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시간에는 음악실로 교실 이동을 해야했다.
음악실은 4층에 있었고, 나는 계단을 오르는 게 귀찮았다.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정연을 무시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툭 치는 손길에 돌아보니 나연 언니였다.
나는 당황했다. 정연은 벌써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나연 언니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연 - 모모야, 혹시 나 불편해?
모모 - ....아니
나연 - 진짜루?
모모 - ....조금.. 불표난가..?
우물거리는 내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연 언니가 웃었다.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서 두세 계단씩 마구 올라갔더니 나연 언니도 성큼성큼 따라 올라왔다.
나연 언니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나는 빨리 올라오느라 힘들어 죽겠어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나연 - 야아! 갑자기 왜 그렇게 빨리 올라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연 - 원래 말이 별로 없어?
모모 - 그롤껄...
나연 - 유정연이 너 귀엽다던데
내가 귀여운가. 잘 모르겠는데. 눈썹을 씰룩거리고 있자 나연 언니가 내 볼을 슬쩍 잡아당겼다가 놓는다.
나연 - 나도 그런 것 같아
나연 언니는 히히, 하고 웃더니 음악실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부채질을 했다. 얼굴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야.
깜빡하고 음악책을 안 가지고 와서 정연이랑 같이 보기로 했다.
정연은 음악책에 나온 가곡을 우스꽝스럽게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들으며 기다란 의자에 앉아서 지지대에 팔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거리는 느낌이었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뜨자 정연이 나를 보고 있었다. 왜 하고 눈으로 물으니 건조하고 뜨거운 손으로 내 볼을 꾹 누른다.
정연 - 모구리, 볼 빨개
나도 알고 있거든.
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정연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슬금슬금 내 입술을 더듬는 게 아닌가. 나는 이를 세워서 정연의 손가락을 앙하고 물어버렸다.
갑자기 입술은 왜 만지는거야?
인상을 쓰고 제 손가락을 호호 부는 정연을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 앉았다. 지효겠거니 하고 계속 정연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연 - 모모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나연 언니다.
어떡하지. 나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어서 애꿎은 정연만 계속 째려봤다.
나연 - 모모
이번에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돌릴까 말까 갈등하고 있는데 음악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어 번 눌렀다.
휴, 살았다. 들키지 않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연 언니는 옆에 앉은 쯔위와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나연 언니가 바로 옆에 있다는 생각에 몸이 또 뻣뻣해졌다. 나연 언니가 불편하다. 도망치고 싶다.
정연 - 생각해 봤어? 영화 보기로 한 거
심각하게 생각에 빠져있는데 정연이 귓가에 소근거렸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하교할 때까지 영화, 영화, 영화. 정연의 영화 타령이 너무 귀찮아서 그냥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정연 - 이번 주 일요일에 볼래?
모모 - 그로든가
정연 - 그래. 그럼 일요일에 만나자
늦잠자고 점심쯤에 만나면 되겠지.
자꾸 속닥거리니까 음악 선생님이 이쪽에 눈치를 준다. 정연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말을 시키고.
나는 정연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몰래 카톡을 확인했다.
사나한테 카톡이 와 있다. 역시 나한테는 우리 사나밖에 없다.
답장을 하고 카톡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연 언니가 내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번호를 찍어서 내게 건넸다.
나연 언니의 번호. 어떡하지?
고민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시선에 그냥 ‘나연 언니’하고 저장했다.
나연 - 나한테도 카톡해, 모모야
나는 그저 번호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러다 외워버릴 기세다. 솔직히 말하면 벌써 다 외웠다.
심란하게 휴대폰을 윗주머니에 넣고 시선을 내리다, 무심결에 정연이 음악가 얼굴에 이상하게 낙서를 해놓은 걸 봤다. 팍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은 나는 괜히 짜증이 나서 정연의 팔뚝 살을 꼬집고 비틀었다.
정연이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쌤통이다, 바보.
고소하게 웃다가 음악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 - 너희 둘 뒤로 나가서 서 있어
아, 진짜.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나갔다. 이게 다 유정연 때문이야.
정연이 옆에서 팔꿈치로 나를 쿡 찌른다. 당연히, 모른 척 했다.
정연 - 뭐야, 삐졌어?
모모 - 몰라아! 말 시키지 마로
정연 - 모구리 완전 삐순이네
모모 - ...
이번엔 진짜로 내가 화났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눈에 힘을 딱 주고 유정연을 째려봤다.
그러자 정연이 슬그머니 허리를 감아오며 귀에 소곤거린다. 모구리, 왜 울려고 그래?
누가 운다고 그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코웃음을 쳤다.
불퉁하게 칠판에 그려진 콩나물 같은 음표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나연 언니의 동그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자동으로 뿅하고 떠오른다. 나연 언니의 번호 열한자리.
나는 침대에 엎드려서 휴대폰 액정을 보고 있었다.
안녕, 이라고 쓰다가 지운다. 그 다음 나 모몬데, 하고 썼다가 지운다.
‘언니 지켜보고 있었어.’? 에, 이건 좀 스토커 같지 않나.
뭐라고 보내면 좋을지 모르겠다. 머리 아파.
휴대폰을 옆에 밀어놓고 천장 무늬를 보며 멍하게 눈을 깜빡인다. 지잉 하고 진동이 와서 얼른 보니 정연이다.
정연 「아직도 삐졌어?」
그냥 씹어버리고 다시 나연 언니에게 보낼 카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뭐라고 보내지. 살면서 이렇게 고민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대강대강하는 게 편한데.
카톡 창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실수로 전송을 눌러버렸다.
모모 「ㄴ」
이게 뭐야. 나 정말 바본가.
이미 나연 언니에게 가버린 카톡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으려다가 말았다. 탈모 되는건 싫어.
그래.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어.
이 창피함을 쿨하게 잊기 위해 얼른 샤워를 하고 이를 닦았다. 잠이나 자야지.
나는 침대 속으로 꼼지락대며 들어가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제발 꿈에서만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억지로 눈을 꼭 붙이고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유정연이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면서 액정을 눈 가까이 가져다댔다.
나연 「응?」
나연 「모모 안녕ㅋㅋ」
나연 「근데 뭐가 ㄴ야? 무슨 뜻이지」
나연 언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카톡을 읽고 또 읽었다.
‘모모, 안녕’ 하고 웃으며 인사하는 나연 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답장을 뭐라고 하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다시 누웠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았다.
나연 - 모모야! 어제 카톡 읽어놓구 왜 답장 안 했어어~
나를 보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나연 언니 탓에 괜히 심장이 콩알만 해졌다.
창피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이상하다. 못 들은 척 책상에 엎드렸다.
하늘이 참 파랗다. 이런 날엔 나연 언니 연습하기 좋겠다. 여름엔 조금 더워보였는데 봄이라면 더 좋겠지.
작게 하품을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눈을 감는다.
같은 곡이 세 번 정도 돌아가자 정연이 등장했다. 하도 요란해서 금세 알 수 있었다.
정연은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자마자 내 이어폰 한 쪽을 또 가져간다.
정연 - 모구리. 왜 카톡 읽씹하고 그래
누가 보면 둘이 나 좋아하는 줄 알겠다. 답장 한 번 안 한 걸 가지고 되게 그러네.
나는 말없이 다시 이어폰을 가져와 귀에 꽂았다.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지 자꾸 졸린다.
꿈에선 나연 언니가 나왔었다. 간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춤추는 데 열중하던 나연 언니는 언제나처럼 나를 봐주지 않았다. 차가운 음료수가 내 손에서 미지근하게 식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넣었다.
그게 꿈의 전부였다. 늘어놓고 보니 되게 별 거 없다. 바보같아.
나는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처럼 책상에 붙어있었다.
정연이 문학 선생님한테 내가 아프다고 미리 말해둬서 혼나지는 않았다.
봄이 와서 그런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정연이 문학책 귀퉁이에 꼬불거리는 글씨를 써서 내게 밀었다. 혹시 그날이야? 따질 기운도 없어서 그냥 네모 하나를 그려줬다.
정연 - 이게 뭐야?
뭐긴. 그건 날 둘러싸고 있는 나연 언니랑 너네들이지. 저 네모 한 가운데 점을 찍어놓으면 내가 되는 거다.
쯔위 - 언니. 비타민C가 건강에 좋대요. 이거 머거
쉬는 시간에 쯔위가 내게 오렌지를 주며 말했다. 고마워, 하고 대꾸하자 옆에서 정연이 ‘우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상한 애야.
정연 - 드디어 말하네! 모구리, 너 아프면 언니도 아프니까 아프지 마라
뭐래. 아픈 거 아니거든.
내가 찌릿 노려보자 내 머리통을 꼭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어댄다.
숨 막혀, 치워.
버둥거리자 미안, 미안 하고 놓아주는 유정연. 나는 오늘따라 알 수 없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정연 - 아, 해봐
쯔위가 준 오렌지를 정연이 까줬다.
손이 끈적해지는 게 싫어서 책상 위에 놔두기만 했는데 그새 가져갔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내가 입을 벌리자 쏙 하고 오렌지를 넣어준다. 우물거리자 시큼하고 달콤한 즙이 입 안에서 퍼졌다.
지효 - 체육이 몇 교시였지? 체육시간 되기 전에 옆 반에서 체육복 빌려야 되는데
지효가 매점에서 돌아오면서 한 말에 나는 드디어 아침부터 생각하던 답을 찾았다.
바로 시간이었다.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꽤 오랫동안 나연 언니를 멀리서 지켜봤고, 아주 단기간에 가까워졌다. 일종의 부작용 같은 게 일어난 거였다.
나연 - 얘들아~ 나 이제 연습하러 가볼게!
나연 언니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내가 먼저 피했다.
잘 모르겠다. 나 연습하는 거 처음 보냐는 다정한 물음이 왜 이렇게 아직도 속상한지.
그동안은 막연하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했었지, 정말로 나를 알지도 못 할 줄은 몰랐다. 원망스럽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냥, 그냥.
몰라. 아무튼 그런 거 아니야.
한 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일어난 나연 언니가 내 쪽으로 왔다.
얼굴 위로 작은 그늘이 진다.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내 뺨을 살짝 두드렸다.
나연 언니는 생긴거랑 다르게 손이 엄청 크다.
나연 - 모모야, 많이 아파? 아플 땐 약 먹고 쉬는 게 직빵이야! 오늘 꼭 약 먹어, 알았지?
탄력 있는 종아리와 균형 잡힌 늘씬한 다리. 뒷모습조차도 예쁜 나연 언니.
나는, 나는 아픈 게 아니다.
바보. 아무것도 모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