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번 시간은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대해 써보려고 해...ㅠ


왜 이런 야심한밤에 이런글을 올리는지 다들 이상하게 생각 할 수있을테지만



그래도 열심히 써볼게!! 


그럼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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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우리에게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 의해 문화통치가 시행되던 시절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지기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파악하면서도 
정작 그 식민지를 다스렸던 식민모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식민지기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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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코토 - 3대, 5대 조선총독(역대 최장기간 역임), 나중에 군부 쿠데타로 암살당함.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인 1905년부터 만주사변이 발생하는 1931년 전까지 이 25년 간 일본의 역사에는 그 전후와 구분되는 한줄기 역사적 지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 시기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얻은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구가했으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문화가 정착되면서

전화, 자동차, 라디오, 영화, 레코드 등이 일본의 새로운 풍경으로 떠올랐다. 
고등교육이 확산되며 도서의 보급, 잡지발행도 활발해졌고 신문의 발행 부수가 100만 부를 돌파하는가하면 여성의 사회진출도 활성화되었다.


생활의 안정은 자연히 정치참여 요구로 이어졌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 시기에 지식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과거의 번벌 위주의 일방적인 정치가 비판 받기 시작했고 (번벌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정부요직을 독차지한 인사들을 일컫는다.)
정당민주주의가 시작되었으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은 물론 사회주의, 아나키즘 역시 민중들 사이로 흡수되었다. 
이는 마침내 1925년 만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서 선거권을 주는 보통선거법의 도입이라는 쾌거로 이어졌다. 
바로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즉위했던 다이쇼 덴노의 이름을 빌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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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덴노 - 재위 1912 ~ 1926

 

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정의를 내리기 굉장히 모호한 시기다.
그 전이나 그 이후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나 그 역시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는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정확히 언제 막을 내리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만큼은 여러 연구에서 대략 1905년 9월 발생한 히비야 폭동을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히비야 폭동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강화 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은 대중들이 강화 반대와 전쟁 지속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전쟁에 대한 옹호, 민족주의의 발호라고 볼 수 있는 셈인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는 것을 생각하면 
히비야 사건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것은 일견 모순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비야 사건의 의의는 다른 것들보다도 바로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개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러일전쟁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일전쟁은 전적으로 우익과 번벌 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전쟁이었고 정보 통제로 언론과 민간은 전쟁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시베리아 바이칼호까지 진군해야 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이 대유행할 정도였다.(심지어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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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일본인들의 망상.jpg


일본은 개전 초기에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1905년 1월 4일 뤼순(여순)항을 함락시켰으나 끝내 국력의 차이를 이기지는 못했다. 
뤼순전투 이후 이어진 평톈(봉천)전투에서도 일본은 승리했으나 이 전투에서 무려 7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일본 육군은 전투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다. 
더군다나 이미 군수 물자 생산력도, 보급도, 재정도 한계에 달한 일본으로써는 병력을 더 징집한다한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면 러시아는 유럽에서 거듭하며 병력을 파병, 하얼빈에 100만의 대군을 집결시키겠다고 호언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기도 허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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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항을 함락시키는 일본군 - 일본군은 이 뤼순공방전에서도 6만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였냐면 평톈전투 후 도쿄를 방문한 고다마 겐타로 총참모장이 정부에게
‘일본 육군의 전력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상당한 보충이 없는 한 하얼빈 결전에 임할 수 없다. (중략) 이제 일본의 존망은 외교에 달려있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 점을 알고 있었던 일본정부는 필사적으로 미국의 중재를 통해 러시아와 강화를 맺으려 하였다. 
이런 사실은 강화 회담 참석을 위해 항구로 이동하던 정부 관료들 사이의 대화 내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905년 7월 8일 고무라 주타로가 전권위원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갈 때, 도로는 환송나온 시민들로 가득차고 일장기와 만세 소리가 들끓었다.
하지만 고무라는 환송 나온 가쓰라 수상에게  "돌아올 때는 정반대의 풍경을 보겠군요."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네가 참으로 딱한 처지에 몰렸군. 지금까지 쌓은 명예가 이번에 다 무너질지도 모르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원로 이토 히로부미는 "자네가 귀국할 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만은 반드시 마중을 나옴세." 라고 말했다.

- 다치바나 다카시, 천황과 도쿄대(1), p413


이 대화 내용을 통해 정부 관료들이 이미 강화회의의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일본정부의 예상대로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결과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상금은 한 푼도 없었고 지배권을 확정할 수 있었던 영토 역시 남사할린 지역뿐이었다. 
출정군 총 94만 명, 사상자 40만 명, 20억 엔에 달한 전쟁 비용에 비한다면 분명 터무니없는 결과였다.


문제는 이 전쟁이 일본이 최초로 겪은 총력전이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위해 수많은 국민들을 징집했고 세금을 걷었으며 그들에게 국채를 팔아 전쟁비용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전쟁 참여의 기반이 된 일본 민중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화조약의 결과를 본 이들은 아무 것도 얻은 것 없는 전쟁을 위해 자신들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결과가 전해지자 일본 전역이 분노로 들끓었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 내무대신 관저가 불에 타고 계엄이 선포되기에 이른다.


일본정부는 집회나 소요를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이미 러일전쟁 기간 동안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집회나 행진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용인하면서 
민중들은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집회를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진압은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 꼴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부의 강경진압에 대한 반발은 결국 국민들을 배제하고 정치세력을 독점하고 있던 번벌들에 대한 반대 움직임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즉 운동이 강화를 반대하고 정부의 굴욕적인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방향에서 번벌들이 오로지하는 정부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중들이 스스로를 정치참여의 주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히비야 폭동이 그 내용에도 불구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게 된 이유다.


이런 움직임은 1906년 상업회의소 주도의 직물소비세, 소금전매, 쌀 수입세 등의 폐지를 요구하는 악세반대운동으로 다시 한 번 불붙게 된다.
당시 러일전쟁 기간 동안 부족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다양한 증세를 실시했는데 
전후 이에 불만을 품은 상업 자본가 계층이 악세들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정부 내 번벌과 원로들에 좌지우지되는 의회는 이러한 움직임을 무시하고 오히려 설탕소비세, 석유소비세, 주세 등을 신설해 증세와 군비확충을 꾀했다. 
이에 상업회의소는 전국적인 연합회를 조직해 악세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의회 일각에서 군비 확충에 반대하는 의견이 확산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의회에서는 국방은 주변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고 전쟁의 위협이 없으므로 군비 확충을 위한 증세는 악세라는 야당 측과 
군비확충을 해야지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며 군비확충을 생산보다 먼저 고려해야한다는 여당 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민간에서는 심지어는 군함 감축과 사단 감축 주장까지 제기되었을 정도인데 
군비확충을 꾀하는 번벌과 군부에 대항해 이를 공공연하게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업회의소는 실질적인 세수를 무시하고 군비확충에 편중된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폐단을 불러온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도쿄의 선거구에서 여당이었던 정우회는 11석 중 2석을 차지하는데 그친 반면 
상업회의소의 악세반대운동과 관련된 의원들은 6석을 차지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물론 이들 자본가 계층이 제국주의 자체에까지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군비 감축이라는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지배체제의 개혁과 번벌 관료세력의 타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악세폐지운동은 단순히 세금제도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국가 재정과 정치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쌓인 민권운동의 여력은 몇 년 뒤 한층 더 크게 터져 나오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중국이 혼란해지자 이를 중국 침략의 적기라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을 구성하고 있던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는 재정난과 국제문제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이에 반발해 사임했고 군부가 후임 대신 임명을 거부하면서 1912년, 내각이 붕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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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 사이온지 긴모치 / 하 - 우에하라 유사쿠


이후 군부에 호의적인 가쓰라 내각이 들어섰으나 언론과 민중들은 육군과 번벌이 내각을 무너뜨린 것에 대항해 호헌운동을 전개했다. 
앞서 말한 상업회의소는 이번에도 사단증설과 군비증가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1912년 12월에는 입헌국민회와 정우회 등의 정당들을 중심으로 제1회 헌정옹호대회가 열렸다. 
이 때 대회에는 삼천 명 이상의 군중들이 모였는데 불과 2개월 뒤 열린 3차 헌정옹호대회에는 1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였으며 
호헌운동은 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1913년 2월 11일 혁명의 발발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자 내각이 총사퇴함으로써 가쓰라 내각은 수립 53일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이를 다이쇼 정변이라고 부른다.

 

다이쇼 정변은 국민의 여론과 정당들의 힘을 통해 일부 번벌들에 의해 좌우되던 근대 일본의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했다.

1913년에는 그동안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정당인 입헌정우회에 대항해 입헌동지회가 창당되었다. 
입헌동지회는 이후 1916년 헌정당, 1927년 민정당으로 개칭하며 시베리아 출병 반대, 노동조합 공인 등의 정책을 주장하며 
입헌정우회와 함께 양대 정당의 역할을 수행했다. 강력한 양대 정당의 출현은 일본 내에서 안정적인 정당 정치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어떤 사건보다 1918년의 쌀 소요는 정당 정치로의 변화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14년부터 1919년까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이 급격히 올랐는데 
일본정부가 러시아혁명을 빌미로 시베리아 출병을 결의하고 미곡상들의 사재기가 겹치면서 1918년 7월, 한 달 동안 쌀 가격이 무려 60% 이상 폭등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베리아로 끌려간다는 민중들의 불안감은 소요를 더욱 자극했다.
소요는 나날이 확대되어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당대 일본 최대의 시위가 되었는데 
민중과 언론들은 번벌 세력이었던 데라우치 내각의 정책 실패를 규탄하고 정치참여권의 확대를 요구했다. 
데라우치 내각은 이런 민중의 움직임을 군경을 동원해 강력하게 진압했으나 결국 그해 9월 29일 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에게 총리 자리와 내각을 내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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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카시 - 평민 출신으로 총리가 되었으나 군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다 우익청년에게 암살당함.


평민 총리라는 별명을 가진 하라 다카시 내각은 중의원의 다수당 의원들에 의해 운영된 최초의 내각이었고

육군대신, 해군대신, 외무대신을 제외한 모든 각료들을 정당 의원 출신들로 임명했다. 
정당 정치의 실현을 위한 일본 사회의 오랜 움직임이 드디어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하라 다카시는 총리 재임 중 암살당하기는 했지만(일본 역사상 최초의 현직 총리 암살 사건) 

2차 세계대전 전 일본에서 이례적으로 3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정당내각제가 자리 잡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3.1운동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군부, 특히 육군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일본 정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제(管制)에 따르면 총독은 내각이 아닌 천황 직속으로 되어 있었으며 육해군 대장만을 임명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외연상으로 일본의 내각 총리와 조선총독부 총독은 동등하고 독립적인 위치라는 것. )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은 일본 육군의 지배를 받으며 군부의 경제력을 키워주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 재생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라 다카시는 이를 제어하기 위해 하세가와 총독에게 3.1운동의 책임을 묻고 정무총감이던 문관 출신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후임총독으로 내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문관총독을 임명하는 것은 3.1운동이 격화되어 책임이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관료들에게도 적용되고 육군의 반발이 거세지자 불발되었다.

그 대안으로 당시 퇴역한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가 물망에 올랐다.

이는 군부의 반발을 달래면서도 육군과 연고가 없는 해군 출신 퇴역 장성을 총독에 임명함으로써

군부의 영향력을 잘라내고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계산이었다.

 

군부는 조선총독부를 정부의 통제 아래 두려는 하라 다카시의 계획에 계속 저항했다.

관제개혁안에 있어 군부는 총독의 문무관 병용 임명은 인정하면서도 군권은 무관출신 총독일 때만 주어진다는 규정을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추밀원에서 부정당한다. 

 

만약 진정 총독의 통치를 위해 (총독이) 군통수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무관 총독으로 한정할 이유가 있겠는가.

만약 문관 총독에게 군통수권을 위임할 수 없다면 결국 총독을 무관에 한정하는 현 제도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생략) 총독으로서 그 출신이 문관인가, 무관인가에 따라 직권의 일부를 달리하여 마치 총독이 두 종류로 설치된 것과 같이 명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 추밀원회의의사록(20), p256

 

대신 총독은 필요한 경우 군령을 통해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들에게 군권 사용을 요청할 수 있다는 식으로 관제가 변경되었다.

관제개혁안이 만들어진 후 하라는 1919년 6월 13일 내각회의에서

"내가 대만․조선의 현제도 설정 연혁을 말하고, 현제도는 구미제국의 식민지를 모방한 것으로서 근본에서 잘못이 있다면

결국 내지(일본)와 같도록 하는 방침을 취하여 상당한 개혁을 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는 군부에 의한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조선땅에 대해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추진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실제로 인사권을 가진 정무총감에 하라가 신뢰하던 관료인 미즈노 렌타로를 임명하고

또 렌타로가 모든 인사권을 사이토 마코토로부터 일임받음으로써 하라는 조선총독부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미즈노 렌타로는 하라의 기대에 부응하여 총독부에 대한 영향력을 되살리려는 군부의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이를 차단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총독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고 군통수권을 상실했으며 막료나 부관도 둘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라 다카시는 식민지 조선에서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나름의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일본의 조선 통치 방식이 1910년 무단통치에서 1920년대 문화통치를 위시한 유화책으로 전환된 것에는 이러한 시대적, 정치적 배경이 존재했다.

 
이런 사회운동의 성장과 민중들의 정치적 성장은 1923년 12월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미수사건을 책임지고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이던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각을 구성하자 제2차 호헌 운동을 벌임으로써 다시금 그 존재를 드러냈다. 
기요우라 내각은 추밀원의 귀족의원들 중심으로 이뤄진 탓에 ‘귀족내각’이라 불리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입헌정우회와 입헌동지회의 후신인 헌정회 등을 포함한 호헌3파 연정이 총선에서 승리해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하면서 정권을 잡았고,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1925년 보통선거권을 도입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 해에 아나키즘, 공산주의운동 등을 비롯한 사회운동을 처벌하는 치안유지법이 제정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는 절정의 순간 몰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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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 요시노 사쿠조 / 하 - 미노베 다쓰키치

 

도쿄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유학 후 귀국해 도쿄제대에서 정치사를 강의했했던 요시노 사쿠조는 

1914년 중앙공론이라는 잡지에 첫 글을 기고한 이후 이 잡지를 통해 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등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논평을 대중들에게 제공했다.

또 단순히 글만을 쓰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회단체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우익단체와 공개토론회를 열어 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1916년 요시노는 중앙공론에 헌정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큰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민본주의를 제창했다.

요시노의 민본주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를 번역한 것이다. 

그가 이 단어를 민주주의로 번역하지 않은 것은 천황제 하에서 정치적인 문제 제기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대신 그는 민본주의라는 단어를 통해 천황제와 민주주의적 의회 제도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일반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고, 일반 인민의 의향에 따라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그는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고 있던 있는 번벌과 원로, 추밀원 중심의 당시 일본 정치제도를 비판했으며

봉건적이고 전제적인 이 체제를 헌정과 민본주의를 통해 개혁해서 정당정치를 실현하고 선거권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보통선거권 운동과 정당내각제 운동, 그리고 자유민권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요시노 사쿠조가 제창한 민본주의를 헌법적으로 정당화 시킨 것이 바로 도쿄대 법학교수인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든 이후 일본의 헌법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이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국가의 통치권이 천황 개인에게 있다는 ‘천황주권설’과

통치권의 주체는 국가 자체에 있으며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그것을 행사할 권능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천황기관설’이 그것이다.

(천황주권설의 대표주자는 미노베와 같이 도쿄대 법학교수로 있던 우에스기 신키치였다.)

 

천황기관설과 천황주권설이 대립하게 된 원인은 사상적 차이도 있지만 헌법 해석에 대한 근본적 문제도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만들어진 메이지헌법은 행정권과 입법권에 있어서는 천황의 권한에 제한을 가하고 있으면서도 육해군 통수권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때문에 군부에 대한 의회나 내각의 통제가 유명무실했고 육해군대신의 임명권도 군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각에 대신을 입각시키지 않거나 자의적으로 퇴진시킴으로써 내각성립을 저지하고는 했다.

이것이 첫편에서 보았듯 2개 사단 증설 문제와 관련해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를 필두로 한 군부가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미노베 다쓰키치는 국가의 통치권은 기관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법인설)

때문에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라는 헌법 조항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즉 그는 천황을 의회, 정부, 재판소 같은 국가 기관의 하나로 본 것이다.

이는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입헌정치와 정당내각제의 강력한 학문적 기반이 되었다.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이 빛을 발한 것은 1930년 런던해군군축조약 때였다.

군부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조인하자 우익세력은 이것이 천황의 군통수권에 대한 침해라며 문제화했다.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 덕분이었다.

미노베는 통수권과 편제 대권을 분리하여 오로지 군사작전상의 결정만이 순수하게 독립된 것이고

나머지는 국가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정부에서 처리할 문제라고 정리했다.

천황기관설이 굳건하게 존재하는 한 군부의 정치개입은 법적으로 명분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천황기관설의 거두로서 우익과 군부세력의 공적이 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를 통해 군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자유민권운동이 신장되자 우익들의 반발도 날로 심해져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끝으로는 대체로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1925년이 이야기되는데

그 이듬해 다이쇼 덴노가 죽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이런 구분은 더욱 깔끔하게 시대를 정리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만들어낸 흐름들이 1925년 이후로 곧바로 사그라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치안유지법이 즉각적으로 일본사회의 모든 논의를 억압한 것도 아니었고 정치인들의 군부 통제 시도 역시 여전했다.

그러므로 군국주의의 광풍이 그 잔불까지 모조리 꺼버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계기가 더 필요했다.

 

1931년 만주사변은 그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다. 일본관동군과 조선군은 정부의 재가도 없이 독단적으로 만주를 침략해 점령하고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사건이었기에 엄중히 책임을 물었어야 할 일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했다.

결국 이 사태를 통제할 수 없었던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가 물러나고 후임으로 총리에 임명된 것은 이누카이 쓰요시였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위에서 보았던 호헌 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정치인으로 번벌에 반대하고 정당정치와 의회정치를 추구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헌정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부를 제어하려 했던 정당 출신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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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쓰요시 - 물론 이 이누카이 쓰요시 역시 만주국을 승인하고 군부와 타협함으로써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인 면모를 보였다.

 

이누카이 총리는 만주국 문제를 두고 중화민국과 타협을 시도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당연히 군부 내 반발을 불렀고 1932년 5월 15일 일부 청년 장교들에 의해 일어난 쿠데타로 살해당했다.(5.15 사건)

만주사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총리에 취임한지 불과 5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군부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해군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면서 일본의 정당정치는 이 날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총리에 군부 인사들이 임명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군국주의와 전쟁의 길,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어처구니없는 건 이 사이토 마코토조차 군부 내에서는 온건파였기에 후일 또다른 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암살당함. 개막장...)

 

그리고 1935년. 마침내 그 유명한 '천황기관설 사건'이 발생했다.

 

천황기관설에 대한 논쟁은 이미 1912년 미노베 다쓰키치와 우에스기 신키치와의 사이에서 발생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학자들 간의 논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노베의 이론이 논쟁에서 승리했고 이후 그의 이론은 다이쇼 시기를 거치며 완전히 수용되었다.

우에스기 신키치가 헌법학 강의를 맡고 있었음에도 미노베의 헌법강좌가 신설되었고 수강생도 미노베 측이 더 많았다.

후일 천황기관설 사건으로 일본정부가 법학 서적 조사에 나서자 400여 종류에 달하는 법학 서적들이 모두 미노베의 헌법기관설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는 결과도 있다.


그런데 1935년에는 상황이 달랐다.

1934년 미노베 다쓰키치의 저서가 뜬금없이 우익 인사에 의해 불경죄로 고발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으나 이를 시작으로 미노베를 공격하는 우익세력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귀족원을 중심으로 미노베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는데 이 사건이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되면서 큰 반향이 일었다.

학문적 영역에서 거리가 멀던 우익세력들이 단순히 천황기관설의 이름만 보고 미노베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대다수는 미노베의 저서는 읽지도 않고 단순히 천황을 기관에 빗댄 것이 불경하다는 수준이었다.

기관을 기관총이나 기관차로 알아듣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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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설? 사실 잘 모릅니다.^^

 

문제는 미노베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격을 당하는 동안 그 누구도 그를 적극적으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분에 있었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 일본의 정치 지형은 급속하게 우측으로 기울어 있었다.

귀족원과 우익세력의 기관설 공격에 대해 미노베 다쓰키치는 직접 귀족원에 가서 ’일신상의 변명‘이라는 연설을 통해 스스로를 변호했다.

이 연설은 명연설로 꼽히며 반대파의 공격을 한순간 저지시켰으나 군부가 나서면서 다시 사태는 미노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군부는 우익세력에 호응하여 정부가 미노베의 처벌에 미지근한 것을 비난했고 어느 순간 천황기관설 논쟁은 국체명징 운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국체명징은 한마디로 천황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있어 절대적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정부와 의회에 일본의 국체에 대해 명확히 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는데 천황제 국가에서 이를 무시하는 것은 대역이자 무도한 처사로 받아들여졌기에

생각 있는 정부 관료들이나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우익 세력과 군부는 이 상황을 십분 이용했다.

결국 귀족원이 천황기관설 배격을 주장한 결의안을 가결시켰고 중의원 역시 국체명징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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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쉽게쉽게 말하면 이런 짓을 열심히 하자고 결의한거다. 

 

마침내 1935년 4월 미노베의 저서가 발매금지 처분을 받고 10월 15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체명징 성명을 발표하면서 천황기관설은 완전히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불과 1년도 안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십 년을 연구해온 학문적 이론이 우익세력의 몽니에 의해 부정당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관설 반대와 국체명징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때도 관료들이나 사법부에서는 기관설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당시 일본 정부의 관료 대부분이 미노베로부터, 혹은 그의 천황기관설을 교육받은 도쿄제국대학 출신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덕분에 미노베는 그저 소란을 일으킨 죄목으로 기소유예를 받아 천황기관설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이후 미노베는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고 집에 은거했지만 이런 조치에 만족하지 못한 우익인사에 의해 끝내 총격테러를 당해 중상을 입고 만다.

 

그리고 미노베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극우파 장교들에 의해 2.26사건이라 불리는 쿠데타 시도가 일어났다.

군부 내에서 그나마 온건파에 속하던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전 총리, 와타나베 육군 대장 등의 온건파 인사들이

이 과정에서 살해당하면서 정부의 군장악력은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런데 이 2.26사건 역시 어떤 면에서는 천황기관설 사건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와타나베 육군 대장부터가 천황기관설을 용인하는 인물로 목표가 되어 살해당했다.

 

이는 일본 군부가 특히 천황기관설에 민감해했음을 알려준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일본 헌법은 육해군의 통수권을 오로지 천황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때문에 군부와 우익이 주도한 국체명징 운동에서는 헌법 3조의 “천황은 신성불가침하다.”는 조항이 특히 강조되었다.

이를 통해 천황의 신격화가 빠르게 이루어졌고 자연히 신성 불가침한 천황의 통수권이 강조되었다.

 

천황이 신성불가침의 존재이고 그의 통수권 역시 그러하다면 자연히 군 역시 그런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즉, 군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천황의 신격화에 힘써야했다.

천황이 신격화되면 신격화 될수록 황군을 대표하는 군부의 권력도 점점 강해져갔고 정부로부터도 독립적인 집단이 되었다.

또 군이 그렇게 천황의 신성함을 나눠 가졌으므로 국민은 군을 신성시해야한다는 사상도 만연해졌다.

 

이것이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천황의 신격화와 깊숙이 연관된 이유였으며 천황기관설에 대해 일본제국의 군부가 적대적이었던 이유였다.

미노베의 이론이 그들의 권력 기반을 기초부터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노베의 저서들이 발매금지처분을 받고 그의 학설이 대학에서 폐기되면서 이제 공허한 국체명징의 외침만이 일본에 울려퍼지게 되었다.

이미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1932년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당했을 때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는 완전히 저문 것이었지만

이 천황기관설 사건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향유하고자 했던 시대는 마침내 완전히 그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 뒤 일본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의 길을 착실히 걸어갔고 마침내 패망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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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정리하자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번지던 사상적 변화에 호응하여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을 통해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일본도 그들 스스로의 방향 전환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전략에 따라 식민지인을 대상으로든 자국의 하층민들을 대상으로든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1910년대가 끝나가면서 그러한 억압정책은 한계에 다다랐고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쌀 소요에서 보듯이 민중의 불만 고조가 정부 내각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국민들의 정치적 성장이 두드러졌고

식민지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부상했다.

1919년 3월 1일 발발한 조선의 대규모 독립운동은 일본인들에게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변화에 대해 일본사회와 지식인들은 억압의 완화와 팽창의 억제라는 방향전환을 모색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하라 다카시 총리를 통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가 기존의 무단통치를 대체해 새로이 전개되었다.

목적은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정체성말살정책이었지만

분명 문화통치 기간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한 35년 중 가장 온건하고 효율적이었으며 그나마 발전적인 모습을 보인 통치 기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책들은 결코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우익과 군부의 반발 속에 혼란을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위기와 함께 대립과 갈등이 점점 더 첨예해졌다.

특히 군부는 군부를 제어하려는 정부와 의회의 노력에 반발해 수차례 쿠데타나 암살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의회민주주의가 이러한 폭력에 굴복하고 군부가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일본은 내부 대립 해소를 위해 다시 한 번 무력을 통한 세력 확장을 꾀한다.

그리고 이러한 팽창노선은 군국주의화와 함께 자유주의적 사회분위기의 탄압과 정당정치의 폐지로 끝을 맺는다.

 

더군다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지식인들 스스로도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내부로는 일본 인민들의 자유민권을 외치면서 외부로는 제국주의적 식민지배자의 면모를 보이고는 했다.

호헌운동, 자유민권운동을 펼치던 지식인들, 자본가들, 정치인들 중에도 대외침략이나 식민지배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던 이들이 다수였다.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일본이 한층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만주 포기와 조선 포기를 외치는 급진적인 자유주의 움직임도 존재했으나 그것은 분명 절대적으로 소수의 움직임일 뿐이었다.

또 근본적인 헌법의 모순도 국체명징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변화의 발목을 잡았다.

천황제와 자유민권운동을 공존시키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우익세력이 헌법 3조를 통해 천황의 신격화를 들고 나오면 급속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915년 일본을 방문한 소스타인 베블런과 1919년 일본을 방문한 존 듀이는

입을 모아 일본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자유주의가 공기 중에 퍼져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절반의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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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정리 해서 써 봤는데 재밌고 이해 가기 쉽게 쓴건지 모르겠디 ㅠ


야심한 밤에 고리타분한 이런글 읽어 줘서 고마워 ㅠ


모두들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