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동네마다 비디오 렌탈샵이 일베 노짱사진처럼 범람했던 그 시절에는


정체불명의 영화가 실제 내용과 상관없는 자극적인 제목을 뒤집어쓰고


호기심 많은 고객들의 손길을 유혹하는 경우가 흔했다. 


예컨대 '여름날 오후의 정사'라는 제목에 눈이 번쩍 띄어


의미심장하게 웃는 렌탈가게 주인앞에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돈을 건넨 뒤


행여나 라벨이 눈에 띌까봐 옷 속에 꼭꼭 숨긴 뒤에 집까지 부리나케 달려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데- 오후의 정사는 개뿔,


처음부터 동네 삼류 앙아치들이 티격태격 싸우는 내용으로 일관하는데다가


등장하는 여자는 양아치들의 엄마와 할머니가 전부더라- 라는 식이다.



뭐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제 아무리 허접한 영화라도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생했던 스탭들이 있으니


누군가 한 명쯤은 희생양이 되어 봐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허접한 영화가 아니라 ㅆㅅㅌㅊ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수입업자들의 무성의한, 혹은 센스없는 제목붙이기때문에


피해를 보는 영화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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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모르는 사람 거의 없을 거다. 제목인 Groundhog Day는 2월2일 성촉절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칩과 비슷한 날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입업자들이 붙인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이다.


성촉절을 제목으로 붙이긴 어려웠으니 나름 이해는 된다. 근데 왜 블랙홀이냐고.


주인공 빌머레이가 하루 라는 시간속에 갇히는 것과 블랙홀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 영화 개봉관에서 재미를 못보고 있다가 비디오 렌탈 입소문으로 터진 영화다. 하긴 이 정도면 애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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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반디젤 성님이 등장하는 본격 SF영화 Pitch Black 이다.  


그러니까 '칠흑같은 어둠'이라는 뜻이 되겠다. 물론 그렇게 제목을 붙일 수는 없으니 좀더 멋진 제목으로 바꿔야겠지.


수입업자들이 붙인 이름은 무엇일까? <에이리언2020> 되시겠다.


물론 중간에 외계생물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디젤성님의 능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단순한 소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난데없이 2020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허접한 제목 덕분에 비디오샾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테이프를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돌려보았다.


재미있다. 못 본 사람은 꼭 구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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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스틸러 감독, 에단호크와 위노나 라이더가 주연한 영화 Reality Bites 다.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는 뜻이다.


20대 청춘들의 성장통을 유려하게 그린 영화다. 우리나라 청춘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수입업자들은 <청춘스케치>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


나는 비디오샵에서 이 영화를 고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이유는 아래 영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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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영화의 제목도 <청춘스케치>다. 지금은 운지한 이규형감독의 작품이다.


난 앞의 영화가 이 영화인줄 알았다. 그래서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멋진 작명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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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영화가 왜 나오냐고? 포스터에도 나오지만 원래 제목은 The Shawshank Redemption 이다.


리뎀션은 '되찾는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걸 <쇼생크 탈출>이라고 이름붙였다. 제목이 곧 스포일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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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명작 Flatliners 다. 이 영화를 아는 일게이는 '내가 영화 좀 봤구나'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24Hours의 주인공 키퍼 서덜랜드가 젊은 얼굴로 나와 '죽기에 아주 좋은 날이군'이라고 읊조리는 영화다.


Flatliner 란 심장박동이 정지한 상태를 말한다. 실제로 주인공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락가락한다.


그런데 이 영화 <유혹의 선>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 유혹의 선이란다. 유혹의 선.


그래서인지 테이프가 에로영화 분류해놓은 곳에 꽂혀 있었다. 멋진 작명, 훌륭한 분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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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레옹2>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다. 원래 제목은 '와사비'다. 고추냉이다.


장르노가 등장한다는 사실 말고는 <레옹>과 아무 관계 없는 영화다. 이 정도면 어설픈 작명이 아니라 아예 사기다.




자, 이제 끝판왕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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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길리엄 감독의 ㅆㅅㅌㅊ 걸작 Brazil 되겠다. 조지 오웰이 쓴  <1984>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작품이다.


몽환적인 분위기속에 미래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냈다. 안 본 사람은 꼭 봐라. 두 번 봐라.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 수입업자들은 이 영화에 어떤 제목을 붙여 놓았을까.


놀라지 마라.


<여인의 음모>다.


음모가 컨스피러시를 말하는 건지 거시기털을 말하는 건지 알수 없지만 정말 희한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테이프도 에로영화 한복판에 꽂혀 있었다. 이걸 내용도 모르로 빌려간 청소년들은 배신감과 자괴감때문에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요즘은 정보의 전달속도가 워낙 빠르고  영화를 보는 안목들도 많이 높아져서 더 이상의 어이없는 해프닝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다행이다.


어쨌거나 오늘도 발기찬 하루를 보내기 바란다. 이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