게 보여 주고 수정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는 나의 사진과 약력도 요구하여 서영해가 이를 제공했다.

 

 

2월 13일

2월 8일, 국제연맹에 우리의 서신을 제출한 이후 많은 친구가 현 상황을 ‘위엄 있고ʼ, ‘노련 한’ 방식으로 언급했다고 우호적으로 논평을 했다. 특히 사무국과 회원국들에게 보낸 서신의 첫 단락은 호소력 있게 잘 쓰여 사무국이 이를 전 회원국들에게 배포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 도록 만들었다고 평했다. 존슨이 전화를 해서 국제연맹 회원들뿐만 아니라 언론인들도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서로 논의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신문들은 일본에 반대하는 19명의 위원회가 채택한 결의안들을 보도하였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자도 국제연맹과 스팀슨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반면 영국 외 상 존 시몬스 경은 일본에 대항하여 국제연맹이 채택한 어떠한 조치에도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서영해는 나를 지지하는 웰링턴 쿠의 성명서를 중국인들이 배포하고 있다 고 보고했다. 나는 그에게 중국인들이 우리 문제를 상정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내게 아부를 하려 한다고 답했다. 나는 2월 13일부터 국제연맹이 만주의 모든 한인들을 비(非)일본인으로 선언하여 중국이 나 그들이 선택하는 다른 나라로 귀화할 수 있도록 최소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 하는 「리튼 보고서」를 근거로 문건을 작성했다. 「리튼 보고서」에는 일본이 중국인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가 국제연맹의 관심을 불 러일으키길 바라며 문건을 준비해 왔다.

 

2월 21일

오전에 로잔느(Lausanne) 대학의 브라운 여사와 미리엄(Anne W. Meriam) 양이 와서 점 심 식사를 하고 가라고 했다. 식사 후, 우리는 오후 3시 반에 총회가 개최되는 국제연맹으로 갔다. 호수를 향해 창문이 난 총회장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히만(Hyman) 의장은 불어로 연 설을 했고 연설문 전문도 불어로 배포되었다. 총회는 오는 금요일에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총회가 휴회되어 많은 사람이 실망을 토로했다. 2월 22일 옌 박사가 국제연맹에 우리의 성명서를 제출했고, 튜발(Teuval)331) 사무총장이 만주국 수 립에 항의하는 뜻에서 이를 배포했다. 만주국은 한인들의 운명에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살고 있는 100만이 넘는 한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신 세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332)이란 제목의 원고를 준비하는 데 혼 신의 힘을 다했다.

 


1933년 일본제국 국제연맹에서 탈퇴를 하다.  (제네바 대첩)
1933년 2월 24일 일본의 불법성과 일본군의 철수를 명시한 리튼 보고서가 찬성 42표 반대 1표로 채택되자
일본은 즉시 반발하여 일본측 대표는 국제연맹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이승만의 일본과 영미간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균열점을 만들었다.  이승만의 Korean In Manchuria 홍보서 는 각국 대표단에게
호평을 받으며 리튼 보고서 채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폭탄테러 이상급의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그 이유는 피한방울 안흘리고 이룩해낸 업적이라고 더더욱 높이 평가한다.

 

 



 

 

이승만의 항일 운동사를 널리 알려야 한다.  

교과서에 이러한 이승만의 위대한 항일독립 운동 업적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오로지 유혈투쟁만이 대단한 업적인것 처럼 포장해온 반일종족주의적 사관이 문제였던것이다. 
이제는 이승만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일게이들부터 제대로 인식을 하고 외연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줄 요약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자 열강들이 반발을 일으킴
갓승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주국의 불법성을 홍보함 

국제연맹에서 일본을 ㅁㅈㅎ 시키는데 조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