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크게 전기왜구와 후기왜구로 나누어 지는데 이번에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전기왜구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과연 왜구는 왜 갑자기 고려에 침공하기 시작하였는가? 어떤 이유로 발생하게 되었는가?


왜구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전기 왜구에 대해서 통설로 보여지는 것은 쓰시마, 이키, 마츠우라, 고시마 출신의 섬 출신 일본인들과 규수 남부에 있던 무사집단 마츠우라토(松浦党)가 관여했다는 설이 크며 고려사 일본전에서도 위 섬들 출신들이 주로 왜구로서 해적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1350년 2월부터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었다고 이루어지나 고려사에서 최초로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기록은 

고려 고종 10년 (1223년) 5월조에 왜구들이 김주에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그 이후로도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이전부터 규수남부를 중심으로  마츠우라토라는 무사집단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이 종종 고려와 중국에서 사무역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1) 마츠우라토의 기원 - 규수의 무사집단


松浦党水軍のモニュメントと松浦党発祥之地説明板

<마츠라이토 수군 기념물 사진>


일본 히라토의 마츠우라 사료박물관에서 발행하고 있는 "사도 히라토 - 연표와 사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왜구는 가마쿠라시대 1226년 마츠우라 토의 수군이 해상무역을 조선에 의해 방해를 받아 그에대한 보복으로 고려연안에 침입한 것이 시작으로 이루어지나, 그때 외국을 자극하던 것을 경계한 가마쿠라 막부가 그 주범인 마츠우라토 의 무사들 90명을 처형한 적이 있다 "


마츠우라토는 마츠우라 가를 포함한 30여개의 가문이 섞여 있는 무사집단으로 마츠우라케는 8세기의 사가 덴노의 제18황자가 시조로 여겨진다고 한다.

8대손인 히사시는  1069년에는 장원 관리를 위해서 게이비시( 당시 일본 율령제 하의 영외관으 형사사건을 담당한 관직) 로 임명되어 

히젠마츠우라의 이마토미로 가 성을 마츠우라로 바꾸게 된다. 상하 마츠우라 군과  소노기 지역 일부와 이키를 관장하게 된다. 


마츠우라토 수군은 강력하였으며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의 수군으로서도 참전하기도 였다고 한다. 




梶谷城跡

<지금은 터만 남은 카지야성>


1096년에는  이마리완 입구에 카지야 성을 지어 점점 그 세력을 키워나간다. 헤이안시대가 지나 내란이 빈번하여 일본의 쵸테이(조정)이 약체화되면서 히젠마츠우라에서는 혈연 지연을 중심으로 다수의 집단이 결속하여 규슈 북서부 연안을 지배하에 두게 된다. 


그러나 마츠우라 지방은 평지가 없고 토지가 척박한지나 오래전부터 주민들은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잡았다.


국삼국지 왜인전에서도 이들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방 주민들은 경작지가 적어기에 식량이 부족하면 배를 타고 다른 섬에 나가서 식량을 조달하였다고 하여 이키나 쓰시마도 동일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즉 이들은 종종 고려로 가서 평화로운 사무역을 하기도 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않으면 약탈과 폭행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이들이 전기왜구라 불리우는 무장집단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왜구의 규모는 당시 이 지역의 상급무사(고케닌)인 쿠사노씨 도 무사들이 152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마츠우라토의 한 집단은 군사력이 150명 이하로 보여지며 이들이 여러집단으로 행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마츠우라토의 세력권으로 지금 일본 규수의 사가현 과 나가사키현 북부에 위치한다>


이성계에 죽임을 당한 아지발도도 당시 15.16세의 소년으로고  이키 마츠우라토의 중심인물로 전해지는데 백마를 타고 창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1380년 9월 남북조 시대 후반 아지발도는 500척을 이끌고 고려 연안을 습격하여 남원산성까지 쳐들어간 것이다. 


(2) 여몽연합군의 2번의 일본원정 - 고려와 원에 대한 복수심


Mōko Shūrai Ekotoba.jpg

이들 왜구 활동이 본격화하는 것은 2번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칩입 이후이다. 

1274년과 1281년 두번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칩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것은 전쟁터가 된 마츠우라을 기반으로 하는 마츠우라토인 것이다. 

크나큰 인적피해를 입으면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지는 자신들이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논공행상에서 제외되고 만다. 이에 불복한 마츠우라토는 대표를 카마쿠라에 보내어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만족할만한 보상은 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결국 가마쿠라막부에 대해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은 자신스스로 힘을 기르려고 노력하게 된다. 

마츠우라토는 카무카라 말기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한층더 결속력을 강화하였고 가마쿠라막부 말기에는 48개의 분가가 존재했으며 

현재의 일본 사가현 동부에서 나가사키현 고시마 열도까지의 연안부 일대에 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이후 마츠우라 토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중소영주나 주민들이 중국과 한반도에 출몰하여 식량이나 재물의 약탈, 주민 납치등 해적행위를 하게 되는데  당시 병사들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살해당했으며 그 복수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마츠우라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 있었다. 그래서 고려는 습격하여 마을주민을 유괴하려 부흥을 위한 노동력으로서 해적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여몽연합군 몽골 장군인 홀돈은  일본인 젋은이 200명을 사로잡아 고려왕과 그 왕비에게 바쳤다는 기록과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선체 밖에 매달렸다라는 기록도 전해진다.(니치렌성인주화찬 제5권 "몽고래")


쓰시마, 이키, 히젠연안에 차례차례로 침공을 받아 마츠우라토의 히젠의 고케닌인 사시 후사시와 사시나오시, 토마루, 이사무 부자와 다른 고케닌인 이시시 켄,시시니로 부자들이 나섰으나 마츠우라 토의 기지는 괴멸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사시 후사시와 그 아들들은 모두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들 마츠우라토에서는 수백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었다고 한다. 


또한 두번에 걸친 칩임으로 또다시 여몽연합군이 처들어올지 않을까 우려를 하여 고려와 중국연안부의 동태를  파악하려 영토방어를 위한 시찰을 위해서 이러한 해적행위를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 일본 남북조 시대의 시작과 혼란 - 규수 남조세력과의 결탁


1246년 고사가 덴노의 퇴위 후의 덴노가는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다이가쿠지 계통(寺統)과 지묘인 계통(持明院統)로 분열되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다이가쿠지 계와 지묘인 계가 번갈아 가며 황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양측을 종용했다. 1336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묘 덴노를 옹립해 북조를 수립한 뒤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고, 고다이고 덴노은 요시노에 남조를 수립해 일본열도의 왕조는 둘로 분열되었는데 이때부터 남북조 시대가 시작한다. (1336–1392)


일본 각지에서 남조와 북조세력이 치열한 대결을 벌였고 그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에 대해 통제권이 약화될수 밖에 없었다. 남조의 고다이고 덴노은 아들 가네나가 친왕을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봉해 파견하였는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남조세력이



1361년 지쿠고 강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남조 세력은 규슈의 다자이후를 차지하여 정서부를 설치, 약 10년에 걸쳐 규슈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정서부는 당시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키쿠치 씨 일족이 중심이 되었으며 키쿠치 타케미츠의 압도력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1362년 봄에는 대부분의 규슈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가네나가 친왕은 왜구의 단속을 조건으로 명 홍무제로부터 의 책봉을 받았고,“일본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토대로 세를 다졌다. 명나라는 친왕이 비록 일본 전체의 지배자가 아닌거을 알지만 왜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빨리 일본과의 국교성립을 서두르고 있었고 명나라 또한 규슈를 지배하는 세력이 왜구를 통제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규수의 무사들은 명과 책봉관계를 맺음으로 인해서 돈이 되는 대명무역을 독점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는 북조를 지지하던 무로마치막부의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이마가와 사다요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해 그의 군사세력이 규슈정벌을 위해 규슈로 향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압박을 받고있던 친왕은 "책봉을 받은 것으로 명의 군사적인 버팀목을 얻으려는 노림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네나가친왕은 왜구 토벌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이 당시 가네나가친황을 옹호하는 정서부는 왜구활동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고 그 보상으로 전리품을 받음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당시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통솔이 된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전투집단으로 보여지는데 즉, 당시 무로마치 막부와 대립하고 있던 이들 세력이 왜구에 대해 정치적 비호세력이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무로마치 막부의 큐슈 단다이였던 이마가와 사다요도 규수 평정 이후 실제로 왜구 금지와 납치민 송환을 위해 노력하며 왜구와 남조의 정서부를 동일세력으로 적대시한 것도 이를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서부의 한 세력이었던 쇼니(少弐)씨 집안은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쇼니 후유스케가 암살당한 이후 정서부에 들어가 1세기 이상에 걸쳐 막부에 저항하였는데 이 집안또한 종종 왜구화되어었다고 전해진다. 


3줄 요약

1. 일본 왜구는 예전부터 있었으나 본격적 칩임은

2.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따른 원, 고려에 대한 복수심과 남북조시대 시작으로 인한 일본 내부통제의 약화로

3.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