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과 지효가 하는 시답잖은 얘기를 들으며 바나나 껍질을 막 벗기고 있는데 같은 반 애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다현이라고 하는 1학년이 너 불러달래, 하고.


나는 뽀얗게 속살을 드러낸 바나나를 그대로 들고 복도로 나갔다. 또 왔네, 김다현.


나는 하얗고 귀엽게 생긴 다현을 멀뚱히 올려다보며 바나나를 베어 먹었다. 이거 맛있다. 쯔위한테 또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다현 - 언니!




다현이 나를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폭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복도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몇 번 오다가 안 올 줄 알았는데 꾸준히 7반을 찾아주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다현은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꽉 안고선 언니는 왜 먹는 것도 귀여워요? 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옆으로 빼놓은 바나나가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꼬맹이한테 귀엽다는 소리 들어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다현은 어쩐지 정연의 상큼한 버전 같다.




다현 - 나랑 같이 매점 갈래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건 정연보다 한 수 위다. 어려서 그런가.


나는 어어, 하는 사이에 벌써 매점 앞까지 와 있었다. 이대로 교실로 돌아가는 것도 귀찮은 것 같아 그냥 의자에 앉아 바나나를 먹었다.


우물우물 바나나를 먹고 있는 내게 다현이 막대 사탕을 줬다. 복숭아 맛.


나는 사탕을 내민 손을 본다. 손가락이 좀 통통한 게 아직 애기다. 나연 언니 손가락은 되게 가느다랗고 예쁜데.




다현 - 이거 좋아하죠?


모모 - 몰라


다현 - 좋아하잖아요. 나연 언니가 준 거랑 같아서


모모 - ...


다현 - 언니, 근데 저 되게 하얗죠?




나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다현을 가만히 본다.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현 - 언니, A형이죠?




그렇다, 나는 A형이다. 뒤끝 있는 A형. 안 그런 척 하지만 정연이 가져간 내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지.




다현 - 좋아하는 건 먹는 거, 그 중에 족발이 제일 좋고. 관심사는 나연 언니. 그 외엔 다 관심 없음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다가 입 안에 있던 바나나가 튀어나올 뻔 했다. 뭐라고?




다현 - 전 언니에 대한 건 다 알아요. 좋아하니까요




이쯤 되면 슬슬 무서워지려고 한다. 김다현, 진짜 무서운 애다. 언제 봤다고 날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스토킹에 시달리니까 내가 늘 피곤한 거다.


다현이 두 손을 모아 꽃받침 포즈를 하고 나를 보고 있다.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히 사랑스러워 보이는데 나는 왜 소름이 돋을 것 같지.




다현 - 언니는 언니가 유명한 거 모르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유명한 건 내가 아니라 나연 언니다.


나연 언니는 입학할 때부터 유명했다. 나는 처음에 나연 언니가 보이시하거나 중성적인 매력이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일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본 나연 언니는 토끼 앞니에, 상큼발랄 귀여운 외모에, 적당히 날씬하고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순정만화의 여주인공 같았던 나연 언니.


돌이켜보니 나연 언니를 처음 본 날, 나는 충격을 받았던 것도 같다.


아, 요즘 들어 왜 자꾸 나연 언니를 처음 봤던 그날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떠올릴 때마다 더 새로운 것들을 기억하게 된다.




다현 -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어요, 언니


모모 - 모를?


다현 - 언니가 체육관 2층 계단에 앉아서 나연 언니 보고 있었잖아요. 옆에 누가 와도 모르고. 채영이랑 학교 구경하다가 봤는데




내가 나연 언니를 보고 있을 때, 주변의 것들은 사라진다. 아마 누가 나를 부르거나 해도 못 들을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혼자 보러가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 일도 거의 없지만.




다현 - 나연 언니가 그렇게 좋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현을 봤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가야겠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는데 다현이 팔락하며 내 코앞에 뭔가를 흔들었다.


나는 다시 앉아서 그게 뭔지 보려고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 눈알이 빠질 것 같다. 내가 불퉁하게 인상을 쓰자 그제야 다현이 손을 멈췄다.




다현 -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너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다현의 손에서 사진을 뺏어왔다. 옆에서 다현이 방금 거 또 해봐요, 또 라고 시끄럽게 구는 걸 깡그리 씹었다. 그래. 너는 떠들어라 나는 사진을 볼 테니.


나는 일부러 조금 늦게 사진에 시선을 줬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모모 - 아..




사진은, 나연 언니였다. 춤을 추는 듯 역동적인 동작으로 머리칼이 흩날리는 나연 언니.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왜 사진에서 후광이...




다현 - 왜요? 그렇게 좋아요? 갖고 싶어요?


모모 - ..웅


다현 - 이거 진짜 비싼 건데. 나연 언니 사진은 구하기가 힘들어요. 하도 찾는 애들이 많아서


모모 - ..올만데?


다현 - 정말 사려구요? 이런 적극적인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언니




사르르 웃으면서 말을 하는 다현은, 얼굴을 붉히며 사탕바구니를 건네던 아이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느낌이 났다. 이런 아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런데 이런 아이가 대체 무슨 아이일까.




다현 - 뽀뽀


모모 - 에?


다현 - 뽀뽀해주면 생각해 볼래요




그깟 뽀뽀. 나는 얼른 김다현 볼에 뽀뽀를 한 뒤 사진을 들고 일어섰다.


다른 요구가 이어질까 무서워서, 좀 풀어진 표정으로 앉아있는 다현에게 도망치듯 안녕, 하고 얼른 교실로 돌아왔다.


뺨이 상기된 나를 정연이 이상한 눈으로 봤다. 나는 나연 언니의 사진을 등 뒤로 감추고 앉았다.


지금 나연 언니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걸 들키면 더 이상 나연 언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연 - 그건 뭐야?




대답하지 않고 얼른 가방 속에 사진을 넣었다. 구겨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랍이며 잡동사니 상자를 전부 뒤져 빈 액자를 찾았다.


나는 빈 액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왔다. 문득 넣기 전에 들고 있던 사진을 봤다.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나연 언니. 반짝인다는 말을 사용해도 좋을 만큼 예뻤다.


나연 언니의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본다. 임나연. 이름마저도 나연 언니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이라서 나는 조금 감탄했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엄마가 간식으로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쌓여있는 카톡들은 확인하지 않고, 바로 나연 언니와의 대화창으로 들어간다.


카톡을 읽고 있는 것뿐인데 내가 나연 언니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지나가는 아이들 사이에 멈춰 서서 내게 카톡을 하던 나연 언니. 아쉽다. 찍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때는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사이 정연에게 또 카톡이 왔다. 내가 뭐하고 있는지가 왜 궁금한 걸까. 어차피 내일 아침에 또 볼 건데. 우리가 영영 못 보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데, 나도 갑자기 나연 언니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유정연 병이 옮은 게 아닐까. 병이 더 심해지기 전에 휴대폰을 내 몸에서 멀리 떼어놔야겠다.


누워서 나연 언니를 생각했다. 정말로, 뭐하고 있을까. 이렇게 늦은 밤에도 연습을 하고 있을까.


나연 언니와 처음으로 하교한 다음 날, 나연 언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정연에게 듣기로는 한창 사내 평가 시즌이라 바쁠 시기란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나는 섭섭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실망했다. 나연 언니가 학교에 오면 한 마디도 섞지 않을 거라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3일이나 지나버리니 그 마음마저도 희미해졌다. 그냥 얼른 다시 학교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톡 해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그냥 자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볼 건데, 카톡하면 이상하겠지. 거기다 할 말도 없고.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학교에서 하도 자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더니 베개에 머리를 대자 신기하게 또 잠이 솔솔 왔다.


그렇게 막 꿈나라에 방문을 할까 말까 하는 찰나에 벨소리가 울렸다.


시끄러워서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아, 진짜 누구야 짜증나! 발신자를 확인할 것도 없었다.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유정연...




나연 - ..모모야? 늦게 미안해.. 혹시 자고 있었어?




유정연이 아니었네.




나연 - 미안~! 갑자기 모모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우리 며칠이나 못 봤잖아, 히히..




그랬던 이유는 순전히 댁 때문이고요.




나연 - 사실 어제부터 전화하고 싶었는데 언제 하면 좋을지 몰라서.. 이상하게 자꾸 망설이게 되더라구. 정연이한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모모는 왠지 고민하게 되더라. 왜지?




그렇게 말한 나연 언니가 휴대폰 너머로 조금 웃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닿는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훨씬... 아, 뭐라고 하면 좋지. 간질간질? 살랑살랑? 아무튼 나는 깜깜한 방 안에서 혼자 얼굴이 빨개지며 몸을 베베 꼬았다.


이런 거 정말 쪽팔린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해야지. 죽을 때까지.




나연 - 나 내일 회사에서 월말 평가라는 거 봐야 돼. 연습생들은 거기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받아야 되거든.. 응원해줄 거지, 모모야? 잘 자, 좋은 꿈 꿔.. 얼른 보고 싶다~!




내 목소리 듣고 싶다고 전화한 나연 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덜컥 통화를 끝내버렸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얼른 보고 싶다고?


뭔가 낯부끄럽다. 얼른 잠이나 자야지.











나는 학교에 오자마자 휴대폰으로 네이버에 들어갔다.


가수 연습생 회사 평가, JYP 연습생 평가 뭐 이런 것들을 검색해보고 있는데 지효가 ‘뭔데, 뭔데’ 하며 옆에 앉았다.


하지만 정작 궁금한 건 하나도 안나와있고 두루뭉술한 이야기들만 가득하다.




지효 - 뭐야~ 나 아직 다 안 봤거든


모모 - 응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난 다 봤다. 보고 싶으면 너 휴대폰으로 보면 되잖아.


지효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정연의 자리에 앉아 부담스럽게 나를 주시했다. 뭐지. 방금 전의 복수인가. 나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모모 - 모!




얼굴을 뚫어질 듯 보던 지효가 내 볼을 쭉 늘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 볼이 장난감이야? 나는 기분이 안 좋아져서 지효의 손을 확 쳐냈다.




지효 - 푸흡... 가까이서 보니까 유정연이 왜 만날 너 쪼물딱거리고 괴롭히는지 알겠다




뭐래. 나는 무시하고 이어폰을 꽂았다.


오늘 집에 가면 노래를 좀 바꿔야겠다. 같은 노래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하니까 질린다.




지효 - 모구리~ 나랑도 좀 놀아줘. 쯔위도 안 오고 정연이도 아직 안 왔잖아




나는 지효랑은 별로 안 친했다. 지효는 정연과 친하고, 쯔위하고 친하다. 나는 정연과 친하고, 쯔위하고 친하다.


고로 우린 안 친하다. 그런데 지금 유정연도 없고 쯔위도 없다.




지효 - 음악 듣는 거야? 나도 한 쪽 주라


모모 - 시러어


지효 - 아, 왜에~




지효가 내 이어폰 한 쪽을 가져가서 귀에 꽂았다.


나는 짜증나서 내가 듣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볼륨을 끝까지 확 올렸다. 지효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깜짝이야.




지효 - 으엑!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양 귀를 한 쪽씩 차례로 틀어막고 요란하게 아아아, 소리를 내던 지효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귀에 이상이 없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연 - 뭐야, 박지효. 왜 모구리 괴롭히고 있어


지효 - 뭐래! 모모가 나 괴롭혔거든




유정연이다. 정연이 이렇게 반가운 적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내가 진짜 강아지였다면 정연에게 꼬리라도 살랑살랑 흔들어줄 뻔 했다.


나는 지효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는 정연을 물끄러미 봤다. 오늘따라 왠지 차분해 보이는 게 뭔가 이상하다.




정연 - 어제 왜 카톡 씹었어?




그럼 그렇지. 나는 일찍 잤어, 하고 대답했다.


정연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책들을 꺼내다 말고 내게 시선을 줬다. 언젠가 스치듯이 봤던 묘한 눈이었다.


유정연은 이런 표정, 되게 성숙해 보인다는 거 알고 있을까.




정연 - 그런데 전화는 통화 중이더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냥 책상에 엎드렸다.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정연이 조금 시간을 두고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하고.


나는 유독 청명한 하늘을 보며 춤추고 노래하고 있을 나연 언니를 생각했다.


얼른 보고싶다, 고 말해주던 나연 언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