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보안법에 대하여 아라보자.


국가보안법


제1장 총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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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checkbox" id="Y000100" name="joNoList" value="1:0" style="font-family: Gulim, doutm, tahoma, sans-serif; color: rgb(68, 68, 68); margin: 0px; padding: 0px; vertical-align: middle;" /> 제1조(목적등) ①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신설 1991ㆍ5ㆍ31>

[제목개정 199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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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checkbox" id="Y000200" name="joNoList" value="2:0" style="font-family: Gulim, doutm, tahoma, sans-serif; color: rgb(68, 68, 68); margin: 0px; padding: 0px; vertical-align: middle;" /> 제2조(정의) ①이 법에서 "반국가단체"라 함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 <개정 1991ㆍ5ㆍ31>

② 삭제 <1991ㆍ5ㆍ31>

[제목개정 1991. 5. 31.]

       제2장 죄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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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checkbox" id="Y000300" name="joNoList" value="3:0" style="font-family: Gulim, doutm, tahoma, sans-serif; color: rgb(68, 68, 68); margin: 0px; padding: 0px; vertical-align: middle;" /> 제3조(반국가단체의 구성등) ①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다음의 구별에 따라 처벌한다.

1. 수괴의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2.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ㆍ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3. 그 이외의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타인에게 반국가단체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③제1항 및 제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④제1항제1호 및 제2호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⑤제1항제3호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1991ㆍ5ㆍ31>

대한민국에서 합법적 정권 교체는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거를 통한것인데.

김대중이는 한민통이라는 반 국가단체를 만들어서 수괴가 되고 헌법에서 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하려고 한것이다.


김일성이 6.25로 남침을 해서 대한민국을 무너트리려 한것과 반 헌법적 내용에서는 다름이 없다.



김대중이 국가 보안법의 반 국가 단체의 수괴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

심재철이 아닌, 이휘호가 가지고있던 증거가 그 하나의 이유이다.



그리고 7월 김대중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은 광주사태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이 한민통이란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었다.  



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12978


광주사태 전야,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
전두환에 대한 왜곡과 기만이 스려있는 광주사태의 진실
 
역사학도 네티즌 논설가 
  김대중의 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 중 초기청문회였던 1988년 11월 30일 청문회를 잘 관찰하면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고, 시청자들에게 혼동을 줄 목적으로 편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12.12사태의 당사자 정승화씨가 광주사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려는 꼼수였으며, 김대중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단서는 그들의 숨기고 있었던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이었다.

   그날 평민당이 출석시킨 정기용 씨를 정기용 씨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담당 군 검찰관으로 출석시키고 심문함으로써 시청자에게 두가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를 주도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둘째로,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오백 만원을 준 혐의로 사형이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5.18기만자들이 연출한 쇼였으며, 진실에 있어서 전두환 장군은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임기는 1980년 4월에 끝났으며, 6월에 후임자 노태우에게 인수인계함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7월 김대중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은 광주사태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이 한민통이란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미국에서도 테러 단체 등 반국가단체 연루자들에게는 사형이 구형되고 있음을 우리가 보지 아니하는가.   

   그간 5.18기만자들이 어찌나 사기를 쳤던지 5월 17일에 전 장군이 김대중을 연행하였기 때문에 그 다음날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5월 17일 밤 김대중 연행의 주체는 당시 중장정보부 총무국장으로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이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군주로 세울 기회를 노리던 자였는데, 5월 16일 일부 대학생들이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 명단을 치안본부에 넘기자 김대중 보호작전으로서 김대중을 연행하여 수사정보를 조작하였던 것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담당 수사관은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의 부하 이기동이었다.  그는 전남 광양 사람이었는데, 전남에서도 광양, 순천, 광주, 무안, 목포 출신들은 동향 출신이라는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엄청난 혈세를 낭비하면서 이용자 없는 무안공항을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지연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대중 내란음모 담당 수사관이 바로 이런 지연으로 얽힌 이기동이었으며, 그후 그는 김대중 가문의 가신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기동씨에게 수사를 맡긴 것이 김대중에게 유리했으니깐 훗날 김대중이 이종찬에게 김대중 후보 선거위 위원장, 김대중 정부 인수위 위원장,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 등의 중책을 맡김으로 보은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5월 17일 김대중 연행에 헌병들이 동원되었으나, 그 인솔자는 김대중 보호작전의 특명을 받은 이기동씨였다.  그는 김대중 연행과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이날 밤 10시가 조금 지나 진과장과 김수사관, 그리고 나는 승용차 편으로 헌병 1개 분대를 실은 트럭을 인솔하여 동교동으로 향했다. 김대중씨 집 근처에서 대기하던 중 밤 11시30분을 기하여 평소 김대중씨 집을 수시로 방문한 바 있는 김수사관이 초인종을 눌렀다.

김대중씨의 비서는 김수사관을 확인한 후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헌병 분대 (장교 1명, 사병 18명)를 이끌고 순식간에 대문을 박차고 뜰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아래채(비서실 겸 숙소)에 있던 김대중씨의 개인비서 10여명이 마당으로 몰려나와 김대중씨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착검한 헌병들이 본채와 아래채의 중앙을 일렬로 막아 차단했기 때문에 고함소리만 요란할 뿐 본채로 접근하지는 못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작은 제목 "아, 김대중 쪽을 맡는구나" 마지막 두 단락.)

   이어 이기동씨는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증거물이었던 "예비내각명단"을 어떻게 자기 선에서 처리함으로서 김대중을 보호해 주었는지를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오대위에게 밖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까지 김대중씨를 안내하고 대기중인 수사관에게 김대중씨를 정중히 남산으로 모시라고 지시한 후 이희호씨를 만나기 위해 거실로 올라섰다. 막 거실로 올라서는데 약간 열려 있는 안방 문틈으로 이씨가 화장대 서랍 속에서 무언가 꺼내 황급히 핸드백 속에 넣는 게 보였다.

핸드백을 들고 태연히 방에서 나온 이씨는 아직도 볼일이 남았느냐며 자신은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한 후 “이 여사님, 우선 안방에서 핸드백 속에 넣으신 서류를 저에게 건네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희호씨는 “핸드백에 무엇을 넣었다고 그래요? 화장품 좀 챙겼는데…”라며 핸드백 열기를 완강히 거절했다.

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압수하고 이희호씨에게 말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작은 제목 "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 일곱째  단락부터 네 단락.)



   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은 군 검찰관 정기용 씨가 정동년씨 건으로 김대중에게 내란 누명을 씌운 장본인이란 착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의 지휘 하의 중앙정보부에서 결정적인 내란 증거물들은 걸러내고 경찰로 수사를 넘겼으며, 경찰은 다시 군 검찰로 넘겼으며, 이 과정에서 예비내각명단 등 결정적인 내란음모 증거물은 감추고, 수사 방향이 정동년씨 사건에 집중되게 함으로서 김대중을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정기용 씨는 이렇게 두 다리 건너 자기에게 넘어온 자료의 범위 내에서 수사하다보니 김대중과 정동년이 만났었는지 여부를 수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이천 오백 만원에 해당하는 오백 만원을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주었느냐는 사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5월 17일 이휘호 여사의 수중에서 확인된 현찰만 해도 오늘날의 1억 5천만원에 해당하는 3천만원이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작은 제목 "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 끝에서 세번째 단락.).  고급요정에 출입하며 딸을 숨겨두는 것 외에는 만년 실업자였던 김대중에게 어떻게 현찰로 그런 거금이 있었는가?  여하튼 그런 거액의 현찰이 있었다는 것은 수백 만원 단위로 지출할 용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만약 광주청문회의 목적이 진실을 밝히는데 있었다면, 정동년 씨의 오백 만원 등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에 대하여 김대중을 심문하여야 했다.  그해 5월11일  김대중은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동학제'에서 5만 청중에게 동학난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제2의 동학난이 일어나야 한다며 광주사태(무장봉기)를 선동하였다.  
 
그 다음날인 12일 서울 북악 파크호텔 521호에서 김대중은 한승헌, 이문영, 문익환, 장기표 등 이른바 '국민연합'이라는 재야인사들을 불러모아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궁극적으로 반민주 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분쇄한 다음 민주주의에 역행하여 온 독재정부를 무너뜨려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는 연설을 하였고 장기표, 심재권등 30대 복학생들에게 각대학의 동정을 살필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김대중이 말하는 "반민주 유신세력들"이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말하며, 독재정부란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말한다.  따라서, 광주사태 당시 누가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는가?  맨위 동영상에서 보듯 '88년 11월 30일의 청문회 때는 김대중 세력은 유신정권을 지지하였는데, 전두환이 유신정권에 반역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는 논리를 내세웠던 것이니 이 얼마나 간사한 주장인가?  5.18사기꾼들의 주장은 이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국적 민중봉기 선동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전복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5월 11일경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괴전화에 속은 유시민이 그 유언비어를 부풀려 퍼뜨려 일어난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 도중 시위대 속에서 뛰쳐나온 괴한들이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전경1명을 처참하게 깔아 죽이고,
4명에게는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http://study21.org/518/video/515.htm ), 그때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한민통 조직원들이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니, 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민통 조직원들이 미리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연결고리이다.

   그날 시위대 버스에 순경들이 깔려죽는 사고 발생 직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서남동, 이해동 등을 불러모아 이른 바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을 작성하고 다음날 5월16일 각 언론사와 대학에 배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비상계엄 즉각해제, 신현확 총리의 퇴진, 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등에 대해 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시에는 이른바 '국민연합'이 5월 22일부터 국민과 함께 행동에 들어갈 것임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경우 모든 책임이 정부에게 있음을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임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의 성격을 규정한다.  광주사태 당시 서남부지역 에서 나돌던 유언비어 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시장 군수를 할 수 있다는 유언비어였다.  5월 17일 김대중 연행사건 당시 김대중의 경호원이었던 함윤식씨도 광주사태 이전에 이미 감투가 미리 배분되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하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전복 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 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 (여기를 클릭하여 출처에서 자세히 읽어보기 .)

   맨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기세 당당한 평민당 조찬영 의원이 정기용 씨에게 "김대중 씨는 지난번 청문회 증언에서 분명히 정동년 씨는 본 일도 없고 만난일도 없고, 군 수사 기관에서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반문하면서 사진 좀 보자, 이렇게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증인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심문하는 것을 본다.  정기용 씨 답변은 "제가 검찰에 송치 되가지고 조사 받으실 적에는 그 점은 순순히 시인하셨기 때문에요"이다.

   여기서 김대중과 정기용 둘 중 하나가 위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조찬영 의원처럼 김대중의 잡아떼기 수법에 속아넘어가는 바보가 있는가?  김대중은 도청한적 없다고 잡아떼었으나 거짓말이었다.  김대중은 북한에 비밀송금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었으나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자택에서 정동년을 두번 이상 만났었다는 증인은 바로 그때 그의 경호원이었던 함윤식 씨이다.  1987년 6월 김대중씨의 전모를 밝힌 베스트셀러 '동교동 24시' 로 유명한 그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 18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자금이 전달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명이 5. 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여 작은 제목 "5 · 18전 학생대표 등 만난 김대중씨" ).

   이렇듯 함윤식 씨는 광주사태 직전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들이 분명히 두 차례에 걸쳐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도 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증언의 진정성은 광주사태 직전 동교동을 다녀간 전남대생의 증언이 있어야 확증된다.  그런 증언이 있는가?  광주사태 당시 전남대 운동권으로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벌였던 김인원씨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14일 이전 김대중 씨를 만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자세한 날짜는 기억에 없고 다만 김대중 씨측에서 학생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함께 간 것이었다. 관광버스 한 대를 구하여 약 38명이 함께 올라가게 되었다. 그중에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구교성 씨도 있었고 김대중 씨 비서관들도 몇 명 끼여 있었다... 회담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서 김대중 씨 자택에서 기념으로 사진촬영을 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22.html 에서 중반의 작은 제목 "김대중 씨를 만나고.")

   김인원씨 증언에서 김인원씨가 보았던 김대중 씨 비서관들 중에 함윤식씨도 있었다.  그리고 회담이 끝난 후 기념사진촬영까지 하였다.  이로써 함윤식 증언의 진정성은 명확하게 입증되었으며, 따라서 광주청문회에서의 김대중의 위증 또한 명확하게 판명났다.  그럴진대, 김대중의 위증에 속은 바보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던 광주사태는 이제 재해석되어야 한다.  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는 조찬영 의원같은 바보들의 큰 목소리가 이기는 청문회였다.  그러나, 그런 바보들의 주장이 30년 이상 한국사회를 지배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