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는 조선시대에 을사조약 관련해서 어떤 기록이 남아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씨발거 ... 그래서 당시 기록 두개를 보고 게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길 바란다.
요약은 없다.~ 

누가 손가락으로 저새끼 친일파요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같이 돌팔매질하는 조선인이 되지 말자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힌  5대신들 



- 승정원 일기 -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힌 이근택 권중현 이근택의 상소가 있었다.

고종 42년 을사(1905) 10월 22일(신유, 양력 11월 18일)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내부 대신 이지용의 사직 상소


을사오적 이지용

 

○ 내부 대신 이지용(李址鎔)이 사직 상소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신이 외람되이 내부 대신의 직임을 맡은 지도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누차 간절한 마음을 아뢰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아직도 성상의 윤허를 받지 못한 채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두려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지방을 분명하게 관할하고 관리의 전형(銓衡)을 담당하는 직책은 얼마나 긴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신은 재주가 엉성하고 식견이 부족하여 하는 일마다 잘못을 저지르기만 한 채 자리나 차지하고 있다는 비난을 더하고 있으니, 신은 진실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아아, 신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터럭 하나까지도 모두 우리 폐하께서 교화시키고 양육하는 천지 가운데 물건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만, 재주가 한계가 있고 식견이 넓지 못한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어지러운 일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데도 한결같이 정돈하지 못하고, 쌓인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도 조금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함께 다스리고자 하는 성상의 생각을 체득하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성상의 뜻을 선양하는 데 작은 정성을 바치지도 못하였으니, 매번 스스로를 반성해 보건대 무엇 하나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어찌 감히 버젓이 그것을 스스로 감춘 채 오래도록 조금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정상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남김없이 훤히 다 알고 있으리라 여깁니다. 이에 감히 속마음을 다 드러내어 상소를 올림으로써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관직을 헛되이 제수해서는 안 되는 점을 생각하시고 재주 없는 사람이 함부로 차지할 수 없는 점을 살피신 다음, 신이 현재 맡고 있는 직함을 속히 체차하시고 직무를 태만히 한 신의 죄를 다스려 여론을 진정시키심으로써 관직을 중히 여기고 신의 분수가 편안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어떤 고난이라도 뚫고 나가 고락을 함께하는 것이 본래 의리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즉시 사무를 보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郞)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적임이 아니고 신병이 있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군부 대신 이근택의 사직 상소


 

○ 군부 대신 이근택(李根澤)이 사직 상소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얼마 전에 외람되이 간절한 충심(衷心)을 아뢰어 사직에 대한 윤허를 받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삼가 내려진 성상의 비답을 받드니, 도타이 유시(諭示)하시고 꾸짖으시기를 배나 더 엄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감사하는 한편으로 너무나 두려운 마음에 감히 외람되게 직임을 받들고 나아가 일을 보지 못한 지가 또 며칠이 되었습니다. 신은 본래 어리석은 자질이라 이런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결코 실마리를 풀어 나갈 능력이 없으니, 속히 물러나야 마땅할 것입니다. 게다가 신의 고질인 담증(痰症)이 근래 들어 더욱 심해졌는데, 그 결과 원기가 날로 쇠해지는 데다 온갖 증세가 번갈아 나타남으로써 시일이 지날수록 골골하며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재주와 질병이 있는 몸으로는 결코 직임을 수행하기가 어렵기에 누차 사직 상소를 올려 번거롭게 했던 것입니다. 은혜로운 명을 어기는 것이 진실로 신하의 분의가 아니기는 하지만 중요한 직임을 계속 그대로 버려둔다면 거듭 일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갈수록 더욱 죄만 더하게 되어 결국에는 성상의 인재 선발에 누를 끼치고 관직을 더럽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감히 짧은 상소로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특별히 신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시어 신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심으로써 마음을 다해 병을 조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지금이 떠나겠다고 말할 수 있는 때인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공무를 행하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郞)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약 체결을 저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체차하고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의 상소

○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權重顯)이 스스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재주가 없고 식견이 어두운 사람으로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갑자기 올랐는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의 경우에는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이루어진 한일(韓日) 두 제국(帝國)의 조약은 비록 황실(皇室)의 존엄이나 내정(內政)의 자주권에 관계되는 것은 조금도 없지만, 국권(國權)을 잃고 국체(國體)를 손상시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은 끝까지 힘써 거부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한 채 잠깐 사이에 상호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기어이 보고 말았으니, 신의 분수로 헤아려 볼 때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고 간담이 서늘하여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맥은 풀리고 숨은 헐떡거려 살고 싶은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에 감히 서둘러 짧은 소장을 올려 자신에 대한 성토를 행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먼저 신이 현재 맡고 있는 직임을 거두시고 이어 신을 해당 형률로 처벌하심으로써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소서.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굳이 이렇게 인혐할 필요 없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郞)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42년 을사(1905) 10월 25일(갑자, 양력 11월 21일)

외부 대신 박제순의 사직 상소에 대해,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는 비지

○ 외부 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사직 상소를 올려 운운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어찌 갑자기 이렇게 떠나기를 청할 수 있단 말인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郞)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42년 을사(1905) 10월 28일(정묘, 양력 11월 24일) 맑음

외부 대신 박제순의 사직 상소에 대해,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나와 사무를 보라는 비지

○ 외부 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사직 상소를 올려 운운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 와서 떠나기를 청할 필요도 없다. 경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나와 사무를 보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郞)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42년 을사(1905) 10월 23일(임술, 양력 11월 19일)

조약을 체결할 때 회의에 참석했던 대신들을 모두 처벌할 것을 청하는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의 차자

○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李根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일전에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으며 우려와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과연 얼마나 관계가 중대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의당 조정에 자문을 구하여 협의한 다음 처리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오직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궁궐에서 서둘러 회의를 열고는 이렇게 크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여론이 들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는 일이니, 국법으로 볼 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당일에 회의를 했던 대신들을 모두 형률에 의거하여 처벌하심으로써 온 나라 사람들의 공분(共憤)을 풀어 주소서. 재결을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지에,
“‘차자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노성한 경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로 당연하지만 또한 그 일에 있어 어찌 헤아린 점이 없겠는가. 경은 이해하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비서감 낭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 상소가 빗발치는데 대체적으로 고종의 반응은 경들의 뜻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때로는
물러가지 않고 떼쓰는 신하들에게는 짜증을 내며 처벌을 지시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협상 5대신들이 역적으로 몰려 위협을 느끼자 5대신들이 공동책임을 상소하기에 이르렀고
이 기록에는 당시 사건을 복기하는 내용이 있어서 당시 고종이 얼마나 관여했는지 알수 있다.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2월 16일 양력 3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이완용 등 5명이 한일 의정서를 조인한 전후 사정을 아뢰고 사직을 청하다

의정부의정대신임시서리 학부대신(議政府議政大臣臨時署理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더 관대하게 우선 폐하의 위엄을 늦춘 것은 참으로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들이 버젓이 묘당(廟堂)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탄핵(彈劾)하고 논열(論列)한 것들은 신들이 스스로 폄하(貶下)한 것과 크게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니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힘껏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皇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올 때에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중대한 문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우관(寓館)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 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주관(駐館)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 등 8인(人)이 함께 일본 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外部)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議決)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 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 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허다한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모로 극력 반대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의정부 내의 직소(直所)에 와서 기다렸으며, 일본 공사는 관원을 데리고 뒤따라와서 휴게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들이 입대(入對)하여 폐하께 각기 경위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폐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후의 조처에 대해 여러 번 신중히 하문(下問)하셨으나, 신들은 다만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로써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그렇지만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이에 이완용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되는데 폐하의 조정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군신(君臣)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으니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사가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며 공사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안건의 발락(發落)하는 것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군신 간에 서로 묻고 대답하는데 다만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다 밀어치우니, 사체(事體)를 가지고 논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겠지만 이 또한 형식상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나아가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진실로 천만 다행일 것이지만, 만일 너그러운 도량으로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없었으며 여러 대신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완용이 또 아뢰기를, ‘신이 미리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添削)하거나 개정(改正)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토오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 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지금 이 학부 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런 것은 모두 의사(議事)의 규례이니 구애될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때 여러 대신이 아뢴 것이 모두 권중현이 아뢴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면 이 조약 초고(草稿)는 어디 있으며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하셨습니다. 이하영이 품속에서 일본 대사가 준 조약문을 찾아내어 연석(筵席)에서 봉진(奉進)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나아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조약 제3조 통감(統監)의 아래에 외교라는 두 글자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훗날 끝없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외교권을 도로 찾는 것은 우리나라에 실지 힘의 유무(有無)와 조만(早晩)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기간을 억지로 정할 수 없지만 모호하게 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 짐(朕)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머리의 글 가운데서 「전연 자행(全然自行)」이라는 구절은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되지만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부득이해서 첨삭하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건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대신 가운데는 폐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는 사람 이완용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 권중현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모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우리 여덟 사람이 똑같이 아뢰기를,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御前)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政府)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君命)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廟堂)에 두어서는 안 되며 참정대신(參政大臣)과 외부 대신(外部大臣)은 더욱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사가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태연스럽게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이 만류하면서 해명하기를, ‘공사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참정대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그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가 군사령관(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고,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과 군사령부 부관(軍司令部副官)이 뒤따라 왔습니다. 일본 공사가 대사에게 전후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가 궁내부 대신(宮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奏請)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朕)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또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에게 성지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대사가 곧 참정대신에게 토의를 시작하자고 요청하니, 한규설이 여러 대신에게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먼저 참정대신을 향하여 말하기를, ‘각 대신들은 어전 회의의 경과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한 번 듣고자 합니다. 참정대신은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하였습니다. 

한규설 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반대한다고만 상주(上奏)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는지 설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한규설이 말하기를, ‘설명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반대일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외부 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니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 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勅令)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민영기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반대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절대 반대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탁지부 대신은 반대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하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세계 대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가 있는데 이제 또 하필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나라의 체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완용에게 물으니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대하여 이미 참정대신의 통고가 있었으니 이 안건의 요지가 이미 판결된 셈이다.’라고 하고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여차여차하게 아뢴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그만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권중현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연석에서 면대하였을 때에 대체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딴 의견은 바로 황실(皇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즉시 판별되기 때문에 참정대신이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반대한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문구는 실로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심근택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도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기 때문에 농상공부 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지용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 또한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또 내가 일찍이 작년 봄에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공사(公使)와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약관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강토를 보전한다는 등의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사안에 대하여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곧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 뿐입니다. 주무대신(主務大臣)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 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그런즉 신들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추어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다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만일 거센 물살을 견디는 지주(砥柱)와 같은 위의와 명망, 하늘을 덮을 만한 수단이 있었다면 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 밤새도록 굳게 틀어쥐고 갖은 희롱을 막는 등 술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연석에서 면대할 때에는 전적으로 상(上)의 재가(裁可)만 청했고 외국의 대사와 문답하는 자리에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말이 성지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함으로써 전제(專制)하는 데 구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의 숱한 말들이 무력한 지경에 똑같이 귀결되게 하고 빈 말로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고 하며 거짓으로 명예를 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대의(大議)가 이미 결정됨에 미쳐서 조약 초고를 찢어 버리거나 인신(印信)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신 등 5인과는 애당초 같다 다르다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외국 대사가 일을 끝내고 돌아간 후 정부에 물러가 앉아서는 정해진 규례도 준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신들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시험 삼아 한규설의 잘못을 논해 보면 응당 우리들 5인의 아래에 놓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로 말하면, 처음에는 비록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또한 신 등 5인과 고심한 것이 동일하며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신들로 하여금 천지(天地)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신 등 5인은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당당한 제국의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이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탄핵하는 글로 말하면 반드시 증거를 확실하게 쥐고서야 바야흐로 등철(登徹)할 수 있는데 저 무리들에게 과연 잡은 증거가 있습니까? 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죽을죄를 씌운 자에게는 의당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것이 실로 조종(祖宗)의 옛 법입니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