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나다 침공은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들 중에서도 가장 찬반양론이 극심한 정책이다.

찬성자들은 그레나다의 안보와 민주주의를 지켜냄으로서 미군의 자신감을 회복시킨 쾌거로 기억하지만

반대자들은 미국이 결국 그레나다를 침략했을 뿐이며 레이건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고 비판하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사실은 그레나다 침공은 모든 반미독재자들의 악몽이 되었다는 점이지.

베트남에서의 철수로 크게 꺾인 미군의 위상을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실제로 작심하고 군사행동에 나서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거든.


그레나다 침공은 사담 후세인이나 카다피의 몰락과도 한 차원 다른데, 그 이유는 레이건 행정부의 초강경 정책이 그레나다에서의 저항의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지. 즉, 미국 입장에서는 오바마처럼 어물쩡하게 대해봐야 반항만 하니까 레이건이 그레나다에서 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조져야 한다는 걸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로 남아있거든. 이건 (레이건 계승을 내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과도 상당히 연관이 있지. 트럼프의 실질적은 브레인은 레이건 시대를 아는 존 볼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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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나다는 어떤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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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나다는 콜롬부스가 발견한 최초의 섬들 중 하나이다.

그 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인들이 이 섬의 지배를 놓고 겨루었다가 결국 영국이 승리했다. (그래서 공용어가 영어임)

영국인 지주들은 그레나다에 거대한 농장을 개발해놓았지. 농장 개발을 위해 질병에 약한 원주민들 대신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다수 이주시켰고 그래서 그레나다 주민들은 주로 흑인계가 많다. 흑인 비중이 카리브해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영국령으로 남아있으면서 나름 ㅅㅌㅊ 번영을 구가하다 1974년 독립에 이르렀고 독립한 후에도 영연방에 남아있다. 그래서 그레나다인들은 자치적으로 총리를 선출하지만 국가 원수는 일단 영국 여왕이다.


관광업과 농산물 수출이 가장 큰 산업으로 미국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큰 가치는 없지만 지정학적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안보에는 매우 중요한 섬이다. 게다가 영어가 공용어인 몇 안되는 나라였기에 미국은 그레나다를 이 지역의 중요한 우방 및 카리브해의 공산화를 막을 전략적 거점으로 보고 있었다.










2. 노조 지도자에서 첫 총리로: 에릭 게어리

그레나다의 독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에릭 게어리이다. 한때 영국에 맞서는 노조 지도자였다가 나중에 영국 왕실로부터 귀족 칭호까지 받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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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게어리는 아직 그레나다가 영국령이던 시절, 주민들의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1950년 "Red Sky"로 알려진 총파업을 주도했는데 이게 폭력사태로 번지면서 영국 정부의 표적이 되었다. 그 후, 그레나다 통합노동당이라는 과격파 정당을 세우고 그 정당의 대표로 활동했다. 결국 1957년 정치 활동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정치 활동 금지령을 받은 후, 네덜란드령 큐라사우 섬으로 몸을 피했는데 그곳에서 원주민들의 힘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고 역시 유럽 선진국의 도움이 필요함을 목격했고, 온건 성향으로 바뀌었다. 1961년 금지령이 풀리자 그레나다에서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지지를 받아 그때부터 그레나다의 유력한 흑인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1972년 주민 선거에서 당선되며 영국령 그레나다의 수상이 되었고 1974년 그레나다가 독립을 이룩하자 독립국가의 수장인 총리로 칭호가 바뀌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은, 그때까지 영국의 시스템을 잘 학습한 것처럼 보이던 게어리가 영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총리가 되자 비밀경찰을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점. 이런 거 보면 후진국은 진짜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1976년의 총리 선거를 대비하여 게어리의 비밀경찰은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게어리는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게 주민들의 불만을 불렀다. 야당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감지한 게어리는 비밀경찰에 계속 의존했고 그레나다의 민중저항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것을 공산화 절호의 기회로 본 공산주의자들은 쿠바의 지원을 받아 그레나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3. 혁명가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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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의 트찰라 국왕과 닮은 모리스 비숍은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동시에 강건한 육체와 뛰어난 두뇌를 겸비한 '크게 될 놈'이었다.

아들의 미래에 몹시 큰 기대를 걸었던 비숍의 아버지는 아들에 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아버지 덕분에 비숍은 그레나다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학에 갈 수 있었고, 또 대학에서도 우수한 학업을 인정받아 런던에까지 장학생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가 일으킨 쿠바 혁명에 감명을 받고,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그는 점차로 혁명에 대한 열의를 키워나가게 되었다. 영국 유학 시절 당시 만난 친구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는 그의 가장 중요한 혁명 동지가 되었으며 훗날 그의 처형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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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Coard



영국에서 학위를 따오는 길을 포기한 비숍은 (지나치게 마르크스-레닌에 심취한 탓에 지도교수와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레나다로 귀국하여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라는 당을 세우고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버나드 코드는 보석운동에서의 비숍의 오른팔이자 가장 소중한 동지였다.


학구파였던 비숍은 마르크스와 레닌 이론에 정통했고 또한 철저하게 이론에 매달렸다. 반면 코드는 모택동의 유명한 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다. 실제로 보석운동당은 무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걸 추진하던 인물은 비숍이 아니라 코드였다.


마침 게어리의 부정선거 때문에 반정부 감정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1979년 게어리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비숍과 코드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록 보석운동 당원들은 수는 많지 않았으나 게어리의 공백으로 정부군은 명령 체계가 마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게어리 정권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호응했다. 결국 3월13일, 단 하루만에 정부는 보석운동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비숍은 인민혁명정부(People's Revolutionary Government)를 선포했다. 그리고 새 총리에 취임했다.


실제 행정 경험은 없고 전형적인 '먹물'이었던 비숍의 통치는 처음엔 의외로 잘 풀렸다. 새로운 공산혁명을 육성하기 위해 소련, 쿠바, 니카라과에서 적극적으로 원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들 공산권의 후한 원주 덕분에 그레나다 최초의 국제공항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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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모리스 비숍,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카스트로 키가 190cm인데 비숍은 그보다도 크니까 체격이 얼마나 건장한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게릴라가 아니라 이론파였다.


경제는 외국의 원조에 맡겨두고 비숍은 권력을 다지기 위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보석운동당(사실상 공산당) 이외의 다른 정당들의 활동이 금지되고 영국의 영향을 받은 헌법 대신 새 헌법 제정에 들어갔다. 항상 카스트로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던 비숍은 쿠바를 따라한 그레나다 혁명군 창설을 추진했는데 이때부터 보석운동당의 내분이 시작된다.









4. 모든 혁명가들의 운명을 따라

버나드 코드는 혁명군이 창설되면 모든 권력이 비숍에게 집중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경제학을 전공한 코드는 당시 그레나다의 재무부 장관 및 총리 대리를 맡고 있었고 군 창설에서는 제외되고 있었다. 권력이 비숍에게 집중되는 현상에 코드와 그의 파벌이 위기감을 느끼고 보석운동당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코드는 조급해했기 때문에 협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최후통첩을 들이밀었다. 코드는 비숍에게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자신과 권력을 동등하게 나눈다는 조항을 헌법에 넣을 것을 요구했다. 비숍은 거절했다. 이제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먼저 죽이는 쪽이 살아남을 판이었다.


이론가였던 비숍과 달리 코드는 실제 무장세력을 지휘하던 인물로 휘하 병력이 있었다. 병력을 동원하여 코드는 비숍을 집에 가두는 연금 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비숍의 지지자들이 거리에서 (게어리 정권을 전복시켰을 때처럼) 시위를 벌였고 그 틈에 비숍의 집에 뛰어들어가 비숍을 구출해냈다. 코드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다. 비숍이 쿠바로 탈출하고 카스트로의 지원을 받아 귀국하면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코드도 비숍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혁명을 공부하면서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혁명가가 어떤 운명에 처해지는지 지겨울 정도로 봐왔다. 


코드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비숍을 체포하도록 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코드가 비숍을 발견하면 현장에서 사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추적 끝에 비숍을 체포한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비숍을 총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숍에 의해 장관에 임명된 비숍파 3명은 기관총으로 난사해 죽였다. 비숍과 그의 추종자들의 시체는 현장에서 소각되었다. 1983년 10월13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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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친한 진구였던 비숍과 코드는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모든 혁명가들의 운명. 죽을 때까지 권력투쟁을 해야 하고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 죽어야 한다는 운명.









5. 하지만 미국대통령이 레이건이라면 어떨까?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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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이 그레나다의 공산화에 나서지 않았을까? 1979년 당시 대통령은 (외교의 무능함으로는 오바마와 막상막하인) 지미 카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드가 비숍을 처형했을 때는 1983년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이 그레나다에 매우 민감해하던 이유는 국제공항의 건설 때문이었다. 그레나다의 인구는 지금도 1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송파구 인구가 60만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레나다에 국제공항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레이건은 그레나다 국제공항 건설의 진짜 목적은 소련의 군사 기지 역할을 수행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지으려던 전과가 있는 만큼 그레나다에 무언가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겉으로 보면 코드의 비숍 처형은 그냥 과격파 단체에서 흔히 일어나는 내분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이것을 과격파가 온건파를 제거한 것으로 내다보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과격파 김정은이 온건파 장성택을 처형한 것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과격파가 권력을 잡으면 과격한 행동에 나서는 법. 레이건은 코드가 권력을 잡았으니 뭔가 일을 벌이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레이건은 문제가 터진 다음에 뒷수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아예 문제의 싹을 제거하겠다는 사람이다. 그리고 레이건은 폭격 정도가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하여 그레나다에서의 공산화의 싹을 제거하겠다고 결심했다. 


미 해병대는 1983년 10월25일 그레나다에 상륙한다. 비숍이 처형된지 불과 2주일도 채 안되어 벌어진 일이다. 충동적으로 해병대를 보냈을 리 없다. 레이건이 얼마나 그레나다를 벼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레나다에서의 버나드 코드 정권 전복 후의 일, 그리고 게어리 아재의 인생 후반의 이야기는 2부에서.

그리고 문재인 씨발놈아. 왜 국민의 청원에 답변을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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