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팬픽은 상상에 기반한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지명, 단체는 실제의 그것과 전혀 무관하고, 만약 일치하더라도 단순한 우연에 불과합니다.
한참의 오열 끝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끝끝내 모르기를 바랐던 일이다.
자신과 유리에 대해서도, 저주받은 운명에 대해서도,
언제가 되던 혜원이 모르기만을 바랐다.
그것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혜원이 받을 상처에 대한 염려이기도 했고,
혜원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가면을 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그 해 겨울, 혜원이 본래의 예나에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얼마나 특별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외면하려 들었으니까... 모르길 바랐다.
그대로 혜원이 본래 살아오던 세상 속에 편안히 안착할 수 있기를 원했다.
예나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려 혜원을 바라보았다.
혜원은 넋이 나간 채로 옥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아 예나는 혜원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손... 치워..."
예나는 멈칫거렸다.
스산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와 싸한 얼굴을 하고 혜원은 예나를 쳐다보았다.
혜원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왜 예나가 아기 고양이를 가슴에 꼭 움켜쥐고 있었는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던 그 두 어깨가 왜 이렇게 쳐져있었던 것인지.
어둠에 갇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예나가,
왜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말을 슬픈 목소리로 꺼내놓았는지...
어린 날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위로가 필요했었구나,
따뜻하게 안아줄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던 거였구나,
지독하리 만치 상처 입은 눈빛으로 나를 슬프게 만든 너는...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을만한 슬픔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조숙해져버렸던 거였구나...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혜원은 예나의 손목을 강하게 쳐냈다.
쳐내진 손목보다 예나의 마음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혜원아..."
"예나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예나의 말문이 막히고 고개가 숙여졌다.
이런 반응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닌데,
막상 눈앞에서 대면하려니 예나의 입이 굳고 숨이 멈추는 듯했다.
진정부터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예나는 고개를 들었다.
혜원이 다시 돌아섰다.
예나가 손목 대신 어깨를 붙잡자,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는 듯 세차게 팔을 휘저으며 뿌리치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예나는 조금 더 힘을 주고 혜원의 양쪽 어깨를 모두 부여잡았다.
놔! 이거 놔! 비명처럼 소리치는 혜원의 목소리가 귓속을 찔렀다.
처절하게 터지는 혜원의 눈물이 그대로 예나의 가슴속에 흘러들어왔다.
"너 때문에... 난 하나뿐인 친구를 잃었고,
예나의 어머니는 딸을 앗아간 원수를 제 딸로 여기고 오늘만 해도 네 걱정에 슬퍼하셨어!"
핏대가 빳빳하게 솟아오른 혜원의 목을 타고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질끈 눈을 감고 악을 지르는 혜원을 예나는 그저 지켜볼 뿐,
가슴이 아파서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
가슴에 큰 멍이 드는 듯했다.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는 혜원을 보면서,
단 한 번도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는 혜원이 악에 질려 얼굴을 구기는 모습을 보면서...
이미 새겨진 멍에서 피가 흐르는 듯했다.
꽉 부여잡은 혜원의 어깨가 들썩였다.
수그러든 고개 너머로 괴로운 눈물이 바닥을 향해 뚝 뚝 떨어졌다.
"난, 나는... 그런지도 모르고...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수년간의 지옥 길을 희망이라 여기며 견뎌왔어...
넌 나한테... 그 누구보다도 더 잔인했어. 알아?!"
하얗게 번져 일그러진 얼굴.
피눈물이 흐를 듯 검붉게 충혈된 눈.
악에 받혀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혜원의 지금 심정을,
자신은 어떻게 헤아릴 수 있는 걸까.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전부 변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견디며 걸어온 길이 너무 험난해 네 마음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고,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배신할 수 없었다고...
그저 네가... 찰나라 믿고 다시 예전처럼 평범히 살아주기를 원했다고.
머잖아 네가 지난 감정 잊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지만 모두 변명일 뿐이다.
잔인했었다. 혜원의 감정을 쉽게 생각했었다.
제 상처에 눈이 멀어 그보다 더욱 상처로 얼룩져가는 혜원을 업신여긴 대가,
이렇게... 벌받고 있다.
"네가 그랬지? 우연은 없다고, 전부 선택이라고...
똑똑히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은...
뛰어내리려던 널 구했던 거야... 알겠니...?"
혜원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예나의 두 손에 힘이 빠졌다.
혜원은 이를 악문 채로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예나는 망연한 눈을 옮겨 멀어지는 혜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멀어지고 있다.
이런 결과,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지,
기대.
기대해선 안 되는 대상들에 기대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예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기대만큼 참혹한 상처가 있던가,
마음이 두둥실 하늘을 향해 치솟다가,
기대를 저버린 현실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그 나락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게 세상이었다.
행복이 지속될 줄 알았던 어린 딸의 순진함을 배신하고 사라져 버린 어미가,
어린 딸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그 차가운 겨울 떠나버린 아버지가,
헤어지기 싫다는 어린 딸의 간절함을 외면하고 굿을 치른 어미가,
진즉에 일러주고 갔다.
기대같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란다.
기대하지 않아야,
그 후에 폭풍이 몰아쳐오지 않는 것이야.
그런데 왜,
알면서도 대체 왜 혜원에게 진실을 고한 건지...
혜원이 자신을 용서치 않을 것을,
그 뻔한 사실을 알면서 대체 왜 한 가닥 희망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무심코 묶어두고 기대한 것인지...
예나는 막힌 숨을 토해내며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감쌌다.
두 손안에, 혜원의 향기만 옅게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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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야, 자니...?"
잠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앉혔다.
"언니, 무슨 일이야?"
그냥, 잠이 안 와서... 혜원은 침대 끝에 앉은 후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리는 그 뜻을 몰라 멀뚱히 혜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 좀... 줘볼래?"
유리는 잠시 굳는다.
그리고 혜원의 손을, 제 손을 번갈아보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오른손을 건네준다.
혜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의 예나를 떠올리며 유리의 손을 잡았다.
그때의 예나와 달리 유리의 손은 차갑고 거칠기만 하다.
하지만... 그리운 향기가 났다.
혜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마다 유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점점 마음이 헝클어져서 잡고 있던 유리의 손을 내렸다.
느릿하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유리는 어린 날의 예나의 얼굴을 하고서 혜원을 마주하고 있다.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조유리가 분명한데,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열다섯,
그날의 최예나인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 모습에 결국에 혜원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유리를 꼭 끌어안았다.
왜 갑자기 껴안고 그래? 라며 칭얼거리면서도 얌전히 혜원의 품에 안겨온다.
조그마한 얼굴에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 아이.
보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까지 웃게 만드는 아이.
불만 많은 자신과 달리 항상 긍정적인 아이.
그때의 예나가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유리의 안에 있는 예나를 안으면서,
단 한 가지만 터지는 플래시처럼 번쩍 빛을 내며 어떠한 사실이 남겨진다.
강혜원은...
그때의 최예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설렘과 흥분은 존재했지만 사랑으로 정의되지 못하고 예나는 사고를 당했다.
어쩌면... 예나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만약 유리와 영혼이 바뀌지 않았다면,
사랑으로 정의 내릴 가능성도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예나도 혜원과 같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혜원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
잔인하게도, 분명한 사실은...
사랑이라 정의 내린 건 병원에서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예나라는 것과,
그때부터 이어지던 절절한 마음 역시 지금의 예나에게 향해 있다는 것.
혜원의 손에서 힘이 탁하고 풀리고 늘어진 손이 침대 시트에 늘어졌다.
얼마나 꼭 껴안았던 것인지,
유리는 품에서 풀려나자마자 켁켁 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낸다.
그리곤 누굴 죽일 생각이야? 라며 가는 눈을 뜨며 혜원을 바라보다가 순간 숨이 멈췄다.
혜원이 공허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언니, 대체 왜 그래...?"
혜원은 대답 없이 일어났다.
그저 왜 라고 묻고 싶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만,
왜 자신은 이런 사랑밖에 모르는 것이냐고 묻고 싶다.
시발, 개 같아서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좋겠다. 남들처럼 맘껏 소리쳐 보고도 싶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보다 먼저 혜원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가끔은, 이런 미친 사랑으로 살아야하는 가여운 인생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태어난 운명이 있다는 것을.
그 인생이, 그 운명이...
또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혜원은 유리에게 등진 채 나지막이 말했다.
"유리야... 용서할까?"
"무슨 소리야?"
"그냥... 너랑 나랑... 다 용서해줄까?"
"무슨 소린지는 몰라도, 미워하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난 찬성."
용서... 그 선택 또한 후회할지 모른다.
언젠가 시간 지나, 정말 사랑이었냐고,
어떻게 그 죄인을 용서하느냐고,
도리어 가슴을 치며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미친 운명 속에서 혜원 또한 이미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사랑 또한 그 미친 짓 중의 하나일뿐...
그저 혜원은...
모험을 시작하기로 한다.
"나... 아직 빛나고 있니?"
열다섯 예나가, 아니 지금의 유리가 만약...
다시 자신에게 일러주고 간다면,
자신이 정말 어둠을 밝혀줄 빛이 나는 사람이라면...
네가 밝혀준다면 그 아이,
자신을 옥죄는 모든 어둠의 사슬을 끊어낼지도 몰라.
그렇게만 일러준다면 예나를....
아니,
그렇게라도 예나를 어둠에서 끌어내고 싶다.
"내가... 넌 항상 빛나고 있다고 했잖아..."
유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 저린 눈물이 유리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모르겠다, 왜 이런 말이 나온 것인지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인지...
다만 가슴이 아파서 미쳐버릴 것만 같다.
혜원도,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리는 유리도,
둘 중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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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절정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