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조직의 혼란은 개인에게 기회다








노무라 카츠야(노무상)는 자신의 반세기 가까이 계속된 야구인생에서도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 시절을 ‘암흑 시기’로 부른다.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프론트, 레벨은 낮은데 스타 의식에만 취한 선수단, 기레기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오사카의 언론, 인내심 없는 팬 등등. 오죽하면 그 독한 독불장군 호시노 센이치가 한신 감독을 지내면서 고혈압을 얻었으랴. 그래도 노무상은 한신을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성과들 중의 하나가 바로 붙박이 포수 야노 아키히로를 육성한 일이었다. 야노는 훗날 노무상 후임으로 부임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 때 한신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는 중심 선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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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카와 큐지와 함께.


그러나 야노가 2010년 은퇴하고 죠지마 켄지를 영입하여 2012년까지 써먹은 이래 한신은 지금까지도 붙박이 포수 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만큼 주전 포수를 육성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한신은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명의 후보 포수들을 실전 시합에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금년 시즌부터 야노 아키히로가 배터리 코치로 들어오는 등, 필사적으로 주전 붙박이 포수를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직의 혼란은 개인에게 기회이다. 예를 들어, 주전 포수에 후루타 아츠야 같은 굇수가 버티고 있다면? 조직은 안정되었겠지만 다른 포수들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1군 포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후루타는 수비, 타격은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금강불괴급의 견고함을 자랑했으니까. 포수는 B급도 자신의 장점을 살리면 충분히 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A급이 된 한명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래서 후루타와의 경쟁에서 밀린 포수 하타 신지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꾸었고 그 덕분에 1군에서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포수에만 집착했더라면 1군에 나갈 일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신의 위기는 그만큼 후보 포수들에게 기회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강점을 갈고 닦아 지금 1군에서 유망주로 우뚝 선 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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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인물인 그의 이름은 하라구치 후미히토.



이 사진에서 보면, 하라구치의 등번호는 세자리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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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과 2군까지만이 두자리 숫자 등번호를 받고 세자리 숫자를 받는 선수들은 육성 선수들이다. 유니폼을 받았지만 정식으로는 구단 소속 선수가 아닌 그야말로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야구계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1군이 될 수 없을 정도로 하라구치의 지난 과거 여정은 그야말로 역경의 연속이었다.

하라구치는 고교 시절 포수로 활동했다. 성격이 원만하고 투수들의 장점을 끌어내는 리드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9년 (포수 자원이 늘 후달리던) 한신에게 드래프트 6위로 지명을 받아 프로야구선수가 되었다. 이때 받은 등번호는 52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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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군에서 극도의 타격 부진에 시달렸고 설상가상으로 허리 부상까지 입은 하라구치는 결국 2012년에는 등록선수 계약이 풀렸고 자유계약선수가 되었다. 말이 좋아 자유계약선수지 그냥 한마디로 해고였다. 그리고 한신과 육성선수 계약을 다시 맺었다. 이때 등번호 124번을 받았다. 

육성선수는 1년마다 육성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육성 선수의 연봉은 240만엔. ‘내년에는 등록선수가 되겠다’는 희망 하나만 보고 모든 걸 참고 운동만 하는 고달픈 신세인 것이다. 게다가 하라구치는 2013년에는 데드볼에 맞아 손등뼈가 골절되는 역경까지 겪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긍정적인 자세로 포기하지 않고 운동에 전념했다. 손을 쓰지 못할 때에는 달리기에 전념하고, 손이 낫자 다시 타격과 포수 연습을 반복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하라구치가 해고 당하지 않은 것에는 아직 젊은 포수 자원을 내치고 싶지 않았다는 한신의 팀 사정도 한몫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매력은 바로 하라구치의 타격이었다. 포수치고 장타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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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자기 멋대로 ‘난 이것을 잘해’하고 정하고 그것만을 하는 것보다는 일단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필사적으로 하는 편이 훨씬 낫다. 정신없이 노력하다 보면 자신의 진짜 장점이 자연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라구치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라고 말하는 위대한 포수 죠지마 켄지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리고 죠지마의 현역시절 연습을 소화해내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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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머리가 어울리는 남자 죠지마 켄지.
하도 하라구치가 이상한 미소를 띄우고 자기를 따라다니니까 "이놈 스토커 아닌가?" 걱정했다고 한다.


육성 선수(따위)가 레전드 선수의 연습 메뉴를 따라하는 것은 황당해보이기까지 하지만 하라구치는 기왕이면 최고를 추구하고 싶었다. 이것은 성장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정말로 중요한 관문이다. A가 되겠다고 노력해도 B가 될까 말까 한 게 현실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목표를 B로 잡으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스티브 잡스를 목표로 삼고 잡스처럼 노력해도 잡스처럼 된다는 보장이 없는데 처음부터 안철수 따위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점에서 가장 풀이 죽기 마련인 육성 선수 시절에 오히려 죠지마 켄지를 목표로 삼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은 하라구치의 성장에 중요한 거름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연습했던 하라구치는 그의 진짜 강점은 수비 능력이 아니라 타격임을 알게 되었다. 고교 시절에는 리드 능력으로 평가를 받았던 선수였고, 입단 첫해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기까지 했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육성 선수로서 하라구치의 타격은 주목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2015년 겨울, 육성선수 계약이 아니라 등록 선수 계약을 다시 맺게 되었다. 이 때, 그가 받은 번호는 94번.

하라구치는 2016년 새해를 2군에서 시작했다. 당시 2군에는 ‘1군에서의 활약이 기대되는 유망주들’이 자주 거론되었는데 그 중에 하라구치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송곳은 아무리 깊은 주머니 속에 넣어도 뚫고 나오는 법. 하라구치의 타격 실력은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라구치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신 타이거즈의 레전드이자 2군 감독인 카케후 마사유키였다. 카케후는 육성에 뛰어난 수완을 가진 인물로 많은 선수들이 그를 자신의 멘토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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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타이거즈" 카케후 마사유키. 육성에 대한 자기 철학이 뚜렷한 지도자로 그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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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노스케도 학창시절에는 카케후의 팬이었다. 카케후를 흠모하는 선수들은 지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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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케후의 와꾸는 박원순과 비슷한데 박원순처럼 인상에 야비한 구석이 없다. 역시 사람의 인상은 자신의 인생을 반영한다.



현역 시절 타격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카케후는 하라구치의 실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카네모토 1군 감독에게 하라구치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카케후는 하라구치에게 타격을 집중적으로 지도했고 하라구치가 1군에서 좀더 경험을 쌓으면 반드시 환골탈태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다만 야노 아키히로 코치는 하라구치의 수비 능력이 미흡하다는 점을 들어 하라구치를 포수로 1군으로 내보내는 일에 반대했다. 

늘 말하지만 조직의 위기는 개인에게 기회다. 1군에서의 출전 기회를 얻은 하라구치는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했다. 하라구치는 카케후의 지도를 받을 때부터 자신의 강점은 수비가 아니라 타격임을 간파했다. 그는 상대 타자 연구보다 투수 연구에 더 노력했고 1군에서 불붙은 빠따질을 선보여 ‘강타자 포수’의 재림을 기대하는 오사카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맹타를 휘두른 하라구치는 5월 리그 MVP에도 뽑혔는데 일본야구 역사상 육성 선수 출신이 1군의 MVP를 받는 일은 처음 있는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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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젖은 빵을 먹고 기어이 1군에 우뚝 선 이 모습을 보라... 빛나고 있다.


다만 하라구치의 수비 능력은 아직 부족했다. 그 때문에 야노 코치는 하라구치의 주전 기용에 계속 반대했다. 그러나 한신 타이거즈가 전반적으로 타격 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하라구치의 장타력은 정말 탐나는 것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조직의 위기는 개인에게 기회다. 결국 카네모토 감독은 하라구치를 포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으로 빼는 일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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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점권 타율도 좋은 하라구치. 끝내기 적시타를 친 직후, 카네모토 감독과 기뻐하고 있다.


만일 하라구치가 ‘나는 포수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아직도 1군과 2군을 오가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도 어디까지나 아베 신노스케급의 진짜 엘리트가 가져야 미덕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라구치는 오랫동안 눈물젖은 빵을 먹으면서 1군에서 통하는 자신의 확실한 무기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타격이었다. 그렇다면 타격을 더더욱 갈고 닦아 1군에서 확실한 ‘내가 있을 곳’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비록 한신 타이거즈는 이번 시즌 클래스B가 확정되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나갈 수 없으나 젊은 선수들의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점에서는 아직 희망이 있다. 특히 3번타자 안타제조기 타카야마 슌, 4번타자 하라구치 후미히토의 젊은피 클린업은 시즌초 노장 후쿠도메 코우스케의 한방에만 의존했던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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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인상의 "도메아저씨" 후쿠도메 코우스케. 메이저리그에서도 활동한 후, 지금은 한신에서 플레이. 외야수로서 지금도 보살을 잡아내는 강견은 건재. 이 양반도 레전드다.



하라구치는 이번 시즌 후반부에는 포수보다는 1루수로서 더 많이 출전했다. 그것은 두가지 포석을 의미한다. 내년 하라구치를 포수가 아니라 야수로서 쓰고자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지금까지 1루수/4번타자를 맡고 있던 용병 마우로 고메스가 이번 시즌 타격 부진에 시달린 것 때문에 고메스의 대체를 검토 중이라는 의미도 된다. 고교 때부터 홈런타자가 아니었다면 외국인 용병과는 타격으로 겨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일본에서 당당히 1루수 자리를 넘보는 하라구치는 타격 실력 뿐만 아니라 배짱도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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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스와의 성적을 비교해봐도 하라구치는 107시합에 출전하여 0.299의 타율을 기록했고 고메스는 139시합에 출전하여 0.255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라구치는 삼진을 52개 당한 반면 고메스는 130삼진을 기록하며 선구안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내년 한신 타이거즈의 중심선수는 하라구치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라구치는 조직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미래를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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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격과 풍모에서부터 강타자의 오라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한신의 주전 1루수 고메스. 한단계 더 위로 가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격이 높은 상대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도 중요하다. 고메스의 1루수 자리를 위협하는 하라구치의 성장은 주눅들어 지내는 사람들에게 꿈을 보여준다. 




자신의 미래를 열기 위해, 성장에 필요한 조건들
1. 자신의 강점은 이것이라고 미리 정하지 말고 강점을 발견하기 위해 일단은 뭐든지 해보기 (타격 부진으로 짤린 하라구치는 지금 타격으로 1군 4번타자이다)
2. 목표를 높게 잡기. 이상이 낮으면 절대로 그 이상 성장할 수 없다. (목표는 단순히 2군으로 복귀하기가 아니라 죠지마 켄지!!!)
3.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관점을 바꾸는 용기도 필요함 (지금까지 해온 포수 대신 1루수로 바꾸기)
4. 자기보다 격이 높은 사람에게 꿀리지 않는 용기. (1루수에 외국인 용병이 있다 해도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


일게이들이,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너희가 잘되어야 한다. 너희가 사회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면 혹세무민하고 선동하는 무리들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이 헬좃선?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기회가 아니겠는가.



한줄 요약: 조직의 혼란은 개인에게 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