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에서 발간한 '6.25전쟁 증언록 3부' 집에서 옮김.
 


 
이 기 정
 
51.12.8 갑종7기 임관, 6사단 7연대 3중대 2소대장
교암산, 575고지, 194고지전투 59.4.30 소령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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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다닥, 이얏! 퍽, 억! 575고지 백병전>




575고지는 교암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지형 능선 가운데서 적 방향으로

가장 근접하여 돌출되어 있어 적으로부터 감제(瞰制)되는 위치에 있었다.

이 일대에서 전술적 주도권을 잡으려면 가장 높은 교암산을 장악해야 했다.

그리하여 중공군은 1952년 4월부터 교암산을 얻기 위한 거점을 확보하려고 575고지에 집중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국지전 양상으로 전개된 575고지 전투는 하나의 초토화 작전이었다. 낮에는 아군이 차지하고

밤에는적이 침투하여 낮과 밤에 주인이 서로 뒤바뀌는 격렬한 소모전이 연일 계속되었다.





피아의 포격이 집중되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앙상한 산줄기는 바위가 부서져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먼지가 되어 온종일 뿌연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1952년 4월 17일 새벽, 우리 제7연대 1대대는 교암산에서 575고지를 향하여 진군했다.

우리가 전진하기 전에 연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어느날 중공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575고지를 덮쳤다.

자정 무렵부터 이 작은 봉우리에 적의 포화가 집중되었고 아군 포화는 적 지상부대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하여

금성천 일대에 포격 탄막을 퍼부었다. 몇 시간의 포격전이 끝날 무렵 금성천을 도하한 적은 575고지를

향하여 집요하게 기어올라와 야전호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지고 교통호는 적의 시체로 메워졌다.

밤새 계속된 이 전투에서 적은 수백 구의 시체를 남겨둔 채 퇴각하였다.

우리 2연대 2대대도 큰 손실을 당하였으나 방어전통을 견지 끝내 진지를 사수하였다.

아군의 승리는 이즈음 새로 사용한 VT탄 덕이었다.





새로 등장한 VT탄은 노출된 적을 살상하는 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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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T탄 신관을 장착한 포탄은 종래의 포탄처럼 지표에 떨어져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 25야드 상공에서 작렬하는 포탄이어서 무수한 파편이 공중에서 비같이 쏟아져 내리면서

직경 30~40야드 넓이에내려 꽂히므로, 아군 상공에서 터져도 호 속에 있는 아군 병력은 다치지 않지만

기어오르는 노출된 적은 파편비로 살상되는 새로운 포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퍼부은 피아의 집중공격으로 제2연대 2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더 이상 대전할 수 없는 상태이어서 우리 제7연대 1대대가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전진한 것이다.

교암산을 출발한 우리 3중대는 약 1Km 정도 떨어진 575고지를 향하여 교통호를 따라 전진했다.

도중 어느 곳에서 느닷없이 적과 조우할 지도 모른다. 뿌연 회색 먼지 속에서도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2소대장인 나는 소대 병사들에게 M1소총을 주요 3부분으로 분해하여 마대에 싸서 등에 메고

멜빵에는 각각 두 개의 수류탄을 매달고 낮은 자세로 엎드려 전진토록 하였다.

이곳의 소대, 중대 규모의 전투는 연일 쉴 새 없이 계속되는 피아의 포격으로 바위는 깨져 없고

흙은 재가 되어 밟히는 것은 풀석풀석 먼지 뿐이어서 마대에 총을 싸지 않으면 돌가루 뿌연 먼지가 약실에 차서

사격하려 해도 격발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주요 3부분으로 분해하여 마대에 싸서 메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각지대에서 즉시 결합하고 사격하는 것이 이곳의 무기관리이며 전투요령이다.





가끔 포격에 흙이 무너져 얕아진 통로를 지날 때 노출될 것을 예상하고

엄호 사격을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약 500m 정도 전진하니 교통호에 중공군의 시체가

가득 메워져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퉁퉁 부어오른 시체들을 막대기 지렛대로 산아래로 굴러

떨어뜨리고 전진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한 후 제2연대 6중대 병력과 교대하여 파손된 진지를

재구축하는 작업을 신속히 끝내고 언제 터질지 모를 교전에 대비하는 것이 575고지의 임전수칙이다.

소강상태로 이어지는 침묵은 긴장을 극도로 자극하여 몸을 굳어지게 하므로 나는 때때로 빤히 건너다

보이는 적의 총안에 예광탄으로 조준사격하여 선제위협하는 한편

병사들을 경각케 함으로써 일촉즉발의 상황에 지체없이 대응할 수 있도록 경계심을 견지케 하였다.

하룻밤에도 그냥 지난 적이 없다는데 나는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지 오히려 어서 나타나라고

기다려지기도 했는데 역시 상황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산 아래 금성천변에 잠복 수색 중이던 1분대에서 황급한 보고였다.






물 깊이는 거의 발목을 적실 정도로 얕아 평지나 다름없는 금성천 건너에서 적의 이동이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즉시 1분대에 신속 철수를 명령하고 중대에 보고한 후 소대에 전투 태세를 명령하였다.

개인야전호를 상호연결한 복개교통호를 연락병들이 부산하게 오갔다.

아니나 다를까 밤 1시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적막했던 주변은 순식간에 여기 저기 마구 떨어지는 포탄이 작렬하는 폭발음과 전후좌우에서

막 날아오는 재 먼지가 병사들을 덮어씌워 눈을 뜰 수 없고 들리지도 않아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공중에서 발광하는 아군의 조명탄 섬광만이 번쩍일 뿐 얼이 빠지고

감각이 없어진 상태에서도 불어닥치는 흙먼지에 총이 노출되지 않도록 감싸안고

밖을 의시하는 실눈에 능선 아래에서 검은 물체가 움직였다.





곧이어 수 미상의 적이 기어오르는 것 같이 보이자마자 발사명령을 하기도 전에 호마다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적이 보여서 쏘는 것이 아니라 적이 기어오른다는 생각이 들자 반사적으로 무조건 내리갈기는 것이다.

지휘자도 안 보이고 명령도 안 들려 자주적 교전이 빛과 폭발음과 먼지와 뒤섞여

칠흑같은 밤을 대낮같이 밝히지만 흙먼지 속에서 숨쉬기도 힘든데 대화는 아예 없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 움직이기만 하면 직감과 반사가 동시에 작동되면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발사하는 총소리로 귀머거리가 되고 총구에서 뿜어내는 섬광과 네 발 다음에 나가는 예광탄의 빛줄기는 산 아래로

난무하여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찢어지듯 악쓰는 절규와 동시에 얼굴에 튀어오는 피와

선혈냄새가 송곳같이 나를 찌르는 충격에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움직은 것이 느껴지기만 해도 무조건 총을 갈기는 무의식 무차별 전투, 정신없이 미쳐 날뛰는 이 전장이 바로 아비규환이다.

소위 긴박, 공포, 전율 등의 낱말은 모두가 한가한 사람들의 한낱 사치스러운 푸념에 불과하다.

너와 나의 관계의식도 없고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방아쇠만 당기는 반사작용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고참은 머리를 들고 총부리를 산 아래에 대고 갈겨대지만

매일같이 새로 보충되는 신병들은 머리를 철모 속에 파묻고 총부리를 허공에 치켜세운 채 앉아서 마구 울며 방아쇠만 당긴다.

이쪽을 쳐다보기라도 해야 손짓을 하지, 총성에 아예 귀가 먹어 말도 들리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적의 포화가 멈춘 듯한데 아군진지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은 적의 근접을 막기 위한 VT탄 발포 소리다.

지체없이 우리 진지 상공에서부터 산 아래쪽 허공에까지 수없이 작렬하는 아군의 VT탄막 포격으로

적의 포화는 멈췄다. 그러나 포성이 멈춘 것은 끝이 아니고 적병이 가까이에 기어오르고 있다는 징조이며

곧 시작되는 혈투 백병전의 예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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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로 뒤섞인 흙먼지, 탄재를 뒤집어쓰고>

폭발음과 번쩍이는 섬광 속에서 무서움에 강박감이 점증하는데 우리 포격마저 멈췄다.

칠흑 같은 어두움, 숨소리도 없는 적막 속에서 별안간 적병이 호 속으로

뛰어들어 오는 공포가 엄습하는 가장 무서운 순간이다.

숨을 죽이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이때냐, 이때냐에 입이 마르는데 돌연


“ 적이다 ”

악쓰는 소리와 함께푸다닥 푸득 소리와 기합소리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소란한데

나는 흙먼지에 덮여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시간이 지나면서 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검은 장막이 사라지면서 회색 하늘이 보이자 여기저기서 아픔을 참는 신음소리와

터지는 울음소리가 뒤섞인 속에서 우선흙 재먼지로 덮힌 나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끈적한 피가 여러 곳을 적셨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 으로도 아직 살아있음이 틀림없었다.

주위가 피로 얼룩진 검은 먼지임을 보니 피해가 크다는 감이 들었고






흙을 털고 산허리를 보니 중공군의 시체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산 아래에도 여기저기 그들의 시체가 보이는데 저쪽의 금성천은 어제와 다름없이 흐른다.

나는 유개호에 있었는데도 박힌 파편 몇 개를 빼어 내고는 연락병을 대동하고 산병호 들을 점검했다.

이미 숨져 흙먼지 속에 묻혀 있는 병사

살이 찢어져 흰 뼈가 드러난 다리를 부여안고 나를 쳐다보자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심해 숨 꺼져가는 병사 등

피와 재먼지로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전사자 2명과 부상자 7명을 후송하고 중대에 보고했다. 경상자응급치료를 명하고 밖으로 나갔다.

무개교통호에 10여 구의 중공군 시체가 쳐박혀 있는데 머리나 팔다리가 없거나 배가 터져

내장이 밖에흘러나오는 등 모두 눈을 뜨고 처참히 죽었다.

이들을 8부 능선 아래에 널려 있는 적의 시체들 위에 내던지고는 오늘 밤 또 다시 겪어야 하는 전투 대비작업을 시작했다.

이날 이후 이 같은 전투는 만 2개월 동안 매일같이 반복되었고

사상자는 매일 후송되고 신병이 보충되는 큰 손실을 입고도 진지는 사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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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산화한 14만 호국영령들과 유엔군을 추모하며..

2019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