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돌아오니 나를 보는 정연의 표정이 참 가관이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실은 내 뒤에 있는 나연 언니를 보고 놀랐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같이 온 것 때문에 놀랐던 걸까.
나연 언니는 다시 내 뒤에 책상을 놓고 앉았다.
나는 수업을 받는 동안 온 신경이 뒤에 가 있었다. 종이 칠 무렵에는 내가 수업을 받고 있는지도 잊어버렸다.
나는 오직 나연 언니가 어떤 표정으로 내 뒤에 앉아있는지가 궁금했다. 다시 돌아보면, 나연 언니가 또 웃어줄까.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사물함에 가려는 척 일어섰다.
나연 언니는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의 내가 바보가 됐다.
기운이 빠져서 도로 의자에 앉았더니 정연이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내가 가져다 줘?’ 나는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연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는 게 다 보인다.
그건 쯔위나 지효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서로 시선 교환만 할 뿐 직접적으로 내게 묻지는 않았다.
날 몰아붙인 대가다. 말 안 해줄 거야.
안절부절 못하는 정연의 등을 두드려줄까도 했지만 귀찮아서 그만 뒀다. 의자에 걸터앉은 몸을 반쯤 돌려 자고 있는 나연 언니를 봤다. 아직도 젖어있는 속눈썹. 서럽게 울던 나연 언니.
나는 나연 언니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럼, 나 정말로 싫어하는 건 아니지?’
여전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연 - 나연 언니랑 화해했어?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정연이 넌지시 물어왔다.
나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아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가 화해를 했나. 어쨌든 나는 사과를 하긴 했다. 사과를 했고, 교실에 왔고, 허송세월을 하며 하루를 보냈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교실에 사람이 없어서 부랴부랴 가방을 싸기 시작한 거였다. 내가 아무리 멍을 때렸어도 그렇지 어떻게 인사도 없이 다 가버리는 거야. 너무하네, 진짜.
정연 - 그.. 나연 언니랑 너무 친하게 지내진 마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야. 나연 언니랑 친하게 지낸 적도 없고, 친하지도 않은데.
나는 문제집이 두어 권 들어있는 헐렁한 가방을 메며 정연을 흘겨봤다.
모모 - 파스트 키스
정연 - 어?
모모 - 나 그거 처음이어따고, 이 도둑아
내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정연을 두고 걸어 나왔다.
나연 - 아, 모모야! 안 늦어서 다행이다, 하아..
왜 나연 언니가 아직도 학교에 있는 거지.
나연 - 지금 집에 가는 거 맞지?
나는 복도 한 가운데 멈춰 서서 갑자기 나타난 나연 언니를 봤다.
나연 언니는 뛰어온 듯 조금 숨이 차 보였다.
느닷없는 나연 언니의 등장에 표정 관리가 어려웠던 것 같다. 아마도. 내 얼굴이 안 보이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정연 - 언니? 회사 안 갔어?
나연 - ..왜? 나는 오면 안 돼? 모모한테 할 말 있어서 왔거든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아서 나는 이만 빠지기로 했다. 같이 있다가 나까지 이상해지면 어떡해.
장렬하게 퇴장해서 집까지 걸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건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얼른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 하고 싶었다.
나연 언니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띡, 하고 8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상기되어 있는 뺨. 언젠가 나연 언니의 손가락이 닿았었지.
거울 안의 나는 울 것 같기도 하고 웃을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나연 언니도 이런 나를 봤을까. 보면서 웃겼을까. 그래서 너 얼굴 지금 되게 웃겨,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근데 나는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자려고 누웠는데 카톡이 왔다.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근처를 더듬어 휴대폰을 들었다.
정연 「야, 모구리」
정연 「나랑 사귀자」
사귀자, 오귀자, 육귀자, 칠귀자. 그리고보니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소설 재밌었는데. 유정연도 좋아할까, 원미동 사람들.
그나저나 갑자기 이건 무슨 말이야.
나는 불 꺼진 방 안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액정을 다시 봤다.
유정연은 참 웃기는 애다. 이 시간에 잠도 안자고. 이런 장난은 이제 하나도 안 재밌는데.
첫키스까지는 봐주는 셈 쳤지만 자꾸 이러면 별로다. 오늘이 만우절도 아니고.
아침 자율 시간이 끝나고 막간 투표를 통해서 학급 임원을 뽑았다.
우리 반 부반장은 쯔위가 되었다. 반장은 유정연.
나는 공정한 투표를 위해서 두 번 다 기권했다. 사실 하얀 투표용지에 나도 모르게 나연 언니 이름을 쓰고 있어서 깜짝 놀라 구겨버린 거지만.
나는 칠판 앞에 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쯔위의 말에 짝짝 박수를 쳤다. 조만간 강아지 사진이라도 돌리는 건 아니겠지?
정연은 ‘나만 믿어!’ 하고 간단하게 소감을 마쳤다. 뭘 믿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순 엉터리다.
정연 - 모구리, 나 봤어?
모모 - 응
정연 - 간지나지?
모모 - ..なにが? (뭐가?)
정연 - 엉? 뭐.. 뭐라구?
어이가 없다. 간지가 무슨 뜻인진 알까. 특이한 유정연.
사나한테 정연이 반장 됐다고 카톡을 했더니 온통 키읔으로 도배된 답장이 왔다. 너네 반 망한 거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톡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고 있는데 불쑥 어깨에 누가 손을 올렸다. 뭐야. 휙 고개를 들었다.
나연 - 모모야~ 뭐가 그렇게 재밌어?
뭐, 그냥. 친구랑... 얼버무리자 나연 언니가 내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는 순식간에 의자에 등을 빳빳하게 기대는 바른 자세가 되어버렸다.
나연 언니의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가 어렸다. 뭐야,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손을 뻗어 내 얼굴에 가져다대려고 하길래 반사적으로 피했다.
나연 - 싫어?
나연 언니가 삐뚤어진 내 타이를 만지작거렸다.
나연 - 나는 너가 정연이랑은 곧잘 그래서 스킨십 좋아하는 줄 알았지
모모 - ..내가 온제
나연 - 둘이 만날 껴안고 붙어있고 그러잖아. 다 보이거든?
나는 입 안이 껄끄러워졌다. 모래가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나연 언니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나연 언니의 시선이 다시 나를 끌어 앉혔다.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로 겨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이 있고. 느껴지는 시선에 생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나연 - 그럼 나도 해도 되겠다. 그치, 모모야?
내 머리를 매만져주는 나연 언니의 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정연 - 야, 모구리
정연의 손이 눈앞을 슉슉 지나갔다.
땡. 겨우 풀려남과 동시에 나연 언니가 내 책상에서 내려갔다. 뭔가 가뿐한 동작이라서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연 언니는 팔짱을 낀 채로 정연과 시선을 맞췄고, 정연은 아주 당연하게, 고질적으로,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팔걸이로 보이는 모양이지.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진짜 이번 한 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
나연 - 또 반장이네, 유정연?
정연 - 그럼. 내가 누군데
나연 - 참나.. 야, 축하한다
정연 - 뭐, 당연한 걸 가지고
언제부터 친구였다고 그랬었지. 초등학교? 유치원? 중학교? 아무튼 오래된 친구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듯이 우정이 돈독해 보여서 참 부럽다. 저번에 둘 사이가 이상해 보여서 걱정이었는데, 이제 보니 괜히 했다.
뭐, 나도 사나가 있으니까.
마침 열린 교실 뒷문으로 사나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호랑이 사나. 사나도 제 생각하면 온다. 저번에 비슷한 한국 속담을 배웠던 게 생각났다.
가서 말을 걸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사나와 손을 잡고 가는 다른 애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 대체 누구야.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나가 지나간 복도를 봤다.
말도 안 돼. 사나가 나 말고 다른 애랑. 손은 나랑만 잡기로 했으면서.
꽁해진 기분으로 쓰레기통 근처에 붙은 거울을 들여다봤다. 왜 항상 거울은 쓰레기통 옆에 있는지 모르겠다. 쓰레기통을 앞문으로 옮기면 안 되려나.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거울 너머로 정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쟤는 눈이 얼마나 좋으면 저기서 거울을 보려고 하는 걸까.
정연 - 모구리
나는 거울을 통해 어느새 내 뒤에 서있는 정연을 봤다. 어라, 순간이동인가.
정연 - 그때 보낸 카톡, 생각해봤어?
정연이 무슨 카톡을 보냈지.
왜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나연 언니가 보냈던 건 기억나는데. ‘모모, 안녕’ 하고 말이다.
그 후로 한 번도 카톡을 안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연 언니의 번호는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났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정연 - ..기억 안 나면 됐다
거울 저편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쏴주자 정연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따가 휴대폰 확인해볼까. 정연이 보낸 카톡이 뭐였는지.
찝찝해서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연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쓰레기통 옆에서 참 잘하는 짓이다. 나는 문득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 푸욱 한숨을 쉬었다.
모모 - 모야아.. 불푠해
정연 - 우리 모구리 또 까탈부린다~
나는 정연에게 더 이상 말하기 귀찮아서 그냥 정연을 달고 뒤뚱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정연이 떨어졌다. 이제야 살 것 같다. 한껏 기지개를 켜고 나서야 나연 언니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모모 - 왜?
나연 - 어? 아니, 그냥.. 좋아보여서. 정연이랑
유정연이랑 내가? 별 이상한 말을 다 듣겠다.
도대체 어디가 좋냐고 묻기도 전에, 조례를 위해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나는 다시 앞으로 돌아앉았다.
나연 - 부럽다
뒤에서 나연 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나연 언니가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