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나라는 유방이 세운 전한과 유수가 세운 후한으로 나뉜다. (삼국지의 배경은 후한)

전한과 후한 사이에는 신(新)나라라는 특이한 나라가 있다. 겨우 15년 존속한 나라이다.

신나라를 건국하고 또 신나라와 함께 멸망한 자가 바로 삼국지에서 반역자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왕망(王莽)이라는 인물이다. 


중국사가 한족 중심의 사관이라는 걸 감안해서 '악인'으로 몰린 사람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인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자타가 공인하는 좃병신으로 남아었다. 왜 왕망이 쉴드칠 수 없는 무능한 군주인지 되짚어보자. 







1. 서민 코스프레의 원조

왕망은 금수저 출신이었다. 그의 고모가 황후였기 때문이다. 왕망은 젊을 때부터 정치적 야심이 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왕만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망은 그의 출세길을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고 따라서 궁정 생활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더구나 고모나 고모부가 황제의 변덕에 따라 실각하면 왕망은 소리없이 몰락할 게 뻔했다. 


권력 암투에 밝았던 왕망은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검소한 유생(儒生)의 복장을 입고 항상 스스로를 낮추어 궁정에서도 큰 칭찬을 받았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도한 모습에 불과했다. 왕망은 고모의 신임을 얻어 벼슬길에 나아갔고 순조롭게 출세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고모부에 해당하는 황제 원제가 세상을 떠나자 왕망은 큰 기회를 잡는다. 원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인물은 (조비연과 조합덕으로 유명한) 성제였다. 성제는 색욕에 눈이 멀어 국정을 팽개쳤다. 정치에 흥미가 없던 성제는 겉으로 검소하고 야심이 없어 보이는 왕망을 크게 신임했다. 성제는 26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왕망에게는 세력을 다질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섹스에 너무 환장했던 성제는 결국 복상사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섹스를 해도 씨없는 수박이었는지 성제는 아들이 없었다. 


여색에 탐닉했던 성제 다음의 황제는 동성애에 탐닉하던 애제였다. 성제 이상의 막장 스토리인데, 애제가 사랑하던 똥꼬충은 무려 자기 부인 동씨의 친동생 동현(董賢)이었다. 애제는 정치에 대해 아무 안목도 없었으나 애제에게 (문자 그대로) 보지와 후장을 바친 동씨 가문은 왕망을 경계했다. 왕망은 계속 스스로 낮추어 검소한 척 했다. 즉, 서민 코스프레는 왕망이 시작한 것이다. 왕망 몰락 이후의 이야기인 삼국지에 등장하는 각 군벌들이 서민 코스프레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그것이 왕망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f5130050ef264353f58b501f349f1cb6.gif


그러다가 애제가 (호모라서 그런지 아들이 없었음) 세상을 떠나자 그때부터 왕망이 행동에 나섰다. 그는 막심센세가 빙의한 왕망은 사병(私兵)들을 시켜 대사마 벼슬을 맡고 있던 동현을 다구리 놓고 옥새를 힘으로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를 옹립했다. 그 황제가 바로 (애제의 사촌동생) 평제이다. 동씨 가문은 숙청되었고 이제는 누가 봐도 왕씨의 세상이었다.


왕망은 평제의 섭정을 자처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아무리 똥꼬충이라 해도 평제에게 애제는 사촌이었고 동현도 엄연히 인척이었다. 유씨가 아니면서도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동현까지 처형한 왕망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평제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낌새를 눈치챈 왕망은 결국 평제를 독살해버렸다. 황제가 주도한 암살 시도를 겪으면서도 끝내 황제를 암살하지 않았던 조조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왕망에게는 후폭풍을 예측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왕망은 가문빨과 군자 코스프레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라 그런지 과격한 행동이 가져올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평제를 독살해버리자 이제 한나라 유씨 가문에 충성하는 보수 세력과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제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망은 기원후6년, 그냥 유씨들 중에 '유자영'이라는 어린 애를 데려다가 제위에 앉히고 섭정을 계속한다. 사실 왕망이 정식으로 제위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전한은 멸망하고 신나라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섭정 짓에도 싫증이 났는지 2년 후에는 직접 제위에 오른다.











2. 세계 최초의 폴리페서 집단 

그러나 당시 '황제의 자리는 유씨의 것'이라는 인식은 뿌리가 깊었다. 라이벌들을 힘으로 제거한 군벌 조조조차도 직접 황제 자리에 오르는 일만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감각 없는 원조 서민코스플레이어 왕망은 나름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르기 위해 먼저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 여론 조작을 맡게 될 브레인들이다. 그래서 왕망은 세계 최초로 폴리페서들을 운용한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왕망이 우대한 지식인들은 고대의 문헌을 연구하는 고문학자(古文學者)들이었다. 그 이유는 왕망이 황위 찬탈의 근거로 고문을 내세울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왕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발견하지 못하자 결국 왕망과 그의 폴리페서들은 고문서를 위조했다. 특히 한나라 고조(유방)가 왕망에게 황위를 넘긴다는 예언을 위조해서 그걸 전국에 뿌린다. 약 2000년 후에 어떤 국민대 출신의 가르마 쓸어넘기는 느끼한 틀딱새끼가 한 말 그대로 "어쩌면 예언서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대로였다.


왕망도 허위날조도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위조한 예언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뇌물을 주고 한황실이 아니라 자신에게 직접 조공을 바치게 했다. 그렇게 억지로 여론을 만들어가며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신나라를 선포하니 기원후 8년의 일이었다. 

45daf071c9451e3f99d5068c51b05528.gif 


왕망은 유자영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는 형태를 취했다 (이 수법은 훗날 조비가 따라한다). 하지만 고문서를 위조하는 그 수법이 너무나 치졸했기에 그나마 '유씨가 제위에 앉아있던' 기존 국가에 충성하던 인물들도 왕망에게 실망하고 신나라 조정을 등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왕망을 키워주었던 고모 태후 왕씨조차는 왕망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제 왕씨 일족은 끝났다!"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조조가 자신의 통치를 뿌리내리기 위해 몇십년이고 인내했던 모습과 매우 비교된다.











3. 베네수엘라 이전에 신나라가 있었다

왕망이 권력을 잡아가던 과정을 보면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우매한 민중은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 일단 복종하고 보는 법. 권력을 잡은 왕망은 한나라와는 다른 새로운 통치를 약속했다. 그런데 왕망이나 그의 측근들이 밥먹고 글만 읽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이 약속한 이상은 (옛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꼽는) 주(周)나라 시대를 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태평성대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너무나 황당한 발상이었다. 주나라는 상공업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걸 답습한다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였다.



왕망은 주나라의 제도를 되살려내며 '왕전제'라는 제도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게 씹소름 돋게 문재인의 정책과 닮아있다. 우선 왕전(王田: 왕씨의 땅)이라는 호칭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왕망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토지를 왕씨의 땅으로 부르고 토지의 거래를 금지했다. 그리고 일가족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넓이를 제한해놓았다. 남자 8명을 넘지 못하는 가족이 할당량 이상의 토지를 갖고 있을 경우, 국가가 빼앗아 다른 가족에게 강제로 나누어 주었다. 


1850959.jpg



왕전제는 대실패로 끝났다. 식량 생산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결국 왕전제가 도우려고 했던 소농민들만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소농민들을 등쳐먹는 고리대금업이 발달하면서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농민들이 급증했다.

게다가 토지란 넓이가 같다고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다. 토지를 넓이로만 판단하여 함부로 빼앗아가니 가치가 높은 토지의 가격은 더욱 폭등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토지를 사고 팔지 못하게 되니 토지를 담보로 몰래 돈을 거래하는 편법이 유행했다. 



왕망의 뻘짓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물가를 잡겠다고 곡물, 술, 소금, 철, 비단 등의 소비재들의 가격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했다.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억눌러버리니 생산자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결국 밀매와 암시장이 크게 발달했다. 지하경제가 활성화 되면서 부정부패도 심해졌다.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2000년 전에 이미 신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왕망은 시장이 인간의 탐욕을 부추긴다고 보고 급기야는 화폐의 사용 자체를 금지했다. 이 조치는 반란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장원리를 이기는 국가권력은 없다. 



신나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시장을 권력으로 억누르려는 멍청한 권력자들이 늘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후한시대 말기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와 장비는 자영업자 출신이고 관우는 소금 밀매꾼들의 뒤를 봐주던 '어깨'였다. 유비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택한 이유도 권력이 시장에 개입해서 좋은 일이 없었다는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경제가 어지러워지면 권력자는 누군가를 숙청함으로서 민중의 분노를 돌리려고 한다. 왕망의 공포정치 중에서도 제일 악명높은 일은 왕손경의 처형이다. 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적의'라는 인물과 친분이 깊었던 왕손경을 체포하여 산채로 배를 갈라 죽였다. 그리고 창자에 (혈관이라는 설도 있다) 가느다란 대나무를 넣어 길이를 재는 엽기적인 짓을 벌였다. 사실 중국 문헌에 기록된 '인체 해부'는 왕망이 최초이다. 다만 이 기록은 왕망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잡히면 전기고문까지 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두로 정권처럼 왕망도 폭력정치로 반대파를 억누르려고 했다. 



자기 정책 때문에 실패한 것을 측근 탓으로 돌리는 짓은 툭하면 윗입술 까뒤집고 임플란트 자랑하는 어느 틀딱새끼를 닮았다.

DeUjgncVMAAJfmB.jpg












4. 좆망한 외교

왕망은 외교면에서도 눈부신 실패를 거듭했다. 우선 자기가 날조한 예언서를 정말로 믿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왕망은 이민족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취해 크게 신뢰를 잃었다. 


우선 북쪽으로 신나라는 흉노족의 국제 관계에 개입하여 다른 이민족들 상대로 흉노족에 내는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빡친 흉노는 신나라와 전면전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신나라의 경제는 더욱 빠르게 하라보지를 따라가게 된다.


남쪽에서는 남만(제갈공명이 정벌한 그 지역 맞다)의 추장을 만나자고 해놓고서 만난 자리에서 암살하는 정신나간 짓을 벌였다. 이 일로 신나라와 남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남만의 반란은 어떻게 진압했지만 남만은 왕망이 살아있는 한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동쪽에서는 고(高)구려에 대해 이름이 가당치 않다며 '하(下)구려'로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빡친 고구려는 신나라의 변망을 마구 노략질했다. 하지만 왕망은 고구려를 어찌 할 수도 없었고 나중에는 고구려 관련 보고는 받지도 않게 된다. 


서쪽에서는 서역족에게 왕에서 제후로 강등시키겠다는 주장을 펼쳐 서역의 반란을 초래했다. 서역은 흉노족과 연합하였고 신나라는 끝내 서역을 정벌하지 못했다. 훗날 후한을 건국하는 광무제의 친구이자 부하인 마원(삼국지 마초의 조상님)이 서역을 안정시킬 때까지 중국의 서쪽 또한 또다른 헬게이트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악하자면, 왕망은 딱 이렇게 되었다.

e06118d4d179ceae85d7f6fdcd359965.GIF













5. 나르시스트의 패망

기록에 의하면 왕망은 자신의 외모에 매우 집착했다고 한다. 머리털과 수염이 하얗게 세자 수시로 염색을 했고 틈만 나면 연회를 벌여 자신의 공덕과 풍채를 찬양하도록 했다. 또한 유난히 식탐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어느 오다리 틀딱새끼와 매우 비슷하다.



358.png




그 와중에 현실 정치에서 일이 잘 안 풀리게 된 탓인지 왕망은 미신에 매우 집착하게 되어 점을 자주 쳤으며 귀신의 보호를 받기 위해 수시로 제사를 올렸다. 한편 자신을 꾸중하는 귀신에 대해서는 그 사당을 부수는 보복까지 했다고 하니 일평생 좋은 평가만을 받고 싶어하던 그 집착이 정신병으로 발전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2000년 후 한국에서도 어느 난교충이 비슷한 증세를 보이게 되었다.



Dumbass

maxresdefault (1).jpg



결국 왕망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반란군에 대한 공포로 반쯤 실성한 그는 신통력으로 반란을 막아보겠다고 나섰으나 결국 반란군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시체는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졌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왕망을 처음 살해한 '두오'라는 인물은 상인 출신이었다는 점. 왕망이 망쳐놓은 상업이 보복을 가한 셈이다.












6. 정신나간 오마이뉴스 ㅋㅋ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라는 놈이 자기 나름대로 왕망을 분석한 글을 올렸다. 2017년 7월1일 기사이니 문재인 집권 초기 때의 기사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4635


이 기사에서 시민기자놈은 왕전제를 시대의 부름에 응한 시기적절한 정책으로 칭찬하면서 왕망의 실패 원인으로 적폐세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며 문재인의 후장을 빨기에 여념이 없었다. ㅋㅋㅋ 워낙 같잖은 소리이니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왕망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평가를 보면 앞으로 문재인을 어떻게 쉴드칠 것인가도 짐작이 간다. 좌파 매체는 문재인의 실패를 '기득권' 탓으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다. 또한 더욱 강력하게 기득권 청산을 못했다고 핑계를 댈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결국 패망해가는 좌파정권의 발악에 불과하지만.











결론: 문재인은 앙망이 아니라 왕망

1. 왕망은 폴리페서와 위조에 의지하여 권력을 수탈한 최초의 사례

2. 왕망과 그의 통치집단은 경제와 외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함

3. 왕망은 시장원리를 거부했고 사유재산에 반대하던 인물임

4. 왕망은 나르시스트적 욕구가 지나치게 강하여 통치 역량의 부족이 드러날 때마다 폭력으로 보완하려고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