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위키백과의 내용을 일게이들 편히 볼수있게


사진 첨부 내용추가 및 재편집한 글이며


유용원의 군사세계 사이트도 참고한 글입니다.




------------------------------------------------




소련 최악의 전투


스탈린 그라드







주요인물


추축군


아돌프 히틀러.jpg

아돌프 히틀러


에리히 폰 만슈타인.jpg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jpg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헤르만 호트.jpg

헤르만 호트

오른쪽인물

프리드리히 파울루스.jpg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이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이탈로 가리볼디 , 구스타브 비테즈 야니 , 빅토르 파비치치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jpg

이오시프 스탈린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jpg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jpg 

게오르기 주코프 


니키타 흐루쇼프.jpg


니키타 흐루쇼프


세묜 티모셴코.jpg


셰몬 티모셴코



이외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 안드레이 예레멘코 , 하지 아슬라




교전국


추축군


8.jpg 6.jpg


독일제국  이탈리아


65.png 헝가리.png

루마니아 헝가리


소련


3.jpg

소련





스탈린그라드 교전국 병력


추축국


독일                 소련

50만명               170만명

        독일 제6군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독일 제4기갑군       남서 전선군

   이탈리아 제8군       동 전선군      

루마니아 제3군                       

루마니아 제4군                      

헝가리 제2군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과 소련이 1942년 8월 21일 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 그라드에서 전개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과 소강상태


552.png



1941년 6월 22일 독일군과 추축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략함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은 12월에 모스크바 고방전을 기점으로 반격을 한다.


탈진과 겨울장비가 부족한 데다 보급로가 약해진 독일군은 더이상 모스크바에 대한


진격을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겨울에 약한 독일군은 봄까지 전선을 안정화 시키는데


중부 집단군의 손실이 컸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은 기각되어 버림


당시 독일군의 군사철학은 무방비한 곳을 공략하여 최대의 성과를 얻는 것인다 .


히틀러는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적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했기떄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히틀러는 미국을 유럽전에 참전시키기 위해 동부 전선을 끝내거나 피해를 최소화 할려고 한다.


그래서 코카서스의 대유전 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 시키는 동시에 독일군의 연료 문제도 해결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동진하는 에르빈 롬멜과 중동에서 합류를 꾀하기도 한다.



롬멜.JPG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




스탈린 그라드의 중요성


슨탈린.jpg


러시아 내전에서 스탈린은 백군의 공세로부터 짜라친(당시 스탈린그라드의 명칭) 방위에 큰 공훈을 세우며


그뒤에 산업화를 밀어붙이면서 각종 산업시설이 건설되며 기하급수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며


후에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되어서 짜라친이 스탈린그라드로 변경된다.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카스피 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수송로가 있는 도시가 있었고


이곳을 점령하면 코카서스로 전진하는 독일군의 안전도 확보되기 떄문에


히틀러에게 중요한 점령지였으며


또한 스탈린의 이름이 들어간 도시를 점령하는것은


선전적인 면에서 소련에 큰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청색작전


독일 남방 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 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는데


히틀러에게 유전지대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 남부 전선에 더많은 병력과 지원을 했는데


여름공세의 암호명은 "청색작전"


(Fall Blau)


히틀러는 작전에 참견해서 집단군을 두개로 나누는데


에발트 폰 클라이 스트.jpg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jpg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이렇게 두 부대로 나뉘게 된다.


청색작전은 4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


보로네쥐를 점령하여 측면에 있는 소련군을 제거함


2단계


돈 강을 도하하여 돈 강 너머의 소련군을 격파


3단계


스탈린 그라드의 철로를 점거


4단계


소련 남부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이란 국격으로 진격



청색작전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는데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적이였지만


소련군은 넓은 스텝 초원에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퇴각한다.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 부대의 측면 포위로 좌절하면서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와 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갇혀 각각섬멸되어 버린다.


7월 5일 청색 작전 1단계의 성공으로 보로네쥐는 함락당하고 만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B집단군의 초기 진격은 매우 순조로워 


에발트 폰 클라이 스트가 지휘하는 A집단군에 합류하게 된다.


합류로 인해 1주동안 진격이 지체되어


히틀러는 다시 A집단군과 B집단군으로 나눠 버린다.


7월 하순까지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 강 까지 밀어 붙이는데 


이때 독일군은 추축군인 이탈리아 , 헝가리 , 루마니아를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전이 소련군에게 발각되자 소련군 지휘관은


독일군의 공세에 후퇴하던 소련군을 스탈린그라드에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jpg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가 청색작전을 꿰뚫고 소련군을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진격시킨것으로


이떄부터 소련군과 독일군의 위치가 바뀐다.


콘스탄틴은 어떠한 공격이 있더라도 후퇴는 안되며


이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소련은 멸망한다고 스탈린에게 전했다.


이에 스탈린은 지휘관과 장교를 이용해 도망가는 소련군을 죽이도록 명령함으로


소련군은 엄청난 사기충전의 기회가 되었으며


이런 명짤도 탄생한다.



장교.jpg





독 - 소간의 치열한 시가전


폐허가된 도시의 잔해를 방어거점으로 구축할 수 있었는데


전투는 치열하며 잔혹했다.


스탈린 그라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생존시간은


24시간 조차 안되었다.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 227호 명령에 따르면


위에 말했듯이 상부 명령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자는 그자리에서 즉결처분에 처해졌다.


사수 아니면 죽음이였는데 어쨌는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러한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며 물론 이에따라 


독일군도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지상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 작전이였지만


소련군은 그렇지 못했다.


2명당 무기 한개라는 속설도 있으며


무기가 없으면 줏어서 써라 대략 이런 작전이였으며


그냥 돌격이였다.


그렇게 또하나의 명대사인 우라 ! 가 생겼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인데


이곳의 주인은 수없이 바뀐다.


어떨떄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하며


나무벽 하나의 두께에서 벌어진 초 근접전 전투에서는 독 - 소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기까지했다.


소련군과 독일군은 어처구니없는 작전으로 


엄청난 병력을 손실하는데


소련군은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 까지 하였다.


심지어 평원에서 수병(해병)까지 도입하게된다.


각종 시가전에서 큰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해서 지원군을 끌어서


전투를 벌였으니 사상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더많다.


이런 어이없는 전투를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웅이 탄생하는데


바실리.jpg


바로 저격수 바실리 자아체프다


소련군 저격수 총합 독일군 500명을 사살했는데


이사람이 242명을 사살했다.


또한 독일군의 악명높은 저격수 하인츠 토르팔트도 사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하인츠 토르팔트는 소련정부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


이에 낚인 영화사는 하인츠 토르팔트 사살을 주제로한 영화를 만들어 버린다.


 소련군의 위기


독일군은 3개월동안 스탈린 그라드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느리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전진 끝에 11월에 최후로 볼가 강의 강둑에 도달했고 


폐허로 변한 시의 90%가 넘는 곳을 장악하여 남아 있는 소련군을 고립지대에 가두는데


하지만 소련군은 엄청난 물량으로 독일군을 몰아낸다.


가을에 스탈린 그라드 방면의 전략적 작전 지도를 맡은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jpg  바실리 추이코프.jpg


주코프와 바실리는 시내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것으로는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을을 깨닫고 대규모 공세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한다.


그렇게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일방적 공세 작전을 입안했는데


작전은 독일군을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을 공격하여 스탈린 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에는 겨우 거점을 유지 할수 있을 만큼만 병력을 지원했고.


시의 서북쪽과 서남쪽의 스텝 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킨다.


이작전은 천왕성 작전으로 명명되며


독일 중앙 집단군을 겨눈 화성 작전과 함께 실시된 예정이였다.


독일군은 북쪽 좌익이 허점이였는데 이곳은 독일군에 비해서 잘훈련되지못하며


장비와 무기도 부족한 크로아티아 , 헝가리, 루마니아군이 수비를 담당해서


소련군은 이곳을 노린 것 이다.


주코프는 추축군이 도망치지 못하게 험한길에서 두갈래로 적을 독파시켰다.


천왕성 작전


11월 19일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을 개시한다.


3개의 야전군으로 이루어진 남서 전선군의 지휘를 받으며 북쪽으로부터 내려오기 시작한다.


남서 전선군은 대전차 여단의 대병력을 보유했으며


이부대는 독일 제 6군의 북쪽 측면을 수비하던 루마니아군을 겨누었다.


루마니아군은 계속 독일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거부되어서


소련군의 공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1월 20일에서는 남쪽 방면에서도 두 개의 야전군으로 이루어진 로코소프스키 중장 지휘하의


돈갈래의 전선군은 이틀 후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에서 만나 독일 제 6군을둘러 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한다.


소련은 이만남을 영화로 만들어 선전했는데


후에 알고보니 주작이였다.


당시에는 영상 카메라도 없었다.


소련군의 승리


천왕성 작전과 토성작전 화성 작전으로 인해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곡떄문에

시의 외각으로부터 시내로 후퇴한다.

이에따라 공중 보급이 이루어지는 두 공항을 잃고

탈진에 시달릴뿐만 아니라

싸울 실탄도 떨어져 가고있었다.

독일군은 소련군이 우리를 포로로 잡으면 죽일거라는 선전효과떄문에

필사적으로 싸운다.

이에 소련군은 포로에 대한 안전보장

의료보장을 내세워 

독일군을 포로로 잡으며 호의호식 시켜주었다.

하지만 항전을 계속한 추축군 병사는 11.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8.646명이 포로로 잡혔다.

스탈린 그라드가 피의 전투 . 최악의 전투로 불리는 이유는 사망자수에서 생긴 별칭인데

199일동안 독일군과 추축국은 85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소련군은 142만명이 사망했다.


세계의 지휘관은 스탈린그라드의 작전을 보고

피의기록이라하며

작전의 중요함을 알려준 전투라 한다.


51.jpg


56.jpg

(우라돌격)


61.jpg

22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