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ilbe.com/view/179854526 (1편 - 전쟁 프롤로그)
https://www.ilbe.com/view/153220626 (2편 - 알프스 행군)
https://www.ilbe.com/view/156383566 (3편 - 트라비아 전투, 트레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https://www.ilbe.com/view/158193101 (4편 - 파비우스 전략)
https://www.ilbe.com/view/160099287 (5편 - 칸나이 전투 )
https://www.ilbe.com/view/163928394 (6편 - 카푸아와 한니발의 동맹)
https://www.ilbe.com/view/167393061 (7편 - 이탈리아 전역)
https://www.ilbe.com/view/174975159 (8편 - 지중해 전역으로의 전쟁의 확대)
https://www.ilbe.com/view/10797401441 (9편 - 시라쿠사의 반란)
https://www.ilbe.com/view/10804711487 (10편 - 시라쿠사의 전쟁 I)
https://www.ilbe.com/view/10813710862 (11편- 타렌톰의 함락, 한니발의 연승)
https://www.ilbe.com/view/10825966530 (12편- 시라쿠사 전쟁 II - 로마의 승리)
http://www.ilbe.com/view/10840167835 (13편 한니발 전쟁기 - 스페인 로마군단의 전멸)
http://www.ilbe.com/view/10853485319 (14편 한니발 전쟁기 - 한니발의 로마 공격, 로마의 카푸아 함락)


스페인 전역 (209 BC)





카푸아가 점령된 이후 원로원은 법무관 가이우스 네로에게 스페인으로 갈 것을 명령하였다. 스페인에서 그나이우스, 푸빌리우스 스키피오가 사망한 이후 로마인은 에보로 강 북부의 진영에 사령관 없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네로는 카푸아 포위전에 참전한 로마군 병력 중에서 6천명의 보병과 3백 기병을 골랐다. 그 뒤 동맹시에서 같은 수의 보병과 8백 기병을 공출 받아 총 1만 2천 보병, 1천 1백 기병과 함께 출발하였다.

에보로 강에서 도착한 네로는 인근까지 올라온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대치를 하였으나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하였다. 

일설로는 이때 네로는 하스드루발에게 농락당했다고 한다.

네로는 하스드루발군을 포위한 뒤 보급을 끊었는데 하스두르발은 네로와 협상하자는 핑계로 만나 회담을 수차례 가지면서 군을 몰래 포위망을 밖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현대 사가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한편 로마원로원은 집회를 열어 투표를 통해 스페인을 담당할 사령관을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이례적인 조치였다. 군사지휘권은 임페리움이라 불리는데, 보통 집정관 혹은 법무관이 일년간 수행하다 만료되면 원로원이 연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만 스페인의 전역은 기약없이 연장될 임페리움이었고, 또한 두 사령관, 스키피오 형제의 죽음 직후라서 누군가를 지명하기에는 원로원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선출이라는 전례없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선거는 개최되었으나 자원하는 자가 나오질 않았다. 하스드루발, 마고, 기스코의 군대가 지키는 바르카의 영지나 다름없는 스페인에 군을 이끌고 가는 것은 위험하고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었다.

로마에는 마르켈루스를 포함한 유능한 장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이미 다른 전역에 투입된 상태였다.

지원자가 없는 상횡에서 24살에 불과한 전직안찰관 푸빌리우스 스키피오가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훗날 아프라카누스라는 칭호를 받는 천재 군사령관의 등장이었다.





스키피오는 이미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 그의 성실함, 유능함, 호감있는 외모와 성격은 시민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장점들이었다. 스키피오는 하루의 시작을 매일 아침 신전에 나가 기도하는 경건함으로 유명하였다.

스키피오의 지원에 시민들이 환호했지만 곧 그의 젊은 나이와 두 스키피오가 죽은 뒤 세번째 스키피오를 보내는 불길함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스키피오는 뛰어난 웅변술과 자신감을 보이면서 마침내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원로원은 신임 사령관 스키피오에게 약 1만여 병력을 주었다. 스페인 북부의 로마군 패잔병 1만명과 네로의 1만 2천 병력, 그리고 스키피오의 1만 병력, 즉 3만 2천 병력의 규모로 다시 스페인의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스키피오는 재량껏 현지에서 보조군을 뽑거나 용병을 고용하여 병력을 늘릴 수 있었는 권한도 주어졌다.




한편 타렌톰에서는 카르타고 본국에서 파견된 전함이 로마군 요새를 봉쇄하였다.

하지만 로마군의 요새에 이미 충분한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고 카르타고 전함이 소비하는 식량은 타렌톰 시민이 감당하기 어려운 양이었다.

결국 보급 문제가 심각해져 카르타고 전함은 봉쇄를 풀고 카르타고로 돌아간다.


로마



늦여름 시라쿠사 점령이라는 업적을 달성한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로마로 귀환하였다. 도시 밖의 신전에서 원로원과 회담을 가진 마르켈루스는 자신에게 개선식을 할 영예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원로원은 개선식 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승인하지 않았다. 전쟁이 아직도 진행 중임과 같이 개선식을 해야하는 마르켈루스 휘하의 병사들이 그대로 시칠리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음이 그 이유였다. 그는 개선식 대신 오베이션을 하기로 하였다.

화려한 오베이션 뒤 시라쿠사를 배신하고 마르켈루스에게 협력한 두 용병들에게 로마 측에서 상당한 보수를 주었다.

그들에게 로마시민권과 약속한상금, 정착할 땅과 마을 그리고 시라쿠사 내에서 살고 싶은 집을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이는 앞으로 카르타고를 배신하고 로마인에게 협력하면 상당한 대우를 해줄 것이라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카르타고는 다시 시칠리아에 8천 보병과 3천 누미디아 기병을 내려놓고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무르게티나, 에르게티움을 비롯한 여러 도시가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섰다. 누미디아인 무티네스는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다시 로마편의 도시를 공격하고 다녔다.

그리고 시칠리아에 복무하는 로마인들은 상당한 불만을 터뜨렸는데, 마르켈루스는 로마로 귀국하고 자신들이 남아서 복무한다는 것이 부당하다, 게다가 겨울을 도시내에서 보내는게 아니라 성밖의 병영에서 보내야한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법무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는 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다.


마케도니아 (210 BC)

이윽고 한 해가 지났다. 두 집정관 중 하나인 술키피우스는 마케도니아로 가서 마케도니아왕 필리푸스를 상대키로 하고, 다른 집정관인 풀비우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집정관 선거를 주관키로 하였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담당하여 상당한 성과를 내온 전직 법무관 라에비누스를 로마로 귀환시키도록 하였다. 

이윽고 개최된 선거에서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귀환해 오베이션을 치룬 마르쿠스 마르켈루스와 마케도니아에 머무는 전직 법무관 라에비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된다. 



집정관에 선출된 라에비우스는 그 해에 그리스 북부지역 폴리스 연맹체, 즉 마케도니아와 아테네 사이에 있는 지역의 연합인 아에톨리아 동맹의 대표를 만나 그들과 동맹을 맺는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바 있었다.

이는 로마와 그리스 폴리스와의 최초의 동맹이자, 마케도니아의 후방을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함으로서 마케도니아로부터의 위협을 상당수 제거할 수 있는 성과인 것이었다.

이 동맹의 효과는 조약을 맺자마자 바로 나타났는데, 아에톨리아인은 조금도 지체없이 마케도니아를 공격한 것이었다. 

필리포스 왕은 당시 일리리아 지역을 공격중이었고, 동맹의 소식을 듣자마자 군을 물려 우선 북부로 가서 다키아인을 공격해 통로를 차단하고 남쪽으로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아에톨리아인은 그 막간의 사이에 군복무 연령에 해당되는 모든 남성을 소집하여 자신들의 남쪽에 위치한 폴리스 연맹체인 아카이아 동맹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카이아 동맹은 아에톨리아인에 군사력이 열세였고 심지어 로마인도 후방을 위협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은 대단한 조치를 취했다. 60살 이상 노인과 여자 어린이들을 에피로스로 보내고 15세와 60세의 모든 시민들에게 승리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시킨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전쟁에서 질 경우 패잔병을 시내로 들이는 자들에게 내리는 끔찍한 저주문을 작성해 시민들에게 외우게 하였다.

또한 미리 전사자들을 위한 무덤을 파놓고 묘비문을 작성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여기 아에톨리아인의 무자비함과 저열함에 맞서 최후까지 싸운 전사들이 잠들다”


이런 조치를 취한 뒤 아카이아 동맹은 군을 이끌고 아에톨리아군을 마주보는 곳에 진영을 차렸다. 아에톨리아인은 아카이아인들이 취한 저 위의 조치를 듣고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여서 쉽게 싸움을 걸지 못하였다.

이윽고 필리포스가 구원군을 보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아에톨리아인은 군을 철수하여 펠라로 돌아갔다.

로마



3월 15일 로마에서 집정관 직무를 시작한 마르켈루스는 원로원을 만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였다.

로마 인근에 자신을 비난하려고 시라쿠사 인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고, 자신을 음해하고 싶어하는 시칠리아 담당 법무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가시칠리아 전체에 퍼져있는 자신을 미워하는 일당을 한데 모아 로마로 꾸준히 보낸다는 것이었다.

마르켈루스는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는데, 그 법무관은 여기에 덧붙여 자신을 비방하는 편지를 잔뜩 작성해 시라쿠사 집 곳곳에 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런 상태에서는 도무지 업무를 하고 싶지 않으니 우선 동료 집정관 라에비우스가 도착하여 문제를 결정지을 때까지 로마시내의 상업활동을 휴식시키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 하였다.



상업활동이 멎자 할 일 없어진 로마인들은 한데 모여 불평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전쟁이 영원히 계속되니 죽을 맛이라 하였고, 한니발이 로마인근의 농장을 전부 박살내서 살기 힘들며, 이탈리아 전체의 군대는 해마다 소집되어 한니발에게 도륙당한다고 없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그 해에 선출된 집정관에 대해서도 불만을 늘어놓았는데, 두 집정관은 모두 열렬한 전쟁광들이며 하필 이런 사람들을 뽑아놨으니 올해는 글렀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러는 동안 로마 시내에서 큰 불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원로원은 신속히 해당사건을 조사하고 이 사건의 배후에 카푸아 귀족들이 있음을 밝혀낸다. 이 귀족들과 그들의 하인은 모두 처형된다.

이 소동이 있는 동안 마케도니아에 머물고 있던 라에비우스는 자신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는 귀국하는 길에 로마 인근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시라쿠사와 카푸아인들로 마르켈루스와 풀비우스의 잔혹함을 호소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라에비누스와 함께 도시로 들어왔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라에비누스가 모든 전쟁 피해자들의 대표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윽고 담당지 결정 제비뽑기에서 라에비우스는 이탈리아를 마르켈루스는 해군과 시칠리아를 담당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원로원은 그 해에 21개 로마군단을 투입키로 결정하였다.

이때 시라쿠사인들 다수가 로마시내에서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곧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마르켈루스가 다시 시칠리아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this result came as a blow to them, like a second capture of Syracuse. The result was that their sobbing and tearful remarks immediately made people turn to look at them, and later on set tongues wagging. For these men went around to the homes of senators dressed as mourners, declaring that, if Marcellus went back there with imperium, every group in their delegation would leave Sicily altogether, and not just their own home towns. They had done nothing to deserve his implacable rancour towards them earlier, they said, and what would his anger drive him to now, when he knew that Sicilians had come to Rome to complain about him? Better for that island to be engulfed by the flames of Aetna, or swallowed up by the sea, than to be virtually surrendered to a personal enemy for punishment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 담당집정관이 되었다는) 그 소식은 시라쿠사인에게 있어 두번째 시라쿠사의 함락과도 같아 망치로 한방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흐느낌은 로마인들의 눈에 띄었고 이들은 곧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시라쿠사인들은 곧 옷을 장례식장의 상복으로 갈아입고 각 원로원 의원을 집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만약 마르켈루스가 군단지휘권을 갖고 시칠리아로 돌아온다면 마르켈루스를 항의하러 로마로 온 사절단은 시칠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마르켈루스의 사무친 원한을 다시 맞닥뜨려야한단 말입니까? 

이제 마르켈루스는 자신에 대해 감히 항의하러 온 시라쿠사인들에게 분노를 품지 않겠습니까? 마르켈루스의 잔혹한 보복보다 차라리 시칠리아섬 전체가 아테나의 불에 의해 불살라 없어지거나 바닷물에 잠겨 사라지는게 낫습니다!!”


이 소동으로 인해 원로원은 기존의 담당지역을 재검토하였다. 마르켈루스는 나서서 말하길 이들이 이렇게 공포에 떨면 자신은 담당지를 바꿀 수 있다. 다만 담당지역민들의 민원으로 로마의 정책이 바꾸는 것은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그래서개인적으로 교환하도록 하겠다하여 원로원의 찬성을 얻어낸다.

이로서 마르켈루스는 이탈리아를, 라에비누스는 시칠리아와 해군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서 마르켈루스는 이탈리아내에서 한니발을 직접 상대하게 된 것이었다. 



이윽고 시라쿠사인의 사절단이 원로원에 나와 마르켈루스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였다. 시라쿠사인들은 주장하길 이들은 단지 히에로니누스, 에피사이데스, 히포크라테스라는 잔혹한 독재자에게 이끌렸을 뿐인데, 마르켈루스는 도시를 점령한 뒤 무고한 시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많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시민들의 대표들이 마르켈루스에게 협력하고자 하였지만 마르켈루스는 정해진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이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다시 뽑은 대표들이 마르켈루스에게 협력해 성문을 열고자 하였는데 그는 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스페인 용병들하고 내통하길 선택해무력으로 점령하였다.

마르켈루스는 항복보다는 무력 점령을 원했고 이렇게 도시의 재산을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무력 점령이라는 군공을 원했고 재산을 불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협력을 거부하고 잔혹한 짓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르켈루스는 이에 답변하길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전에 자신은 분명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는데 이들을 내쫒은건 다름아닌 시라쿠사인이었다.

시라쿠사인이 독재자의 압제 때문에 로마인과 싸운 것이라면 어째서 그 독재자에게 맞서질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독재자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는가?

내가 시민단의 대표의 협력을 거절하고 내통한 스페인 용병을 통해 성을 점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런 중대한 순간에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결정문제서 자신은 스페인 용병이 믿을 만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시라쿠사인들은 스페인 용병 따위를 신뢰했다 비난하는데, 지체높은 사람들 중 누가 이들처럼 로마인들을 위해 나섰으며, 이런 주제에 아직도 신분을 따지는가? 

전쟁의 승자는 승자로서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이것을 비난하는 건 나쁜 선례가 될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훗날을 위해서도 원로원은 자신의 조치를 승인하고 나쁜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후 이어진 원로원은 이에 논의 끝 판결을 내려 다음을 공표하였다. 

"마르켈루스의 전쟁 중과 그 이후의 조치를 승인하며, 로마 원로원은 시라쿠사의 이후 상태를 주의 깊게 염려하겠다"

그 뒤 카푸아인의 사절단이 원로원에 와서 발언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