펙트 중심적으로 썻다.

 

잘못된거 있으면 언제든지 수정요청해라. 수정할용의있다.

 

 

고럼 김대중 앙망문의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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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 인기가 높자 내란음모죄로 구속

2. 심재철, 고은, 문익환, 이해찬등 같이 구속
3. 김대중에겐 잠안재우는 고문및 어두운방에 뱀을 풀어놓는 고문만 시키고 옆방에서 동지들을 고문하며 그 소리를 다 듣게함
4. 고문에 못이겨 지인들은 자백을 함
5. 그러나 법정에서는 자신의 자백을 뒤집고 고문에 의한 강압이었다 폭로
6. 유독 '심재철'만 자백이 사실이었다고 함 (훗날 출세가도를 달림, 현 새누리당 국회의원)
7. 김대중 사형 판결
8. 최후 변론 '나는 분명 사형을 받고 죽겠지만, 나를 말미암에 다시는 이 땅에 정치보복이 없었음 좋겠다'
9. 미국및 세계여론 빡침
10. 세계에서 구명운동 발생, 지미카터, 레이건 미대통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에드워드 케네디, 엘 고어, 빌리브란드 서독총리,
와인버거 미 국방부장관, 그렉 전대사등이 전두환을 성명과 친필 편지, 외교단절등으로 압박.
11. 그냥 풀어주기 싫은 전두환이는 앙망문쓰라고 권유
12. 김대중 거절
13. 재차 권유
14. 비공개 원칙으로 쓸 것을 약속
15. 전두환 약속 파기 언론 공개
16. 김대중은 사면이 아닌 형집행 중지로 미국 망명
17. 망명후 귀국때 암살당할것을 걱정한 미 상하의원들이 보디가드를 자청 같은 항공편에 그들과 같이 공항에서 내림
18. 우여곡절끝에 산업화가 적절하게된 대한민국의 대통령 당선
 
19. 김대중은 8번에 자신이 한말을 지키고 전두환,노태우을 사면하라고 김영삼 압박. 김영삼 임기 끝(김대중 당선하자마자) 바로 사면해줌.
 
20. 전두환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명절때마다 김대중에게 세배를 보내며 나름 고마움을 표시하며 김영삼이 김대중을 비난하면 항상 쉴드쳐줌.
 
21.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화해시사,대통합시대를 열겠다.
 
22.-99년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가 존경해야 될 대통령이라면서 기념관건립 공식선언
 
22-5.16재평가 시작. 박근혜 후계로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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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는 앙망문의 대한 펙트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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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전두환과 미국의 거래에 대하여 <딴지일보>

http://www.ddanzi.com/news/61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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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사건(金大中內亂陰謀事件)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B%8C%80%EC%A4%91_%EB%82%B4%EB%9E%80%EC%9D%8C%EB%AA%A8%EC%82%AC%EA%B1%B4

 

 

 

 

 

 

김대중 내란음모사건(金大中內亂陰謀事件)은 1980년 신군부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미국 망명

김대중은 1980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여, 학생 운동권의 질서 유지를 당부하였다. [1]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면서 동시에 전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이튿날 이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벌였고, 이를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동자로 김대중을 지목하여 내란혐의로 기소하였다. 1980년에 대법원은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으나, 당시 김대중이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 법정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 행정부, 미국 의회와 심지어는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한 세계 각국 지도자와 종교인, 인권단체들로부터 김대중 사형 중단 압력이 거세어짐에 따라 이듬해인 1981년 1월 23일 김대중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얼마 후에는 20년형으로 다시 감형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셨다.[2]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에 대해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80년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미국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의원은 84년 4월 26일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고 썼다. 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은 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86년 5월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은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전두환에게 편지 등을 보냈다.[3]

 

독일 사민당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은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에게 두 차례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5]

 

이후에도 계속하여 미국을 비롯한 해외 지식인들의 강한 항의가 제기되고 급기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우회적인 압력이 들어오자 김대중 문제가 미국과의 외교 마찰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김대중의 석방을 건의하였다. 이를 두고 고심하던 전두환은 1982년 광복절 특사 명단에 김대중을 포함시킬 예정이었지만 군 내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전두환은 노신영 안기부장에게 김대중 석방을 추진하라고 지시하였고, 노신영은 이희호를 통해 김대중에게 미국으로 출국하여 병을 치료하고 오라는 사실상의 망명 권유를 하였다. 김대중은 처음에 이를 반대하였으나, 미국으로 떠나기만 하면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압박하지 않겠다는 노신영의 제안에 결국 이를 수락하여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귀국과 가택 연금

미국으로 출국한 김대중은 일체의 정치 활동을 안하기로 전두환 정부와 약속하였으나, 얼마 못가 미국 내의 정치인들을 만나며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해 강력한 성토를 하는 등 전두환 정부에 대해 독재 정권이라는 비난을 하였다. 그리고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한국에 귀국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전두환은 격노하며 김대중 입국을 저지하도록 안기부에 지시하였고,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 역시 불과 2년 전인 1983년 여름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 입국하는 순간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의해 암살되었음을 상기하며 김대중을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서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귀국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이에 최창윤 당시 대통령 정무비서관은 1985년 1월 23일자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기를 다시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1985년 4월로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서울에 전했고,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최창윤의 발언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닌 개인적인 의견일뿐이라는 해명자료를 내놓았다. 또한 미국 국무부가 김대중을 강사로 초청하여 직원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등을 주제로 강연하도록 주선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점점 더 거세졌다.

 

마침내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은 2년 2개월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미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에 대해 가택 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미국 인사들은 여전히 전두환 정권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는지 에드워드 페이언(민주), 토머스 폴리에타(공화) 하원 의원을 비롯한 여러 미국의 저명 인사들이 김대중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여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입국장에 들어서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과 경찰이 김대중 부부를 강제로 끌고 지하로 이동해 안기부 버스에 태웠고, 이를 저지하려던 미국 인사들과 안기부 요원들이 충돌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특히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원경 당시 외무부 장관과의 협의를 통해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미국 대사관 1등 서기관이 영접하고 대사관 관용차편으로 동교동 자택까지 동행하겠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김대중의 귀국 당일 안기부의 방해로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뒤늦게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미국 인사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전두환 정권을 비난하였고 특히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트는 "서울 올림픽 때 미국인들이 안전하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지를 재고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미국 정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김포공항에서의 소동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으며, 미국 대사관도 이원경 외무부 장관에게 합의 파기에 대한 사과와 해명을 요구하면서 전두환의 방미를 앞두고 한미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 정부가 전두환 정권을 직접 비난한 것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6]

이후

1995년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김대중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어졌고,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재심을 청구해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7]

 

레이건 정부 당시 리처드 알렌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한 비화를 공개했다. 알렌 전 보좌관은 당시 상황에 대하여 "저희가 협상을 시작한 첫날 한국측에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형이 예정대로 집행될 것이고, 그러고나면 한미관계가 새롭게 출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측의 이와 같은 방법이 잘못되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된다면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한미관계에 있어서 재앙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협상카드 자체가 없었습니다. 한국측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식에 전두환 장군을 초청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형을 감형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제안은 중대한 실수였고, 이 실수는 한국측의 무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은 개인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떠한 국가 원수나 국가 수반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저는 1월 21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이후 레이건 대통령과의 만남이 가능할 수도 있고, 그것이 국빈방문도 아니고, 정상회담도 아닐 것이며, 추후 일정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을 방문한 첫 외국인 방문객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역사의 왜곡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첫째로 정상회담이 아니었음에도 한국에서는 정상회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둘째 국빈방문이 아니었습니다. 셋째 그 방문은 공식의전이 아닌 특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이와 관련해 알려진 내용은 부정확합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오해가 발생했고, 수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레이건 전 대통령이 독재자를 도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한국에서 거의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수년동안 올바른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미국에 있을 당시에도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을 지지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실인즉슨 레이건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닌 김대중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한미관계는 긴장 관계에 있었고, 매우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왜냐면 카터 전 대통령이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김대중 대통령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미관계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레이건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생명을 구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스스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던 카터 전 대통령은 훌륭한 품성의 소유자로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레이건 당선자에게 친히 전화를 걸어서 개입을 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만약에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면 한미관계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우리는 한미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어떻게 퍼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외국수반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레이건 행정부 최초의 외국방문객이 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제가 직접 당시 자메이카의 에드워드 세아가 총리를 초청했습니다. 세아가 총리가 최초의 방문객이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만남은 정상회담도 아니었고 국빈방문도 아니었습니다. 국빈 방문과 관련된 의례가 준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자들, 기자들 그리고 논평가들은 지속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역시 거의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 된 후 미국 방문 당시 저의 제안을 받고 특별히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집을 방문했고, 비록 병이 깊어 다른 방에 있었던 레이건 전 대통령은 만나지 못했지만 낸시 레이건 여사가 이 방문에 깊이 감동했을 정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뛰어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실이 사람들이 미국과 한미관계에 대해서 자신들이 유지하길 원하는 환상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고 밝혔다.[8]

 

 

 

 

 

 

 

 

 

  

1980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대중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하였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김대중이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 법정 최후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를 비롯 레이건 행정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선 덕분에 이듬해인 1981년 1월 23일 무기징역으로 감형 되었다. 다시 20년형으로 감형과 함께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구속된지 2년 7개월 만인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36]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에 대해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80년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미국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의원은 84년 4월 26일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고 썼다. 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은 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86년 5월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37]

 

레이건 대통령은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셨다. 이들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김대중은 신군부에 의해 가까스로 사면을 받아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김대중 구하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레그 CIA 지부장이 89년 주한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은 "나는 개인적으로 귀하가 대사로 오게 돼 기쁘다. 왜냐하면 귀하는 1973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나의 목숨을 살려줘 내가 깊이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라며 은인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38]

 

독일 사민당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3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가 김대중의 사형 집행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40]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 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지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41]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 8일 귀국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 6개월 전인 1983년 8월,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오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당시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을 강행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케네디 의원과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은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전 대통령에게 편지 등을 보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래도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암살을 우려한 미국 하원 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한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42]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36]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한 비화를 공개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한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43]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44]

 

 

 

 

 

 

'김대중 지킴이' 그레그와 DJ의 관포지교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politics/pol_others/view.html?photoid=3317&newsid=20090811153912438&cp=nocut

 
◈ 김대중의 목숨을 구한 美정보요원

 

1989년 5월 12일. 주한미국대사 인준청문회에서 그레그 대사 지명자는 신상발언을 통해 "본인 내외는 서울에서 보낸 2년간의 세월을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고, 가장 분주했던 기간으로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서울에서 보낸 2년간이란 그레그 전 대사가 미CIA 한국지부장으로 재임한 1973년부터 75년까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73년 8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도꾜의 한 호텔방에서 요원(한국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알려짐)들에 의해 납치를 당하자 구명작업에 깊숙히 개입했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그레그 당시 CIA 한국지부장은 DJ 납치가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주도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비브 당시 주한미대사와 함께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행방불명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납치 13일 만에 서울에서 발견되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레그 전 대사의 '김대중 지킴이'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레이건 대통령은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셨다.

 
이들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에 의해 가까스로 사면을 받아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고 전두환은 레이건 정부에 의해 미국에 초청됐다.

 
◈ DJ가 병석에 눕자 한 달음에 달려온 지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997년 12월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퇴임한 이후에도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을 맡은 그레그 전 대사와의 친분은 계속됐다.

 

지난 2007년 9월 김 전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뉴욕 코리아 소사이어티 오찬연설 소개자로 나온 그레그 전 대사는 아시아의 중요 정치가로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한국의 김대중 세 사람을 꼽고, 김 전 대통령을 이 셋중 유일하게 권력밖에서 권력을 쟁취한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어느덧 자신도 백발이 성성한 81세의 노신사가 된 그레그 전 대사는 이날 병원 앞에서 취재진들과 만나서도 여전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세계 평화에 큰 기여를 했고, 노벨평화상이 이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에게 경의를 표한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쾌유돼서 세계 평화를 위해 계속 일할 수 있길 바라고 기도하겠다"며 병원을 나섰다.

 

 

 
"브란트 前 獨 총리 DJ 구명운동했다"
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090520004101&subctg1=&subctg2=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1992년 작고·사진)가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구명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발송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사료를 주독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입수했다고 20일 밝혔다.

 

김대중평화센터가 입수한 독일 사민당(SPD)의 1980년 9월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죽음앞에 선' 김대중 구한 교황편지 공개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90519094809362&p=yonhap

 
故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全 대통령에 DJ 구명 편지 보내

 
김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됐지만 교황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구명 운동을 벌이고 미국 등이 `김대중 사형은 지나치다'며 군사정권을 압박한 결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 같은 내용은 신군부와 미국 백악관 사이에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형 집행 여부를 놓고 긴박한 `거래'가 오갔음을 보여주는 비밀문서가 2005년 공개되면서 `사실(史實)'로 확인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나서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으며, 1987년 사면.복권되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이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 자료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시 국제 사회의 구명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김 전 대통령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구명운동에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서울지법, 전두환 사형 선고(1996)
http://blog.ohmynews.com/bizwe/219442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는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5·18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전대통령에 사형,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22년 6월을 각각 선고했다.

 
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이들을 모두 특별사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직 당시 5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1997년 추징금 2629억원을 확정판결 받았다. 정부는 올해 4월까지 2286억원을 추징해 87%를 돌려받은 상태다.

 

한편 ‘전 재산은 예금 29만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1997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2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4월 현재 532억원 밖에 납부하지 않았다. 집행률은 24%다.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피고인】 전두환 외 16인

 
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35129A9B850E40EAE0438C01398240EA&courtName=&caseNum=96도3376&pageid=#

 
 

 
김대중 전 대통령 '무죄 선고' 판결문 전문-2004년
http://ejung.blog.seoul.co.kr/87?srchid=BR1http%3A%2F%2Fejung.blog.seoul.co.kr%2F87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1981년 1·24 비상계엄 해제 등 전두환 등이 저지른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해당한다. 이를 저지하고 반대한 피고인 김대중의 활동은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려는 정당한 행위로 범죄라고 볼 수 없다.

 

 

CIA 한국정세분석보고서 1980년 6월 17일 - 광주민주화운동직후 미국의 시각
http://andocu.tistory.com/entry/CIA-한국정세분석보고서-1980년-6월-17일-광주민주화운동직후-미국의-시각

 

 

 

 

 

 

 

 

 

3줄요약

 

1.펙트를 주었다. 내가 볼때 좌파랑 싸울때 김대중가지고는 절대 못이긴다.

 

2.걍 김대중 우리꺼하고 노무현+종북패야된다. 그게 김대중 대통령도 좋아하실꺼다. 왜냐? 김대중은 보수셨으니깐.

 

3.홍어들이 김대중이 위대했으니 노무현도 좋다 라고 물타기 못하게 김대중과 노무현을 분리하자.

 

 

아 그리고 좌파들이 왠만해선 이런거 잘 언급안하더라.

 

김대중이 5.16 독재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한거에 대해서 실망감을 감추지 않더라고.

 

ㅋㅋ 병신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