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


국사책에서 배우는 조선통신사는, 일본에게 선진 문물을 전해주고


원조 한류라고 불릴만큼 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사책에서 알려주지 않는 조선통신사의 이야기를 알아보자





1. 조선 통신사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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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는 편도 2000km, 10~12개월이 걸리는 엄청난 여정길이다


바닷길이 있는 만큼.. 위험한 여정이고, 떠나기 전에 혹시 가다가 운지할지도 모르니 유서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1719년 조선통신사로 발탁되어 다녀온


39세 문인 신유한의 이야기를 써본다 이기야





19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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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주상께서...고마.. 통신사를 파견한다 아니노.."


"어떤놈이 내가 글재주가 있다고 소문을 내부러서"


"제술관의 직책을 맡게 되부럿노..."


"그놈은 홍어새끼가 틀림없어 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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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늙으신 어머니도 계시고....."


"집이 흙수저라 사양도 해보고..."


"별짓 다해봐도...안된디야....가야된디야"


"아! 기분조타! 딱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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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 6월 6일


조정에서 하직인사를 올리고, 통신사 일행은 부산에 모여


떠나기전 무사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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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척의 배가 부산에서 출발했다.


통신사 일행의 구성은


정사, 부사, 종사관을 중심으로


군관, 역관, 의원, 화원(화가), 마상재, 소동(아이 심부름꾼) 등이 따라갔다.





2. 일본의 첫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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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한 곳은 '대마도'


임진왜란 '원수의 나라', '섬 오랑캐' 라는 적대감을 품고 도착한 일본은


실제로 보니, 법령이 준엄했고 백성들이 질서를 잘지켰다.




100년 정도 앞선


1624년 통신사로 파견됐던 강홍중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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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중 :


"섬 오랑캐 질서가 우리 하인들보다 나았다"


"대마도 구경꾼들은 모두 배를 땅에 납작 엎드려 조용히 구경하는데,


우리 하인들은 아무리 주의를 줘도 시끄럽게 떠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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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왜인들)


또 사는 모습도 의외로 부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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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중 : 


"시장에는 물화가 산같이 쌓였으며,


백성들의 살림집에는 곡식이 널려있다..."


"백성의 부유함과 풍성함이 우리조선과 비교가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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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일행은 임무를 다하고 돌아갈 때까지


대마도 사무라이들의 안내와 호위를 계속 받게 된다.


이들을 포함해 통신사 일행은 약 800명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이런 호위와 안내 일행은


대마도번 뿐만 아니라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며 번이 바뀔때 마다


새로운 번의 사무라이 들이 추가되어


인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만큼 이들을 접대할 각 번주(다이묘)들의 책임은


에도(도쿄)로 향할수록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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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신노스케 : 


"도로정비.... 숙소신축... 선박 건조.... 6개월 이상 걸렸데스"


한번 통신사를 맞이하는 데에만 1년 국가 예산을 다쓸 정도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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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일행이 대접받은 음식, 입에는 잘 안맞았다고 함)



NHK 방송에서는 통신사 접대비만 


현재가치로 1천억엔이 들었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쇼군의 강력한 지시로 다이묘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 많은 조선인들과 도자기 만드는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갔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의 도자기 제조 기술을 매우 부러워 했다.


조선통신사행렬은 일본으로 갈때마다 붙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대려오려고 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10여 년이 지난 1617년 8월 27일


종사관 이경직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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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 : 


"자네들 다시 조선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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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까 난감한디유.."


"여기서 대접받고 살만한데, 조선에 가면 흙수저 밑바닥 삶..."


조선에서 도공들은 천한일을 하는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장인을 우대하는 전통이있는 일본에서는


다이묘들의 보호도 받고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일화도 있다구


본론으로 돌아와서



3. 오사카


1719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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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본 오사카의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많은 다리들...


시가지의 화려하고 큰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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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넓고 평평했으며, 티끌이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길을 가득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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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아....흙으로 빚은 인형(일본인)에게...


이런 부귀와 번화라니... 애석할 일이로다...!"



그로부터 45년 뒤,


오사카를 본 김인겸의 글이다


1764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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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집들.. 모두가 기와집이다... 굉장하다"


"오사카 최고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 권세가 저택의 10배 이상이다...


황금 기둥을 가진 사치스러움은 가히 비정상 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100리가 넘는다(40km정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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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겸 : 


"아... 이 금수와 같은 인간들이


이토록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도다..."




1719년 9월 5일


신유한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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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오사카는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장으로...


물산이 집결하고 이곳의 화려함은 도요토미가 재물을 탐하여


백성의 고혈을 긁어다가 사치스럽게 꾸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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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는 강물을 끌어 인공운하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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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 다리는 200여개이고, 절은 300개나 되며 좋은 집들은 수천, 수만을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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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온갖 서적들이 쌓여있는 서점가가 있고


식당, 술집, 약방, 화원도 있었으며


창녀와 기생들이 거주하는 화류 거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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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는.. 매년 높은 세금을 징수하고 있기 때문에


풍부한 재정으로 궁실과 관청 등을 수리하고 호화롭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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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평소 책읽기를 즐기던 조선의 선비들은


일본의 출판 문화에 충격을 받는다.


중국책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책까지 모두 구비해 놓은 서점에는


국가 기밀인 '징비록'과 '간양록'까지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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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통신사 도중에 쓴 시문이 나중에 돌아오는길에 보니


벌써 책으로 묶어져 출판되고 있었으니


그 엄청난 속도에 통신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4. 교토


오사카에서 배를타고 100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왕이 살고있는 교토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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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모습은 발전된 오사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왜왕이 사는 수도로써 호화롭기는 마찬가지 이다.




1764년 1월 28일, 김인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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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겸 :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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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겸 : 


"이 토지를 모두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 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



반면에 신유한의 글은 차분하다.



1719년 9월 11일 교토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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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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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이곳 사람들의 옷은 오사카 비단옷보다 갑절은 더 눈이 부셨다"


"길 옆에는 이층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달빛과 등불 빛이 끝이없었다"






5. 일본이라는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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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8세기때 국명을 '일본'으로 고친 뒤


줄곧 공식적으로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신사들은 한사코 일본을 왜라 칭하고


일본인들을 서슴없이 왜인이라고 불렀다.


신유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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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 왜인이라고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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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그대가 무슨 유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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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역사 책에도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고 했으니..."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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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그러면 귀국은 왜 우리 조선인을 당인(唐人)이라 부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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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귀국의 문물이 중화와 같다고 하여 당인이라고 칭하니, 이것은 사모하는 것입니다"




교토에서 6~7리쯤 가자, 비파호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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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호)


호수의 모양이 비파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둘레가 400리의 끝없이 넓은 호수는 가히 중국의 동정호와 비교할 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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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주변으로 갈대와 대나무 숲이 시원스래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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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아..! 어찌 오랑캐 주제에 이 좋은 강산을 맡았는가.."





6. 나고야


교토에서 400리 길을 더 가다보면 경유하는 도시가 바로 나고야 였다.


1719년 9월 16일, 신유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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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이곳의 모습도 오사카 못지 않았다. 거리에는 황금빛 가옥과 백화점이 있어서


눈부시고 기이한 구경거리가 펼쳐졌다"



나고야에는 통신사가 강을 건너기 위해 길이 855m에 달하는 배다리가 만들어 졌으니,


이때 사용된 배가 무려 300백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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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소강의 배다리)


쇼균이 천황이 있는 교토를 왕래할 때와, 조선통신사가 왕래할 때


딱 두차례만 이용했다 하니, 당시 일본이 통신사 맞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의 배다리를 설치하는대만 꼬박 5개월, 동원된 인력도 7천여명.




7. 후지산


나고야에서 다시 400리 길을 가다보면 하마마츠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300리 밖의 후지산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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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왜인이 말하기를, 후지산은 산 밑에서 정상까지 100리인데


산 정상의 눈은 여름에도 녹지 않기 때문에 멀리 바다 가운데서도 왜인들이 눈 덮인 봉우리로 방향을 분별한다고 한다.



후지산을 본 신유한은 이런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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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누가 옥을 쪼아 비녀를 만들었는가?"


"항아(달나라 선녀)의 살결인 양 희고도 곱구나"


"아아! 너는 어찌하여 오랑캐의 땅에 서있느냐?"






8. 오랑캐의 예물은 받을 수 없다



당시 일본에게 있어 중국과 네덜란드는 무역 상대국일 뿐


조선은 유일한 수교국이였으니, 접대에 성의를 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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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는 사신들에게 막대한 은자를 예물로 주곤 했는데


조선 사신들은 명분이 없는 은자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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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선비 : 


"오랑캐에게 예물을 받다니. 이건 상국의 예가 아니오!"




때문에 1634년 억지로 은화를 받은 조선 사신들은


한참을 궁리하다가 하마마츠 인근의 호숫가에 버리기로 작정한다.


다만 버릴때 다 보이는데서 버렸는데, 나중에 수행하던 대마도 사람들이


이 은화를 건졌을 것은 뻔햇다.


하지만 이렇게 하여, 은화를 받아서 막부의 체면도 세워주고


버림으로써 사신들의 체면도 지키고


대마도에서 부터 따라온 대마도인들에게도 이득이 될 수 있었다.




9. 눈덮힌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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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로 입성하는 시즈오카에서 고갯길이 무려 40리나 되었다.


낑낑대는 가마꾼들이 가엾고,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통신사 일행은 전부 가마에서 내려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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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 : 


"밤새 눈이 내려 고갯길에 대나무를 베어 눈을 덮었는데


마치 마른 땅을 밟는 듯 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40리 길을 전부 마련하였다니....


왜인들의 물력의 풍부함과 행정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 에도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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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일행을 보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기록에는 에도 주민 3명중 1명이 환영 인파속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에도의 인구가 100만명.. 무려 30만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를 매웠던 셈이다.


동시대의 파리, 런던은 인구가 30~40만..


17~18세기 에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중 하나였다.


이때 통신사 행렬이 어찌나 긴지


선두부터 후미까지 모두 지나가려면 5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과장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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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막부는 에도 백성들에게


통신사를 '조공 사신단'으로 홍보했기 때문에


구경꾼들 중에는 통신사를 보며 낄낄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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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길가에 있는 긴 회랑은 모두 상점이였다."


"거리넌 넓고 사방으로 통하며 모두 직선으로 반듯하였다"


"거리 양편에는 2~3층 건물이 즐비했고 서로 잇달아 있는 지붕은 비단을 짜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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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극장)


"오늘날 왜국은 국토가 통일되고 군사가 강성하고 인구는 많고 국고가 풍성하기 때문에, 요즘보다 융성한 적이 없다"


"추측하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왜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침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1. 국서전달


통신사의 에도 체류 기간은 통상 20~3일


통신사는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쇼군에게 예물로 줬다.


그런데 가끔 종이나 동상을 예물로 가지고 오기도 했으니...


조선에서부터 에도까지 끌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12. 마상재


조선통신사 행렬단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바로 


달리는 말 위에서 재주를 펼치는 '마상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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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재)


마상재는 고려시대 까지 기병이 익히는 무예 중 하나였는데


무기가 발달하면서 필요없게 되자, 기예꾼으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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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상재가 조선통신사 행렬에 포함된 것은 일본의 요청에 의해서 였으니


마상곡예를 본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스고이" 를 연발했다.







12. 개방적인 성풍속


통신사 일행의 글을 보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 아닐까 싶다.



1719년 9월 9일 신유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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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안의 인구가 매우 번성한데, 여자가 남자에 비해 더 많았다"


"사촌 남매끼리도 혼인을 한다"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데리고 살기 때문에,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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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목욕탕)


"집집마다 목욕탕의 설비가 있어서,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을 한다"


"대낮에 서로 정사를 하기도 하고, 밤에는 반드시 불을 켜고 정사를 하는데


각기 색정을 돋우는 기구를 사용하여 즐거움을 극대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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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도)


"화려한 종이에 각기 남녀의 교접하는 모습을 백가지, 천가지로 묘사했으며,


또 춘약(정력제)으로 그 색정을 돋운다고 한다" 



"또 각 지방마다 사사로이 창녀를 접할 수 있으므로 이름난 도시에 큰 객점에는 모두 홍등가가 있었는데,


홍등가 안에는 화려한 병풍, 장막, 이불, 베개가 모두 비단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의 남자들은 여자와 정분을 나누는데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13. 남창(돈꼬춘)


통신사 일행을 가장 놀라게 한 일본의 성 풍속은 바로 남창, 바로 돈꼬춘이 성행한 것이였다.


신유한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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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의 곱기는 여색보다 몇 배나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탐하는 것이 또 여색보다 몇 배나 된다"


"사내아이가 14~15세 이상으로 용모가 특수하게 아름다우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양쪽으로 땋아 늘이고,


연지분을 바르고 진귀한 패물로 꾸민다"


"귀족들은 그런 남창을 사다가 추행을 실컷 하는데, 혹시라도 자신의 남창이 다른 남자와 통하면 질투하여 죽인다"


"남녀의 정욕은 본래 천지 음양의 이치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양만 있고 음은 없이 서로 느끼고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14. 소중화 사상



일본에는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을 번역한 '해체신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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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신서)


일본의 의원이었던 '기타야마 쇼우'가 조선 의원인 '남두민'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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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야마 쇼우 : 


"우리나라 어떤 의원이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 장기를 자세히 살피고 책도 지어냈스무니다"



그러자 남두만은 이렇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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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두만 :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지어다."






15. 일본 최고 지성인과의 필담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 최고 학자와 필담으로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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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관 : 


"일본에 선진책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그것을 등사하여 세상에 내놓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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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세키 : 


"나는 대서양, 이탈리아, 네덜란드, 오키나와 등의 사람들을 접하여


넓은 세상을 알고 있소."


"혹시 조선에 만국전도가 없다면 한 장 줄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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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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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세키 :


"그런데 왜 조선은 여전히 망한 나라 명나라를 붙잡고 있는 것이오?"



하쿠세키는 1715년에 '서양기문'이라는 서양 연구서를 낼 만큼 서양 사정에 박식했다.


때문에 그는 조선 사신들의 소중화 사상이 매우 고루해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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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관 : 


"조선은 그래도 청나라가 인정하는 예의지국이오"


"왜국도 중화를 예를 따라야 할 것이오"


"왜국의 시문을 보면 종종 선왕의 옛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불경한 짓을 하고 있는데..."


"대체 왜그러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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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세키 : 


"문자는 뜻 전달이 중요한 것인데, 문자 자체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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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관 : 


"....."


조선 사신단은 화제를 중국의 제도로 돌리며


조선이 중국 예법에 우등생임을 과시했다.



끝. 드디어 다썻네 시팔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