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위키백과의 내용을 일게이들 편히 볼수있게


사진 첨부 내용추가 및 재편집한 글이며


유용원의 군사세계 사이트도 참고한 글입니다.



1편 스탈린 그라드


http://www.ilbe.com/545367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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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최대의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주요인물



추축군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jpg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jpg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


프리츠 비트.jpg


프리츠 비트

(왼쪽)


미하엘 비트만.jpg


미하엘 비트만


그외 


프리드리히 돌만



연합군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jpg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마일즈 뎀프시.jpg


마일즈 뎀프시


버나드 로 몽고메리.jpg


버나드 로 몽고메리


아서테더.jpg


아서 테더


오마 브래들리.jpg 


오마 브래들리


그외


버트럼 램지 , 트래퍼드 로말로리



주요 교전국



연합군


캐나다.png 오스트레일리아.png 영국.png 미국.png 뉴질랜드.png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 영국 , 미국 , 뉴질랜드


뉴 펀들랜ㄷ.png 네덜란드.png 자유 프랑스.png 노르웨이.png  체코슬로바키아.png


뉴 펀들랜드 ,  네덜란드 , 자유 프랑스 , 노르웨이 , 체코슬로바키아



추축국


나치 독일.png


나치 독일




D-day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군이 주력이 되고 기타 캐나다 ,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등


8개국의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노르망디.gif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동원된 병력만 무려 15만 6천 명이다.


그들의 적인 나치독일의 방어군은 약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연합군측은 당시 작전명 오버로드라는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은 넵튠 작전이었다. 오버로드는 대군주를 뜻하며 넵튠은 로마 신화의 해신의 이름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영국군의 프레데릭 모건 중장이 이끄는 기획팀이 계획을 세웠는데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으면 육해공군을 모두 망라한 것이었다.


프레드릭.jpg


프레데릭 모건 중장


넵튠 작전은 1944년 6월 6일에 개시되어서 노르망디 교두보가 완전하게 확보덴 1944년 6월 30일에 종료된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였다.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jpg  버나드 로 몽고메리.jpg


독일측의 방어사령관은 프랑스 주둔 독일 집단군의 총 사령관인 북 아프리카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사막의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다.


롬멜.JPG


롬멜과 아이젠하워 장군과 동등한 내공을 보였지만


롬멜이 한참 후배다.


상륙작전의 전모


상륙작전 개시일인 6월 6일은 D-day 라는 음어로서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사용했었는데


이 암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한 명칭이 된다.


첨언한다면 D-day의 D는 여러 가지 ssul이 있지만 Day의 약자라고 한다. 


상륙작전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는데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자정 경에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작전이 있었고


이어서 날이 밝자 상륙 작전이 개시 되었다.


먼저 노르망디 침공작전의 시작이 되는 공수작전을 알아보자


2만4천명이나 되는 공수 부대원의 공수작전이 상륙 작전 전야인


6월5일과 6일 사이 자정 조금 후에 실시 되었다.


공수.jpg


공수 작전에 참가한 공수 부대는 미국 영국 캐나다 그리고 자유 프랑스 군의 부대였다.


해안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 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그날 아침 06:30분이다.


해상의 일기가 아주 황천상황이어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다.


상륙작전이 아주 힘든 날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내린 작전 감행의 결단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기습은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날씨의 덕도 보았지만 연합군측이 독일군에게 전개했었던


기만 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다.


기만 작전은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곳으로 돌리는것인데


기만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패튼장군의 지휘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독 작전을 실시하는 것


패튼장군.jpg


(위엄넘치는 패튼장군)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 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았다.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사스'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졌다.


이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의 레이더를 교란시켜


칼레해안에 곧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기 위해서였다.



도버해안.jpg


(도버해안)





작전에 필요한 날씨



매월 10일간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가능했는데 그중 만월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인 날씨인데


밝기는 공중 침투하는 항공기 조종사나 글라이더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의 식벽에 필수였으며


조류는 상륙정들이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상륙 저지 장애물을 피하기위해서


가능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다.


6월 5일이 작전에 필요한 날씨에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날이었다.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6일 사이를 야간 작전 개시일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나 5월에는 아주 쾌청한 일기가 6월에는 나빠지기 시작했다.


작전 강행 결정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줬는데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수 없게 했으며


낮은 시계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국을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다.


상식적으로는 6월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해야했다.


하지만 이미 상륙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바다에 떠다니는 상황이였다.


다음 만월이 뜰떄까지 기다리는 것도 전쟁 상황상 불가능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다.


총사령부.jpg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 JM 스태그 대령은 6월6일에는 기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으며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언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스미스장군.png


그러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 제독은 중도적이였다.


레이말로리.jpg


레이 말로리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의 해안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 가 없었다.


한편 영불 해협 방면보다도 더 험한 북부 프랑스의 악천후는 독일군을 안심하고 경계를 풀게 하였다.


이들은 그간 미영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경고 받고 있기 때문에 높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끔찍한 악천후는 적어도 며칠간 마음을 놓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일부 부대는 비상 경계령을 일시 해제 하기도  하였고 많은 고위 지휘관들은 주말을 맞아 위치를 떠나기도했다.


해안선 방어를 책임진 에르빈 롬멜원수는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 독일의 집으로 귀가했으며


거기에 수십명의 사단장이나 연대장 그리고 대대장이 침공 대비를 위한 워 게임 연습을 위해 해안을 떠나 있었다.




작전 계획


상륙작전은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영불해협을 횡단하는 향해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은 그 폭이 무려 50마일로 이넓은 해안은 5개의 작전 구역으로 구분이 되었다.


각 작전구역에는 작전 명칭이 부여되는데 유타 , 오마하 , 골드 , 주노 , 소드였다.


연합군의 상륙계획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이 각각 담당한 해안선의 침공 구역은ㅇ 아래와 같다.


미국 1군은 73.000명의 병력으로 오마하와 유타 두개의 해안을 목표로 공격했는데 


이 병력 중 15.600명은 공수 병력이었다.


오마하 해안 : 미군 5군단 - 1사단과 29사단


유타 해안 : 미군 7군단 - 4 사단 90사단의 359RCT 101 공수 사단과 82사단의 상륙 해안 후방 내륙강하


영국군 2군이 이 구간의 일부를 담당 6공수 사단 7,900명이 침공 구역 좌측에 투하되었다.


소드 해안 : 영국군 코만도 부대의 2개 여단, 1군단의 3 사단과 27 기갑 여단


주노 해안 : 캐나다 1군단 - 3사단, 캐나다 2 기갑여단 , 영국군 제 4 코만도 부대


골드 해안 : 영국군 30군단의 3사단 , 캐나다 군 1개 기갑여단


작전지도.jpg


노르망디 주변에 파란색 점자가 찍혀있는데 그게 미국의 작전 경로


독일군의 방어 계획


연합군 침공에 대비해서 독일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를 대서양 해안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jpg


해안 방어사령관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 


독일은  대서양 연안에 걸쳐 4년 동안 교통호와 화력 지원 요새와 벙커들로 바느질로 조밀하게 누빈듯한 방어선을 구축한다.


독일군 최초의 방어선은 영불 해협인데 영국이 영국 본토 공격을 노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의 해군을 분쇄한 천연의 장애물이다.


반대로 독일군이 사용하게 된다 .


두번쨰의 방어선은 해안이다. 히틀러는 총통 명령 51호로서 벨기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해안지대를 대서양 방벽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요새화하라고 명령했다. 방어공사가 집중된 곳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의 해안쪽이었다


즉 앞에서 말한 기만 작전이 행해진 칼레 해안이었다.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떄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MG42로 무장된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고 해변에는 상륙 정들의 접근을 막기위해서 수천개의 방어물과 수만개의 지뢰를 매설하기까지 한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 사이에 책임 전투 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떄문이다.


독일군의 병력 배치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지점은 4개의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다.


716 독일 보병사단은 상륙 해안의 최동단 이었다.


이곳에 영국군과 캐나다 군이 상륙할 예정이었는데


716 보병사단은 신체적으로 약한 시민과 소련군 포로 잡종들이 모인 사단이라서 전투력을 의심받았다.


오바하 해안에는 독일 정예 3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사단은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사단이라


오바하 해변을 공격한 미군 병사들의 피해율가 가장 높았다.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



해안으로 뻗어 나온 코탕탱 반도 내륙에는 루프트 바페 소속의 91 공수 사단이 주둔했다.


709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 동쪽과 북쪽 해변에 배피된다.


기타 노르망디 해안 인근 주변 지역에 주둔한 분대들을 여기 소개해보면 243 보병사단 , 711사단 , 30기동 여단


여기서 30기동여단은 자전거 부대다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는데 롬멜은 상륙 저지 부대로서 최고 유효 수단인


기계화 사단들의 사용을 두고 집단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집단군 사령관 룬트 슈테트 원수는


순수하게 관리의 편의성 떄문에 휘하 서부 기갑 집단군 부대들을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그 장군의 휘하에 두고있었는데


이 집단군은 후에 제 5 기갑군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5기갑군은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 다시 전장에 재배치하게 된다.


레오.jpg 룬트.jpg


                         좌 :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그   우 : 룬트 슈테트                         


롬멜.jpg


당시 해변의 방어선을 사찰하는 롬멜 원수


아프리카에서 실전 경험을 충분히 쌓은 롬멜은 연합군의 항공력이 훨씬 우세하며 전투가 발발하면 기갑부대의 이동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갑부대들은 이동거리가 짧은 해안으로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 배치되기를 주장했지만


게이르는 기갑군은 파리와 루엥의 중간 지점에 중점 위치해있다가 적의 교두보가 확인되면


기갑군을 집중 투입해서 이를 궤멸하는 것이 더 낳은 전략이라 주장했다.


롬멜과 게이르는 전략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히틀러에게 직접 중재해주도록 하기로 한다.


아돌프 히틀러.jpg


히틀러는 그의 버릇대로 양쪽 다 만족하지 못할 중재안을 내놓는데


롬멜에게는 3개 기갑 사단만이 주어질 예정이고


이 3개 사단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전 해안선을 커버하기는 불가능하였는데 나머지 사단들은


OKW 예비대 라는 명칭을 주고 게이르의 휘하에 두고 적의 상륙 공격이 있을 시에 반격하도록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은 단 3개 사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4개 사단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상륙할 경우 출동하도록 하였다.


롬멜 룬트슈테트 가우제.jpg


전략을 두고 논쟁하는 롬멜과 게이르 


히틀러는 예의 버릇대로 집중되어야할 병력을 분산시키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더 나쁜 결정은 게이르  휘하의 OKW 예비대 3개 사단을 출동 시킬때에 자신의 허가를 받고록 한것이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떄인 6월 6일에는 OKW 예비대 전차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지시가 없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날 히틀러는 잘떄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서 OKW예비대 출동의 허가도 받을수 없게 되버린다.





해안작전



노르망디 작전의 예비 단계는 해군의 역활이 중대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국 해군 사령관은 영국 해군의 버트람 램지 경이 임명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작전에 동원된 함선들은 영국 측이 주동이 되어서 마련한 것이다.


사령관 램지 경은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패주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수송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북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 작전 기획 책임자 이기 까지하며 시실리 섬 침공에도 힘쓴 그는


해군 상륙 작전 지휘의 최고 베테랑이라 말할 수 있다.


작전명 넵튠 ,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해군 목표는 노르망디 침공의 해상 루트와 상륙 예정 해변을 독일 해군의


방어와 반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였는데 중요한 침공 해상 루트의 보호 임무는 영국 본토 해군함대에게 부여된다.


독일 해군이 바다에서 침공 함대에 ㅏ해올 위협은 두가지로 압축될수 있는데 하나는 노르웨이 북방 해안과 발트해에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함대의 주력 대형함에 의한 해상 공격이었다. 그러나 독일 대형 전함들은 영국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큰피해를 입고


순양함들은 훈련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함대의 출동 연료도 부족했었고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이들 수상함대가 통과할 빌헬름 황제운하해역에 설치한 대량의


지뢰 지대에 걸리게 되어있었다.


설사 이런 불리한 조건을 뚫고 상륙할수가 없어서 작전 수립 단계에서 독일 대형함대에 대응하는 부분을 제외한다.


55.png


당시 연합군 최대 위협 이였던 독일의 U 보트


연합군 해군에게 예견이 가능한 진짜 위협은 대서양에서 활동하는 U보트 (잠수함)부대였는데 


U보트를 감시하기 위해서 미 해군의 호위 항공모함 세 척과 영국 공군 해안 감시대 소속 정창기들이 영국 본토에서 먼 바다까지


나아가서 정찰을 했지만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연합군 해군은 U보트에 대한 경계활동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브리타니와 비스케이 만으로 부터 상륙 지점에 접근할만한


길목에는 함대를 배치해서 봉쇄하였다.


프랑스 연안엥는 기뢰 지대가 여러 곳에 설치되어 독일 해군 함정 루프트바페의 엄호 거리내에


항로를 대비하면서 독일 해군의 동정을 살폈지만 작전 개시 전까지 별다르게 달라지지 않았다.


만족하지 못한 해군은 독일 해군에게 더욱더 압박을 가한다.


도버 해협의 접근로는 모두 기뢰를 깔아 접근을 불가능하게 했으며


공중 초계와 레이더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독일 전투함이 출항할만한 항구들은 모두 폭격해버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훼방 놓을 수도 있는 독일 함대의 출현을 경계하는 연합군 해군이 침공전까지


격참한 독일의 군함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함대의 상륙작전 방해라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목표는 완수했다.


D-day 당일 U보트는 한척도 보이지 않았다.


영국함정.jpg


정찰중인 영국 함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해군이 맡은 중요한 임무는 전함에서 순양함, 구축함 , 그리고 상륙정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함정의 화력을 상륙 작전 지원에 최대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D-day에 지원된 해군 함정의 화력지원은 막강했는데 본보기를 든다면 주노 해안에서 캐나다 상륙부대에게


지원된 화력은 실패로 끝났던 1942년 DF 기습작전떄의 몇 배를 달한다.


영국 구령전함 HMS 라미리스와 와스파트와 포함 HMS 로버트는 오른 동쪽의 해안 포대를 순양함들은


베르쉬르메르와 물리노의 해안 포대를 11척의 구축함들은 각 상륙 부대에 근접하여


전면 적 요새를 직접 사격으로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정통 군함 외에 수십 척의 상륙정들을 다양한 상륙 화력 지원함으로 개조하기도 했으며


8척의 상륙용 함정들에 각각  두문의 4.7인치 포들은 장치했고


다른 8척은 기관포를 또 다른 8척은 1.100발을 일시에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를 8척의 상륙정은 24발의 폭뢰를


발사하는 무장을 해서 독일군이 해변에 설치한 기뢰를 파괴하는 기능을 주었다.


24척의 탱크 운반 상륙정들은 상륙 해안으로 질주하는 시간에도 적 해안 목표를 향해 발사가 가능한 자주 곡사포를 장비한다.


해군의 함정들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력은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


먼 후방까지도 타격하여 군 병력의 집결지장을 주기도 한다.


독일 룬트슈테드 원수는 이 점에 대해서 특벌히 언급한적이 있다.


HMX.jpg


HMS 로포트 함


큰 역활을 한 연합군 해군은 역시 독일 육상 화력에 피해를 보기도한다.


상륙 지휘함의 한 척이었던 HMS 로포드는 상륙작전 3일째인 1944년 6월 8일 주노 해변에서 적의 공습으로 침몰한다.


상륙작전중 유일한 수상함끼리의 해전은 D-day 당일 오후 소드 피시 해안 연한에서 동부 기동함대를 공격한


4척의 독일 어뢰정이 발사한 18발의 어뢰중 한 발이 노르웨이 구축함 스베너 함에게 명중해서 이를 격침한 것 .


독일 어뢰정들이 겨눈 것은 구식 영국 전함인데 빗나가서 노르웨이 국축함을 격침해버려서 


독일 구축함은 어뢰를 발사한 뒤에 연막을 치고 도주해버린다.


그 외 독일이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의해서 미 구축함 코리 함과 pc정 그리고 여러 척의 상륙함이나 상륙정들이 격침되버린다.




다음편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中으로 이어진다.





도버해협.jpg


독일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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